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다

- 무언의 소통

 

 

“내 안에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는 상징주의를 이야기할 때  즐겨 인용하는 중세시대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표현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표현하지 않은 말들은 어디에 숨었을까요?

우리는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고 말할까요? 또, 남이 내게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는 있을까요?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무(nothing)는 없음, 아무것도 아님, 혹은 결핍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불리는 ‘그 무엇(something called nothing)’을 뜻합니다. 《햄릿》, 《리어왕》, 《오셀로》 등 이 모든 비극에서 주인공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nothing’의 말이 단순한 없음이나 무의미를 뜻하는 부정어가 아니라 보다 능동적인 긍정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무엇(something)’을 소통하지 못하는 데서 극의 비극성이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리어왕은 세 딸들에게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럼 땅을 나눠주겠다고 제안한 것이지요. 땅을 물려받고 싶은 욕심에 두 딸들은 전혀 마음에도 없는 거창하기만 한 거짓 사랑을 고백합니다. 반면 셋째 딸 코오딜리어는 진정으로 아버지 리어왕을 사랑하는 딸입니다. 두 언니의 사랑 고백을 듣고 있는 코오딜리어는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만일 ‘사랑’이란 말이 언니들이 말하는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라면, 자신의 사랑을 언니들이 사용한 것과 같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코오딜리어는 아버지의 신뢰와 기대를 저버리고 “너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느냐”는 기대에 부푼 왕의 질문에 “할 말이 없다(Nothing)”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숨은 코오딜리어의 진정한 사랑의 고백을 알아차릴 수 없는 리어왕은 실망과 배반감으로 셋째 딸을 추방하고 맙니다. 그때부터 리어왕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뒤늦게야 겉으로 드러난 언어 뒤에 숨은 무언의 진실에 하나씩 눈 떠가지만 이미 때늦은 깨달음일 뿐입니다.

 

침묵도 하나의 언어다

 

“고백을 해야 할까?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처음 읽게 되었을 때 내가 당황했다는 것을……. 나는 처음에는 그가 말하는 침묵이 그 무엇의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능동적인 그 무엇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프랑스의 형이상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The World of Silence》를 읽고 한 말입니다. 피카르트는 말합니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된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인 것이다”라고. 피카르트가 말하는 침묵의 깊은 철학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일상 언어에 숨어 있는 말들, 침묵한 의미들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무언(침묵)도 엄연한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머어윈의 시처럼 그 언어들은 “어둠 속에 깨어서 우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 연필 안에

말들이 웅크리고 있다 한번도

쓰인 적 없는

말해진 적 없는

배운 적 없는 말들이

 

숨어 있다

 

어둠, 그 어둠 속에

깨어서

우리를 듣고 있다

- 머어윈, <쓰이지 않은 말> 중에서

 

우리가 하는 말 중에는 의미 없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말이지만 동시에 소음입니다. 소음이 ‘의미 없는 목소리(meaningless voice)’라면, 침묵의 언어는 ‘목소리가 없는 의미(voiceless meaning)’입니다. 그 언어가 목소리를 갖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unspoken) 침묵의 언어, 또는 말할 수 없어서(unspeakable) 하지 못하는 침묵도 있습니다. 또 스스로도 내 마음 깊은 곳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말 속에 그 말과는 다른 진정한 나의 마음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프로이드는 말의 실수도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글을 쓰다보면 내가 의도하지 않은 단어를 쓸 때가 있습니다.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 우연인 것 같은 실수 속에서 나의 무의식이 건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나는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을까?

 

독일의 한 해석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는 퇴근하면서 아내에게 “머리가 아파”라고 하소연합니다. 이때 아내가 “그래요?” 하고 진통제만 가져다준다면 아내는 남편의 말 뒤에서 침묵하고 있는 진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입니다. 어쩌면 남편도 그 말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때 남편이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머리가 아파”가 아니라 “당신의 위로가 필요해. 나를 좀 돌봐줘”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만일 아내가 남편의 말 뒤에 숨어 있는 침묵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면 아내는 ‘남편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남편의 욕구를 채워줄 것입니다. “당신 오늘도 밖에서 일하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요”라며 다른 날보다 더 특별한 위로를 해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편도 자신이 정말 위로받고 싶어서 그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르면서도 아내가 그저 진통제를 내밀 때 뭔가 허전하고 마음이 허전하겠지요. 괜히 답답하겠지요.)

 

어린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직장을 다니는 엄마가 있었습니다. 낮 동안에도 수시로 아이가 궁금하고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친 몸으로 퇴근해 친정에 가면 어린아이가 드라마에서처럼 달려 나오며 “엄마아아~~” 하고 매달리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는 엄마를 반기기는커녕 언제부턴가 “스티커!” 하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얼굴은 외면한 채 말입니다. 스티커를 사가지 못하는 날이면 아이는 이내 토라져서 작은 일로도 투정을 부리거나 떼를 썼습니다. 스티커에 대한 끈질긴 집착은 오랫동안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외국에 출장을 갔다 오면서도 엄마는 스티커를 사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단순히 스티커에만 집착했던 것일까요?

 

스티커를 달라는 아이의 투정은 바로 “엄마, 하루 종일 어디 갔다 왔어? 엄마가 날 두고 가버렸을까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 내면의 그런 두려움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그 당시 자신이 좋아하는 스티커가 엄마의 ‘사랑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합니다. 어쩌면 스티커는 부재의 시간 동안 엄마가 자신을 기억했다는 증거품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주면 부모들은 아. 그렇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아이에게 반응할까요? 아마 대부분 아이에게 눈높이로 앉아서 부드럽게 말할지 모릅니다. “00야, 네가 원하는 건 스티커가 아니란다”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해주어도 아이에게는 소용없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스티커를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스티커만 준다면 사랑을 갈망하는 아이의 욕구는 영원히 충족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엄마는 아이가 말한 스티커와 함께 표현되지 못한 말의 의미인 사랑을 듬뿍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불안 속에는 엄마의 부재 뿐 아니라 무엇보다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fear of the unknown), 즉 엄마가 대체 자신을 두고 어디에 가 있는지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이 더 큰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주말에 자신이 낮에 무엇을 하는지 직장에 데려가 보여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 00이가 할머니댁에 가 있는 동안 엄마는 지금 우리가 가는 이 길로 차 타고 학교에 가는 거야.... 여기가 엄마가 학생들 가르치는 교실이야....“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가 안 보이는 동안 불안하지 않고 ‘엄마가 지금쯤 어디 있겠지’ 하고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퇴근길에 스티커는 물론 사랑도 열심히 ‘표현’해주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와 함께 15분 정도 뒹굴며 놀아주고 꼭 안아주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느 때부터인가 아이는 그렇게 집착하던 스티커를 달라고 조르지 않았습니다.

 

 

나의 속마음은 누가 알아줄까?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도 그 욕구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다른 곳에 그 욕구를 전이시켜 거짓 욕망에 집착합니다. 배가 부르면서도, 비만으로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초콜릿이나 군것질을 달고 살거나, 술이나 게임 등에 집착하는 경우입니다. 그 순간 초콜릿을 먹지 말라거나 게임을 하지 말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 사람이 진정 원하는 것을 탐구하도록 도와주고 그것을 먼저 해결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짓 욕망에 대한 강박증은 사라집니다. 이런 강박증은 때로 사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보이기도 합니다.

 

친정어머니는 우리딸을 유달리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지나치셔서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전화를 하셔서는 “오늘은 애한테 뭐 먹였니?”라고 물어보셨습니다. 불고기를 해주었다고 하면 “야채를 먹여야지!” 하고 화를 내셨습니다. 다음 날 야채 반찬을 해주었다고 하면 “고기를 먹여야지!” 하고 또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무슨 대답을 해도 만족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어머니가 말만 시작하면 다 듣기도 전에 벌써 화부터 났습니다. 때로는 전화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안톤 체홉의 <비탄>이라는 단편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책의 한 구절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인공 포타포브는 이제는 너무 늙어 일하기 어려운 마부입니다. 그는 얼마 전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가 늙어서 말〔馬〕을 제대로 몰지 못하자 마차에 탄 젊은 청년들이 노인에게 심한 모욕을 주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욕적인 행동에 분노를 느끼지 않고 다만 소리로만 듣습니다. 그리고는 “허허, 참 유쾌한 젊은이들이야” 하고 웃어버립니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말을 듣기만 한다는 그 장면은 소설의 주제와 무관하게 “아하!” 하며 머릿속을 강타했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어머니의 말을 일일이 들리는 대로 해석해서 감정적으로 반응했을까? 그냥 단순히 소리로만 들으면 되는데.’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은 고기를 먹여도, 야채를 먹여도, 그 무엇을 해도 성에 차지 않을 만큼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의 표현임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네 딸을 사랑하는지 알지?’라는 (어머니 자신도 모르는) 어머니의 소리 없는 진심이 무시당하자 어머니는 나름대로 욕구불만이 쌓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심을 알아달라고 점점 더 심하게 잔소리를 하신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어머니의 간섭과 잔소리에도 나는 평화로워졌습니다. 그렇게밖에는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어머니가 안쓰럽기도 하고, 또 아이처럼 귀엽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알았어, 알았어요!! 울 엄마, 손녀 사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라며 웃으며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게 찾아온 평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의 간섭과 잔소리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의 진정한 마음을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간섭과 잔소리로밖에는 표현하지 못한 자신의 진정한 사랑과 욕구를 알아주자 어머니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변화로 어머니도 변하셨던 것입니다.

 

내 속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날이면 새삼 삶이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융(Jung)은 “고독은 내 곁에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자신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의사소통 할 수 없을 때 온다”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배려할 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말 너머 말없이 침묵하는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서로의 욕구를 읽어주고 들어준다면 그것이 진정한 공감과 경청이며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훨씬 더 따뜻해질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중에서

Rene Magritte-le ciel meurtrier(the Murderous Sky)-Nat'l Gallery of Art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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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노래가 곡조를 이기지 못한다 한다.   
곡조가 사랑의 노래를 가두고 있다는 말일까?  사랑이 곡조에 갇혀있다. 그 사랑을 표현할 곡조가 없다는 뜻이기도하고  표현되지 못한 채 갇혀진 사랑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노래가 되는 사랑.  님의 침묵에 나도 침묵의 노래밖에는 부를 수 없는 것일까? 


나에게  "님"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나를 떠난 그 무엇을(누구를) 보내지 아니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까? 

적막한 봄 - 정완영 (1919~2016)

  산골짝 외딴집에 복사꽃이 혼자 핀다
  사람도 집 비우고 물소리도 골 비우고
  구름도 제풀에 지쳐 오도 가도 못한다.

  봄날이 하도 고와 복사꽃 눈멀겠다
  저러다 저 꽃 지면 산도 골도 몸져눕고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건가.

   - 출처 <시암(詩庵)의 봄>(2011)

pic. by bhlee0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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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나는 막 달아났소.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  [꽃나무- 이상 李相]
060806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무감각한 뿌리들을 흔들어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듯이 지켜주었지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어주고
희미한 생명을 마른 뿌리로 먹여주었지

-T. S. 엘리엇, <황무지>중에서 / bhlee역
(from "The Burial of the Dead," The Waste Land- T. S. Eliot)

 

지난주 올 들어 첫 꽃을 보았습니다캠퍼스 길가에 노란 수선화 두 송이가 수줍은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그 곁에는 어느새 푸르러진 풀 섶 속에 작은 제비꽃이 숨어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보아주는 이 있든 없든 말없이 성실히 피어있는 작은 꽃과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나도  '살아서 살아있고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슴을 흔드는 4월을 시인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합니다이 시는 4월이면 누구나 한번쯤 중얼거려보는 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의 첫 구절입니다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생명수 같은 봄비가 무감각하던 겨울뿌리를 흔들어 망각의 잠에서 깨워주는데 왜 잔인한 달인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현대인을 메마른 불모의 대지 황무지에 사는 살아있는 죽은 자(the living dead)”라고 말합니다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것은 참된 사랑에 접근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인식하고 감동할 수 있는 감각들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그 의식의 무감각함을 흔들어 일깨우면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봄이 때로는 진실의 태양빛처럼 너무 부시고 아려서 그만 눈을 감고 싶어집니다. 4월이 잔인하다든 것은 이렇게 살아있으나 죽은 자처럼(little life) 잠든 채 살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의식의 죽음그 비극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그들에게 생명과 의식을 일깨우는 4월은 잔인하기만 합니다우리 모두 엘리엇의 또 다른 시 구절처럼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어 낼 수 없는(Human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존재들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4월입니다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어김없이 푸르러 오는 생명의 계절가끔 가던 길 멈추고 물어봅니다. "나는 살기 위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c)2004이봉희, 덴버 중앙일보 연재 문학칼럼 중에서

봄날에선가 꿈 속에선가 - 릴케

어느 봄날에선가 꿈 속에선가
나 언제였던가 너를 만난 것이
지금 이 가을날을 우리는 함께 걷고 있다.
그리고 너는 내 손을 쥐고 흐느끼고 있다.

흘러가는 구름 때문에 우는가?
핏빛처럼 붉은 나뭇잎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리.
언제였던가 한 번은 네가 행복했기 때문이리라.
어느 봄날에선가 꿈 속에선가…




ㅡㅡ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
당신도 한 번은 행복했었나요?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교수의 문학치유 카페]가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교양도서에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생각속의 집)가 출간되었습니다.

추천사를 써준 저널치료의 대가이며 문학치료전문가, 나의 멘토, 수퍼바이저이며 동료이고 의자매인 Kathleen Adams에게 감사드립니다.

그 외 추천해주신 이해인수녀님,  이시형박사님, 채정호박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이 책을 통해 여러분을 만나고 여러분의 마음을 만져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만나고 자신의 마음을 만져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낸 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최근까지도 [내 마음을 만지다]가 여전히 잊히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사랑해 주시고 위로받으시고 힘을 얻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감사와 함께 죄송한 마음이 늘 가슴 한편에 있습니다.  오래전 출판사로 어떤 나이 많으신 독자 어르신께서 일부러 찾아오셔서 이 책으로 삶이 달라졌다고 다음 책이 혹시 언제 나오느냐고 묻고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한 후에도 몇 년간 계속 대학원에서 문학치료 수업과 논문지도 등 혼자 도맡아 했던 거 같습니다. 그 이후로는 너무 몸이 지쳤고,  또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국을 떠나 있기도 했습니다.  어서 다시 힘을 얻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제 저 자신을 응원하기 위해 귀한 독자들이 올려주셨던 예전의 리뷰들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때 이후로는 우연한 경우가 아니고는 리뷰를 읽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의 감동적이고 진솔한 마음을 기억하면서  더더욱 어서 힘을 얻어야겠다고 또 다짐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2024. 3. NY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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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위로와 평화를 전합니다

-캐슬린 애덤스(RPT/TWI대표/CJTInc.미국저널치료센터장/전 NAPT<전미문학치료학회> 회장)

  선생에게 가장 큰 선물은 선생의 스승이 되는 학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학생이 쓴 책입니다. 나는 저자 이봉희 교수를 미국 콜로라도 주에 있는 덴버대학교 대학원에서 만났습니다. 저자는 내가 가르치는 <글쓰기와 치료> 강좌를 수강했으며 또한 나의 <저널치료센터>에서 공부했습니다. 연구교수로 온 한국의 영문학교수가 내 수업을 듣게 되어 큰 영광이었습니다.

  그는 나의 대학과 센터에 명예와 자부심을 가져다 준 특별한 학생이었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동안 그는 문학치료라는 분야에서 다양한 생각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인간의 고통에 대한 탁월한 직관과 이해력으로 누구보다 환영 받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를 치료하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그는 우리의 자매와 친구로서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가 가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성품과 부드러운 강인함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 속의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독특한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종종 치유를 경험하곤 했습니다.

  이봉희교수는 2007년 NAPT(전미문학치료학회) 총회에서 한국최초의 공인문학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NAPT의 공식 한국대표가 되었습니다. 또한 나의 <저널치료센터>의 한국지소를 설립하였습니다. 이후 문학치료사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표현하고, 또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어떻게 다양한 고통들을 감당하게 해주는지를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보다 큰 위로와 평화로 이끌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에서 달빛마저 보이지 않는 어둠의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를 떠나지 않고 고통스럽게 하는 수많은 갈등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책에서 위로와 평화를 얻기 바랍니다. 이 책에서 전하는 따뜻한 선물을 깊이 호흡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알게 되실 것입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당신 곁에는 그 누구보다 용기 있고, 사려 깊으며, 당신의 아픔을 공감해주는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그가 바로 이 책의 저자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캐슬린 애덤스 Kathleen Ad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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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희 교수의 책 < 내 마음을 만지다>에 부침

 인생이란 길 위에서 누구나 예외없이 안팎으로 크고 작은 아픔들을 경험합니다.  아픔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아픔을 대면하는 이들의 태도 역시 다양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아파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모습이 밝아지기도 어두워지기도 합니다.   이봉희 교수의 책<마음을 만.지.다>는 우리가 고통이나 상처를 피하기보다 제대로 직시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동행함으로써 재발견되는 삶의 기쁨과 행복에 대해 말해 줍니다.  문학치료사인 작가의 학문적인 지식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얻은 구체적인 체험들이 조화를 이루어  더욱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다가오는 이 책을 내가 받은 편지라 여기고 읽어보십시오.    자신의 아픔을 잘 길들이고 객관화 하는 법, 남의 아픔을 보듬고 헤아리는 법, 나부터 변화되어야 하는 중요성을 더 깊이 알아듣고 마침내는 아픔 또한 축복임을 고백할 수 있게 해 주는 치유의 지침서인 이 책을 나 역시 아픈 사람으로서 아픈 사람 모두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 이해인(수녀, 시인)

 

 

살아가면서 마음의 상처 한 번 안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크든 작든 상처는 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열 사람의 칭찬보다 단 한 사람의 비난이 더 기억에 남는 법입니다. 우리의 뇌는 플러스 요인보다 마이너스 요인에 강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의 아픈 기억을 이겨내려면 열 번의 좋은 기억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내 마음이 커져야 합니다. 소인국에 도착한 걸리버가 수많은 화살을 맞으면서도 다시 일어서듯 말입니다. 세상의 문제들보다 내가 더 크게 변신하는 비법. 그것은 마음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이 책은 ‘마음의 거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알려줍니다. 거친 세상 속에서 마음의 힘을 키워가고 싶은 모든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해 드립니다. - 이시형박사(정신과 전문의, 세로토닌 문화원장)

 

세상에는 마음이 아픈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어쩌면 마음이 아픈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화가 날 때, 슬플 때, 용서하지 못할 때,  기다려야 할 때,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말을 하고, 풀어내며, 마음을 달래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이 책은 이럴 때 책읽기와 글쓰기가 놀라울 정도의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오직 성공만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 소중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더 행복하게 해주는 책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책을 덮을 때 내 마음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상처로부터 회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것을 확신합니다.
- 채정호박사 (가톨릭의대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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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lf62님의 리뷰입니다. (출처: 네이버/yes24)

 

“왜 갑자기 이렇게 눈물이 나지요?” 문학치료사인 이봉희 교수가 20년 이상 만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이라고 한다. 자기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그 많은 눈물은 왜 갑자기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것일까? 내 이야기를 진실로 들어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제대로 눈물 흘리지 못했던 이유는 내 말에 귀기울여줄 단 한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 해도,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일 시간이나 여유가 없다. 혹시 들어준다 해도 감정의 언어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 마음이 아프다고 말할 사람이 내게는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들은 어쩌면 부모한테는 할 수 없는 말이었고, 아내에게 못할 말이었고, 남편에게 못할 말, 자식한테는 터놓을 수 없는 말들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우리는 말 한번 못하고 꾸역꾸역 가슴 속에 담아놓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렇게 살아왔기에, 내 말을 들어주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변함없이 공감해주는 저자 앞에서 많은 이들이 감정적으로 무장 해제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닐까?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마음속의 감정 덩어리들은 그렇게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 타인으로부터 위로받았다고 느낄까. 섣불리 나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하는 사람에게 도리어 상처를 받던 기억이 더 많지 않았나. 위로하려 했던 그 말이 왜 우리에게 상처가 될까. 아무리 내 몸처럼 사랑하는 상대라도 우리가 그 상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의 보잘것없는 ‘능력’으로 상대의 문제를 진단하거나 해결해주려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란 그저 함께 아파해주는 것 뿐 이란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임을 알기 때문일까. 베테랑 문학치료사인 이봉희 교수의 모토는 너무도 겸손하다. ‘이해하려 하지 마라. 다만 함께 하자. 도우려 하지 마라. 다만 사랑하자.’ 다만 함께 해주기 위해, 저자는 자신의 말로 설교하기보다는 소설과 시와 영화와 그림과 음악의 한 조각을 우리 앞에 슬그머니 내민다. 지금 내가 아파하는 것과 비슷한 지점을 지나간 그 어떤 사람이 느꼈을 마음의 행로를 보여줌으로써, 나 혼자만이 아픈 것은 아니라고 위로한다. 그렇게 우리를 위해 골라준 한 조각 위로는 강력하다.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 줄 때도
사실은 참 아픈 거래
-이해인, <꽃이 되는 건> 중에서

지금 아픈 우리의 이 고통이 실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이라고 선언하는 이 시는 고통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님을, 죽음 같은 이 시간 속에 생명력이 있음을 깨닫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추스르고 일어날 힘을 준다.

나에게 고통을 안겨준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몸부림치는 나의 모습도, 영화 <밀양>의 바탕이 된 이청준 소설 <벌레 이야기>속에 오버랩된다.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도.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럴 빼앗아가 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불공평한 일들과 억울한 일들과 애정 결핍을 경험할 때, 우리는 자신의 상처에 압도되고 매몰된다. 때문에 우리는 ‘도대체 나는 왜 이런 집에 태어난 것일까’,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며 운명을 탓하게 된다.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갇힌 우리에게 저자는 의외의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왜 불행만 탓하느냐고, 당신의 행복에도 의문을 가져보았느냐고?

우리는 불행할 때만 운명을 운운하지만 내가 누리는 축복이나 행복에 대해서는 운명을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나는 운명의 실수로 이렇게 부잣집에 태어났을까? 왜 나는 운명의 실수로 이렇게 잘 생겼을까? 대체 나는 무슨 운명의 실수로 이렇게 남보다 머리가 뛰어난 걸까? 이런 질문을 할 때 우리는 내게 주어진 고통속의 축복을 알게 되고, 내가 받은 축복을 나눌 권리와 책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상처 입은 자들은 종종 제가 받은 고통에만 돋보기를 들이대는 자기중심성에 빠진다. 저자가 던지는 이 질문은 그 과도한 불균형을 깨뜨리는 직방의 질문 아닌가? 내 앞에 던져진 불행 앞에서 오그라들기만 하던 나의 자아는 이봉희 교수의 이 느닷없는 질문 하나로 인해, 순간 기를 펴고 확장된다. 아무 공로도 없이 받은 축복은 마치 나의 권리인 듯 당연히 누려온 삶을 반성하게 된다.

 

이렇게 자기문제에 함몰된 우리의 시각을 한순간에 전환시킨 저자는 문제보다 더 크게 내 존재를 키워보라고 제안한다. 문제 해결은 상대가 변화하거나 세상이 바뀌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상대가 바뀌어도 내가 변화하지 않으면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내가 변화해버리면 상대와 세상이 바뀌지 않아도 내가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그렇게 문제보다 내가 더 커버리라고.

 

문학치료사로서 수많은 이들의 마음과 동행해 온 저자의 마음창고에는 아파하는 우리의 마음 갈피에 딱 맞는 말들이 수없이 저장되어있는 것 같다. 적재적소에 내게 필요한 말들을 맞춤처럼 꺼내 주며 위로해주는 것을 보면. 탁월한 공감능력, 함께 아파해주겠다는 애정 어린 의지 때문일까? 이봉희 교수는 우리 마음의 비밀 문을 정확하게 찾아낸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 앞에서 그토록 큰 위로를 받고 눈물 흘렸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자기가 아픈 지도 몰랐던 사람, 아팠어도 아프다고 누군가에게 말해보지도 못한 사람들. 당신의 말을 경청하는 그녀에게 다가가 한 마디 건네볼 일이다. 그녀는 분명히 당신도 몰랐던 당신의 취약한 부분을 감싸주며 그 안에 고인 상처를 토해내게 할 것이다. 혹은 당신 스스로에게조차 발설한 적 없는 당신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종이 위에 표현하게 해줄 것이다. 뜨거운 눈물과 함께 당신의 상처는 치유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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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교수님(woolf)의 리뷰에 제가 감동받고 뭉클했습니다.
그동안 적잖이 외롭고 힘들었던 제 마음을 만져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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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ournaltherapy.org/2791

 

https://www.journaltherapy.org/2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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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주간을 맞아 다시 이 그림으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당시 건축공학 전공이던 딸이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린 그림.
초등학교 때 미술학원 3일 가고 재미없다고 그만둔 게 미술교육(?)의 전부였던 딸.

이제는 뉴욕에서 3D 디자인과  AI분야에서 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딸의 그림이다. 

정념의 기 - 김남조  (1927. 9. 2-2023. 10. 10)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새벽에 아가에게 - 정호승

  아가야 햇살에 녹아내리는 봄눈을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사랑이 있는가 보다

​  아가야 봄하늘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눈물이 있는가보다

​  길가에 홀로 핀 애기똥풀 같은
  산길에 홀로 핀 산씀바귀 같은

​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한 송이 들꽃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라

​  오늘도 어둠의 계절은 깊어
  새벽하늘 별빛마저 저물었나니

​  오늘도 진실에 대한 확신처럼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없나니

​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눈물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라
  내가 별들에게 죽음의 편지를 쓰고 잠들더라도
  아가야 하늘에도 거지별 하나.

   - 2015년 시선집 <수선화에게>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