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도망쳐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그림자처럼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기다림.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차마 포기하지 못하는 고통스런 업이 되어버린 적은 없었나요?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는 “기다림은 아픔이다. 잊는 것도 아픔이다. 하지만 둘 중에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정호승 시인은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중략.......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정호승 <또 기다리는 편지> 중에서


차라리 기다리는 것이 덜 아프다


나는 기다립니다. 나는 소망합니다. 오지 않는 그대를. 지친 나그네 바람이라도 머물다가겠지, 그렇게 위로하며 오늘도 마음의 문 앞에 의자 하나 내어 놓습니다. 맘 편히 쉬었다 가라고 가만히 문을 닫아놓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궁금하다면, 혹시라도 나를 기억한다면 문을 두드리리라, 그렇게 위로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만 그 의자를 치워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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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꿈에서 나타나는 무의식적 욕구처럼 때로 변장을 하고 나타납니다. 때로는 연인의 모습으로, 또 때로는 성공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시인의 말대로 우리가 진실로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기다려봐야 알 수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리는 님이 오지 않았기에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오지 않았기에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

나는 님을 누군지 알 것만 같다

- 김형영,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림을 계속하는 것, 오지 않는 그 무엇을 기다리는 것, 그것은 답 없는 질문을 계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기다림은 질문입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길을 잃을지 모릅니다. 답이 없어도 질문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질문은 대상을 향한 나의 관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자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문은 기다림처럼 아직은 이해할 수 없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성실한 의지이며 희망입니다. 

답이 없는 질문을 계속하는 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다림을 통해 만나는 것은 ‘그’가 아닌 나 자신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기다림은 질문처럼 우리를 성숙시킵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최초의 질문이나 최초의 기다림의 이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면서 기다리던 내 마음이 차차 호수처럼 잠잠해지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참으로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쓸쓸한 아픔입니다.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작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형기, <호수>)입니다. 오늘도 쓸쓸한 날, 나를 토닥여주며 말해봅니다. “아프지, 그게 진심만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야. / 아프지, 그게 서로 부르고 있다는 증거야”라고.(마종기, <상처6>) 그리고 여전히 내 마음 문 밖에 의자 하나 내어 놓습니다. 창 앞에 섧도록 빨간 우체통 하나 세워놓습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오지 않는 그대를 기다립니다.

< 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기다린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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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이 되었습니다.

올해 나는 또 그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갈까요?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나는 또 그 무엇을 기다리며 한 걸음 나에게 다가갈까요?

골똘히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지치지 말자고. 포기하지 말자고.

너무 외로워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