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that taking life seriouly means something like this:

that whatever man does on this planet has to be done in the lived truth of the terror of creation.....

of the rumble of panic underneath everything.  Otherwise it is false.   

--Ernest Becker, The Denial of Death

 

삶을 진지하게 대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땅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살면서 깨달은 피조세계의 두려움이라는 진실, 모든 존재의 근원에 깔려있는 우르렁거리는 공포의 소리, 그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면 모두 거짓이다.  - 어네스트 베커, [죽음의 부인]

 

 

우리가 이 끔직한 현실을 염두도 두고도 만족스럽고, 더 나아가 행복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이를 잃거나, 치명적 질명에 걸린다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다거나,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다거나, 윤리적 실수를 저지른다든지 하는 일들을 겪게 마련이다.  그리고 아무도 이런 일에서 제외될 면역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No one is immune).


가족 친지와 건강하고 넉넉하고 평안하게 살고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기 위해 어떤 대책을 세우고 얼마나 애쓰는지와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무엇인가가 그 모든 걸 파괴해버리게 된다(something will inevitably ruin it). 제아무리 많은 돈과 권력을 쌓고 계획을 세운다해도 가족과의 사별, 심각한 질병을 비롯한 끔찍한 일들이 수시로 삶에 끼어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인생은 치명적으로 연약하며, 불가항력적 힘에 휩쓸리게 되어있다.  그래서 삶은 비극적이다(Human life is fatally fragile and subject to forces beyond our power to manage. Life is tragic).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으며 어려움과 아픔을 겪는 사람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절망에 무릎 꿇지 않으려면 도움이 필요하다.......그리고 결국 그 도움은 영적일 수 밖에 없다.

 

고난이 닥치면 그제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이 제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해 본적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 고난의 풀무불을 거치는 과정이야말고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아는 수준을 넘어 인격적인 만남으로 이끄는 주요한 통로이다. C. S. Lewis루이스의 말처럼 "하나님은 기쁨을 통해 속삭이시고,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며, 고통을 통해 소리치신다(God whispers to us in our pleasures, speaks in our conscience, but shouts in our pain)."

 

일자리와 가족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한 남성은 이렇게 내게 말했다.

"<고난을 헤쳐나가려면 예수님만 있으면 된다>라는 것을 나는 원칙으로 항상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에게 남은 것이 예수님 한 분 뿐임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내가 필요한 유일한 분임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I always knew, in principle, that 'Jesus is all you need' to get through. But you don't really know Jesus is all you need until Jesus is all you have)."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3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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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고난을 당하는 당사자거나 혹은 후보자들이다.  모두가 지금 당장 깊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곤경에 처한 것을 보는 이들은 거기에 대한 철학적,  사회적, 심리적, 도덕적인 의문을 품게 된다. 반면 당장 고통과 역경의 손아귀에 붙들려 신음하는 이들은 현실을 철학적인 이슈로 대할 여유가 없다. 깊은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는 이들이 "하나님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허락하십니까?"라는 철학적 질문으로 신음한다 해도 실질적 관심사는 생존 그 자체에 있기 마련이다............
실질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의연하게 철학적인 자세로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잔인한 짓이다(To speak in a detached philosophical manner to an actual sufferer is cruel).  하지만
고통이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되는 하나님과 인생의 본질에 대한 "중대한 물음"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And yet the experience of pain leads almost inevitably to "big questions" about God and the nature of things that cannot be ignored).  

 

 

고난의 속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철학적 영역을 떠나 인격적(personal)과정이다.

성경은 마치 부모가 걸음마를 배우는 자녀에게 하듯 한발짝씩 걷도록 가르친다. 성경말씀은 차근차근 고통 속을 걸어 통과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기위해서 고통의 주제와 관련해 심오하게 현실적이고도 동시에 놀랄만큼 희망적인 균형잡히고 포괄적인 가르침들을 이해하기를 요구하고 계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고통의 풀무불에서 달아나려하거나(회피),  서둘러 빨리 지나가려하거나(부인), 또는 무기력하게 희망을 버리고 주저앉아 있는 것(절망)을 피하도록 해준다.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character of suffering is a journery from the philosophical toward the personal.]  We could almost say that, like a parent with a toddler, the Bible is teaching us to walk, step by step.  The Bible calls us to walk steadily through afflictions, and to do so requires that we understand its wonderfully balanced and comprehensive teaching on this subject--both profoundly realistic and yet astonishingly hopeful.  This keeps us from thinking we can run from the furnace[avoid it] or quickly run through it [deny it] or just lie down hopelessly [despair in it]).

 

 

when you pass through the waters.... when you walk through the fire... I will be with you. You will not be consumed. (Isa 43:2)

 

[Jesus] plunged himself into our furnace so that, when we find ourselves in the fire, we can turn to him and know we will not be consumed but will be made into people great and beautiful.  "I will be with you, your troubles to bless  and sanctify to you your deepest distress."

 

인간이 겪는 불처럼 뜨거운 고통속으로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걸어들어가셨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다.

 

주님은 친히 그 불속에 뛰어드셨다. 그래서 우리가 풀무불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소멸되지 않고 더 위대하고 아름답게 빚어지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너의 고통을 축복으로, 너의 깊은 고난으로 널 거룩하게 하리라."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