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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의 언어로 말한다

- 소통의 한계

 

딸아이가 오래전 외국에서 외롭게 공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나는 도심의 늑대 같아. 혼자서 인간들 속에 살고 있는…….”

오늘 말로 하는 대화는 딱 한 마디 했어. 내 목소리를 잊을 지경이야.”

우리는 종종 대화를 포기하고 차라리 외로움을 택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소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고장 난 피아노 건반처럼 제 음을 전달할 수 없거나 서로 불협화음을 내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이 상대에게 낯선 나라의 말처럼 소통되지 않는다는 좌절 때문입니다. 누군가와의 소통이 더없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통 수단은 대부분 언어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참 불완전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그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각자 타인 앞에서 해석하고 번역해야 하는 하나의 언어로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자신만의 사전으로 상대의 말을 해석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언어 이상의 의사소통 수단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습니다.

 

나는 조용조용 설명한다. 당신은

고함치는 말로 듣는다. 당신은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한다. 나는

오래된 상처가 들추어짐을 느낀다.

 ....... 

나는 비둘기다. 당신은

매로 보인다. 당신은

올리브 가지를 내민다. 나는

가시를 느낀다.

R,  맥거프, <당신과 나> 중에서

 

상대의 말과 그 속내는 똑같을까? 

우리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전화 통화를 하고, 또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그게 짧은 글이든 목소리든 언어는 그 사람을 여지없이 드러내준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너무 수식어가 화려해서 읽으면서 살얼음을 딛듯 아슬아슬한 경우도 있습니다. 대체 이 사람은 언제부터 나를 얼마나 안다고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걸까? 한두 번 보았다고 마치 나를 다 알기라도 한 듯 온갖 아름다운 말로 나를 포장하는데, 왜 그러는 걸까? 미사여구로 상대를 잔뜩 포장해놓고는 내 마음과 똑같았어요. 마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시는 것 같았어요라는 말로 상대에게 되돌려주기도 합니다. 그런 진심이 의심스런 말을 들을 때면 빌려 입은 옷을 입고 무대에 선 것처럼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혼자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혼자 토라져서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맘대로 투사해 상대를 영웅처럼 바라보다가 결국 실망했다며 평가절하하고 떠나가 버립니다. 때로는 자신의 일방적인 감정을 소화하지도 못한 채 분풀이를 하는 언어도 있습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이모티콘을 사용하고, 말끝마다 웃음으로 포장해도 자신의 날 감정은 그 포장 속에서도 진한 냄새를 풍겨옵니다.

 

그래서일까요. 한 사람의 말투는 그 사람의 인격뿐 아니라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꾸며도 그 뒤의 이기적인 계산을, 아무리 친절히 말해도 그 뒤의 적대감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웃으며 말해도 그 뒤의 두려움을,  아무리 당당하게 말해도 그 뒤의 패배감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잔인하게 말해도 그 뒤의 사랑은,  아무리 무뚝뚝하게 말해도 그 뒤의 관심은 묻어둘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숨겨둔 사랑과 관심보다는 당장 내 뇌리에 깊숙이 파고드는 뾰족한 언어의 칼에 얼마나 아파하는지요. 하지만 그 안의 사랑과 관심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상처 입고 되돌아가기에 너무 늦어버립니다.

 

나도 내가 하는 말을 모른다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언어 습관을 객관적으로 안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는 곧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안다는 자체가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내가 다르다는 사실은 종종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이 괴리는 자신의 사진을 볼 때의 첫 느낌, 즉 낯설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잘 나타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남들에게는 사진 속의 내가 그들이 보는 실제의 나와 달라 보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시각의 괴리만이 아닙니다.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처음으로 방송극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내 목소리가 어찌나 낯설던지 어린 마음에 그냥 밖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는 창문 밖에서 간이 오그라드는 심정으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던 때였습니다. 엄마가 곁에 없어도 아이가 엄마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나는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녹음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녹음이 끝난 후 들어본 목소리는 너무나 끔찍하고 낯선 목소리여서 무척이나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 낯설음이 주는 당혹감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남편과 아이는 그게 내 목소리라고 인정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타인이 알고 있는 나와 내가 알고 있는 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진실한 나의 모습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과 목소리, 성격 그리고 습관화된 나의 말투들이 타인이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소통의 한계 앞에서 한 번 더 자신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동명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내 책상 위의 천사로 잘 알려진 작가 쟈넷 프레임(Janet Frame)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이야기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글로 써서 찢어버리지 않고 친구에게 전달한 이야기다. 들어주어서 고맙다고, 내 마음의 귀에 분별력 있는 열쇠 구멍을 내주어서 고맙다고 그 보상으로 해준 이야기다.” 그렇기에 시인이며 작가인 로오드(Audre Lorde)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상처 받아 멍들고 오해받을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언어화하고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말처럼 대화를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고장 난 피아노 건반처럼 화음을 낼 수 없는 존재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고 오해를 불러오더라도 언어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소통입니다. -중략-

 

상대의 말에 자주 상처 받지는 않나요? 이런 언어의 한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소통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 친구와 했던 약속이 기억납니다. 우리가 혹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면 그건 진심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임을 서로 굳게 믿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로 인해 무척 맘이 상한 오늘, 나는 신뢰를 갖기로 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그 사람 자신도 모르는 언어습관이나 언어의 한계 때문에 생긴 것이지, 그 사람의 본심이거나 의도는 아니라고 믿으며, 그가 준 상처와 언어의 불완전함을 포용하기로 합니다. 언어가 나아갈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해결책은 대화의 단절이 아니라 바로 상대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C)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중에서

 

 

 

https://www.journaltherapy.org/3632- "여러개의 언어를 알았으면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