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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후 혼자서는 거동이 불편해서 감옥처럼 갇혀 불편하게 지낸 지 3개월이 넘었다.

그래서 지난 한달 반 동안 도우미 아주머니를 통해 20 상자 넘는 나의 글들과  공책, 공부한 귀중한 자료, 그 외 여러 자료들을 다 버렸다. 정년퇴임할 때도 연구실에 있던 버리고 버려도 끝도 없는 수많은 자료와 책들을 버렸었는데.(청하지 않았는데도 찾아와준 대학원 제자들이 아니었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무나 고마운 샘들!!)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뒤에 남은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정리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었다. 아주머니도 놀랐다. 자신이 10년 넘게 일하러 다녔고 그중에 교수들도 많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했다. 그래도 아쉬워서 남겨둔 것들도 아직 많다. 삶의 무슨 답을 찾고자 이렇게 끈질기게 나는 읽고 적고 했을까? 아니, 뭘 그리 끝없이 혼잣말을 여기저기 끄적였을까?  버린 것 외에도 내 외장하드에 남겨진 그 수많은 이야기들은 또 언제 버려야하나..... 겁이 나서 열어보지도 못하고 있다. 그 글들 속에서 나의 어리석고 바보 같았던 열정과 시간들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기에.     

그러다 오늘 블로그에서 시를 찾다가 우연히 비공개로 올려놓은 이 글을 발견했다. 너무나 오래전 글이라 지금과 달라진 사실들이 많다. 특히 그 사이 작은 언니와 큰 오빠도 세상을 떠나셨으니..... 그런데 20년도 넘었는데 나는 어쩌면 그 길고 긴 세월 동안 달라진 게 없을까 씁쓸하고 심지어 부끄러운 마음마저 든다. 이 알 수 없는 이 슬픔과 회한의 감정은 무엇일까? 사실 그 자료들, 무엇보다 따로 일기장이 아니라 수업자료든, 워크숍기록이든, 내가 공부한 내용의 공책이든,  공책마다 여기저기 수시로 적어놓은 나의 글들과 메모들을 발견할때마다 가슴이 울컥거리기도 했다.  미련을 버리고 다 무의미하다며 눈감고 다 버리고 나서 나는 이유 없이 아팠다. 치열함의 허망함때문일까?  부끄러운 열정에 대한 회한때문일까? 
그 치열함의 이유 중 하나를 어쩌면 이 글에서 발견했나?  이 글이 나 자신을 위로하는 초라한 변명이라도 되어서일까? 그냥 다시 이 글을 현재로 소환하고 싶었다. 좀 격세지감이 있지만 주절주절한 글을 수정하지 않고 그냥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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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곳에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 (2002)

 

나중에 책을 내려고 그러시지요?” 어떤 교수님이 여행 중에 내가 항상 무언가 써넣는 것을 보면서 물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글 쓰기 습관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 내지는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왜 난 늘 무언가를 쓸까? 쓰면 어떤 결과물을 남겨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쓰고 말면 그뿐인 걸 계속하는 건 의미 없는 우스운 일 아닌가? 이런 자의식이 생기면 무언가를 쓰려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놓게 된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는 무언가를 쓰고 싶지 않다.

습관적인 글 쓰기는 일기를 쓰는 일로 시작되지 않았을까?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글짓기 대회라면 늘 우리학교 대표로 나가서 교내, , 도 주최에서 상을 받아서 전교생이 보고있는 조회시간에 운동장에서 교장선생님의 상을 받곤 했다. 줄 뒷자리에 서 있다가 내 이름을 부르면 깜짝 놀라서 뛰어나가곤 했었다. 기쁨보다는 쳐다보는 아이들 사이를 얼굴이 빨개져서 뛰어갈 때의 그 계면쩍음과 난감함 때문에 교장선생님이 계신 단 위까지가 10리나 되는 듯 무척 멀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TV가 없던 1960년대 초,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은 라디오에서 5에 시작하던 어린이 시간의 어린이 연속극과 학원이라는 잡지 뿐 이었다.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거기에도 내 글이 여러 번 실렸던 것 같다. 한번은 라디오 어린이 극에 내가 역할을 맡아서 방송에 나온 적도 있었다.  너무 가슴이 뛰고 부끄러워서 방 밖으로 도망가서 창문밖에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때 쓴 글들을 하나도 모아놓지 않았고 지금도 여기저기 실렸던 수많은 내 원고를 기억도 못할 뿐 아니라 모아 놓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는 책을 내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먼 글쓰기를 하고 있었던 거가 맞다. 

내가 초등학생 일때 그 당시 학생들도 만화책을 좋아했다. 그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것은 김경언 선생의 <의사 까불이> 시리즈였다. 박종래 선생의 <엄마 찾아 삼 만리>나 독립투사 이야기 류()의 만화는 굵은 먹빛 선으로 선명히 가슴에 자국을 남기는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얼굴이나 처연하게 흩날리는 옷고름 자락과 흩어진 머리카락만 봐도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었다. 그 이미지가 4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뚜렷이 남아있는 걸 보면 당시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재기 발랄하게 시대를 꼬집고 세상의 부패에 메스를 가하는, 그리고 가늘고 가벼운 펜의 터치로 그려진 <의사까불이> 쪽이 훨씬 부담이 없었는지 모른다. 김경언의 만화 중에는 지금도 기억하는 많은 장면이 있지만, 특히 고착증세를 버리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라고, 바로 보기 위해서는 한번쯤 뒤집어 바라보라고 시각의 균형을 늘 강조하는 나의 문학 수업에서 종종 인용하는 한 장면이 있다. 가난한 구두닦이 소년이 어느 날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길을 가다가 문득 허리를 굽혀 다리 사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거꾸로 뒤집어 보니 그리 슬플 것도 없는 코믹해 보이는 세상이어서 소년은 하하 웃고 다시 씩씩하게 하루를 향해 걸어가는 내용이었다.

1960년대 초에는 오늘날처럼 학생의 우상이 되는 연예인은 없었다. 노래를 부르는 10대 가수는 내가 몰랐기 때문이겠지만 내 기억엔 없었다. 내가 듣는 노래는 가끔 오빠가 좋아하는 노래, "검푸른 저 산 넘어, 이슬이 석양빛에 소리 없이 사라져...(나중에야 그것이 영화 <셰인>의 주제가 임을 알았다)" 라든가 43살 젊고 아름다운 나이에 너무나 아깝게도 세상을 떠난 당시 영어 선생이던 큰언니가 벚꽃 만발한 무심천 둑을 내 손을 잡고 거닐면서 불러주던 무언지 모를 영어노래들, 그리고 그 중에 내가 열심히 따라하던 새드 무비(Sad Movies)" 같은 노래가 동요말고 내가 아는 전부였다. 언니가 친절히 그 노래의 내용을 다 설명해주기도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 가가 영어와 섞어 불러서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히트시킨 노래였다. 당시는 전등불을 시에서 일방적으로 켜주고 끄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밤마다 불이 나가는 시간이 통금처럼 정해져 있었다. 저녁 식사시간에 들어와서 11시인가 12시가 되면 불이 나갔다. 그래서 늘 어머니나 언니들은 불 나가기 전에 숙제하라고 종용을 하시곤 했었다. 불이 나가면 특히 밤이 긴 겨울이면 언니들과 촛불을 켜놓고 그림자 놀이를 했다. 그러다가 한 이불 속에 동그랗게 둘러서 누우면 둘째 언니는 어김없이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다 큰 초등학생 동생들을 위해 자장가를 불러주었을 리는 없고 아마 말로 표현 못한 가슴속의 무엇인가를 어둠 속에서 노래로 대신했었던 것 같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산천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겨울은 가고 따스한 해가 웃으며 떠오고...” 한 시간정도 언니의 노래는 끝없이 이어졌다. 유난히 숨이 짧은 둘째 언니가 숨을 참아가며 어찌나 정성스럽게 부르는지, 그리고 그 노래가 어쩌면 하나같이 어두운 밤 혼자 문밖에서 울다 가버리는 겨울 바람처럼 쓸쓸하게 들리던지 나는 숨소리도 못 내고 옆에 누워 듣다가는 잠이 들고 했었다. 그건 노래가 아니라 차라리 말못할 하소연이었다. 그 언니가 아름다운 꿈만을 가슴 깊이 안고서 외로이. 외로이 저멀리 나는 가야지,....말없이 나는 가야지하고 부를 때면 정말 내일 아침이면 어디로 가버리려고 몰래 보따리라도 싸 놓은 게 아닌가 은근히 걱정되어서 졸린 데도 자지말고 깨어 있어야 할 것 같은 두려움과 사명감에 끙끙대다가 잠이 들곤 했었다. 그 언니는 결국 폐가 너무 나빠서 채 피지도 못한 20대 초반에 자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 “산장의 여인처럼 요양소로 떠나야 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언니는 그 곳에서도 의사 몰래(결핵 환자는 크게 웃지도 못하게 했었다.) 밤이면 [노래]를 불렀을 것 같다. 그곳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을 또다시 같은 노래 가락들 속에 실어서 말없이 나는 가야지하고 불렀을 건 만 같다. 언니의 노래는 지금 내가 무언가를 적는 습관과 어쩌면 같은 것이었을 테니까.

당시에는 우리의 우상인 청춘 배우도 없었다. 우리 또래의 배우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영화에 아역으로 나온 전영선이 유일한 우상정도였을까? 그러니 자연 우리의 즐거움은 책을 읽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만화 다음으로 가장 즐겨 읽던 책은 학생 잡지인 [학원]이었다. 오죽하면 전영선이 조금 커서 인터뷰를 한 내용이 [학원]에 실렸을 때 그녀가 죤 스타인 백의 [붉은 망아지]를 읽고 눈물이 났다는 말에 초등학생이던 내가 단숨에 생전 알지도 못하는 미국작가 죤 스타인백의 팬이 되어버렸을까. 잡지 내용도 당연히 요즘 같은 연예인뉴스, 패션 등은 없고 문예물이 대부분이었다. 우리의 우상은 조흔파 선생님의 얄개였다. 얄개는 당시 우리들에게는 서태지와 아이들만큼의 문화 충격적인 이단이고 귀여운 반항아였다. 아무튼 [얄개전]은 외우도록 읽었던 기억이 나는 몇 가지 책 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주부생활]이라는 잡지를 내고 있다고 알고 있는 예전의 학원사라는 출판사는 의자에 앉아서 책보는 사람의 옆모습을 검은 실루엣으로 잡은 로고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6년 간 입고 다니던, 그리고 언니 오빠들이 줄줄이 입고 다니던 우리학교의 배지 보다 더 친근했었다. 어찌 보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는 비교도 안되게 단순한 일차원적인 검은색 작은 로고였지만 내게는 로댕 이상의 생각을 품고있으며, 그 이상의 생각을 나누어주던 중요한 잡지였다. 지금도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마크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도 서울대를 다니던 큰오빠가 주말이면 사 가지고 내려오거나, 아니면 큰언니가 주는 용돈으로 책방에서 새로 나온 [학원]을 사 가지고 올 때의 그 로고가 주는 친근함과 설렘은 기억에 생생하다.

책을 손에 넣은 날은 어김없이 넷째 언니(난 언니가 자그마치 네 명이나 되었었다)와 누가 먼저 볼까 실랑이를 벌이곤 했었다. 물론 늘 언니가 이기긴 했지만. 한번은 기어이 내가 먼저 차지하고 읽겠다고 억지를 부리다가 언니라는 서열에 눌려 빼앗기게 되었다. 나는 분을 못 참아 기어이 책을 집어 던졌다가 책이 찢어지는 바람에 큰언니인가, 큰오빠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그런 기억은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도 TV나 인터넷에 정신을 빼앗겨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거나, 더구나 책 한 권을 놓고 서로 먼저 보겠다고 싸울 필요조차, 싸울 상대조차 없는 요즈음 우리 자녀들의 세대를 바라보면 오히려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거리로 떠올라 미소를 짓게 한다.

그런 우상 같던 잡지인 [학원]에 글을 몇 번 실었어도 그게 자랑거리인 적은 없었다. 집안 식구들한테 칭찬을 받은 기억도 없다. 요즘에는 그저 자녀의 어린 시절 하나라도 위대하고 아름답고 특별한 것으로 기억해 놓으려고 창조적으로 애들을 쓰는 것 같다. 우리 딸이 초등학생일때 아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도 원생들이 서툰 연주나마 CD로 만들어 작품으로 남기거나, 하다 못해 아이를 연주가로 남겨준다고 했었다. 모든 엄마들이 특별히 사정해서 마련한 이벤트인데 그걸 신기해하는 나를 우리 아이의 피아노 선생님은 오히려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사실 우리 딸은 피아니스트가 되기엔 손에 힘이 너무 없었다. 그러나 절대음감을 타고 태어난 우리 아니는 그 학원 학생들 중 누구보다도 음감이 뛰어나고 한 번 들은 음악은 그게 연극 배경음악이든 영화에서 나온 음악이든 아주 어려서부터도 틀림없이 기억해내곤 했었다. 초등학교 때인가 그 전인가 혼자서 은발이라는 미국민요를 치다가 가사가 슬프다고 가사에 나오는 할머니, 할아버지 불쌍하다고 울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입학 첫 날 반에서 한사람 씩 나와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자 대뜸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은 생상의 백조입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 안나 파블로바에 대한 영화를 보았는데 거기서 그 음악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형제가 없어서 여러분과 친구하고 싶습니다...”라고 해서 그때부터 길고 긴 왕따의 역사가 시작되는 비극의 씨앗이 되기도 한 아이였다. 엄마와 같이 본 그 영화는 파블로바의 일생을 그린 것이었다. 시위대 속에서 총에 맞고 쓰러지는 애인을 백조로 형상화하여 발레를 하던 파블로바의 우아하고 아름답고 슬픈 모습을 생상의 선율과 함께 그리고 있는 영화였다. 가슴에 빨간 핏자국을 선명하게 남기고 쓰러져가던 하이얀 백조를 아이는 숨을 죽이고 감동과 충격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동화책에서 읽은 백조는 죽기 전에 가장 아름답게 운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공대를 다니지만 지금도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과 맞는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고 하니 음악을 정말 사랑하는 아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난 그런 아이를 위해서도 CD를 굽지 않았다. 음악을 사랑함과 자신의 연주를 CD로 남기는 일은 다른 것이기에물론 나는 지금도 자주 나만 우리아이를 이 열성적인 세대 속에서 너무 느리게 키워 그만 외톨이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여러 번 자책도 하고 반성도 해본다. 그리고 그게 어린 시절 내가 받은 영향 때문이었나 보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내 초등학교 시절엔 요즘처럼 그저 무슨 상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형편과는 달랐다. 부모님들도 관심이 없었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다. 줄줄이 사탕처럼 5번째 딸인 나, 그리고 7번째 막내로 태어난 나는 그냥 지우시려다가 하필 어지러워 쓰러지신 바람에 병원을 못 가 포기하고 낳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지 않아도 일곱 남매를 키우시다 막내쯤 내려오면 금메달을 달고 와도, (아니 반대로 아마 낙제를 해도 그러셨을 지는 모르지만) 그저 그런가보다 하시기 마련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나도 그 정신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서인지 남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외국에서의 학위나 또는 박사학위를 받는 졸업식에도 가질 않았다. 그래서 내놓을 사진하나 없는 형편이다. 그게 뭐 자랑할 일인가 싶어서였다. 하다 못해 대학 전체 수석으로 소위 영광스런졸업을 할 때에도 지각대장인 작은 오빠의 변함 없는 지각 때문에 3번이나 단상에 올라 상을 받았어도 사진하나 남겨놓질 못했다. 잡지사(우연인지 내가 좋아하던 학원사가 [여원]이라는 잡지를 출판하게 되었는데 그 잡지에서 우리 집에 방문해서 사진도 찍고 취재해 간 내용이었다.)에서 인터뷰를 해서 커다랗게 실렸을 때에도,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에도, 아니 결혼 후 아침 신문을 보고 직장에서 점심시간 달려가 참석했던 문예진흥원 주체 주부백일장에서 산문부 장원을 했을 때에도,  무슨 주간지엔가 커다랗게 사진과 글이 실렸을 때에도, 동아일보 청탁으로 칼럼에 3회연속 글을 실었을 때도 나는 자랑스러워했던 기억이 없다. 그러니 무슨 기록이 남아있겠는가. 그렇다고 그 점이 뭐 그리 아쉬운 적은 한번도 없다.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추억거리를 남겨두어야... 하던 친구가 있었지만 내 자녀, 내 손자, 손녀들이 꼭 금줄 달린 학사모나 옆줄 세 개 쳐진 소매의 검은 가운을 입은 내 사진을 봐야 이 어미와 할미를 박사로 인정해주는 그런 존경을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온 후에도 [학원]에는 글이 두어 번 더 실린 적이 있었지만 가족들 조차 그 일을 모른다.  그렇게 글을 쓰는 것은 무슨 상을 타거나 성취감,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그냥 맘속의 생각을 어디엔가 털어놓고 싶어서 했던 일 같다.  몰론 이제와 생각하면 잡지에 실리고 상을 타고 하던 일로 가족이 나를 특별히 자랑스러워하거나 칭찬해줄 사람이 없었던건 아닐까 가끔 쓸쓸한 마음이 들때도 있다.  매 달 나오는 [학원]을 먼저 보려고 언니와 다투며 안달을 했던 기억만큼도, [붉은 망아지]와 죤 스타인 백이라는 소설가의 이름만큼도, 얄개가 기도해주는 교장선생님의 손 밑에 자신의 머리대신 밀어 넣고 나온 동그란 걸상의 이미지만큼도, 내 머릿속엔 나의 그런 글쓰기의 "성과"가 중요하게 남아있지 않다. 내가 글을 실었다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떠올린 것은 몇 년 전 중년이 다 된 나이에 처음으로 만난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나보다 3-4살은 더 먹은 언니뻘의 같은 반 친구) J에게서 듣고 나서이다. 서울로 전학을 가서도 자신에 대한 글을 써서 잡지에 실었다는 사실에 대한 어린 시절의 흥분과 감격을 잊지 못하고 이젠 아줌마가 된 나에게 아줌마가 된 그가 아직도 흥분하면서 넌 항상 약한 사람 편이었어하고 추켜세우지 않았다면 아마 기억 저편에서 그냥 잊혀졌을 지도 모르는 일들이었다. 이런 저런 일들로 볼 때 난 어려서부터 그저 아무 목적 없이 늘 공책에 무언가 썼었던 것 같다. 무척 활달한 겉모습과 달리 유난히 속맘을 잘 털어놓지 못하는 나에게 그 밖에는 대화의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학교 때는 그것이 더 심해졌다. 하루를 여는 첫 시간에도, 매 시간 수업시작 전,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릴 때, 또는 수업이 맘에 와 닿지 않아서 다른 생각들로 머리가 기차역 대합실 모양 번잡스러울 때면 무언가 적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맘속으로는 경부선, 중앙선, 경춘선... 탈출의 반란과 음모를 꾸미고 있어도 선생님들은 내가 열심히 강의 내용을 적는 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늘 호의적인 시선으로 날 보셨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졸업 후 직장을 다닐 때에도 아침에 내 자리에 도착하면 우선 공책을 펼쳤다글을 써서 무엇을 표현하겠다는 것보다는 하루를 열기 전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종의 리츄얼 같은 것이었다. 의식이 반복되면 제의가 되는 것일까? 습관이상의 무엇, 마치 기도와 같은 일과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사실 일기 쓰기를 한 3년 멈추었던 적도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작은 오빠의 말을 듣고 부터 였다. 내가 무척 힘들어서 끙끙대고 있을 때, 청승맞다고 엄마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숨을 곳 없어서 방 한구석에서 소리도 못 내고 눈물만 흘리며 힘들어 할 때 작은 오빠가 말했었다.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너 자꾸 일기 쓰지 마라. 세상은 그렇게 논리적인 게 아닌데 항상 글로 규정짓고 논리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니까 자꾸 혼돈이 오고 힘든 거야....” 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만큼 오빠의 논리에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날로 일기 쓰기를 멈추었던 기억이 난다. 논리적인 거 말고, 해석하며 사는 거 말고 그냥 모순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싶었다. 해석이 안되면 괴로우니까. 너무 고독하니까. 쓰다보면 자꾸 왜냐고 묻게 되니까. 삶에게 ?”라는 물음표를 달고 싶지 않았다.

삶은 이렇게 모순으로 가득 찼는지. 고통의 연속인 이 삶을, 자신의 의사와 무관히 존재하게 된 이 삶을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 내어야 하는지.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 가장 아름다운 것을 느끼는 순간 슬픔의 그림자가 함께 느껴지는지. “인간들은 외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지. “세상의 모든 기쁨은 이렇게 순간적인 것인지. 반짝이는 별 같은 희망과 기쁨과 사랑 이런 것들이 반짝이며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해 준다해도 역시 인생은 어두운 밤하늘일 뿐인걸....

글이라는 논리 속에, 언어의 틀 속에 세상이치를 자리 매김 하지 말라는 오빠의 한마디 충고가 내게 세상을 보는(받아들이는) 또 다른 길을 열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무척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 후로 정말 오랜 동안 글 쓰기를 포기했었으니 말이다. (물론 학교 신문사에서 쓰던 칼럼은 다른 의미의 글이었다.) 그리고 쓰는 것은 습관인지라 다시 돌이키려면 나의 언어를 다시 찾아내기가 쉬운 것이 아니었기에. 쓰는 것을 포기함으로 생각마저 포기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니 그 무엇보다도 글 쓰기는 해석이전에, 논리적인 풀이 이전에 나의 호흡이었고 숨쉬는 통로였으며 내 속의 무엇을 불러오기도 하고 달래기도하고 풀기도하고 쫓아내기도 하는 일종의 성소였는데 그만 내가 너무 성급히 도망갔던 것 같다. 글 쓰기라는 피난처에서 더욱 황량한 광야로.

그런데 언제부턴가 다시 일기는 아니어도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수첩마다 빼곡이 메모를 했다. 스케줄이 아니라 그 날 있었던 일을 메모했다. 수첩엔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시 구절, 떠오르는 생각... 무어든지 적었다. 그런데 그 일기들이며 수첩이 잘 보관 된 것도 아니다. 난 수없이 그 기록들을 잃어그래서 결국은 잊어버렸다. 어떤 수첩은 수업 중에 시를 읽어주느라고 교탁에 올려놓고는 잊고 그냥 두고 왔었던 거 같다. 제발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글을 교실에 붙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아마 그 속에 비상금으로 넣고 다니던 수표 한 장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귀한 내 삶의 기록을 누군가는 그 속에 든 현실적 가치한 장 때문에 쓰레기통에 넣어버렸을 것이다. 마치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영화에서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인디안의 이름을 새로 가지게 된 백인 던바가 아끼던 일기처럼 그렇게 버려졌던 것이다. 그 영화에서 던바는 인디안의 친구가 된 자신을 추적하는 백인 병사들을 피해 도망을 가다 말고 그의 일기를 찾으러 돌아왔다가 결국 백인들의 손에 붙잡히게 된다. 그러나 던바가 목숨까지 걸며 찾고자 했던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존의 기록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을 그린 일기의 페이지는 백인 군인들에 의해 찢기어 토일렛 페이퍼 대용으로 사용된다. 화면에 비쳐지던 황야에 사방으로 찢겨 흩어지는 던바의 일기가, 조롱당하는 던바의 추억과 가치들이 눈앞에 떠오른다.

이렇게 내가 도둑맞은 나의 과거의 삶의 흔적, 내가 분실하고 실종시킨 역사는 한 두개가 아니다. 유학을 다녀오는 사이 내 물건들을 맡겨둔 언니 네도 해외로 나가게되자 일기며 공책들은 슬그머니 폐기처분되었던 것 같다. 돌아와 보니 내 것으로 남아있는 것은 그나마 애써 여기 저기로 나뉘어 보관된 가구 몇 점과 그릇들이 전부였다. 신세를 지는 처지에 무어라 말할 수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스스로 나의 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겪는 당연한 결과이니 누굴 탓할 것도 못되었다. 보물처럼 상자에 넣어 보관을 부탁한 기억이 없으니 말이다.

보관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더 귀해 보였던, 그래서 식구들이 불편을 감수하고 지켜주다가 내게 돌려준 그 가구들은 마치 무언가 전도된 삶을 살고 있는 내 모순된 인생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가끔 실소를 머금고 생각해본다.

그게 아마 공책에 써넣은 일기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컴퓨터가 공책을 대신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씩 과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PC 앞에서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한 후에도 안타깝게 3년에 걸친 내 과거는 또 한번 삭제되어버렸다. 학교 전산실 직원이 내 컴퓨터를 손봐주면서 모든 자료를, 그리고 내 어줍잖은 글들과 모아놓은 소중한 이메일들을 실수로, 정말 실수로, 복구 불가능하게 완전히 날려버렸다. 일기나 이메일, 수필 등은 논문이 아니었으므로 굳이 따로 디스크에 받아놓지 않은 것도 내 잘못이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다였고 난 그 해 겨울 내내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이름 모를 무기력증에 아무것도 못하고 시름시름 아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일기 쓰기를 그만둔 지 또 한 3년 가까이 되었다. 눈뜨고 부터 감는 순간까지 무엇이 그리 바쁜지 한자 적을 기력조차 상실했다. 그리고 그 사이 일어난 일들은 한 줄로 적기엔 너무 복잡해서 엄두를 내지 조차 않았다. 옛날 오빠의 충고대로 내가 그 이해할 수 없는 하루 하루를 글이란 걸로 규정짓고 그러다 보면 더 시험에 빠져서 내 맘이 요동치며 파도타기를 할까봐 생각 없이, 아무것도 왜 라고 묻지 말고 그냥 행동만 하기로다시 결심하고 산지 3년이 넘었다. 기력이 없었다. 치열하게 물을 기력도, 아침마다 조용한 제의를 치를 짬도, 의욕도 없었다. 걷기도 모자라 뛰어다녔다. 적고 생각하는 대신 생각하지 않으려고 뛰었다. 수첩은 깨끗하다. 이전 옛날의 습관 대신 나이 탓에 생간 건망증을 돕느라고 간단한 메모-- 10XX회의, 5시까지 XX서류 제출, 등만 적혀있다. 피곤하면 잠시 나를 찾고, 나를 만나던 그 수첩, 일기가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난 조금씩 또 무얼 적고 있는 날 발견했다. 자꾸 잃어버리니까 애착은 없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남기려는 의도 없이도 그냥 쓰는 습관만이 슬그머니 다시 돌아온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그래, 그것도 또 5년만이다. 내 삶의 터가 바뀐 이후로 내 삶의 형태도 바뀌었으니까) 콘서트를 갈 일이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어떤 교수님이 나에게 재즈콘서트를 같이 가자고 제의해 온 것이었다. 나에 대한 비밀을 하나 이야기한다면 그건 내가 아주, 아주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날마다 걷는 것도 아니고 뛰어다니며 바삐 사는 나, 교실에 서면 목소리도 남보다 한 톤이 더 높은 나, 건강 그 자체 같아 보이는 통통한 볼 살과 혈색을 가진 내가 무기력하다면 모두 다 사시를 뜨고 꾸며댄다고눈을 흘기니까 그 사실을 비밀에 붙이고 있다. 그러나 난 약속을 미리 하지 못한다. 지키지 못할까봐 겁이 나서. 주말에 죽은 듯이 몰아서 한꺼번에 아프고 나야 하는데 약속을 하면 물에 젖은 솜 같은 몸을 말리지도 못하고 그 몸으로 다시 새로운 한 주일의 일상의 물 속에 뛰어들어야 하고 내 몸은 천근만근 더 이상 가눌 수 없으니까. 다음 주에 아무리 햇빛이 강해도 그 몸을 다 말릴 수은 없으니까. 게다가 주말이라고 햇빛만 비치는가? 맘과 몸이 고달픈 흐린 날, 비까지 오는 날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난 내 삶을 최대한 단순화한다. 그러다 보니 직장일 말고는 불쌍하게도 내 삶은 없다시피 된지 꽤 오래되었다. 살아남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살기를희생해야 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날도 재즈콘서트를 약속해 놓고는 아침에 일어나려고 용을 쓸 때부터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마 정명훈과 함께 하는이라는 타이틀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아직도 결혼을 (독신주의가 아닌데도) 못한 40살 넘은 그 여교수의 청함이 아니었다면, 아니 그보다 그 여교수가 날 본 첫날, 자신이 15년 넘게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사연을 구구절절이 상담해오지만 않았어도 약속을 취소했거나 거절했을지 모른다. 일 때문에 처음 만난 내게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내가 낯선 사람이므로 오히려 안전하다고 여겨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나도 이젠 내가 그렇게 믿음직스러웠나 보다 라고 감격하거나, 의지할 수 있다고 봐 주었나 보다 따위의 환상을 가지지는 않는 나이가 되었다) 이해하지만 그래도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엊그제 처음 만난 나에게 전화해서 같이 가자고 할 수밖에 없는 그 교수의 외로움(?)이것도 내가 쓰는 소설일까?에 생각이 미치자 난 거절 할 수 없었다. 아무튼 난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퇴근시간의 한강다리를 건너 세종문화회관으로 갔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그녀는 가슴에 현기증 나도록 노란 인형을 안고 있었다. 치킨세트를 시켰더니 경품으로 주었다고 소녀처럼 기뻐하면서, 같이 데리고 온 사무실 직원 몇 명과 함께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난 그들의 낯선 대화, 낯선 즐거움 속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나를 청했다는 것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순간 난 느꼈다. 안전해서도 외로워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녀가 무언가 말하고 싶을 때 마치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처럼 내가 우연히 거기 있었던 거고, 또 콘서트를 가고 싶은데 우연히 상대로 내가 떠오른 거라고. 내가 아니어도 좋을 자리에 무슨 친구연 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의무감을 가지고 젖은 솜덩이를 이끌고 먼, 먼 다리를 건너온 내가 바보, 또 바보 같았다.

그래 넌 항상 그렇지 뭐. 혼자 상상하고 혼자 꿈 깨고.’ 또 다시 찝찔한 맛을 삼키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찝찔함에는 언젠가 우리 딸이 해준 말, “엄마, 남에게 기꺼이 이용당해주면 안 돼? 그게 사랑이잖아!” 했던 말이 섞여있었다. 그 여교수가 외롭지 않았다는 건 아니고 그 외로움의 곁에 꼭 내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도 그녀가 필요한 게 아니었는데. 재즈도 아니었는데. 물기를 말려줄 햇빛이 나의 절실한 구세주일 뿐인데. 조금만 건드려도 주르르룩 물이 흐를 지경인데. 표정관리가 어려운 날 보며 그 교수는 얼굴이 부어 보이네요. 어디 아파요?” 한다. “살이 찐 거예요.” “아유며칠사이에 무슨 살...” 난 속으로 물에 젖은 솜이라 그래요라고 말 할 수도 없었다.

내가 너무나 싫어하는 닭튀김의 기름 냄새를 맡으며, 셋이서 떠는 수다를 볼 근육이 뻣뻣하도록 미소를 짓고 바라보면서 시간이 되기를 기다린 후 음악회장에 입장했다. 이층 객석에 자리잡자 불이 꺼지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보니 어느새 내가 깜깜해서 보이지도 않는 객석에 앉아서 수첩을 꺼내 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것이었다.

사방엔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많았다. 재즈에 웬 아이들일까? 내가 생각하는 재즈감상은 이런 대강당이 아니라 클럽이어야 할 것 같았다. 무대와 객석이 조명으로 차단되고 시작을 알리는 은근하고 위엄 있는 종과 인터미션의 종이 울리고 몇 번씩의 무슨 관례처럼 되어버린 기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나면 조용히 의자 소리도 내지 않고 앉아 몰입해야만 경지에 오른 청중이 되는 그런 것말고. 루이 암스트롱이 공연 중 가사를 잊어버리는 바람에 두비두비 두왓 다 두두…… 하고 즉흥적으로 읊조린 것이 창법이 된 그 스캣처럼 자유로운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친해도 좋고 혼자여도 좋고 그런 작은 홀이어야 할 것 같다. 홀이었다면 어울렸을 행동을 옆 교수가 하고 있었다. 리듬을 타는 듯이 몸과 고개를 가끔 흔들어 댔다. 그럴 때마다 의자가 삐걱 삐걱 어울리지 않는 화음을 곁들였다. 그런데 왜 그 흥이 그렇게 흥이 나지 않는 것일까? 슬쩍 슬쩍 그녀를 훔쳐보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수첩을 꺼냈던 것 같다. 그리곤 어둠 속에서 열심히 적다가 한달 전 제주도 여행할 때 어떤 동료교수님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렇게 적었다가 글 쓰시려고 그러시죠?” 그 말이 귀에 다시 떠오르자 난 슬그머니 수첩을 집어넣었다.

이런 경우 아니라도 난 직업병 때문에 늘 무언가를 적는다. TV 곁에도, 하다못해 부엌에도 항상 작은 메모패드나 공책이 하나있다. 그러나 아까 같은 질문, "그렇게 써 두었다가 나중에..."라는 질문에 답답하고 막막해 지는 것은 사실 나는 그런 지식과 정보용 메모까지도 적고 그걸로 끝이라는 것이다. 다시 들여다보는 법도 없다. 하기야 중고생 시절에도 단어장을 만들어 단어를 따로 왼 기억도 그리 많지 않다. 언젠가는 시간 나면 PC에 말끔히 정리해 두어야지 결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책상 서랍이나 이런 저런 곳에 온통 쪽지 투성이다. 결국은 정리도 못한 채 어느 날인가 지쳐서 포기하고는 오래된 영수증 버리듯 버리곤 한다. 이사갈 적마다 대청소를 할 적마다 늘 고민 끝에 버리는 것은 신문 중에서 모아둔 글이나 사진, 또는 내가 메모해둔 이런 저런 것들이다. 그렇게 아무데도 써먹지 못하면서 쓸데없이 난 집에 있을 때면 설거지를 하거나 밥을 할 때에도 TV문학관에서, 미술기행에서, 철학강의에서 AKN에서 무슨 재미있는 말이 나오면, 또는 영어 표현이 나오면 젖은 손을 급히 닦고 뛰어와서 적는 버릇이 있다. 아마 내 옆방의 Y교수라면 그 적은 것으로 책 몇 권은 족히 출판했을 것이다. 난 그 교수처럼 모든 게 정리되어있는 법이 없다. 책을 읽다가도 그 책에서 무슨 재미있는 용어나 주제가 나오면 그것과 관계된 책을 찾아서 또 읽어본다. 그러다 보니 책상 위는 항상 여러 주제의 서류와 책들이 얽혀있다. 언제 들어가 봐도 깨끗이 정리된 사람들의 책상을 보면 열등의식에 사로잡힌다. 난 왜 이렇게 정리를 못하지? 누가 내 방을 방문하면 난 변명을 늘어놓기 바쁘다. 아유, 책상정리를 아직 못해서... 오늘은 좀 정신 없이 바빠서 책상이 엉망이죠? 하고. 책상과 서류를 말끔히 정리하고 사는 사람들은 생각도 나와 달리 깔끔히 정리되어있을 것 같다. 인간관계도, 과거와의 관계도 미래와의 계획도......

 

애써 변명하자면 난 그저 목적 없이 늘 적는 이런 내 버릇을 적극적인 수용이라고 부른다. 소극적으로 들리니까 듣는 것말고, 보이니까 보는 것말고, 스쳐지나가니까 느끼는 것 말고, 바람처럼 불어오니까 머리카락 한번 흩날리고는 보내버리는 것말고, 들은 것에 끄덕여주고, 보이는 것을 카메라에 담듯 머릿속 영상 막에 찍어두고, 스쳐 지나가는 것 옷깃 한번 붙잡아 눈맞추고 확인한 후 보내주고, 바람에 스친 향기 오래 기억하려고 그 냄새에 이름 지어주는 그런 적극적인 삶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면서도 한 번 찾았던 동굴에 이름 새기고 돌아서는 것 같은 행위일까? 그것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라도 내가 이곳에 왔었다고 기억되고 싶어서 새겨놓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동굴에게 표하는 적극적인 교제행위일까? 재능 있는 분들은 그런 것들을 다 글로 쓸 것이다. 기행문을 쓰기도 하고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라고 시로 쓰기도 하겠지. 난 그런 능력이 없으니 그저 메모만 할 뿐이다. ‘코스모스가 벌써 피었다.’ 라든가. 좀 더 일 이분 시간과 마음이 여유 있는 날이면 오늘 아침 출근길, 고속도로변에서 첫 코스모스를 보았다. 순간순간 그저 쏜살같이 스쳐 달려갈 뿐인 수많은 고속 차량들에게 혼자서 성실하게 수행하는 의무인양 온몸으로 흔들며 인사하고 있었다가 고작이다. 그리곤 아주 가끔 내가 살고 있나 죽어 있나 확인해야 될 것 같을 때 수첩을 보곤 한다아니 했었다. , 이날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구나. 의식이란 게 깨어있었구나 하고. 적극적으로 삶에 개입했었구나 하고. 수업 중에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내가 가장 당혹하고 혹은 격리감을 느끼는 것은 강의를 듣기만 하면 다 기억하는 천재인양 필기를 하는 학생들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용어나 생각들을 내가 가끔 보드에 써주어도 그냥 눈으로 외워버린다는 것이다. (내 강의는 교재가 없는 경우도 많은데 말이다.) 그런데 왜 난 아직도 자꾸 적어야 하지? 그 학생들은 천재인가 보다. 난 너무나 머리가 나빠서 적는 행위라도 해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기억할 수 있나보다.

 

그 날 음악회에서 무어라고 썼었던가? 재즈를 잘 모르는 내게 그 날 음악은 몇 개의 곡 외엔 지루했다. 그래서 적기 시작했나?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음악보다 베이스 연주자였다. 소설가 쥐스킨트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그 연주자는 자기 만한 악기를 품에 안고 연주를 하고 있었다. 어찌나 섬세하게 그 악기를 어루만지면서 연주를 하는지 세상에 가장 사랑하는 여인도 그보다 더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어루만질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렇게 낮으면서도 간절한, 가장 설득력 있는 소리가 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랑하는 연인에게나 들릴 그 낮은 목소리 말이다.

나는 때로 음악회에 가면 연주자와 악기와의 그 놀라운 교류를 바라보며 환희를 느낀다. 모든 것에서 완전히 격리된 그들만의 일치, 그리고 그 일치가 만들어 내는 음. 그들이 얼마나 서로 일치가 되어있는가가 음의 질을 좌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건 오디오로는 느낄 수 없는 즐거움과 감동이다. 무엇보다도 피아니시모 같은 소리를 낼 때 연주가들의 땀이, 정말 진한 땀이 솟는 절제된 연주는 아름다움의 극치 같다. 절제야말로 힘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연주자와 음악 아니 악기가 일체가 된 음악을 들을때면 가슴이 무너지곤 한다. 

물론 음악을 듣다가 흥분되어 모든 피로를 다 잊었던 적도 있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던 때였다. 그 날도 너무 지쳐서 언제나처럼 커피를 진하게 보온병 가득 타서 비상약처럼 곁에 두고 운전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FM을 틀었는데 마침 미샤 마이스키 공연 실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음악회에 가보지 못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음악학과 교수는 내가 CD나 테이프, FM에서 클래식을 듣는 것을 보면서 자기는 그런 것으로는 고전음악을 도저히 못 듣는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지만  작은 음악홀인 차 안에서 내겐 그것도 때론 좋아서 죽을 것 같을때가 있다. 그 날은 반 수면상태에서 운전하면서 아무 기대도 없이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는 차츰 나를 피로의 늪에서 끌어내어 넓은 광야로 달리게 만들고 있었다. 특히 A 장조 3번 소나타는 압권이었다. 마이스키의 저음은 놀랍고도 화려한 노크였다. 나도 돌봐주지 못한, 내 관심이 미치지도 못하는 내 깊은 가슴속 바닥까지 찾아가 노크를 해주는 기분이었다. 그 깊은 속에서 문을 열고 맅케의 소년이 달려 나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밤중에 야생마를 타고 달리는 소년, 나는 그런 소년이 되고 싶다는 릴케의 시를 외우며 단숨에 말을 달리듯, 몸이 날아갈 듯 고속도로를 달려왔었다. 마이스키를 들어보긴 처음이었다. 한복을 입은 멋진 모습의 그가 신문에 화재가 되고 내한공연도 몇 번 있었지만 내가 모든 것 다 잊고 귀 막고 눈감고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 지 너무 오래되었으니 그의 음반을 사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오래 묵은 좋아하는 음악을 꺼내 듣고 또 듣는 기쁨과 달리 이렇게 뜻밖의 연인을 만나는 기쁨은 잊을 수가 없는 감동이다. 지금 마이스키를 듣는다면 아마 그 첫 대면의 흥분을 느낄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루빈스타인의 쇼팽은 들어도, 들어도 첫 설레임과 가슴 벅찼던 감동이 줄어드는 법이 없다. 나는 그의 쇼팽 피아노 콘체르트를 끈적끈적하다고 표현한다. 물론 이 말은 일반적으로 내가 말하는 것과는 다른 부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왠지 깔끔하지 못하고 껌처럼 달라붙는 느낌을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끈적끈적하다는 말은 연주자의 손과 건반, 연주자와 음악이 단 한순간도 단절되지 않고 완벽히 밀착되어있다는 의미이다. 그가 연주하는 쇼팽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단 한 순간도 단절되지 않고 전 악장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 하나의 음과 같다. 단 한 순간도 한눈을 팔 수 없이 영혼을 빨아들이는 음의 흡입력, 그걸 이 언어가 부족한 나는 끈적끈적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니! 비가 오면 빗물로, 낙엽이 지면 낙엽 지는 가을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겨울로, 꽃잎 흩날리고 아카시아 향기 퍼지는 봄이면 봄이 되어 언제든지 영혼의 시로 흐르는 루빈스타인의 쇼팽은 바로 쇼팽과 연주자와 청중을 하나로 일치시켜 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흡입력의 비밀은 다름 아닌 그가 연주해내는 깊은 슬픔이다. 감상적인 슬픔을 노래하는 시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가장 밑바탕에 흐르는 강에서 길어낸 순수하게 투명한 슬픔 말이다. 가장 약하면서 가장 강한 그 슬픔 말이다. 슬프도록 순수한 자유 말이다. 이와 비슷한 슬픔을 나는 우습게도 모차르트 속에서도 발견한다. 내 말이 전문가들에게는 우습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건 무엇일까. 모차르트 피아노 콘체르트 232악장이나 하다 못해 212악장의 밝음 속에 감추어진 그 미묘한 슬픔, 잘 짜여진 틀 속에 모순처럼 자유로이 흐르는 슬픔의 강은? 그 미묘한 밝음과 어둠, 희망과 절망의 공존은?

이렇게 연주자와 악기가 하나되어 악보 속의 음악을 살아 숨쉬는 시간 속에 존재시키듯이 나의 쓰고자 하는 욕구도 나와 삶이 단절되었을 때 다리를 놓기 위한 것,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인 것 같다.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필사적인 증명인 것이다. 내가 끈끈하게 내 삶에 밀착되어 결코 겅정겅정 지나쳐 버리거나 내 삶을 외면해버리지 않았다는 본능적인 증명인지 모른다. 그래서 지난번 음악회에서 내가 그만 울어버렸나 보다.

벌써 7, 8년도 넘은 일이다. 장영주, 장한나, 요요마, 이작 펄만 등이 출연하는 <갈라 콘서트> 때였다. 누군가가 내게 표를 선물하겠다면서 관람을 원하는 날짜를 물었고 난 그 티켓을 받고는 당연히 내가 원하는 그 날짜인 줄 알고 딸아이와 함께 갔었다. 그런데 이층 우리 좌석에 다른 이들이 앉아있는 것이었다. 확인해보니 내 표는 그 전날 공연입장권이었다.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입구에서도 나 같은 바보를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냥 보내준 것 같았다. 구세주처럼 종이 울리고 불이 꺼졌다. 나는 어떻게 하느냐고 쩔쩔매는 딸아이를 달래서 좌석 옆 계단,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앞부분에 앉았다. 그런데 맨 뒤 좌석에 앉아있던 (내 처지를 모르는) 다른 이들이 내 용기(?)에 힘을 얻고는 따라서 계단으로 나와 앞으로 내려앉는 것이었다. 비참하던 층계 신세가 그분들의 순수한 음악에의 열정 덕에 체면쯤은 중요시하지 않는 무슨 용기 있는 음악사랑으로 무마된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따라 나와서 계단에 같이 앉아 준 이들이 너무 고맙다.)

연주는 예상처럼 정말 좋았다. 옆에서 너무나도 행복해하는 아이의 얼굴에 더더욱 행복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난 어둠 속에서 줄줄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난 그게 티켓 날짜도 모르고 입장한, 늘 그렇듯  바보 같이 어리비리한(사실은 항상 기력이 소진되어 그런 것이었지만) 나 자신의 초라함 때문인 줄 알았다. 다른 이들이 같이 내려와 앉아주지 않았으면 어셔에게 쫓겨날 수도 있었을 위기를 넘긴 아주 짧은 순간의 비참함과 당혹함, 아이를 실망시킨 미안함, 그리고 그 후의 안도감이 가져다준 뜨끈뜨끈한 피로감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난 그들의 음악이 들려주는 어울림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작은 별, 큰 별, 밝은 별, 흐린 별, 수많은 별들이 모두 모여 도도히 흐르는 아름다운 하모니의 강, 갤럭시의 찬란함에 감동 받고 있었다. 그들이 모여 서로 화답하며 연주를 하는 순간 그들에겐 인종, 국가, 성별, 나이, 연주, 악기의 다름,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다. 음악이라는 공통 화두 속에 자기를 기꺼이 방기(放棄)한 자들의 자유와 그 자유 속에 탄생되는 음악의 아름다움과 감동만 있을 뿐이었다. T. S. 엘리엇이 황무지를 헤매다가 결국 답을 찾은 천둥의 소리인 다. 다야드밤, 다미야타, 즉 주고(give), 공감하고(sympathize), 콘트롤(control)하는 어울림이 나를 감동시켜 버렸던 것이다아니, 이제와 좀더 솔직히 말하면 감동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부끄러운 자기 설움이었다. 나는 저런 어울림과 하모니 속에 한번도 속해보지 못했다는 데 대한 지독한 부러움이 종래는 그 최악의 상태인 자기 연민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래, 자기 연민이라고 외면당해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여전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무언가를 늘 적는다는 것은 외로움 때문인가 보다라는 것이다.   C. S. 루이스는 <셰도우랜즈>라는 영화 속에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책을 읽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닌가, 고 묻고 있는데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무언가를 쓰는 지도 모른다. 릴케는 눈을 뜨는 순간 쓰고 싶은 욕구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면 우리는 작가라고 했지만 난 결코 그 차원은 아닌 것 같다. 어느 동료 교수님이 물었듯이 책을 만들어 내려는 것도 아니다.  인생의 언덕을 넘어 이제는 내려가는 길에 선 이 나이가 되도록 소위 '책 한 권' 남겨진 게 없으니까.  수백개의 시를 써놓고도 시집 한 권 내지 않았으니까.  그런 내가 어려서부터 꾸물꾸물 굼벵이처럼이라도 무언가를 쓰는 것은,  쓰고는 그냥 잊어버리더라도 그 순간 혼자가 아니었다고, 적어도 나 자신과 대화 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때문인 것 같다. 그럼으로써 그 순간 적극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고,  어느 날 생을 마감할 때도 내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면서  좀 떳떳하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나도 그 때, 그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유일한 증언, 소리 없는 외침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만의 무대인 일기장속에서 독백 같은 모노드라마를 펼치고 있는 것일 게다.(12. 2002)

 

그날 갈라 콘서트에서 연주한 곡 중 하나, Brahms- Double Concerto for Violin and Cello, A minor
https://youtu.be/yic6xKq1W7I?si=sF8JnCAYHBUPA0Z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