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가고 싶다 - 안도현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별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 되어 우리라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올 때까지는 저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여줄 따뜻한 이불이란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은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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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 세월 새해아침이면 가슴에 떠오르는 노래입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입니다.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처럼 그리움에 서럽던 마음을 나의 눈물로 다 씻어 헹구고

새로 떠오른 햇살처럼 밝은 희망이 되어 당신에게 가고 싶습니다.

그 긴긴 밤을 지나는 동안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타는 가슴이

사랑보다 더한 행복임을 자꾸자꾸 일깨워주시니 그도 감사합니다.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이 모습 이대로 당신께 가고 싶습니다.

당신도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당신 모습 그대로 내게 오고 싶다면 좋겠습니다.

우리 서로 울 곳이 필요할 때 서로의 등에 기대 말없이 그냥 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서로 빙그레 웃음 지을 일이 있을 때 하늘 보며 떠올리는

달 같은 별 같은 얼굴이면 좋겠습니다.

 

올해도 나의 사랑하는 이들이

어둠에 묻혀 어둠이 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인내와 용기를 잃지 않기를

그래서 어둠도 빛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어둠 속에서 빛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새해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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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라는 문구가 있는 카드를 보냈다. 그래서 생각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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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돌 반 넘은 우리 손녀, 지지난주 처음 교회 예배에 참석했단다. 크리스마스 예배인데 교회가 텅 비었다고 맘이 쓸쓸했다 한다. 코로나 이후 그리 되었고, 또 팀 켈러 목사님 돌아가시고 더 그렇기도 한 것 같다.

그런데  예배 중에 그 어린 손녀가 갑자기 큰소리로 “It’s not about Santa Claus!” 하더란다. 사람들이 돌아보며 미소 지어주고….

아이의 데이캐어센터에 유대인 가족이 있는데 (같은 아파트 사는) 유대인들 행사 때마다 늘 자기네 문화를 알리려 하고 그런 사진을 게시판에 도배하다시피 붙여놓곤 한다.  또 그때마다 어김없이 부모가 학교 와서 자신들의 이야기와 놀이를 애들과 같이 하는데 이젠 심하다 싶을 정도이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도 그렇게 와서 같이 활동하였다는 소식을 학교에서 보내주는 newsletter에서 읽었다.
우리 딸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새 프로젝트 때문에  숨 쉴 틈도 없이 바쁜 와중에 크리스마스 그림책 두 권과 예수님 탄생 모형들 사서 데이케어에 갔단다. (당연히 미리 연습도 했겠지!!) 서클타임에서 책 읽어주고 인형극도 해주고 또 크리스마스 스티커 놀이랑 준비해서 아이들과 함께 활동도 하고!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이 빠져서 예수님 외로우실 거 같아서…라고. (역시 울 딸과 난 맘이 통해^^)
엘라가 무척 좋아했단다~  

전 세계가 화려하게 반짝이며 모두의 축제가 되는 참 특별한 날 크리스마스. 서로 온정과 사랑을 베풀고 어려운 이들을 돌아보며 그동안 못한 마음을 전하는 전통으로 살아있는 날.  싼타의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시절이 아름다운 꿈(그래서 쓸쓸한 아픔을 가진 아이들도 있겠지..) 그날을 즐기는 모두의 문화도 중요하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는 잊히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악몽 2T3

 

 

날 품어주던 오늘이

돌아 누었다.

 

나 꿈을 꾸었어

너무 어둡고 추웠어

진눈깨비 흩어지다가

어느새 주먹만 한 흰 눈이

아득한 바람을 타고

숨도 쉬지 않고 내려왔어

내 숨도 막았어

 

누군가에 도움을 청했지만

흩날리는 눈처럼

가볍게 섧게 날아갔어

눈길조차 없는

파닥이며 맴도는 작은 어둠이었어

 

눈 속에 갇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

허리 끊어진 엉뚱한 몇 마디

투명한 단어들만 간신히 웅얼거렸어

악몽이었을까.

 

침상에 모로 돌아누운 그를 흔들어 깨웠다

아, 돌아눕는 얼굴 없는 얼굴

눈 코 입 그려 넣지 않은 헝겊 인형 같은

 

갑자기 등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

또 다른 꿈으로 지워질 또 다른 오늘이

시린 바람 속에 

알 수 없는 선물상자를 들고 서서

나를 깨운다.

 

일어나야지

눈을 크게 뜨고 악몽을 받아들이는 건

용기 있어 아름다운 결단이야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용기

폭설을 떨치고 날아보는 작은 노래야

 

일어나야해

또다시 지워질 얼굴을 그려야 해

 

언젠가 다다를 오늘의 끝은

눈부신 현실일 거야

 

 

MP 

0719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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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자주 꾼다. 하지만 좋은 꿈은 젊은 시절 외에 꾸지 못한다.
어릴 때는 신기하게 꿈이 잘 맞았다.  기억하는 건 초등학교 때도 군에 간 외사촌오빠가 오는 꿈을 꾸면 꼭 그 오빠가 휴가 나왔다며 우리 집을 찾아오곤 했었다. 
대학교 때는 예를 들면 전날 학교에 불이 나거나, 대통령의 목소리가 학교에서 방송되는 걸 듣거나 같은 꿈을 꾸면 그다음 날 학과 혹은 학부 톱으로 장학금을 받곤 했다. 

내내 그런 꿈을 어김없이 꾸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특히 결혼 이후부터는 거의 악몽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혼자 벽에 기대어 울다 지쳐서 1초 깜박하는 사이 털부숭이 남자가 무시무시한 식칼을 내게 들이대는 찰나 같은 꿈에 놀라 깨기도 했다. 그 후에도 그렇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것들을  순간순간 경험하곤 했었다. 

 

악몽이 현실이 된 꿈 중 예를 들면 어느 날 꿈에서 내가 수술대 위 눈부신 전등 아래 누워있고 옆 테이블에 내 손과 발이 장갑과 부츠처럼 잘려서 놓여있었다. 너무 생생해서 일기에 그림으로 그렸었었다.  그리고 잊힐 때쯤(한 달 후쯤?) 그날도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새벽에 학교 가는 길.... 전철역으로 내려가는 층계에서 두 번을 굴렀다.  손목과 다리 모두 다치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는데  새벽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마침 급한 듯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날 도와주려고 애를 쓰시며 연락처를 묻는데 가족은 미국에 있고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백지가 된 패닉상태.  지나가던 청년이 --그 급한 새벽출근시간에--나를 업고 길 위로 올려주고 나는 간신히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갔던 거 같다.  

 

암튼 내 악몽은 내 마음이 상태뿐 아니고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는 내 내면의 지혜의 경고였으나 그 경고는 피할 길이 없었다. 지난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이디푸스처럼 꿈을 피해 도망가는 선택이었는데 꿈을 향해가는 선택이 되었고 아무 일도 아닌데 상상이상으로 심히 다치고 수술하고 아직도 회복 중이다.  그 외 늘 반복되는 꿈도 몇 가지 있다. 그 이유를 나는 스스로 분석도 하고 알고 있다.  그 꿈이 차차 빈도가 낮아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꿈은 내게 악몽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악몽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내 삶의 한 메타포가 되기 시작했던 거 같다. 

정말 삶이 외롭고 버겁고  힘들었던 아주 오래전에 쓴 이 시도  산더미 같은 그 간의 공부했던 것들을 버리던 중 공책을 뒤적이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제목의 의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시가 들려주는 내 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어제의 나를 다시 만나는 이 마음을 어찌 표현해야 할까.......... 

 

가끔 악몽을 꾸고 나면 나도 영화의 주인공처럼 묻고 싶다. 

 

-언제 이 악몽에서 벗어나 행복한 꿈을 꿀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행복하면 꿈을 꾸지 않을 테니까. 

 

 

 

 

 

도종환 - 폭설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만에 내리는
큰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 속
빈 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을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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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그 눈들의 "남은 시간," ㅡ 그것이 차마 고통스러 힘들어했었습니다. 이 땅의 때묻음, 세상의 나약함은 덮는다고 가린다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녹지 않는 눈 같은 환상이라도 있어 내 눈을 덮어주길 바란 것일까요? 어둠에 그을린 세상을 온몸으로 덮고 함께 녹아 길에 쓰러져 그 최후를 맞이하는 눈...그것을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이 겨울에는 질척이는 외롭고 응달진 골목을 걸을 때 그 속에 함께 녹아 내린 희디 흰 눈의 눈물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ㅡ나태주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 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시집, 슬픔에 손목 잡혀 (시와시학사 2000)>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 - R. 프로스트 (1874~1963)>

 

여기가 누구의 숲인지 알 것 같다.

그 사람 집은 마을에 있으니

그는 모를 것이다 내가 여기 서서

그의 숲이 눈에 덮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일 년 중 가장 캄캄한 저녁

가까운 데 농가도 없는 이곳

숲과 얼어 붙은 호수 사이에 가던 길 멈춰 서있으니

내 조랑말은 분명 이상하게 여기나 보다

 

무슨 문제라고 있느냐고

방울을 한번 흔들어 본다.

그 밖에 들리는 다른 소리란 오직

부드러운 바람과 솜털 같은 눈송이 스치는 소리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 

(bhlee역)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by Robert Frost>

 

 

ㅡㅡ

시인은 “한 해 중 가장 어두운 날 저녁(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눈 오는 숲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다 그 숲의 깊고 어두운 아름다움에 끌려가던 길을 멈추고 말 위에서 한참을 바라봅니다. 

이리 들어오렴... 손짓하며 부르는 듯한 숲!!!

일 년 중 가장 어두운 겨울 저녁은 어떤 저녁일까요? 나의 마음이 가장 춥고 어두울 때는 어떤 때일까요? 

그럼에도 홀로 길을 가던 긴 여정 여기서 멈추고 들어가고 싶은 그 곳.

깊고 조용하고 어두운 그러나 아름다운 그곳의 유혹—그곳이 그냥 깊고 아름답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분명 그곳이 어둡다(dark)말합니다. 

어두운 곳, 눈이 내려 덮이고 있는 깊은 아름다운 숲에서 그가 발견한 어둠, 그 어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긴긴 인생의 여행길, 어두운 겨울밤과 같은 먼먼 길을 홀로 가다가 누구나 한 번쯤, 아니 몇 번쯤

그냥 그 고요한 곳으로 모든 것 다 덮는 눈 속으로, 망각의 눈 속으로 들어가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시인도 그랬을까요? 한참을 그렇게 바라봅니다. 이 묘한 텐션 속에 시를 읽는 나도 빨려든 그 순간

영문 모르는 작은 조랑말은 뭐가 잘못 되었나 방울을 울리고 시인은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이 먼 외로운 겨울 길을 계속 가야 할 이유를 기억합니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길이 아직 멀다고.

 

힘겨워서 고요하고 깊은 아름다운 어두움의 유혹 앞에 잠시 망설이게 될 때마다

나를 지탱해주는 약속! 그리고 가야 할 남은 길에 대해 기억해야한다고 일깨워줍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이렇게 방울을 울려주는 작은 말(馬)을 생각해봅니다.
나 여기 있다고 같이 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그 작은 조랑말을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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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랑말의 방울소리 082020:

요즘은 내가 살면서 난 무엇을 남기며 살았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앞으로 가야할 길도 생각해본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정말 무지무지 많은데 왜 이렇게 기력이 없는지, 왜케 자꾸 몸이 가라앉는지 한해의 2/3를 허망히 보내고 이대로 주저앉아 “나와의 약속/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도 제대로 못 지키고 의미 없이 남은 삶을 사는 건 아닌지 슬프고 두렵고 야속하다.

 

그런데 어제는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닌데 문자를 몇 개 받았다. 이게 내가 걸어온 외로운 길과 지켜야 할 약속을 다시 일깨우는 말방울소리인 것일까?? 그 많은 세월 동안 부족한 내가 제자들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수 없이 받은 편지와 분에 넘치는 사랑을 기억해 본다.

내가 건강이 정말 많이 안 좋았던 어느 해 일 년 간 매주 연구실 문 앞에 말없이 두고 간 녹두죽과 과일,

얼려놓고 매일 먹으라고 하나하나 작은 용기에 포장해 건네주던 녹두죽과 김치,

때로는 밤늦게 일하던 내 방문 앞에 아무말없이 걸어두고 간 고구마.

때로는 노크만 하고 두고 간 꽃다발.

아니 몇 십 년 전, 사은회 때마다 다른 교수들 몰래 내 선물은 내 연구실이 건조하다고 (그때는 낡은 건물에 석유난로를 피던 시절) 가습기를 따로 준비해서 슬그머니 건네주던 학생들, 담요나 베개 같이 정말 세밀하게 살펴서 몰래 준비해주던 학생들.

내가 다리와 허리를 굽히지도 못하게 통증에 시달릴 때 말없이 서서 신을 신을 수 있게 긴~ 구둣주걱을 사다 준 제자.

수업 중에 핫팩을 준비해 주는 제자. 말없이 의자에 방석을 놓아주는 제자.

내가 좋아한다고 늘 일부러 한방 찻집에서 대추차를 사서 수업 전에 가져다 놓는 제자.

중국에서 출장 다녀올 때마다 대추를 사다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해서 가져다주던 제자.

일 년 내 철마다 농사지은 너무나 맛있는 김치를 보내주는 10년 넘게 오래된 내담자

외국에서 보내주는 내담자의 선물들.

예전에 고속도로 운전하며 출퇴근할 때는 오늘 날씨가 추운데.... 눈이 오는데.... 비가 오는데... 안개가 낀다는데... 운전 조심하시라고 전화해 주던 제자들.

어떻게 다 이루 말할 수가 있을까? 책으로 엮어도 몇 권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의 가장 훌륭한 삶의 동반자였으며, 실수 많고 부족한 나의 참 스승이었다.

나는 참 많은 빚을 진 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수없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상처받았지만

정말 수도 없이 오해도 받고, 그걸 견디며 살았지만 감사할 일이 더 많다........라고

나의 작은 말(馬)이 방울을 울리며 나의 갈 길을, 지켜야 할 나의 약속을 일깨워 준다.

 

힘들고 지칠 때, 나만 혼자 가는 길이 너무 외로울 때 수없이 받았던 이런 작은 격려들, 아니 그보다, 내가 함께 해줄 수 있는 마음이 아픈 분들, 아니,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아직도 깊은 곳에서 기다리는 내면의 목소리--그런 것들을 기억한다.

자꾸 머물고 싶고 잠들고 싶은 깊고 어둡고 아름다운 눈 오는 숲 곁에서 나도 방울소리에 깨어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이 눈 오는 겨울 길을 계속 가야한다. 날 깨워주는 작은 조랑말의 방울소리에 감사드린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제자들과 인연들에 감사드린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 Dylan Th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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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연히 받은 편지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떻게 지내시는지.. 건강은 어떠신지 안부 여쭙니다^^ 너무나 늦은 시간인 줄 알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메시지 드려요~~

제가 아이 둘을 키우면서 독서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있어요 그중 문학의 중요성을요.. 얼마 전 아이와 함께 읽으려고 황소와 도깨비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갑자기 교수님과 함께 했던 오셀로가 생각나더라고요.. 두 작품은 상황도 배경도 다른 내용이지만 오셀로에서 상징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교수님이 설명해 주신 것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지표로 삼게 된 것이 Trifles라는 작품이에요.. 교수님과 함께하던 시간에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고 현재도 가장 좋아하는..^^ 인생을 살면서 도움이 많이 된 작품이에요. 문학이라는 건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 혹은 앞으로 경험할지도 모르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주는 너무나 중요한 보물이더라고요.. 아이를 키우면서 특히나.. 결혼해서 모르는 남이 가족이 되면서 특히나.. 문학을 배우길 잘했단 생각이 듭니다^^

좋은 감정과 생각을 잊지 않고 전하고 싶어 두서없이 메시지 드렸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지치실 때도 있으시겠지만 교수님 덕분에 마음속에 보물을 품고 살아가는 제자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20년 전 제자 RR>

ㅡㅡ

교수님을 처음 뵙던 날~

2018년 8월 23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속 고통의 깊이를 모른 채 왜 이렇게 삶이 공허할까 싶었던 순간, 교수님의 강의에서 영혼이 맑고 마음이 따뜻한 그리고 참여자 모두를 품어주시는 교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이 제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성과 열정사이에서 이성적 가르침과 열정적 사랑을 보여주시는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특강을 듣고 무척 높은 연봉의 전문직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온 정말 소중한 선생님의 글>

ㅡㅡ

교수님~

맛있는 거 먹을 때면 교수님 생각이 자꾸,

보내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선배에게 교수님 주소를 받아놓고도 후딱 실행을 못 하고 있었네요.

교수님, 맛있는 누룽지 보내드릴게요. 입맛 없을 때 누룽지가 좋더라고요.

 

그리고, 저 00대 대학원 상담심리학과 박사과정 하고 있어요. 아직 일을 할 만큼의 체력은 아닌 듯하고, 시간이 아까워서요.

지난 1학기 수업받으면서 교수님 생각이 더 많이 났어요.

'우리 이봉희 교수님같이 열정이 있는 교수님이 없구나'하고~.

공부하면서 교수님 말씀이 이런 거였구나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경험도 합니다.

 

가까이 있으면 자주 뵐 수 있으련만.

건강도 잘 챙기시고, 식사도 잘 챙기세요.

 

<나에게 배우려고 먼 곳에서 천안으로 이사까지 ㅡ아이도 전학시키고ㅡ와서 공부했던 샘. 논문 쓰고 석사학위 따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암이 발견되어 수술했었지. 문학치료의 특수함 때문에 여기저기 좋은 곳에 취업이 되어서 일하고 계신 선생님. 내가 좋아하는 대추차를 무겁게 낑낑 사들고 서울까지 왔었던 선생님.>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이어령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하나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조그만 이파리 위에

우주의 숨결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내가 혼자인가를 알았다

푸른 나무와 무성한 저 숲이

실은 하나의 이파리라는 것을…

제각기 돋았다. 홀로 져야 하는 하나의 나뭇잎

한 잎 한 잎이 동떨어져 살고 있는

고독의 자리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잎과 잎 사이를 영원한 세월과

무한한 공간이 가로막고 있음을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살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왜 이처럼 살고 싶은가를,

왜 사랑해야 하며 왜 싸워야 하는가를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생존의 의미를 향해 흔드는 푸른 행커치프…

태양과 구름과 소나기와 바람의 증인…

잎이 흔들릴 때

이 세상은 좀 더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의 욕망에 눈을 떴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들었다

다시 대지를 향해서 나뭇잎은 떨어져야 한다

어둡고 거칠고 색채가 죽어버린 흙 속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본다

피가 뜨거워도 죽는 이유를

나뭇잎들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생명의 아픔과 생명의 흔들림이

망각의 땅을 향해 묻히는 그 이유를

그것들은 말한다

거부하지 말라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대지는 더 무거워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인력이

나뭇잎을 유혹한다

언어가 아니라 나뭇잎은

이 땅의 리듬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는다

별들의 운행과 나뭇잎의 파동은

같은 질서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우리의 마음도 흔들린다

온 우주의 공간이 흔들린다.

 

Life is fine as good as wine.- L. Hughes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 없는 찬사이다. - 장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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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나니 세상이 다시 보여요. 기어가는 벌레 하나도 너무 소중하고, 그 생명력이 무척이나 부러워요.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 알았어요."
한 후배가 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치료를 받는 순간순간 자신이 물 없는 어항에 갇힌 물고기인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그 끔찍한 순간을 겪다가도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을 느낄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벌레는 알까요?
거대한 존재들 틈에서 무심코 밟히기라도 하면 이내 사라지고 말 자신의 운명이 절망스러울 때, 힘겹게 온몸으로 기어 다녀야 하는 그 삶이 부질없게 느껴질 때, 세상의 누군가는 자신을 지켜보며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를 벌레처럼 작고 힘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알까요? 내가 살아서 존재하는 그 자체가 포도주처럼 더없이 멋진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쓸쓸해도 오늘 또 하루 감사하며 살아 있을 것입니다. 장정일 시인의 말대로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 없는 찬사"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카페: 내 마음을 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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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일까 가지가지 통증이 내 존재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며 산다.  야속하게 끈질긴 방문객 혹은 동반자. 그러려니 하지만 가끔 서럽거나 지칠 때가 있다.  하지만 사실 누구에게든 살아가는 일은 그런거잖아.  

그렇게 감쪽같이 아프며, 아니 감쪽같이 아프지 않으며  참 길고 긴 길을 이 나이까지 걸어왔지 않은가?

그런데 아직 내게 남겨진 축복들, 넘치도록 더.욱. 더. 많.은. 감사한 일들도 내 삶과 존재의 일부가 아닌가?  잠시 또 잊었다.  

오늘도 살아서 숨을 쉬고, 계절을 느끼고, 음악을 듣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고,  생각하고, 식사도 하고, 때로 눈물도 흘리고, 때로 화도 나고,  비명도 지르고, 절망도 하고, 자책도 하고, 후회도 하고, 외로움과 아픔과 통증을 느끼고… 내가 살아있기에 누리는 이 모든 일상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며 축복인가!!
내 어깨를 토닥여본다.
감사함이 나를 감싼다.

“아프지? 그게 진심만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야”(마종기)

 
은둔형 외톨이를 위한 글쓰기문학치료
   ㅡ새장에 갇힌 새의 노래ㅡ
 
Whenever affection is revived, there life revives.
<from van Gogh, Letter to Theo>
 
네가 나를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봐준다면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사실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사람도 두 종류가 있다. 천성이 게으르고 강단이 없어서 정말 아무것도 안하며 사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고... 또 다른 종류의 게으른 사람도 있다ㅡ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사람.
그의 내면에는 일을 하려는 욕구가 불타지만 손이 묶여있어서, 말하자면 어딘가에 갇혀있어서, 뭔가를 이루어내기엔 부족해서, 고통스러운 상황이 그를 억지고 이런 곳으로 몰아넣어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지.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모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자신도 그 무엇인가에 적합한 인물이다! 라는 걸 느끼고 있다
 
ㅡ“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쓸모 있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 안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엇일까?”
.........
본의 아니게 쓸모없는 사람들은 바로 새장에 갇힌 새와 비슷하다. 그들은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정말이지 끔찍한 새장에 갇혀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새장에서의 풀려나는 길이 있다는 걸 안다ㅡ뒤늦게 온 해방이지만…..그를 막고, 가두고, 매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지적할 수는 없다. 그러나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창살, 울타리, 벽 등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환상이고 상상에 불과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묻곤 한다. 신이여 이 상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요? 언제까지 이래야 합니까? 영원히?
 
이 감옥을 없애는 게 뭔지 아니?
모든 깊고 참된 사랑이다.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어떤 마술 같은 힘에 의한 놀라운 능력으로 감옥 문을 열어주지.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음으로 지내겠지. 하지만 사랑이 다시 살아날 때마다 생명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뿐 아니라, 감옥이란 편견, 오해, 치명적인 무지, 위선. 거짓 겸손 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고흐의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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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과 집에서 꼼짝 못 하고 지낸 세 달 반만의 외출.

임상치유예술학회 초청으로 목발을 짚고 SRT를 타고 원광대에 다녀왔다.

100여 명의 참여자. 특히 두 번째 강의 때는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집중해 주신 감사하고 소중한 만남이었다.

은둔형 외톨이인 내담자 뿐 아니라 우리 모두 내 안의 은둔형 외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나도 다시 ‘나’로 돌아왔음을 느꼈고,

정말 뜻밖에 너무나 그리웠던 14년 전 인연을 다시 만나기도 했다.

올해를 보내면서 또 하나의 감사한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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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내가 아꼈고 정말 늘 그리웠던 SJ씨

ㅡ2009년에 집단문학치료 워크숍에 참여했던 SJ 씨가 그곳에 왔다!!

끝나고 기차시간 때문에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 집에 오는 길에 통화하면서 옛날 생각에 뭉클했다.

오늘 문자도 받았다. 20대 대학원 학생이던 그녀를 40대가 되어 다시 만나니 정말 그저 벅차게 기쁘고 대견하고 감사하다.

앞길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기도한다.

 

"교수님~^^

많은 시간은 보내지 않았어도 교수님과의 만남은 저에게도 적잖은 파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그날에

교수님과 헤어지고 (문학치료)상담의 길이 아닌 다른 교육의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지만 적성에 안 맞아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오랜 세월을 힘이 들었습니다.

 

결혼도하고 아이도 낳고......

오늘 교수님을 뵙게 되니 저에게는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 길을 갔어야 하는데!!!

 

교수님과 함께했던 모든 문학치료상담시간과

캐서린 아담스 강연준비와

숙대에서 진행했던 통합예술치유와

노인문학치료상담 등

저에게는 너무 소중한 기억이고

다시 이 원점으로 돌아오게 한 보물입니다.

 

이제 정년도하시고

사랑하시는 따님과 미국에 자주 계시다고 하니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교수님께서 52세 때 이 공부를 다시 시작하신 것처럼

저도 용기를 내어 다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후회는 내려놓고 앞으로

제가 만날 영혼을 위해

그때도 그랬지만 또다시

달려볼게요.

 

교수님을 다시 뵈어서

저에겐 응답이 되었고

너무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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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해 주신 PKH교수님의 문자를 받았다. 세심하게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불편한 몸으로 먼 곳까지 와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교수님 워크숍 2번째 타임에 저희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요.

모두 큰 감동과 사랑이 충만함을 제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학교 학생들을 위한 수업으로 꼭 다시 모실게요.

조금 더 긴 시간으로 귀하게 만들겠습니다."

Byun Shiji(1926-2013)  

 



[슬픔 -김용택 ] 


외딴 곳
집이 없었다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어디 울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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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갑자기 눈보라가 쳤습니다. 슬픈 재즈 같이 젖은 눈이 아프다는 소리도 없이 잿빛 바람에 마구 휩쓸려 불려 다녔습니다. 누군들 곱고 하얗게 내려 쌓이고 싶지 않을까요.


세상은 온통 고장 난 시계처럼 하루 종일 희미한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가슴속의 다 타고난 재가 불어오고, 불려 다녔습니다. 공연히 해묵은 아픔이 가슴을 적셨습니다. 이 작은 냉기에도 마음이 또 다시 위축됩니다. 하루하루 손에 남은 건 녹아버린 눈송이 같은 젖은 방울 몇 점 뿐.
해 놓은 일도, 남겨진 것도 없이 무산된 계획만 헛손질하며 가버리는 하루, 하루, 그리고 또하루....

늘 손잡아 주던 엄마가 이젠 혼자가라고 나를 남겨둔 정류장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초조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이런 흐린 날은 어려서부터 공연히 서둘러 집에 가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시인은 집이 없었다고 합니다.
외딴 곳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삶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익숙하던 길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잿빛 바람이 불고 날은 쉽게 어둑어둑해지는 겨울날이 우리 삶의 여정에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외딴 곳, 침침한 곳에서 시인이 집을 찾는 이유는 울 곳이 필요해서입니다. 우리 모두 길을 잃은 듯 외로운 날,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이슬을 막아주는 지붕이 되고 기대어 울 수 있는 벽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는 동으로 난 작은 창이 되어 이 외딴 세상에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런 희망으로 시를 감히 고쳐 읽어 봅니다.  "
외딴 곳,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작은 창에 불이 켜졌다. 나는 그대의 가슴에, 그대는 내 가슴에  집을 짓고  이름 없는 설움을 비워내며 조용히 울었다." (2005 이봉희, Denver 중앙일보 문학칼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