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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남겨진 사람은 또 어떻게 혼자서 살아가야 하나요? " 하지만 내가 널 길들여 주길 원한 건 바로 너잖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오래된 서적 - 기형도
------------- "오랫동안 곰팡이 피어/ 나는" --곰팡이 핀 나와, "곰팡이 피어--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가 내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아무도 들어다 보지 않는 책, 곰팡이 피어나는 책, 축축한 세계 속에 버려진 나. 이게 그가 써 내려간 "어쩌면 한 줄"일 수 있는 (또 다른) 책의 마지막 페이지이다. ( "Human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 T.S. Eliot, "Burnt Norton"/Four Quartets) ------------ 내 친구가 내게 말했었다. 왜 너는 늘 슬픈 글을 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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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맑아-나태주
잊었던 음악을 듣는다. 잊었던 골목을 찾고 잊었던 구름을 찾고 잊었던 너를 찾는다 아, 너 거기 그렇게 있어줘서 얼마나 고마운가 좋은가 나도 여기 그대로 있단다 안심해라 손을 흔든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햇빛과 그늘 사이로 오늘 하루도 지나왔다
-------------- 아름다운 저녁놀에 고통을 매만져 반짝이면, 그때 손수건만 한 꿈이라도 헹구어 널어 말릴까? 가도 가도 닿지 못한 햇볕 같은 그리움이라도 널어놓는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 겨우 17살, 이지훈의 노래를 들으면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해지는 들길에서 - 김용택
사랑의 온기가 더욱더 그리워지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먼 들 끝으로 해가 눈부시게 가고 산그늘도 묻히면 길가의 풀꽃처럼 떠오르는 그대 얼굴이 어둠을 하얗게 가릅니다 내 안의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한 계절의 모퉁이에 그대 다정하게 서 계시어 춥지 않아도 되니 이 가을은 얼마나 근사한지요
지금 이대로 이 길을 한없이 걷고 싶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앞에 하얀 풀꽃 한송이로 서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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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감수하는 용기’ 어느 때부터인가 나의 모토 중 하나가 된 이 생각ㅡ오해를 감수하는 용기!
살다보면 우리 모두 내게 이유 없이 도전해 오는 수많은 사람들, 견디기 힘든 관계, 오해받는 관계나 인생의 문제들과 부딪칠 때가 많습니다. 차라리 내게 이유라도 말해주면 좋은데 뒤에서 비난을 하고, 그 말이 돌아서 나에게 오느 경우가 더 많지요. 처음에는 누구나 자동적으로 나가 무슨 문제였을까 내 잘못이 무엇이었나 먼저 이모저모 생각하고 반성합니다. 무척 힘든 시간입니다. 하지만 내 스스로 그런 비난을 받을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많지요. 누군가가 아무 이유 없이 나에게 화를 내거나 괴롭힌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 그 사람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는 아님을 배우게 됩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데는 그 사람만의 이유, 내면의 상처나 미해결과제, 하지 못한 말들이 있기 때문인입니다. 그게 나의 어떤 면으로 인해 인해 촉발된 것입니다. 나에 대한 도전과 싸움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 문제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지지 않습니다. 내가 친절하게 다가가면 내가 그렇게 싫다고 표현해도 그런다고 비난합니다. 내가 피하면 무시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관계는 내가 노력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분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시훈 시인의 시가 생각납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며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다. 나의 눈과 귀와 코와 입이 모두 바깥을 향해 달려 있다는 거다! 나는 한 번도 내 안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그 캄캄한 어둠의 깊이를. 나는 내 안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온갖 추악한 언어의 난동을. 내 안에 고여 있는 물의 지독한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건 천만다행이건만. 나는 내 안을 향해 말하지 못한다. 오, 가엾다고.
부디 나로부터 나를 구원하소서. - 이시훈, "나로부터 나를"
오래 전 영화 <황금연못>에는 은퇴한 노교수 노먼과 십 대 소년 빌리와의 갈등이 나옵니다. 빌리는 괴팍한 할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할머니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난 할아버지가 싫어요. 나만 보면 항상 소리만 지르잖아요.”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그게 아니야. 할아버지는 너에게 소리 지르시는 게 아니라 세상에 대고 소리를 지르시는 거란다.” 할아버지의 분노의 대상, 소리 지르고 있는 대상이 ‘나’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할머니의 말은 빌리에게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하는 새로운 관점으로 다가옵니다. 이 새로운 관점은 애매한 고통으로 인해 시달리는 자책감과 피해의식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도와줍니다. 그뿐 아니라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불편함, 그로 인한 분노, 그리고 방어심리로 부터 나를 지켜주기고 하지요. 더 나아가 실체가 없는 세상 대신, 눈에 보이는 누군가에게 그 분노를 전이시키는 사람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도 가해자이기 이전에 피해자이며, 강하기 이전에 상처 입은 연약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나 역시 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되지요.
저는 여기서 감시 생각하게 됩니다. 만일 내가 그 할머니라면 빌리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아니, 어쩌면 할아버지는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거란다."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카페] 중에서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아픔을 피하려다 웃음까지 잃어버렸다 - 고통의 재인식
어느 여름날, 난(蘭) 하나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꽃을 피우던 난이 겨울이 되자 어느새 가지가 노랗게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만 손을 놓아버렸나 생각하면서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겨울이 지나도록 볕 좋은 창 앞에 열심히 놓아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어버린 가지를 달고 있는 뿌리가 새 가지를 내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원래 피어오른 줄기가 말라버리자 어느새 뿌리는 그 곁으로 하나의 새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나봅니다. 말라버렸다고 줄기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뿌리 채 뽑아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작은 꽃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죽어가는 가지에도 새 가지를 내고 꽃을 피우는 뿌리의 생명력이 있다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니 문득 이 시가 떠올랐습니다.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 줄 때도 사실은 참 아픈 거래 - 이해인 <꽃이 필 때> 중에서
살아 있으니 아픈 것이다 아픔은 선인장의 가시처럼 생명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박경리 씨의 말이 생각납니다. 20년간 《토지》를 쓰면서 참 힘든 일도, 고통스런 기억도 많지 않았냐는 기자의 물음에 박경리 씨는 망설임 없이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산다는 게 고통 아닌가요? 인간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고통을 겪지 않나요? 내 생각엔 생명이 있다는 자체가, 산다는 게 고통인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생명은 앓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앓음 알음’이라는 것, 앓아가면서 알아가는 여행길이라는 것을.
괴테는 “모든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라고 말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색채들은 빛의 고통에 의해 존재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뿐 아니라 자연 속에서도 아픔 없이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도 나는 사는 동안 뜨겁게 타오르는 노을과 시린 새벽빛과 소나기 뒤의 그 장엄한 하늘빛을 보면서 한 번도 빛의 고통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묘한 빛깔의 많은 꽃들을 보며 감탄만 했지, 그것을 피워내는 아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때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면서 책상 앞에 “난 이미 죽었는데 왜 아직도 아픈 걸까?”라고 써 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프지 않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자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인간도 우주도 그 모든 생명은 아픔과 함께 하는 것인데 우리는 아픔으로부터 피하고만 싶어 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죽은 자처럼 살고자 모든 느낌을 차단합니다. 마취제를 맞으면 아픔이야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 마취된 시간 동안 죽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부분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던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의식이 또렷해서 의사들의 메스소리가 들리는데, 자신의 몸에서 아무 통증이 느껴지지 않자 자신이 온전히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고 합니다. 마취제는 통증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약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마취 상태로 있다가는 다시는 깨어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통증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다가 의식마저 무감각하게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김수영 시인의 <사령(死靈)> 중 한 구절을 중얼거려봅니다.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 김수영, <사령> 중에서
아픔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순간, 다시 살아나는 그 순간에 느껴지는 고통은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살아 있다는 감사한 깨우침입니다. 아픔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이건 사는 게 아니라고, 이건 삶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픔은 오히려 살아 있다고, “깨어서” 살고 싶다고 외치는 온몸의 아우성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고통스런 기억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방어기제는 고통뿐 아니라 생의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들까지 함께 차단합니다. 그럼으로써 타인에 대한 깊은 친밀감과 사랑, 신뢰감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방어기제는 우리의 깊은 내면을 감옥으로 만들어 우리의 참자아를 고립시킵니다. 딸아이가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때 쓴 가슴 아픈 고백처럼 말입니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다가 이제 난 기쁨마저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렸어. 내가 진 거야.”
아픔을 아파하지 마세요
출처: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photo by bhlee(Seattle)
다시 올까? 이 순간이, 지금처럼 너와 내 외로운 마음이 "순하게" 겹쳐진 그 순간의 행복감, 지극함이 다시 읽힌다. 하지만 이어서 나도 시인처럼 그 뒤에 그림자가 따라온다.
그냥 왜 지극히 아름다운 것에 감동받을 때 알 수 없는 슬픔이 따라올까? 어려서부터 난 이것이 의문이었다. 슬픔이 반드시 아픔은 아님도....
이제는 슬픔 뒤에 따라오는 아름다운 여명, 그 노을을 본다.
갑자기... 우리 손녀가 생각난다. 4돌이 채 안된 손녀가 서울 우리집에 왔었다. 첫 한국방문.
====================== 해묵은 사진 한장으로 긴 추억들, 다시 오지 않는 그 시간들이 다시 떠오른다.
[댓글] *ㄴㄷㄴㅁ: 이미 그 순간이 악세비치님의 순간에 남아있는듯한데요? -->acsebichi 2009-04-17 01:01:14 [답글] 무언가 서로 연결된 고리가 있다,,끝없이 이리저리 이어지는. *라디오 2009-04-17 23:16:23 [댓글] 저도 고리 하나 달고 갑니다, 계속 생각하시라고..^^; *jubilate 2009-04-19 20:57:27 [답글] 멀리 가도 좋은 걸요. 얘기 나눌 수 있어서..^^ 제가 얼마 전 인터넷을 이용하다 우연히 악세비치님에 관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이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조심스러웠는데..솔직하기로 했어요.^^
'전과 같을 수 있을까?' 그렇죠.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말도 결국 같은 물음 아닐까요, 오후님!
============ 나는 이 온라인 모임이 있던 때가 참 자주 그립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멀리서 빈다... 오늘은 귀국에 딱 맞춰 의뢰가 들어온 이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특강/워크숍을 위해 내가 찍었던 사진이 하나 떠올라서 이 시를 같이 읽어보기로 했다. (문학치료자료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멀리서 멀리로 떠나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저 바라보는 나뭇잎 다 떨군 나무의 심정이, 이리저리 가시처럼 찢긴 그 매마른 손짓이 가슴에 남아있었던 사진이었기 때문일까?
보내는 나무의 모습처럼 망망대해를 향해 떠나는 배도 그리 행복한 유람선 같지는 않아서일까?
길 포말로 남은 저 떠나는 배의 마음은 무엇일까? 두려움일까 미련일까 아쉬움일까 회한일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상처투성이 마음일까 혹은 미안함일까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못남일까. 그 모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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