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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 상실의 회복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잘 알려진 작가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잃어버린 조각The Missing Piece》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 동그란 피자의 한 조각을 슬쩍 먹어치운 것처럼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그 주인공입니다. 동그라미는 그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하지만 완벽한 원이 아니어서 빨리 굴러갈 수 없습니다. 동그라미는 완벽해지기 위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열심히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여러 조각을 대보아도 잘 맞지 않습니다. 어떤 조각은 너무 크고, 다른 조각은 너무 작습니다. 또 어떤 것은 서로 모양이 맞지 않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에게 꼭 맞는 조각을 만나서 완벽한 동그라미가 된 주인공은 기쁨이 넘쳐납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빠르게 굴러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없이 바삐 굴러가다보니 꽃의 향기를 맡을 수도 없고, 지나가는 벌레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고, 행복한 노래를 부를 수도 없습니다. 결국 동그라미는 “아, 이런 거였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다니던 조각을 내려놓은 뒤 다시 불완전한 채로 덜컹거리며 천천히 길을 떠납니다. 물론 잃어버린 조각은 길 위에 혼자 남겨지게 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욕망하는 이유 우리도 내 안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잃어버린 조각을 찾고 있지는 않나요? 나의 빈 곳과 꼭 맞는 조각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어렵사리 잃어버린 조각을 만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꼭 붙잡아주지 않아서 그만 조각이 떠나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난 조각은 놓치지 않으려고 집착하다가 또다시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신화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태초에 남녀가 결합된 양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반으로 쪼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지요. 반으로 나뉜 인간은 스스로 불완전함을 느끼고는 완전성을 갈망하며 자신들의 반쪽을 영원히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전성을 향한 충동과 갈망을 남녀 간의 사랑의 욕구로 비유한 것입니다.
동그라미는 그렇게 찾아다니던 자신의 조각을 찾았지만, 이내 다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빈 곳을 채우러 길을 떠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하게 찾는 탐구 욕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욕망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욕망(desire)은 라틴어로 ‘별(sire)이 없음(별에서 멀어짐)’을 뜻합니다. 별이란 본질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이란 본질적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절하게 원하던 것을 찾았다고 해서 완성은 아닙니다. 누구나 경험했듯이 인간은 끝없이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하나의 욕구 충족은 완성이 아니라 또 다른 것을 욕망하는 시작입니다. 즉, 욕망의 대상만 바뀔 뿐이지요. 어렵사리 찾아낸 조각을 도로 내려놓고는 또다시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길을 떠나는 동그라미처럼 말입니다. 본질상 채워질 수 없는 것을 끝없이 욕망하며 사는 존재, 영원히 한 구석이 비어 있는 존재, 그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사랑하는 사이도 서로에게 허기져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왜 여전히 공허함을 느낄까요? 폴 발레리(Paul Valery)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다. 그런데, 아직 고독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는 더 한층 고독을 알게 하기 위해 짝을 만들어주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공허함은 카뮈의 《페스트》에서 의사 류가 말하듯 인간이 한 조각의 관념이 아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인식하는 존재이며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상대를 사랑해도 한 조각 관념처럼 상대를 온전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육체를 소유할 수는 있어도 그 순간조차 자유로운 그의 의식이나 영혼까지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소유욕은 (실버스타인의 이야기에서처럼) 상대를 부서지게 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나와 일치를 이루었던 사람이 점점 정신과 영혼이 성숙해져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조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 변해버린 모습 앞에서 우리는 다시 외로워집니다. 세상에 완벽하고 영원한 ‘나의 잃어버린 조각’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서로에게 영원히 허기져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릴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강도 높고도 심오한 고독입니다.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융합이나 헌신 그리고 상대와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개인이 성숙하기 위한, 자기 안에서 무엇이 되기 위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즉 상대를 위해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숭고한 동기입니다. 사랑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위대하고도 가혹한 요구입니다. -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중에서
실버스타인은 5년 뒤《잃어버린 조각》의 후편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발표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잃어버린 조각이 큰 동그라미를 만나다The Missing Piece Meets the Big O》는 첫 번째 책의 끝부분에 홀로 남겨진 그 잃어버린 조각이 주인공입니다. 피자의 한 조각처럼 생긴 그 잃어버린 조각은 모가 나서 홀로 굴러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서서 마냥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자신에게 꼭 맞는 동그라미를 만나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불완전한 동그라미가 찾아와야만 그와 하나가 되어 온전한 동그라미로 굴러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만날 수가 없습니다. 무심히 지나가는 동그라미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번쩍이는 치장을 하고 아름답게 꾸며도 보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수많은 동그라미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자신을 원하는 동그라미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긴 외로움과 기다림 끝에 잃어버린 조각은 드디어 자신에게 꼭 맞는 동그라미를 만났습니다. 둘은 하나의 완전한 원이 되어 행복해하며 함께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잃어버린 조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조금씩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동그라미와 맞지 않게 되어, 결국 잃어버린 조각은 동그라미에게서 떨어져 나옵니다. 그는 또다시 홀로 남겨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동그라미, O를 만납니다. 잃어버린 조각은 그에게 매달려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합니다. 하지만 O는 이렇게 말합니다.
“넌 나와 함께 굴러갈 수 없어. 하지만 어쩌면 너 혼자 구를 수는 있겠지.” “나 혼자? 잃어버린 조각은 혼자서 구를 수 없어.” “노력이라도 한번 해봤니?”
자신을 데려갈 동그라미를 기다리다 지친 조각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스스로 일어서기를 시도합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혼자 힘으로 굴러보려 애를 씁니다. 그렇게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동안 모난 부분들이 조금씩 닳아서 잃어버린 조각은 자그마한 o가 됩니다. 작은 동그라미가 된 잃어버린 조각은 이제 스스로 구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전에 만났던 커다란 O를 다시 만났습니다. 마침내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굴러갑니다.
내 안의 공허함, 어떻게 채울까? 실버스타인은 동그라미가 떨어뜨리고 간, 그래서 다시 길에 홀로 남은 잃어버린 조각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그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이 놀라운 두 권의 그림책은 우리가 생의 여정 중에 겪는 다양한 관계들을 간결하고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버려진 잃어버린 조각은 이별과 상실의 상처를 입고 남겨진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꼼짝하지 못한 채 자신을 완벽한 O로 완성시켜줄 다른 O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하나의 조각일 뿐인 존재. 그런 조각이 희망과 절망을 오가면서 차차 상처에서 회복되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회복이란 상대가 나를 품어주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내 스스로 완벽한 동그라미가 되어 다른 동그라미와 함께 굴러가는 것이라고. 결국 내 안의 결핍은 누군가에 의해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채워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쓸쓸함은 남습니다. 인간이란 그저 각자가 완벽한 원이 되어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 채 동반자로 굴러가야 할까요? 딸아이는 어릴 때 이 이야기를 읽고는 “그래, 내가 완전해야 남과 온전히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거야”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대체 어른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답니다. 타인과의 모든 접점을 잃어버린 채 스스로 누구 하나 품어주지 못하는 원이 되는 것, 결국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깨닫는 것이 어른인가, 그래서 앞으로 굴러가는 것밖에 모르는 외로운 바보가 되는 것이 어른인가, 하고 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본질적으로 외롭고 절망적으로 지어졌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카뮈의 말을 떠올릴 뿐입니다.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은 거대한 고독뿐이다.”
인간은 공허하고 고독합니다. 실버스타인은 단순한, 그러나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이 두 권의 그림책에서 우리 존재의 쓸쓸함과 모순, 그리고 공허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진실 앞에 우리는 공감하며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런 공허함을 나의 실존과 삶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인도의 철학가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의 말처럼 “어느 누구도 그대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의 공허함과 마주해야 한다. 그것을 안고 살아가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c)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중에서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출처: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내 마음을 만지다 “선생님,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요?” 한 학생이 편지로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갈까요. 물론 기본적인 육체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분명 그 이상의 어떤 힘이 필요합니다. 바로 사랑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등장하는 천사 미하일이 이 지상에 내려와 찾은 답 또한 바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이란 말로 넘쳐납니다. 하지만 바닷물처럼 넘실대는 사랑이라는 말 속에 빠져 살면서도 모두들 정작 사랑에 목말라하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사랑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너무 커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 고정희, <사랑법 첫째> 중에서
왜 사랑은 항상 내 기대에 못 미칠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한없이 쓸쓸하다면 그 원인 중 하나는 그 사람이 내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기대한다는 것,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이 한 가지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누구도 나와 같은 존재일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타인이 나의 기대를 채울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늘 어딘가 비어 있다고 느낄 때 문득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은 그 누구도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밖에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나의 일방적인 기대에 불과합니다. 나 역시도 상대의 기대를 온전하게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잊은 채 상대가 항상 나의 기대에 맞춰주기를 요구합니다. 때로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상대에게 대신 밀어놓고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원망을 그에게 전가시키기도 합니다.
생전에 어머니는 나와 내 딸을 참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불편하신 일흔의 몸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손녀를 돌봐주러 집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오셔서는 늘 원치 않는 일만 하셨습니다. 식구도 적은데 날마다 밥솥 한가득 밥을 해놓으시거나 냄비가 넘치도록 국을 끓여놓으시고는 먹으라고 권하셨습니다. 정작 어머니께 원한 것은 바빠서 치우지 못한 채 출근하는 집을 간단히 정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날마다 다 먹지도 못하는 밥을 가득가득 해놓으시며 오히려 집안일을 더 만들어놓고 계셨습니다. 제발 밥 좀 많이 해놓으시지 말라고, 차라리 아무것도 하시지 말라고 말씀을 드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일 년이 넘도록 같은 일로 다투다가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당신이 주실 수 있는 것밖에는 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머니를 통해 그것이 우리 모두의 사랑의 방식임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상대를 사랑해도 내가 가진 것, 내가 줄 수 있는 것밖에는 줄 수 없습니다. 그 이후로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밥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상대도 나에게 뭔가를 기대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대합니다. 부모에게, 자녀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하고 실망합니다. 우리의 언어 습관을 살펴보면 얼마나 자연스럽게 또 일방적으로 기대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남편으로서 그 정도밖에 못하니?” “어떻게 선생님이 저럴 수 있지?” “어쩌면 넌 친구라면서 그럴 수가 있니?” 등등. 흔히 말하는 어떻게 누구누구가 이럴 수 있는가에서 보듯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대하기를 당연시하고, 그 기대를 꼭 충족시켜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상대도 나에게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 남성은 영화 속 여주인공의 모습을 자신의 아내나 여자 친구에게 기대합니다. 여성 역시 남자주인공의 모습을 자신의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기대합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우리는 상대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쉽게 포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에 대한 상대의 기대는 쉽게 무시합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지배이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기대가 선한 의도일 때도 있습니다. 영화 <조이럭 클럽>의 등장인물인 준은 울면서 엄마에게 고백합니다. 어려서부터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서 늘 괴로웠다고, 그래서 상처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엄마 : 난 뭘 기대한 게 아니야. 네게 뭘 바란 적이 없어. 다만 희망을 가졌을 뿐이야. 네게 최선의 것을 희망하고 있을 뿐이야. 희망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야. 준 : 아니라구요? 난 그 때문에 상처를 받아요. 엄마가 내가 해낼 수 없는 무언가를 희망할 때마다 상처가 된단 말이에요. 엄마, 그것이 날 아프게 해요. 엄마가 무엇을 희망하든 난 내 모습 이상이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엄만 그걸 모르세요. 엄마는 내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해요.
어느 사십대 주부와 문학치료 모임에서 이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녀에 대한 자신의 일방적인 기대와 강요가 아이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주었다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후기를 썼습니다.
아이는 그동안 무진장 노력하고 있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 기대 안에서만 아이를 보려고 했다. 내 시야 안에서만 아이를 봐왔다. 갑자기 울컥하며 목이 멘다. 네가 잘되기를 바란다면서 내 기대로만 널 대했던 나를 보며 네가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목이 멘다.
나의 기대를 온전하게 채워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많은 연인과 부부들이 일방적인 기대로 서로에게 실망하고는 섣부르게 돌아서거나 이별을 고합니다. 이혼을 결심한 어느 젊은 부부 역시 늘 상대에 대한 일방적인 자신의 요구만을 강요하다보니 마주보기만 하면 서로 폭언을 퍼붓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문학치료를 통해 각자의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를 차분하게 서로 글로 쓰고 주고받으면서 각자 스스로를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기대를 낳은 각자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상대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이혼의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소중한 사랑과 그 사랑의 보금자리를 지켜내는 일은 적의 공격과 침략으로부터 성(城)을 지키는 것 이상의 힘겨운 싸움입니다.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겹습니다. 나의 기대를 포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사랑할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사랑은 지독한 자기희생이면서 동시에 그만큼 지독한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기대 때문에 (상대가 누구든) 소중한 나의 ‘그대’를 잃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항상 사랑에도 노력해야 합니다. 상대의 사랑의 방식을, 그리고 그가 줄 수 있는 것 외의 것을 바라지 않도록 말입니다. 나도 그럴테니까요. ‘내 기대’를 ‘그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 또한 그대도 ‘그대의 기대’와 ‘나’를 바꾸지 않기를 바라며 함께 노력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 사랑법 첫째 - 고정희 (전문)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하여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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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슬픔- 홍성란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그 어둡고 추운, 푸른 - 이성복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더딘 사랑 - 이 정 록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photo by bhlee(Seattle)
다시 올까? 하지만 이어서 나도 시인처럼 그 뒤에 그림자가 따라온다.
왜 지극히 아름다운 것에 감동받을 때 알 수 없는 슬픔이 따라올까? 어려서부터 난 이것이 의문이었다. 슬픔이 반드시 아픔은 아님도....
이제는 슬픔 뒤에 따라오는 아름다운 여명을 본다.
====================== [댓글] 이미 그 순간이 악세비치님의 순간에 남아있는듯한데요? *라디오 2009-04-17 23:16:23 [답글] 저도 고리 하나 달고 갑니다, 계속 생각하시라고..^^; jubilate 2009-04-19 20:57:27 [답글] 멀리 가도 좋은 걸요. 얘기 나눌 수 있어서..^^ 제가 얼마 전 인터넷을 이용하다 우연히 악세비치님에 관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이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조심스러웠는데..솔직하기로 했어요.^^
'전과 같을 수 있을까?' 그렇죠.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말도 결국 같은 물음 아닐까요, 오후님!
============ 나는 이 온라인 모임이 있던 때가 참 자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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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먼 곳이 생겨난다
----------------------- SSA: 글보다 사진! 여명인지 노을인지 하얗고 노란 햇빛과 마천루도 왜소하게 만드는 구름과 하늘. 왼쪽 구름속의 파란 점은 pale blue dot 같아요. 스티글리츠의 사진보다 더 공감이 되요^^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땅 위에 어둠이 덮인 후에도 아직은 바라볼 무엇이 나는 밤이면 늘 하늘을 바라보곤 한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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