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차창바람 서늘해
가을인가 했더니
그리움이더라

그리움 이 녀석
와락 안았더니
눈물이더라

세월 안고
그리움의 눈물 흘렸더니
아~ 빛났던 사랑이더라  

-작자미상/출처: 울릉도 예림원

엄마와 어머니 사이 - 목필균

  스물네 살 딸 시집보내고
  친정어머니 되고
  서른세 살 아들 장가보내고
  시어머니 되었다

  엄마와 어머니 사이
  비탈진 품 안으로
  조금은 멀게 자리 잡은
  자식들

  진액 모두 빠져나간
  텅 빈 거실에서
  리모컨으로 들려오는
  세상 이야기

  어머니 시절보다
  엄마 시절이
  더 힘이 있고

  엄마 시절보다
  어머니 시절이
  더 둥글더라고.

쉽게 쓰여진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우리들의 시간 - 박경리

 

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딛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뽑내어 본들 徒勞無益(도로무익)

時間(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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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徒勞無益(도로무익) 

   헛되게 애만 쓰고 아무 이로움이 없음

[주말을 여는 책 | ‘내 마음을 만지다’] 마음의 상처와 고통, 읽고 쓰면서 치유하기

2011-12-23 오후 2:37:33 게재

 


차미례 언론인·번역가

한국사회와 그 구성원인 우리는 마치 대지진을 겪은 나라, 재해 속을 헤쳐나온 생존자들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성한 사람이 없다.

경제대국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사회의 불운은 가장 부도덕한 정치인들이 불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것이 물질적 풍요와 유착되어 가치관의 혼란을 부르고, 무수한 정신적 희생자들을 낳았다는 점일 것이다.

좋은
교육을 받고 멀쩡한 외양을 하고 풍요와 쾌락을 구가하는 듯 보이는 사람들도 많은 사연과 어두운 상처를 가지고 있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이 직업인 신문기자를 수십년 하다보니 노동문제, 여성-청소년 문제같이 표면화되고 공식화(?)된 사회문제 외에도 숨은 지뢰밭-사람마다 가슴 속에 크고 작은 한(恨)과 분노, 상처를 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 잘못 다치면 큰일 난다. 찬사로 가득찬 인터뷰기사를 쓰고도 "첼로가 어려워
콘트라베이스로 바꿨다"는 연주가의 말을 그대로 썼다가 평생 원수가 되고 소송까지 당한 기자도 있다. 그의 상처를 모르고 건드린 것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이성복 시인의 시구를 서문에 인용한 이봉희 교수의 이 책은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는 한국인의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선을 끈다.

저자의 생각은 이렇다. 오랫동안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억압하는데 길들여져왔지만, 감정이란 그렇게 쉽게 눌러 막을 수 없다. 안전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해소하지 않으면 슬픔 분노 두려움 같은 미해결의 에너지는 몸속에 다른 형태로 저장되어 예기치 못했던 모습으로 불시에 돌출된다.

원인불명의 만성 질병이나 정서적인 문제가 그것이다. 너나할 것 없이 위태로운데 아픔을 느끼거나 인정하는대신 잘 숨기고 방어하며 살아간다. 몸이 아픈건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마음이 아프면 마치 인격적 결함이나 사회적 실패자인양 수치심까지 느낀다. 그래서 치유가 필요하다.

문학을 이용한 마음의 건강회복법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자존의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내 마음을 만지다'라는 타이틀 처럼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는데서 시작된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우리에게 약간 생소한 '문학을 이용한 마음의 건강회복법'을 담았다. 정신의학분야에서
음악치료, 미술치료, 연극치료가 소개되어 있고 유학파 전공자들도 활동하고 있지만 문학작품을 읽고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치유법이 일반인 대상의 책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다.

문학전공교수(영문학)로 문학치료사 자격을 정식으로 취득한 저자의 실전경험과 풍부한
컨텐츠가 설득력을 발휘한다. 여기서 문학이란 시나 소설 뿐 아니라 신문기사, 노래가사, 연극이나 드라마 대본, 영화시나리오, 일기등 모든 텍스트를 말한다.

즉 문학치료사는 정신적, 육체적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텍스트를 제시해주고 거기에 대한 반응이 있을 때 연관된 다른 것을 읽히는 식으로 접근한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아프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그것을
스스로 발견하고 치유하게 하는 것이다. 문학치료의 방법으로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심리가 가장 가까운 장르인 시가 많이 이용된다.

이봉희 교수는 셰익스피어 전공자이다. 그는 많은 학생들이 문학작품 읽기를 통해 상처를 털어놓고 치유를 경험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2004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가서 전미문학치료학회를 통해서 새롭게
공부를 시작, 3년만에 공인문학치료사와 저널치료사 자격을 취득한 뒤 '한국 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격'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이지만 저자의 진정한 무기는 자격증이 아니다.

그는 시종일관 아주 쉬운 말로 우리가 어디선가 습득해서 부지중에 금과옥조로 삼고 있을법한
현대의 신화들을 한방에 날려버린다.

예를들어 성과(성적)제일주의를 무색케 하는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기대와 칭찬의 불편한 역효과를 다룬 '칭찬은 고래를 병들게 한다' 진실보다는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는 사회에서 상처받는 피해자를 다룬 '그 누구도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왜곡된 자기방어를 성찰한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더 공격적이다'같은 글들이 그렇다.

'칭찬은 고래를 병들게 한다'

저자는 부드럽고 겸손하게 글을 전개해, 읽는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위로해준다. 강한 주장을 담은 글을 이렇게 맑고 유연하게 쓰는 것은 상담자로서의 대단한 내공의 증거다.

"건강하지 못한 수치심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느끼며 실패자로 생각하고, 결국은 자신을 병들게 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아프면 아프다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아픔은 살아있음의 증거입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받기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라고 간언한다. 스스로 마음이 아픈 것을 인정할 때 묵은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나 세상과 화해할 수 있다.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 나, 너, 사회와 화해해야한다며 책의 내용도 나와의 화해(왜 나는 아프다고 말하지 못할까), 너와의 화해(소중한 사람이 더 아프게 한다), 사회와의 화해(살아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의 3장으로 나누어 42편의 글을 실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불행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자신이 겪어보지도 못한 고통을 이해하는 척, 뭔가 해주려고 나서지 말고 말없이 옆에 있어주기, 도움을 청할 때 도와주기를 권한다.

이봉희 교수의 모토도 '이해하려 하지 마라. 다만 함께 하자. 도우려 하지 마라. 다만 사랑하자'라고 한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함께 해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칭찬을 퍼붓는 일도 고래를 춤추게 할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부담을 주는 일이다.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파악하고 잘 알고 세상사에 대처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는 할수 있어'라는 과장된 자기 최면과 허상속에서 자신의 기대치를 잔뜩 높여 설정해놓고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거나 자기 학대의 오류 속에서 첨벙대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을 스스로 파악하는 내면의 힘, 환상에서 깨어나 한계를 받아들이는 치유의 과정을 이 책은 안내해 주고 있다.

생각속의 집
이봉희 지음
1만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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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경제 2011-12-23 10:16  각질이 돼버린…묻어둔 상처 지금 말하세요
 헤럴드 생생 뉴스
2011-12-23 08:02  문학치료전문가 이봉희 교수, “아프다고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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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공인문학치료전문가 이봉희 교수가 펴낸 에세이 ‘내 마음을 만지다’
     

 


선생님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살면서 현재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좋고 진실하며 아름다운지 발견해야 되네. 뒤돌아보면 경쟁심만 생기지. 한데 나이는 경쟁할 만한 문제가 아니거든."

 

선생님은 숨을 내쉬고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공중에 퍼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실, 내 안에는 모든 나이가 있네. 난 3살이기도 하고, 5살이기도 하고, 37살이기도 하고, 50살이기도 해. 그 세월들을 다 거쳐왔으니까, 그때가 어떤지 알지. 어린애가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어린애인 게 즐거워. 또 현명한 노인이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현명한 어른인 것이 기쁘네. 어떤 나이 든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고! 지금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이가 다 내 안에 있어. 이해가 되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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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터질듯 피어오르는 날이면 쉰이 넘은 나이에도 어김없이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때론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5월의 설렘은 청년들의 특권인 것만 같아서 가을 중턱에 들어선 나이에 느끼는 그런 [철] 모르는 감정을 숨겨야 할 것만 같은 부끄러운 맘이 들기까지 합니다. 자라오면서, 그리고 세상 속 세월을 거치면서 가장 흔히 하는 말 중 하나는 철이 들어야 한다는 말, 철이 없다는 말, 철 모르는 어린아이 같다는 말.. 이 아닐까 합니다. 인생도 계절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사철이 나뉘어 있기 때문일까요. 다만 계절은 돌아오지만 인생은 겨울이 지나도 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만 다르기에 한편 서글프고, 또 한편으로 그렇기에 우리의 하루하루가 더더욱 의미 있고 소중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리교수처럼 우리 안에 내 인생의 사계절을 모두 품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순수함을 잃지 않는 어린아이의 맘을 간직하고, 그 눈에 호기심이 별처럼 반짝이며 때로는 젊은 청년의 열정으로 내가 뿌리 내린 곳보다 더 아름답고 높고 깊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정신이 아직도 살아 숨 쉬며, 그러면서도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잘 제어하고 나의 옮길 발걸음과 내 몸과 맘을 앉혀놓을 자리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진 노년이 함께 내 안에 공존하고 있다면 그보다 아름다운 인생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문득 감상주의적 환상과 순수함을 혼돈하거나,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찬 이기적 호기심과 심리적 불안정을 모험심으로 착각하거나, 때로는 쌓아 놓은 정보와 지식이 지혜인 양 허세를 부리거나, 세월과 성숙함이 저절로 비례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연륜을 내세워 허망한 자기 자랑과 주장만 화석처럼 굳어지는 그런 노년이 될까 봐 무척 두렵습니다.

젊음이란 의지와 상상력이며 활력이 넘치는 감성이며, 삶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이라는 사무엘 울먼의 유명한 글, [젊음]에서의 말도 결국은 우리 속에 살아 공존하는 모든 계절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울만은 60살 노인이든 16살 청소년이든 우리들의 가슴 한 복판에는 무선 전신국이 있다고 합니다. 그 무선전신국이 인간과 저 높은 초월자에게서 오는 아름다움, 희망, 환호, 용기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한 우리는 주름과 관계없이 청년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청년이라도 이미 수 십 년을 더 늙어버린 주름투성이 노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 합니다.

 

오늘 무너지도록 부신 햇살아래서 내 영혼의 안테나를 저 5월의 하늘, 그 가슴 한복판을 향해 높이 올리며 소리쳐 말하렵니다. [내 나이를 물어 무엇하랴. 나는 5월에 있다](피천득)라고... [이봉희- 덴버 중앙일보 문학칼럼 중에서 2005]

 

2007. 6. 1.

Vincent van Gogh- Cherry trees in full bl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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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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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겹의 마음을 가졌기에 그 나무가 까닭 없이 불편하였습니까. 

멀리로 멀리로 지나쳐가며 혼자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 스스로에게 그 나무 탓을 했나 봅니다.

"내가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다 말하기 불편하였을까......

그러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여 나무를 멀리서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멀리서 멀리서 보면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그동안 눈이 부셔서 직시하기 불편했을까요?  그리고 그 여러 겹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합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아서라고, 하나의 꽃빛을 피우기엔 너무 많은 소망과 열정이 있어

켜켜히 마음을 피우고 있는 그 나무가 참 외로웠겠구나.......... 깨달았다 합니다.

 

그러다 또 생각합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아 외로웠을 것이지만 그 나무는 어쩌면 외로운 줄로 몰랐을 거라고.

그렇게 고고하게 홀로 제 열정을 따라 여러 꽃빛을 피우고 있는 그 나무는 외로운 줄도 몰랐을 거라고.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서 또 알았다 합니다. 

그 오랜 시간 당신은 그 나무를 떠나지도 못하고 멀리서 멀리서 계속 지켜보았군요.

외롭게 피워 올린 꽃잎들 다 흩어져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에야

그 나무 이제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려 겹 꽃잎 같은 마음 다 흩날아가버리고 맨 몸으로 선 그 시간에야

비로소 당신은 그의 그늘에 앉았습니다.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진 나무라 생각하던 그 나무 아래, 당신은 그제야 다가가 앉았습니다.

심심한 얼굴을 한 나무 곁에.

 

알 수 없네요.

그 나무가 심심한 얼굴을 하고 나서야 당신은 편하게 그에게 다가간 것인지

다가가 보니 외로운 줄도 몰랐을 듯,  열심히 겹겹이 피워내는 마음을 가진 그도 어쩌면 참 심심한 것을 알았다는 것인지.

심심하고 외로워서 더 여러겹 꽃빛을 피워 제 맘을 감싸 입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인지.

그리고 당신은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이제, 어둠이 머지않아 내려올 소리를.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다 하십니다.

그 몇 겹의 색깔을 읽어 보셨을까요. 

까닭 없이 부담스러워 멀리서 멀리서 떠나지도 못하고 지켜만 본 당신,

당신도 그 나무처럼 외로웠나요?
어둠이 내려오는 그 시간에야 그를 통해 알게 된 당신의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저녁 당신이 찾아와 앉았던 그 나무, 여려 겹 꽃잎 다 흩어 보낸 그 나무를  생각할 때마다

수천의 꽃잎이 비명도 없이 떨어져 날아와 내 마음에 쌓입니다.

바람도 불어주지 않는데

바람도 불어주지 않는데.

 

우리는 각자의 언어로 말한다

- 소통의 한계

 

딸아이가 오래전 외국에서 외롭게 공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나는 도심의 늑대 같아. 혼자서 인간들 속에 살고 있는…….”

오늘 말로 하는 대화는 딱 한 마디 했어. 내 목소리를 잊을 지경이야.”

우리는 종종 대화를 포기하고 차라리 외로움을 택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소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고장 난 피아노 건반처럼 제 음을 전달할 수 없거나 서로 불협화음을 내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이 상대에게 낯선 나라의 말처럼 소통되지 않는다는 좌절 때문입니다. 누군가와의 소통이 더없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통 수단은 대부분 언어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참 불완전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그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각자 타인 앞에서 해석하고 번역해야 하는 하나의 언어로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자신만의 사전으로 상대의 말을 해석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언어 이상의 의사소통 수단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습니다.

 

나는 조용조용 설명한다. 당신은

고함치는 말로 듣는다. 당신은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한다. 나는

오래된 상처가 들추어짐을 느낀다.

 ....... 

나는 비둘기다. 당신은

매로 보인다. 당신은

올리브 가지를 내민다. 나는

가시를 느낀다.

R,  맥거프, <당신과 나> 중에서

 

상대의 말과 그 속내는 똑같을까? 

우리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전화 통화를 하고, 또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그게 짧은 글이든 목소리든 언어는 그 사람을 여지없이 드러내준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너무 수식어가 화려해서 읽으면서 살얼음을 딛듯 아슬아슬한 경우도 있습니다. 대체 이 사람은 언제부터 나를 얼마나 안다고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걸까? 한두 번 보았다고 마치 나를 다 알기라도 한 듯 온갖 아름다운 말로 나를 포장하는데, 왜 그러는 걸까? 미사여구로 상대를 잔뜩 포장해놓고는 내 마음과 똑같았어요. 마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시는 것 같았어요라는 말로 상대에게 되돌려주기도 합니다. 그런 진심이 의심스런 말을 들을 때면 빌려 입은 옷을 입고 무대에 선 것처럼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혼자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혼자 토라져서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맘대로 투사해 상대를 영웅처럼 바라보다가 결국 실망했다며 평가절하하고 떠나가 버립니다. 때로는 자신의 일방적인 감정을 소화하지도 못한 채 분풀이를 하는 언어도 있습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이모티콘을 사용하고, 말끝마다 웃음으로 포장해도 자신의 날 감정은 그 포장 속에서도 진한 냄새를 풍겨옵니다.

 

그래서일까요. 한 사람의 말투는 그 사람의 인격뿐 아니라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꾸며도 그 뒤의 이기적인 계산을, 아무리 친절히 말해도 그 뒤의 적대감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웃으며 말해도 그 뒤의 두려움을,  아무리 당당하게 말해도 그 뒤의 패배감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잔인하게 말해도 그 뒤의 사랑은,  아무리 무뚝뚝하게 말해도 그 뒤의 관심은 묻어둘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숨겨둔 사랑과 관심보다는 당장 내 뇌리에 깊숙이 파고드는 뾰족한 언어의 칼에 얼마나 아파하는지요. 하지만 그 안의 사랑과 관심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상처 입고 되돌아가기에 너무 늦어버립니다.

 

나도 내가 하는 말을 모른다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언어 습관을 객관적으로 안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는 곧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안다는 자체가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내가 다르다는 사실은 종종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이 괴리는 자신의 사진을 볼 때의 첫 느낌, 즉 낯설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잘 나타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남들에게는 사진 속의 내가 그들이 보는 실제의 나와 달라 보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시각의 괴리만이 아닙니다.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처음으로 방송극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내 목소리가 어찌나 낯설던지 어린 마음에 그냥 밖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는 창문 밖에서 간이 오그라드는 심정으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던 때였습니다. 엄마가 곁에 없어도 아이가 엄마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나는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녹음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녹음이 끝난 후 들어본 목소리는 너무나 끔찍하고 낯선 목소리여서 무척이나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 낯설음이 주는 당혹감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남편과 아이는 그게 내 목소리라고 인정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타인이 알고 있는 나와 내가 알고 있는 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진실한 나의 모습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과 목소리, 성격 그리고 습관화된 나의 말투들이 타인이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소통의 한계 앞에서 한 번 더 자신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동명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내 책상 위의 천사로 잘 알려진 작가 쟈넷 프레임(Janet Frame)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이야기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글로 써서 찢어버리지 않고 친구에게 전달한 이야기다. 들어주어서 고맙다고, 내 마음의 귀에 분별력 있는 열쇠 구멍을 내주어서 고맙다고 그 보상으로 해준 이야기다.” 그렇기에 시인이며 작가인 로오드(Audre Lorde)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상처 받아 멍들고 오해받을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언어화하고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말처럼 대화를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고장 난 피아노 건반처럼 화음을 낼 수 없는 존재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고 오해를 불러오더라도 언어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소통입니다. -중략-

 

상대의 말에 자주 상처 받지는 않나요? 이런 언어의 한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소통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 친구와 했던 약속이 기억납니다. 우리가 혹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면 그건 진심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임을 서로 굳게 믿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로 인해 무척 맘이 상한 오늘, 나는 신뢰를 갖기로 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그 사람 자신도 모르는 언어습관이나 언어의 한계 때문에 생긴 것이지, 그 사람의 본심이거나 의도는 아니라고 믿으며, 그가 준 상처와 언어의 불완전함을 포용하기로 합니다. 언어가 나아갈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해결책은 대화의 단절이 아니라 바로 상대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C)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중에서

 

 

 

https://www.journaltherapy.org/3632- "여러개의 언어를 알았으면 했지"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다

- 무언의 소통

 

 

“내 안에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는 상징주의를 이야기할 때  즐겨 인용하는 중세시대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표현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표현하지 않은 말들은 어디에 숨었을까요?

우리는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고 말할까요? 또, 남이 내게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는 있을까요?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무(nothing)는 없음, 아무것도 아님, 혹은 결핍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불리는 ‘그 무엇(something called nothing)’을 뜻합니다. 《햄릿》, 《리어왕》, 《오셀로》 등 이 모든 비극에서 주인공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nothing’의 말이 단순한 없음이나 무의미를 뜻하는 부정어가 아니라 보다 능동적인 긍정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무엇(something)’을 소통하지 못하는 데서 극의 비극성이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리어왕은 세 딸들에게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럼 땅을 나눠주겠다고 제안한 것이지요. 땅을 물려받고 싶은 욕심에 두 딸들은 전혀 마음에도 없는 거창하기만 한 거짓 사랑을 고백합니다. 반면 셋째 딸 코오딜리어는 진정으로 아버지 리어왕을 사랑하는 딸입니다. 두 언니의 사랑 고백을 듣고 있는 코오딜리어는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만일 ‘사랑’이란 말이 언니들이 말하는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라면, 자신의 사랑을 언니들이 사용한 것과 같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코오딜리어는 아버지의 신뢰와 기대를 저버리고 “너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느냐”는 기대에 부푼 왕의 질문에 “할 말이 없다(Nothing)”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숨은 코오딜리어의 진정한 사랑의 고백을 알아차릴 수 없는 리어왕은 실망과 배반감으로 셋째 딸을 추방하고 맙니다. 그때부터 리어왕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뒤늦게야 겉으로 드러난 언어 뒤에 숨은 무언의 진실에 하나씩 눈 떠가지만 이미 때늦은 깨달음일 뿐입니다.

 

침묵도 하나의 언어다

 

“고백을 해야 할까?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처음 읽게 되었을 때 내가 당황했다는 것을……. 나는 처음에는 그가 말하는 침묵이 그 무엇의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능동적인 그 무엇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프랑스의 형이상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The World of Silence》를 읽고 한 말입니다. 피카르트는 말합니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된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인 것이다”라고. 피카르트가 말하는 침묵의 깊은 철학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일상 언어에 숨어 있는 말들, 침묵한 의미들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무언(침묵)도 엄연한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머어윈의 시처럼 그 언어들은 “어둠 속에 깨어서 우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 연필 안에

말들이 웅크리고 있다 한번도

쓰인 적 없는

말해진 적 없는

배운 적 없는 말들이

 

숨어 있다

 

어둠, 그 어둠 속에

깨어서

우리를 듣고 있다

- 머어윈, <쓰이지 않은 말> 중에서

 

우리가 하는 말 중에는 의미 없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말이지만 동시에 소음입니다. 소음이 ‘의미 없는 목소리(meaningless voice)’라면, 침묵의 언어는 ‘목소리가 없는 의미(voiceless meaning)’입니다. 그 언어가 목소리를 갖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unspoken) 침묵의 언어, 또는 말할 수 없어서(unspeakable) 하지 못하는 침묵도 있습니다. 또 스스로도 내 마음 깊은 곳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말 속에 그 말과는 다른 진정한 나의 마음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프로이드는 말의 실수도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글을 쓰다보면 내가 의도하지 않은 단어를 쓸 때가 있습니다.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 우연인 것 같은 실수 속에서 나의 무의식이 건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나는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을까?

 

독일의 한 해석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는 퇴근하면서 아내에게 “머리가 아파”라고 하소연합니다. 이때 아내가 “그래요?” 하고 진통제만 가져다준다면 아내는 남편의 말 뒤에서 침묵하고 있는 진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입니다. 어쩌면 남편도 그 말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때 남편이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머리가 아파”가 아니라 “당신의 위로가 필요해. 나를 좀 돌봐줘”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만일 아내가 남편의 말 뒤에 숨어 있는 침묵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면 아내는 ‘남편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남편의 욕구를 채워줄 것입니다. “당신 오늘도 밖에서 일하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요”라며 다른 날보다 더 특별한 위로를 해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편도 자신이 정말 위로받고 싶어서 그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르면서도 아내가 그저 진통제를 내밀 때 뭔가 허전하고 마음이 허전하겠지요. 괜히 답답하겠지요.)

 

어린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직장을 다니는 엄마가 있었습니다. 낮 동안에도 수시로 아이가 궁금하고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친 몸으로 퇴근해 친정에 가면 어린아이가 드라마에서처럼 달려 나오며 “엄마아아~~” 하고 매달리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는 엄마를 반기기는커녕 언제부턴가 “스티커!” 하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얼굴은 외면한 채 말입니다. 스티커를 사가지 못하는 날이면 아이는 이내 토라져서 작은 일로도 투정을 부리거나 떼를 썼습니다. 스티커에 대한 끈질긴 집착은 오랫동안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외국에 출장을 갔다 오면서도 엄마는 스티커를 사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단순히 스티커에만 집착했던 것일까요?

 

스티커를 달라는 아이의 투정은 바로 “엄마, 하루 종일 어디 갔다 왔어? 엄마가 날 두고 가버렸을까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 내면의 그런 두려움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그 당시 자신이 좋아하는 스티커가 엄마의 ‘사랑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합니다. 어쩌면 스티커는 부재의 시간 동안 엄마가 자신을 기억했다는 증거품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주면 부모들은 아. 그렇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아이에게 반응할까요? 아마 대부분 아이에게 눈높이로 앉아서 부드럽게 말할지 모릅니다. “00야, 네가 원하는 건 스티커가 아니란다”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해주어도 아이에게는 소용없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스티커를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스티커만 준다면 사랑을 갈망하는 아이의 욕구는 영원히 충족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엄마는 아이가 말한 스티커와 함께 표현되지 못한 말의 의미인 사랑을 듬뿍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불안 속에는 엄마의 부재 뿐 아니라 무엇보다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fear of the unknown), 즉 엄마가 대체 자신을 두고 어디에 가 있는지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이 더 큰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주말에 자신이 낮에 무엇을 하는지 직장에 데려가 보여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 00이가 할머니댁에 가 있는 동안 엄마는 지금 우리가 가는 이 길로 차 타고 학교에 가는 거야.... 여기가 엄마가 학생들 가르치는 교실이야....“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가 안 보이는 동안 불안하지 않고 ‘엄마가 지금쯤 어디 있겠지’ 하고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퇴근길에 스티커는 물론 사랑도 열심히 ‘표현’해주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와 함께 15분 정도 뒹굴며 놀아주고 꼭 안아주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느 때부터인가 아이는 그렇게 집착하던 스티커를 달라고 조르지 않았습니다.

 

 

나의 속마음은 누가 알아줄까?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도 그 욕구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다른 곳에 그 욕구를 전이시켜 거짓 욕망에 집착합니다. 배가 부르면서도, 비만으로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초콜릿이나 군것질을 달고 살거나, 술이나 게임 등에 집착하는 경우입니다. 그 순간 초콜릿을 먹지 말라거나 게임을 하지 말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 사람이 진정 원하는 것을 탐구하도록 도와주고 그것을 먼저 해결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짓 욕망에 대한 강박증은 사라집니다. 이런 강박증은 때로 사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보이기도 합니다.

 

친정어머니는 우리딸을 유달리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지나치셔서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전화를 하셔서는 “오늘은 애한테 뭐 먹였니?”라고 물어보셨습니다. 불고기를 해주었다고 하면 “야채를 먹여야지!” 하고 화를 내셨습니다. 다음 날 야채 반찬을 해주었다고 하면 “고기를 먹여야지!” 하고 또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무슨 대답을 해도 만족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어머니가 말만 시작하면 다 듣기도 전에 벌써 화부터 났습니다. 때로는 전화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안톤 체홉의 <비탄>이라는 단편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책의 한 구절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인공 포타포브는 이제는 너무 늙어 일하기 어려운 마부입니다. 그는 얼마 전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가 늙어서 말〔馬〕을 제대로 몰지 못하자 마차에 탄 젊은 청년들이 노인에게 심한 모욕을 주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욕적인 행동에 분노를 느끼지 않고 다만 소리로만 듣습니다. 그리고는 “허허, 참 유쾌한 젊은이들이야” 하고 웃어버립니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말을 듣기만 한다는 그 장면은 소설의 주제와 무관하게 “아하!” 하며 머릿속을 강타했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어머니의 말을 일일이 들리는 대로 해석해서 감정적으로 반응했을까? 그냥 단순히 소리로만 들으면 되는데.’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은 고기를 먹여도, 야채를 먹여도, 그 무엇을 해도 성에 차지 않을 만큼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의 표현임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네 딸을 사랑하는지 알지?’라는 (어머니 자신도 모르는) 어머니의 소리 없는 진심이 무시당하자 어머니는 나름대로 욕구불만이 쌓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심을 알아달라고 점점 더 심하게 잔소리를 하신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어머니의 간섭과 잔소리에도 나는 평화로워졌습니다. 그렇게밖에는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어머니가 안쓰럽기도 하고, 또 아이처럼 귀엽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알았어, 알았어요!! 울 엄마, 손녀 사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라며 웃으며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게 찾아온 평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의 간섭과 잔소리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의 진정한 마음을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간섭과 잔소리로밖에는 표현하지 못한 자신의 진정한 사랑과 욕구를 알아주자 어머니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변화로 어머니도 변하셨던 것입니다.

 

내 속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날이면 새삼 삶이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융(Jung)은 “고독은 내 곁에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자신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의사소통 할 수 없을 때 온다”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배려할 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말 너머 말없이 침묵하는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서로의 욕구를 읽어주고 들어준다면 그것이 진정한 공감과 경청이며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훨씬 더 따뜻해질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중에서

Rene Magritte-le ciel meurtrier(the Murderous Sky)-Nat'l Gallery of Art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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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노래가 곡조를 이기지 못한다 한다.   
곡조가 사랑의 노래를 가두고 있다는 말일까?  사랑이 곡조에 갇혀있다. 그 사랑을 표현할 곡조가 없다는 뜻이기도하고  표현되지 못한 채 갇혀진 사랑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노래가 되는 사랑.  님의 침묵에 나도 침묵의 노래밖에는 부를 수 없는 것일까? 


나에게  "님"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나를 떠난 그 무엇을(누구를) 보내지 아니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