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cent van gogh - shoes



무거운 것이 제 한몸이라고
제 한 몸 같은
이 한 세상이라고

구두는
무거운 구두는
나의 친구는

가벼워지기 위해
걸었다

쓰러질 때까지
걸었다.

[구두 4 - 박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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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족부 2020 가족소통참여사업 - 글쓰기문학치료 특강: 내 마음을 만지다

@숲속작은도서관 글헤는 숲 (9/23/2020)

 

 

 

너무나 아름다운 숲속에 작은 집--

도서관이라기보다는 가족같은 작은 공동체. 걸음마하는 어린아기 같은 풋풋한 곳

악화된 코로나19로 인해 참여인원을 15명으로 제한하고 멀리 떨어져 앉아서 마스크를 쓰고 함께 했다.

찾아가는 길 마지막 길을 지나쳐서 빙빙 막히고 막히는 좁은 편도 길을 돌아서 찾아갔다.

순수한 참여자분들의 마스크 너무 눈빛에 그만 또 2시간 강의인데 3시간을 해주고....

그래도 꼼짝않고 집중해서 들어주신 분들이 고맙다.

그리곤 녹초가 되어 집에 오면서 또 나를 쥐어박는다. .

이놈의 불치병.. 문학치료가 뭐라고 이리 알리고 싶어서 매번 무리를 하는가.

아쉬운 점은 아직 미숙하여 강의하는 사람을 위한 생수 한 병 준비를 못해주어서 너무너무 힘들었다.

물을 내가 가지고 갔어야 했나보다.

그래도 순수한 열정을 가진 분들을 만나는 것은 늘 감사하고 행복하다...

희망이 주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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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못난 것들아 - 박노해]

 

한번씩 서울을 다녀오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왜 이리 못 났는가, 못 났는가,
십 년째 제대로 된 책 하나 못 내고
침묵 속에 잊혀져가며 나이만 들어가는
무슨 인생이 이런가
무슨 운명이 이런가

해 저무는 마을 길을 홀로 걸어가는데
감나무 집 할머니가 반갑게 부르신다
굵고 성한 감은 자녀들에게 택배 부치고
비툴하고 못난 감을 깎아 곶감 줄에 매달면서
이거라도 가져가라고 한 바가지 내미신다
언덕받이 부녀회장님댁을 지나가는데
이번에 새끼 친 일곱 마리 강아지 중에
잘생긴 녀석들은 손주들에게 나누어 주고
절름거리는 녀석을 안고 있다가
가져가 길러보라고 선물하신다

내 한 손에는 잘고 비툴한 못난이 감들
품 안에는 절름발이 못난 강아지
어둑한 고갯길을 걸어가는 못난 시인
산굽이 길가엔 못난 쑥부쟁이꽃

못난이들의 동행 길이 한심하고 서러워서
울먹하니 발길을 멈추고 밭둑에 주저앉으니
물씬 풍겨오는 붉은 감의 향내
내 얼굴을 핥아대는 강아지의 젖내
바람에 흩날리는 쑥부쟁이꽃 향기

그래, 이 모든 것이 선물이다
비교할 수 없는 삶의 감사한 선물이다

나는 이 감들이 어떻게 자라왔는지를 안다
이 강아지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안다
이 쑥부쟁이가, 할머니가, 논과 밭이,
오솔길이 어떻게 지켜져 왔는지를 안다
잘나고 이쁜 거야 누구라도 좋아하지만
자신의 결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건 위대한 사람만이 할 수 있으니

이 어둔 밤길의 나의 못난 것들아
못난 시인의 못난 인연들아

 

- 출처: 박노해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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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s by bhlee091920

문득 멈춰서 빛금 친 햇살에게 물어본다......
서로가 그저 필요로 할 뿐이고 그리고 그 뿐인 그런 관계가 이 세상 관계인 것을

왜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워할까?

저 나비도 꽃도 그저 생존을 위해 서로 주고 받는 관계일 뿐일까? 

그렇게 우주의 생명은 존속되고 있는 것일까? 


무심한 듯 나를 스쳐가는 착한 바람과 햇살.....
팔랑이는 작은 나비, 돌담 틈을 비집고 찬란히 피어난 꽃들....
조용히 견디며 존재하는 것들.....
머지않아 저 나비도, 풀섶의 작은 꽃들도 또 묵묵히 사라지겠지 하는 생각에

순간 이 짧은 계절이 더욱 소중하고 감사하다.


그래, 그걸로 족하다... 그걸로 족하다...

중얼거리며 산을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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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hotos by bhlee 102419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이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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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21 03:52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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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에게 부침-권대웅

언제나 지쳐서 돌아오면 가을이었다.
세상은,
여름 내내 나를 물에 빠뜨리다가
그냥 아무 정거장에나 툭 던져놓고
저 혼자 훌쩍 떠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나를 보고 빨갛게 웃던 맨드라미
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단지 붉은 잇몸 미소만으로도 다 안다는
그 침묵의 그늘 아래
며칠쯤 푹 잠들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일어서는 길에
빈혈이 일어날 만큼 파란 하늘은 너무 멀리 있고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 2017.09.11 14:50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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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9.11 14:53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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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d here only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Sting과 Toots Thielemans 의 Shape of My Heart.
투츠 틸레망의 하모니카 연주 너무너무 좋아!!
스팅과도 어쩜 이리 잘 어울릴까.

 

https://youtu.be/IJvfMnnDxp4
Toots Thielemans, The Shadow of Your Smile

 

 

...

[I wonder if everybody feels the same.]

 

가슴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들 속엔 늘 알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슬픔? 그게 슬픔일까?

내가 좋아하는 캐더린 맨스필드(K. Mansfield)의 소설 “카나리아(The Canary)”에서 주인공이 이제는 그의 곁을 떠난 카나리아 새의 노래속에서 들었던 이름 붙일 수 없는 ‘슬픔’—그것과 같은 것인지도모른다. 그래서 난 이 소설을 대학교 1학년 때 읽고 너무 공감해서 소설의 그 부분을 그냥 외워버렸다(나도 모르게 저절로.... )

맨스필드가 말했지.
인생에는 슬픈 무엇이 존재한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고. 그게 뭔지 말하기 너무 어려운 그 무엇이. 그건 질병, 가난, 죽음 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슬픔과 다른 그 무엇이라고. 하지만 저 아래 깊은, 깊은 내면에 우리 존재의 일부로 마치 호흡처럼 존재한다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나 자신을 고단하게 만들어도 잠시 멈춰서면 그 순간 그 ‘슬픔’은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끔 궁금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느낄지. 아무도 알 수 없죠.

하지만 정말 놀랍지 않나요? 그의[카나리아 새의] 그 사랑스럽고 즐거운 작은 노래 속에서 내가 들은 것이 바로 그것ㅡ슬픔?ㅡ아 그게 뭐지? ㅡ그것이었다는 게.. “ (맨스필드)
ㅡㅡㅡㅡㅡㅡ

아무리 열심히 지치도록 살아도 멈추는 순간 마주치는 그 무엇!!! 그게 무엇일까??

나도 맨스필드처럼 평생 혼자 중얼거렸지. I wonder if everybody feels the same....하고.

그리고 열심히 그걸 알고 있는, 그래서 일생 그걸 함께 느끼고 내게 말해주는 “카나리아”를 찾아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ㅡㅡㅡ

All the same, without being morbid, and giving way to—to memories and so on, I must confess that there does seem to me something sad in life. It is hard to say what it is. I don't mean the sorrow that we all know, like illness and poverty and death. No, it is something different. It is there, deep down, deep down, part of one, like one's breathing. However hard I work and tire myself I have only to stop to know it is there, waiting. I often wonder if everybody feels the same. One can never know. But isn't it extraordinary that under his sweet, joyful little singing it was just this—sadness ?—Ah, what is it ?—that I heard.(from The Canary by K. Mansfield)

| 2020.09.09 23:06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안녕하세요 저널치료지도사가 되고싶습니다 양성과정이 있으실지 어떻게 해야할지 문의드려요
Journal Therapy | 2020.09.11 02:31 신고 | PERMALINK | EDIT/DEL
안녕하세요.
journaltherapy@hanmail.net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이곳에 개인정보는 올리지 말아주시기를 권고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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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사랑이 뭐기에 허다한 죄를 덮는 이런 엄청난 능력이 있을까?

 

그리고 인간은 과연 그런 사랑을 할 능력이 있을까?

우리는 가끔 착각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고 온정을 베풀고 있다고.
하지만 그 모든 것 뒤에 어쩔 수 없이 자리하고 있는 나의 자랑과 나의 의 앞에 절망하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늘  진실이 무엇인지 알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20여 년 전에 여객선 카페리호 침물 사건이 있었다.  섬과 육지의 한 도시를 오가는 배에 휴가철이었던가, 명절이었던가?  정원초과로 손님들을 태우고 가다 전복된 사건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의 실종, 사망하였고 사고의 전말을 알기 위해서 선장의 행방을 찾았으나 선장은 발견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선장도 실종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거의 모든 시신이 발견되기까지 선장은 시신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신문기사는 점점 선장에 대한 추측 기사에서 비난의 기사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모든 사건이 그렇듯 이 사건에 대한 의문과 분노를 쏟아내고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이 필요했고 그건 선장이었다.  심지어 신문에는 선장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있다는 기사까지 버젓이 실리더니 결국 그는 배를 버리고 도망간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기사가 실리기 까지 했다.

2주 후 쯤 거센 물결때문에 지연되었던 배의 인양작업이 시작되고 침몰되었던 배가 배다 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선실 한 구석에서 그렇게 찾던 선장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러자 일제히 언론은 선장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는 승객들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배에 남아 키를 붙잡고 사투를 벌였으며 탈출도 하지 않은 채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신문기사의 객관성에 대해 다시 한 번 회의를 갖게 되었다.  며칠전 비난의 글을 올린 신문이 이제는 칭찬의 글을 올리면서 아무 사과기사 한 줄 없었다. 

선장의 시신이 발견되자 드디어 선장의 유족들이 입을 열었다. "우리 남편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절대 배를 두고 혼자 도망갈 사람이 아이었어요..." 

왜 유족들은 온갖 비난의 화살을 맞을 때 아무 말을 하지 못했을까? 왜 이제야 , 시신이 발견된 후에야, 입을 열어 항변할 수 있었을까?

그건 내게 무척 충격적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진실"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들 "자신이 원하는" 진실에 맞는 데이터만 무의식적으로 수집하는 "가설검증바이어스"에 걸린 탓인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가설검증바이어스'라는 말도, 많은 인간의 심리를 파해치는 과학적 용어/판단들처럼, 이미 증상으로 나타난 인간들의 행태와 모습을 통해서 그것을 분석하고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바로 인간들의 모습에서 이미 그러한 만연된 현상을 발견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가설인 것이다. )

나도 언젠가부터 누군가 나를 오해하면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건 오해의 근거를 내가 제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살면서 깨달은 바에 의하면 그 누구도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정의감에서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자신에게 도전을 한 경우 그 순간부터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또는 사람들은 진실을 알아도 그것때문에 상대에 대한 호의적 행동을 하거나 그사람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이 손을 드는 쪽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익한 쪽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쪽이다.  또는 자신을 마치 신처럼 여겨주고, 우러러보며 존경하고 복종해주는 쪽이다.  우러러보고 떠받드는 사람들도 어쩌면 힘의 논리에 의해서, 자신들의 유익함을 위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나약한 인간의 당연한 본능적 선택인지 모른다.  어린시절부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왜 독재가 존재하는 지, 왜 자신을 존중해주고 친절히 대해주는 사람보다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 힘을 과시하는 사람들, 명령하는 사람들에게 모두들 더 다가가서 무리를 이루는지 보아왔다.

그렇다고  그들(나를 포함한)을 비난하려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다. 새록새록 깨닫고 확인하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는 어떤 객관성에 의해 남을 판단하는 능력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인간은 그럴만한 "인격적 실력자"가 아무도 없다. 
만일 선장의 가족들이 한참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을 때 "우리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 아들은.. 우리 아빠는..."이라고 항변했다면 누가 들어주었을까? 

그 누가 그 말을 기사로 실어주었을까?  소위 그들이 말하는 "객관적 증거"인 시신을 본 후에야 실어줄 수 있다는 말일까? 그럼 그 시신이 나오기도 전에 한 두개의 정황으로 유추하여 기사를 쓴, 그래서 그 가족을 지옥 속에 몰아 넣은 신문기사는 무엇을, 과연 어떤 객관적 증거를  근거로 한 것일까?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갑자기 머리 속에 "실종된 진실"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진정 실종된 것, 그건 시신이 아니라 진실이었다는 생각. 


만일 그 선장의 시신이 영영 물결에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그 시신과 함게 선장에 대한 모든 진실도 함께 실종되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추측기사만 더 "진실"이라는 쪽으로 무게를 싣고 사람들의 머리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아니...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얼마 후 까맣게 잊혀졌을 것이다 (사그러든 집단 분노와 함께?).  다만 희생자들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인양되지 못한 채 가라 앉아 사라져간 얼마나 많은 "실종된 진실"들이 있을까? 그리고 그 실종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공교롭게도 그 사건 얼마 후 비슷한 일이 또 보도되었다. 한때 월북했다고 여겨진  S여고 교사의 사건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다. 그 교사는 자진월북이 아니라 납북된 것이었다. 그리고 신혼 10개월 후 생이별을 하고 사회에서 매장되어 살아온 그 부인이 18년간의 고통끝에 우울증으로 (시신이나 다름 없는 뼈만 남은 몸으로) 투신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다.  이것도 실종되었던 진실의 "시신"이 뒤늦게 인양된 사건이다. 또 한명의 희생자를 낳고. 이 테러에 대해서는 왜 아무말이 없는 것일까?

과연 나는 얼마만큼 한 인간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한 인간을 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그건 또 다른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신은 우리에게 타인에 대한 판단보다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와 사랑을, 용서와 인애를 강조하는 것인지 모른다. 복수는 신의 몫이라면서.... 

타인의 행동의 배후까지 이해하기를 바란다면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바보이거나 아직도 감상주의적이고 꿈을 쫓는 이상주의자거나 혹은 골치 아픈 이상한 사람이라 여겨지는 세상에서 누군가가 겉에 드러난 행동으로 오해와 비난을 받을 수는 흔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나의 행동으로 인해  한 인격을 "정의 내린다"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그건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신의 영역에 속한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인간을 판단하고 재판할 수 있는 신은 정죄의 언어로 오시지 않고 "용서"의 언어로, 사랑과 관용으로 오셨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하자 그 무리를 향해 그는 "누구든지 저 여자를 돌로 칠 수 있는 자가 먼저 쳐라." 하시고는 돌로 칠 자격을 가진 유일한 자인 그분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또,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생각해본다.
그여자는 5명의 남편과 살았다.  그 남편이 남의 여자의 남편이었던 사람인지 모두 그냥 싱글이던 남자였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의 남자를 빼앗긴 여자라면 그 수가성의 여자를 비난하고 돌던지는 것을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남편과는 무관한 한 여자, 그 여자가 5명의 남편과 살았다고 그녀를 정죄하고 손가락질하고 근처에도 못오게 하는 것은 과연 "정의"의 분노일 뿐일까?

그런데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 여자를 "재판"하고 "비난"하고 "정죄"할 모든 권리를 가진 사람이엇다.  그가 그 여자를 찾아서 일부러 그 시간에 그 마을을 지나가셨다.   그는 그여자에게 한마디도 네가 어떻게 살았는가 보라..고 훈계한 적도 없었다. 더구나 "나를 보라. 내가 얼마나 거룩한가. 나를 닮으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  그 교태를 버리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  아니 안타깝다며, 너를 정말 위해서 하는 소리라며 충고하지도 않았다--네 처지를 보라고, 왜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고 사람들을 피해 이 더운 정오시간에 혼자서 이 먼 길을 물을 길러 와야하는 지 네 외로운 처지를 보라고, 그게 다 네 탓이 아니냐고, 반성하고 돌아보라고 훈계하지도 않았다.  (오전 시원한 시간엔 마을 여인들이 물을 길러 오는 시간이므로 그여자는 그 시간에 올 수가 없었다.)  다만 그는 "알고 있었다."   왜 모든 마을 사람을 피해 이 뜨거운 정오 먼길을 걸어 혼자 외롭게 우물물을 길러 와야 했는지.   왜 이 여인이 5번씩이나 남편을 갈아야 했는지. (아니 남편들 중 몇은 그들이 먼저 이 여인을 버리고  떠났을 지 누가 아는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는 것과 그것을 상대에게 설명하고 재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여기서 인간의 한계가 드러난다.

그 사람은 그 여인의 그럴 수 밖에 없는 한계와 나약함을 "알았기에" 그녀를, 그 겉에 드러난 행동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아 주었다.  우리가 상담이니, 심리학이니, 여러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지식을 동원하는 건 상대를 정의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정죄하고 추궁하고 충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행동의 근거가 되는 아픔/병을 "바로 이해하고" 끌어안아주고 덮어주고 사랑해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물론 전문적 약물치료를 포함한 의학적 치료를 말하는게 아니다.)

중요한 건 겉에 드러난 행동 이전의 너의 상처야, 너의 목마름이야, 너의 영적 가난함이야... 라고 그는 수가성여인의 소위 부도덕함과 "방탕함"의 배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주었을 뿐이다.  목마르지 않을 물이 있다고 말해주었던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캐묻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진정 무엇이 필요한 지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고 한심하다며, 이 여자는 아직  더 고통을 당해봐야해.. 라며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인간은 아무리 거룩해도.. 아니 거룩할 수록 또 다른 죄을 범하게 된다. 상대 앞에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죄.
그게 바로... 사랑이 없고, 어쩌면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행하고, 실패하고 나아졌는줄 알았는데 아직도 아니라고 하나님은 또 시련과 절망을 통해 성찰하고 깨닫게 하시는 지도 모른다.

두 말씀 앞에 가만히 또 나를 돌아본다. 

"아무도 판단하지 말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양심상 깨끗할 지라도 주 앞에 죄 없다 못하리라."

"네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네 몸을 친구를 위하여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You are NOTHING)"

buck | 2008.08.11 15:24 | PERMALINK | EDIT/DEL | REPLY
선생님, 예전에 제가 쓴 글인데 여기 답글로 달고 싶어집니다.

사람은 자신의 역경을 통해 성숙해 질 수 있다.
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말은
가장 힘든 일을 겪은 자가 가장 성숙한 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며
그렇기에
그렇게 바닥에서 딩굴지 않아도
돼지 우리에서 주염을 먹지 않아도
성숙해 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가졌다고 생각할 때(그것이 무엇이든)
계산기를 두드리며 너는 몇 점이라고 다른 이를 평가한다.
가정형편, 학벌, 옷, 차, 집... 그리고 외모, 등등.

하지만 역겨운, 그보다 더 역겨운, 너무나 역겨운 것은
자신 만큼 고난을 받아보지 않아서
-그 이면엔 자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겠지-
너가 하는 말은 우습다는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다.

즉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고는
자신이 가장 비참한, 역겨운, 참기 힘든 자라고 말하고는
그게 자랑이 되는 것이다.
코메디 중에 상 코메디 인 것이다.
자기의 못남이 자랑이라니.
누가 누가 못났나 경연하는 것도 아니고.

그건 자신의 못남을 앞에 방패막이로 내어 걸고
그 누구도 내 못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라. 난 이미 내 못남을 말했으니..
라고 떳떳하게 자신을 자랑하려는 것이다.

내 안에 그것을 발견한 적이 있었고
또 항시 내 안에 꽈리를 틀고 있을 것이기에
가장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bhlee | 2008.08.19 22:43 | PERMALINK | EDIT/DEL
오랜만에 전화 고마웠어. 어서 모든 일 다 잘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렴. 널 수업중 만나지도 벌써 20년이 넘었구나. 참 오랜세월 변함없는 존경스런 제자들 중 잊을 수 없는 한 사람... 그게 너야. 지금 내가 좀 힘들어서 긴 말 할 수 없어서 간단히 답글 달아. 다시 편지할 게. 아름답고 지혜로운 wife에게도 안부 전해주렴.
Journal Therapy | 2011.02.16 01:37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소설가 김영하(43·사진)씨가 지난달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고(故) 최고은작가의 사인에 대한 반박 글을 올렸다.

 현재 미국에 체류중인 김씨는 14일 오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은이가 굶어 죽었다고 당연히 믿고 있다는데 놀랐다”며 “아마 최초로 보도된 신문의 선정적 기사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녀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의연하고 당당하게 자기 삶을 꾸려갔다고 들었다”며 “직접 사인은 영양실조가 아니라 갑상선기능항진증과 그 합병증으로 인한 발작이라고 고은이의 마지막을 수습한 친구들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진실을 외면한 채 고은이를 아사로 몰고 가면서 가까웠던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겪고있다”며 “살아서도 별로 도움이 못되는 선생이었는데 가고 나서도 욕을 보여 미안하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고(故) 최고은 작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시절 김씨의 수업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석기기자sgtoh@kwnews.co.kr(강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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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밝혀진 이야기들이 얼마나 진실일까? 많은 오해를 받으면 살아 본 경험이 있어서 늘 그런생각 했어.
그런데 가끔 사람들은 정말 진실에 관심이 있을까? 그런 생각도 해. 늘 자신들이 원하는 진실만 원하니까.
그래서 오해를 받아도 결국 침묵하고 말아. 어차피 믿지 않을 거니까. 관심도 없으니까.
내게 진심으로 관심있는 사람들은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믿어주니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이야기해도 안 믿더라고. 그래서 깨달았지.
기자.. 신문.. 그 고마운 매체도 한계가 있지. TV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외국에서는 어려서부터 매체읽기를 위한 교육이 있다던데. 어떻게 편집되고 어떻게 카메라 앵글이 보도자의 주관적 시각에 의해서 달라지고 그것이 시청자를 지배하는지. 어떻게 무비판적으로 받아서는 안되는지. 미디어문맹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이제는 글자를 못읽는 문맹만이 문맹이 아닌지 오래된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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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의 시 - 이형기]

 

밤엔 나무도 잠이 든다.
잠든 나무의 고른 숨결소리
자거라 자거라 하고 자장가를 부른다.

...

가슴에 흐르는 한 줄기 실개천
그 낭랑한 물소리 따라 띄워 보낸 종이배
누구의 손길인가, 내 이마를 짚어주는.

누구의 말씀인가
자거라 자거라 나를 잠재우는.

뉘우침이여.
돌베개를 베고 누운 뉘우침이여.

- 1971년 시집 <돌베개의 시> (문예사)

——


돌베개 베고 누운 불안하고 외롭고 지친 광야의 밤
가슴에 소리 없이 남모르게 흐르는 실개천...

그런 내 이마 짚어주는 손길.
자거라 자거라 나를 잠재우는 말씀.

다 안다, 다 안다.... 아무 말없는 손길과
쉬어라쉬어라 나무라지도 않는 말씀이
참된 뉘우침을 주시는 군요.
참된 깨달음을 주시는 군요.

30대에야 알게 된 이형기선생님(1933~2005) 시가 너무 좋아서 참 많은 시를 외웠던 거 같다.

보통 시집을 사면 몇개의 시 외에는 가슴을 울리는 것이 드물었는데 이형기의 시집은 하나 하나 거의 모든 시가 가슴에 젖어 왔다.
그리고 참 이상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참 많은 오해와 고통을 받던 긴 시절.. 그의  시는 늘 내게 위로가 되었다.

말년에 암과 투쟁하실 때의 이형기선생의 시는 그 전의 시와 또 다른 목소리였지. 이제 보니 겨우 72에 돌아가셨구나.

(우리 아버지와 이름도, 모습도 참 많이 비슷한 분... 그래서 더 맘에 들었을까??)

이상하게 요즘 또 다시
그 시절 외던 시 구절이 떠오른다.

 

  ”아무 말도 말고 다 가져가거라.

   오늘의 내 몫은 우수 한 짐

   나머지는 모두 너희들 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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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편지 - 김남조]

 

편지를 쓰게 해다오.

이날의 할말을 마치고

늙도록 거르지 않는

독백의 연습도 마친다음

날마다 한 구절씩

깊은 밤에 편지를 쓰게 해다오

밤기도에 이슬 내리는 적멸을,

촛불에 풀리는 나직이 습한 樂曲들을

겨울 枕上(침상)에 적시이게 해다오

새벽을 낳으면서 죽어가는 밤들을

가슴저려 가슴저려 사랑하게 해다오

 

세월이 깊을수록

삶의 달갑고 절실함도 더해

 젊어선 가슴으로 소리내고

이 시절 골수에서 말하게 되는 걸

고쳐 못 쓸 유언처럼

기록하게 해다오 

 

날마다 사랑함은

날마다 죽는 일임을

이 또한 적어 두게 해다오

눈오는 날엔 눈밭에 섞여

바람 부는 날엔 바람결에 실려

땅 끝까지 돌아서 오는

영혼의 밤 외출도

후련히 털어놓게 해다오

 

어느 날 밤은

나의 편지도 끝 날이 되겠거니

가장 먼 별 하나의 빛남으로

종지부를 찍게 해다오

 

photo by bhlee

 

 

 

 

| 2011.03.28 16:08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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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30 17:02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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