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대교 남단 카페에서 문득 창밖을 내다봅니다. 한쪽은 한강을 건너려는 차들이 답답하게 막혀서 좀처럼 움직이지 못합니다. 건너편 차선은 거의 비어 차들이 시원하게 달리고 있습니다. 신호가 푸르게 바뀌어도 잘 움직이지 못합니다. 한강을 건너려는 차들이 이 길 하나뿐 아니라 다른 길에서 다 함께 몰리니까요. 얼마나 답답할까요. 빨리 집(가려던 목적지)에 가고 싶을 텐데요.

꼭 내 삶에서 내 길만 이렇게 빨간 불이 켜지고 막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밤 늦은 시간 다들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하나 둘 정류장을 떠나는데 내가 기다리는 버스만 오지 않는다고 느끼듯이 말입니다. 그럴 땐 곁에서 어둠을 밝혀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가로등도 위로가 되지 않지요.

 

그런데 깜박 잊고 있었네요. 건너편 차들도 저쪽 강너머에서 다리를 건너기 전 지금 나처럼 한참을 막혀서 기다렸다는 것을요. 누군가가 지금의 파란 신호를 만나기 전 얼마나 많은 붉은 신호 앞에서 기다리고 인내하며 통과해야 했는지 자꾸 잊습니다. 늘 현재의 상황만 보고 ‘나만’ 뒤쳐졌다고, ‘내 길만’ 막힌다고, ‘내 삶만’ 힘들다고, 그렇다고 생각하지요. 마치 상대가 내가 누려야 할 무언가를 대신 가져간 듯이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절망하지요.

갑자기 박탈감에 대한 생각이 납니다. 그런 호소를 하는 분들과 대화할 때 자주 비유를 들게 됩니다. 절망하지 마시라고요. 박탈감을 느낀다면, 억울하다고 느낄 때면 비유를 들어줍니다.
운명? 아니면 내 삶에 복을 주는 포도원 지기는 세상이 아는 그런 주인이 아닙니다. 그렇게 가난하지 않습니다. 100개면 나와 다른 일군에게 50씩 나눠줘야 한다고,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그에게 80을 주면 내 거 30을 빼앗아서 그 일군에게 준 거라고요. 그래서 나는 겨우 30만 받는 거라고요 생각하실 수 있죠. 그게 세상의 셈법이니까요. 그런데 아세요. 그에게 100을 줄지라도 내 것은 그게 얼마이든 그대로 있습니다. 포도원지기는 겨우 100개밖에 가진 그런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 다 주어도 결코 부족함이 없어요.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공평하며 모든 일군 각자에게 줄 것을 주시며 남의 것을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그런 "째째한" 분도 아닙니다. 넘치도록 더 주십니다.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남의 것으로, 세상의 것으로는 아니 그 무엇으로도 세상은 내 근본적인 복을 채울 수 없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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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신호등 앞, 자꾸 막히는 삶의 길을 생각하다가 엉뚱한 생각이 또 듭니다. 저 막힌 길 위에 당당히 서 있는 트럭이 전하는 말 때문일까요? ㅡ "행복 충전소"!!

젊었을 때는 50분이면 올 집을 주차장처럼 막힌 고속도로에서, 때로는 앞이 안 보이는 안갯속, 눈보라, 폭우 속에서 졸음과 싸우며 3시간 걸려 집에 오는 적이 많았지요. 그런데 그때 차에 “갇혀서” 아무 방해 받지 않고 맘껏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내 마음 과 생각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 허가 받은 나만을 위한 차 안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감사한 기회였는지요. 빨리 도달하려는 열정, 목적지와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도 중요하겠죠. 하지만 비록 원한 것이 아닌 붉은 신호등, 엉뚱한 날씨 등 가로막는 일을 마주하는 그 과정도 내 삶이고 나의 의미있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내가 좋은 기회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도 배웠죠.

하지만 그걸 알아도 너무 지치거나 피곤한 날은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피곤한 오늘 생각합니다. 무조건 심리적 성숙만 강요하지 말자고요.  (원래 욕심이 없어서 인지 '네 안의 거인을 깨워라'와 같은 멋진 말이, 이겨내라는 수많은 훈계와 경구들이 때로는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저 막힌 길 위의 내 삶, 그것이 내 무능력도, 내 잘못도, 외면당한 내 운명도 아니라고.  낡은 차처럼 자꾸 주저앉는 것도 내 게으름이나 무기력이 아니라 그동안 참 긴 길을 달려와서 이제는 좀 힘이 달리는구나, 지쳐있구나라고. 그러니 당황하지 말라고요. 슬퍼하지도 말라고 나를 다독입니다.
내가 몸이 강건하면 마음도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니 나를, 내 몸도 친절히 따듯이 받아줘야지 하고 혼자 말해줍니다.  

 

오래된 농담-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 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photo by bhlee 041526

 
<비현실의 현실성>


사람들이 인생은 꿈과 같다고 할 때 현실의 비현실성 때문에,
아니 어쩌면 비현실의 현실성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고 오래 전 막연히 생각했었다.
이제보니 아마 인생도 꿈처럼 혼자서 겪으며 가는 길이기에,
그 누구도 내 꿈을 대신 꾸어줄 수 없기에,
같은 꿈을 공유할 수도, 그 곳에 함께 할 수도 없기에 그런가 보다.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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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KS: 그림 같아요~

-->Bonghee Lee: 감사합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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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 꿈을 대신 꿀 수도, 공유할 수도, 함께 할 수도 없지만, 제가 선생님 꿈에 보조출연자로나마 나오기를 바랍니다^^

물에 비친 하늘과 나무네요, 너무 멋진 사진입니다!

-->Bonghee Lee: 보조가 아니라 메인으로 와도 돼. 함께 늙어가도록 긴세월 한결같은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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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Ahn: 사진이 좋습니다. 화가의 그림같네요.

-->Bonghee Lee: 교수님 잘 지내시죠? 미국에 계신가요? 사모님과 두 분 늘 강령하시길 빕니다.

--> CKAhn: 네 감사합니다. 미국에 있어요.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를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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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 비스듬히여.
시인은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라고 말한다.
가만히 읽어보면 마치 비스듬히 하고 그 이름을 불러주며 말하는 것 같다.
비스듬히는 이제 어딘가에 기대는 기울어진 모습의 특징을 묘사하는 부사가 아니다.
'다른 비스듬히'라고 말하면서 시의 후반에서 더욱 확실해지지만
그런 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라고 명명하고 호명해주는 것이다.
다정하게 불러주는 것이다. 괜차나 그렇게 서로 기대는 거야.
 
맑기도 흐리기도 한 공기에 기대는 존재, 당연히 맑기도 흐리기도 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시인의 다정한 호명에 의해 아름다운 이름과 정체성이 된다. 
 
"공기에 기대다"ㅡ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가.
공기에라도 기대며 살아가는 우리가 당연하고 당당해진다. 

나, 비스듬히도 오늘 흐린 공기에 편안히 기댄다. 
이젠 흐림 속에서도 그 너머 여전히 존재하는 맑음과 빛을 알기에
공기의 흐림도, '나의 흐림'도 의미있고 소중하다는 걸 믿으며,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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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hlee4426



  


작은 일에서 의미를 찾을 줄 아는 사람, 작은 것에서 사랑을 찾아내고 느끼는 사람은 참 아름답다. 
그래서 난 ER가 더더욱 사랑스럽고 소중하고 귀하다. 그 앤 늘 나를 깨어있게 해준다.
우리는 친구다. 작은 것들과의 교감, 감동--그것도 없이 삭막하고 외로워 어찌 산단 말인가?
어제 밤 우리는 카드 하나를 놓고도 그렇게 행복했는데...

애린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지.
엄마 난 왜 엄마가 없을 때 우는지 알겠어. 무서워서만이 아냐. 바로 이것 때문이었어.
그 카드의 구절이다:
Mom, when I think how you've always been there, the moments you've filled with your love and your care, the way you encouraged me to try my best, I look back and know just how much I've been bl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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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게 언제 쓴 일기인지 날짜가 없다. 막막하다. 왜 나는 일기에 날짜 혹은 연도가 없는 날짜만 있을가??? 그냥  끄적이는게, 그 독백이 유일한 대화이며 나의 숨쉬는 일이었기에?
어떤 시구절을 찾다가 언제나처럼 읽게된 길고 긴 일기모음. 어디서 가져다가 모아 놓은 것인 듯하다. 1998년-2000년 쯤? 내 딸이 중학교 들어간 이후니까.  내가 천안으로 출근하면서 학교에서 천안으로 이사를 오라는게 조건이어서 나는 연구실에서 하루라도 자야만 했었다. 무엇보다 일이 많아서 (외국인총장이 나에게 늘 추가로 준 업무 --학교책자를 영어로 만드는 일이라든가 여러 잡다한 영어번역 --내가 잘 모르는 신학관련 업무까지--외국에서 공부한 신학부교수들도 쟁쟁했건만 내가 맘이 편했을까?--으로 나는 늘 11시 넘어 귀가했었다.  그리고 새벽에 또 5시면 일어나 출근.. 고속도록 운전...  그래서 나중엔 일주일에 한번은 --새벽교직원 기도모임-이 있는 날은 그나마도 잠을 잘 수 없어서 할수 없이 하루는 연구실 소파에서 잤었지. 그때엔 어린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애린이는 혼자서 집에 있어야했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평일엔 엄마가 반겨주는 일이 없는 외롭고도 외로운 어린시절을 보낸 우리 불쌍한 딸. 
나는 울딸에게 평생 죄인이다. 상처만 준...  지금도 그렇겠지.....
그런데도 울딸은 늘 나를 이렇게 감동을 주었다.  항상.

일기에 써놓은 이 이야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네. 너무 고맙다. 고맙고도 고마운 우리 애린이... 

 

미안해 지금도 늘...  그리고 고마워
내 딸로 와줘서 너무 미안하고 또 너무 고마워.

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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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무감각한 뿌리들을 흔들어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듯이 지켜주었지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어주고
희미한 생명을 마른 뿌리로 먹여주었지

-T. S. 엘리엇, <황무지>중에서 / bhlee역
(from "The Burial of the Dead," The Waste Land- T. S. Eliot)

 

지난주 올 들어 첫 꽃을 보았습니다캠퍼스 길가에 노란 수선화 두 송이가 수줍은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그 곁에는 어느새 푸르러진 풀 섶 속에 작은 제비꽃이 숨어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보아주는 이 있든 없든 말없이 성실히 피어있는 작은 꽃과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나도  '살아서 살아있고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슴을 흔드는 4월을 시인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합니다. 4월이 시작되면 누구나 한 번쯤 중얼거려 보는  이 시는 T. S. 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의 첫 구절입니다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생명수 같은 봄비가 무감각하던 겨울뿌리를 흔들어 망각의 잠에서 깨워주는데 왜 잔인한 달인 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현대인을 메마른 불모의 대지 황무지에 사는 살아있는 죽은 자(the living dead)”라고 말합니다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것은 참된 사랑에 접근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인식하고 감동할 수 있는 감각들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그 의식의 무감각함을 흔들어 일깨우면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봄이 때로는 진실의 태양빛처럼 너무 부시고 아려서 그만 눈을 감고 싶어 집니다. 4월이 잔인하다든 것은 이렇게 살아있으나 죽은 자처럼(little life) 잠든 채 살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의식의 죽음그 비극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그들에게 생명과 의식을 일깨우는 4월은 잔인하기만 합니다우리 모두 엘리엇의 또 다른 시 구절처럼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어 낼 수 없는(Human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존재들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4월입니다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어김없이 푸르러 오는 생명의 계절가끔 가던 길 멈추고 물어봅니다. "나는 살기 위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c) 2004 이봉희, 덴버 중앙일보 연재 문학칼럼 중에서

장욱진- 밤과 노인


[원시(遠視)-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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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직 젊은 사람들이 늙었다 말하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듣는다.
내 나이 이별이란
멀어지는 일이 아니라
머얼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들을  눈이 시리도록 기억하는 일이다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것들을 그 어디쯤엔가 새겨놓고 더듬어보는 일이다.
머얼리서 바라다 보던 그 얼굴들을
식어가는 가슴에 꼬옥 품고 감사하는 일이다.

지상의 꽃 - 오세영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설령 그것이 죄가 된다 해도
이제 어찌 할 수 없구나.
아침마다 우짖는 산새도,
저녁마다 바자니는 다람쥐도
지금은 눈에 없어.
나는 다만 하늘을 우러르는 한 마리
슬픈 짐승,
낮에는 햇빛으로 환하게 눈멀고
밤에는 등불로 활활 타오를 뿐이다.
지상은
어느덧 가을,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어이 할꺼나,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영원한 그리움이 끝내
한 떨기 불길로 타오르다 사라지는
지상의 꽃.


--
어찌할 거나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들 하늘을 가릴 수 있을까?


상처가 더 꽃이다 - 유안진

어린 매화가 꽃 피느라 한창이고
사백 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섰다
등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으로 보이는가
백 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 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 맡아 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꽃인 것을

3월의 바람 속에 - 이해인

  필까 말까
  아직도 망설이는 꽃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열까 말까 망설이며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쌀쌀하고도 어여쁜 3월의 바람
  바람과 함께
  나도 다시 일어서야지
  앞으로 나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