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해를 감수하는 용기’ 어느 때부터인가 나의 모토 중 하나가 된 이 생각ㅡ오해를 감수하는 용기!
살다보면 우리 모두 내게 이유 없이 도전해 오는 수많은 사람들, 견디기 힘든 관계, 오해받는 관계나 인생의 문제들과 부딪칠 때가 많습니다. 차라리 내게 이유라도 말해주면 좋은데 뒤에서 비난을 하고, 그 말이 돌아서 나에게 오느 경우가 더 많지요. 처음에는 누구나 자동적으로 나가 무슨 문제였을까 내 잘못이 무엇이었나 먼저 이모저모 생각하고 반성합니다. 무척 힘든 시간입니다. 하지만 내 스스로 그런 비난을 받을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많지요. 누군가가 아무 이유 없이 나에게 화를 내거나 괴롭힌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 그 사람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는 아님을 배우게 됩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데는 그 사람만의 이유, 내면의 상처나 미해결과제, 하지 못한 말들이 있기 때문인입니다. 그게 나의 어떤 면으로 인해 인해 촉발된 것입니다. 나에 대한 도전과 싸움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 문제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지지 않습니다. 내가 친절하게 다가가면 내가 그렇게 싫다고 표현해도 그런다고 비난합니다. 내가 피하면 무시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관계는 내가 노력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분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시훈 시인의 시가 생각납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며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다. 나의 눈과 귀와 코와 입이 모두 바깥을 향해 달려 있다는 거다! 나는 한 번도 내 안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그 캄캄한 어둠의 깊이를. 나는 내 안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온갖 추악한 언어의 난동을. 내 안에 고여 있는 물의 지독한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건 천만다행이건만. 나는 내 안을 향해 말하지 못한다. 오, 가엾다고.
부디 나로부터 나를 구원하소서. - 이시훈, "나로부터 나를"
오래 전 영화 <황금연못>에는 은퇴한 노교수 노먼과 십 대 소년 빌리와의 갈등이 나옵니다. 빌리는 괴팍한 할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할머니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난 할아버지가 싫어요. 나만 보면 항상 소리만 지르잖아요.”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그게 아니야. 할아버지는 너에게 소리 지르시는 게 아니라 세상에 대고 소리를 지르시는 거란다.” 할아버지의 분노의 대상, 소리 지르고 있는 대상이 ‘나’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할머니의 말은 빌리에게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하는 새로운 관점으로 다가옵니다. 이 새로운 관점은 애매한 고통으로 인해 시달리는 자책감과 피해의식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도와줍니다. 그뿐 아니라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불편함, 그로 인한 분노, 그리고 방어심리로 부터 나를 지켜주기고 하지요. 더 나아가 실체가 없는 세상 대신, 눈에 보이는 누군가에게 그 분노를 전이시키는 사람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도 가해자이기 이전에 피해자이며, 강하기 이전에 상처 입은 연약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나 역시 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되지요.
저는 여기서 감시 생각하게 됩니다. 만일 내가 그 할머니라면 빌리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아니, 어쩌면 할아버지는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거란다."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카페] 중에서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아픔을 피하려다 웃음까지 잃어버렸다 - 고통의 재인식
어느 여름날, 난(蘭) 하나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꽃을 피우던 난이 겨울이 되자 어느새 가지가 노랗게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만 손을 놓아버렸나 생각하면서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겨울이 지나도록 볕 좋은 창 앞에 열심히 놓아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어버린 가지를 달고 있는 뿌리가 새 가지를 내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원래 피어오른 줄기가 말라버리자 어느새 뿌리는 그 곁으로 하나의 새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나봅니다. 말라버렸다고 줄기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뿌리 채 뽑아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작은 꽃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죽어가는 가지에도 새 가지를 내고 꽃을 피우는 뿌리의 생명력이 있다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니 문득 이 시가 떠올랐습니다.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 줄 때도 사실은 참 아픈 거래 - 이해인 <꽃이 필 때> 중에서
살아 있으니 아픈 것이다 아픔은 선인장의 가시처럼 생명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박경리 씨의 말이 생각납니다. 20년간 《토지》를 쓰면서 참 힘든 일도, 고통스런 기억도 많지 않았냐는 기자의 물음에 박경리 씨는 망설임 없이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산다는 게 고통 아닌가요? 인간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고통을 겪지 않나요? 내 생각엔 생명이 있다는 자체가, 산다는 게 고통인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생명은 앓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앓음 알음’이라는 것, 앓아가면서 알아가는 여행길이라는 것을.
괴테는 “모든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라고 말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색채들은 빛의 고통에 의해 존재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뿐 아니라 자연 속에서도 아픔 없이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도 나는 사는 동안 뜨겁게 타오르는 노을과 시린 새벽빛과 소나기 뒤의 그 장엄한 하늘빛을 보면서 한 번도 빛의 고통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묘한 빛깔의 많은 꽃들을 보며 감탄만 했지, 그것을 피워내는 아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때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면서 책상 앞에 “난 이미 죽었는데 왜 아직도 아픈 걸까?”라고 써 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프지 않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자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인간도 우주도 그 모든 생명은 아픔과 함께 하는 것인데 우리는 아픔으로부터 피하고만 싶어 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죽은 자처럼 살고자 모든 느낌을 차단합니다. 마취제를 맞으면 아픔이야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 마취된 시간 동안 죽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부분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던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의식이 또렷해서 의사들의 메스소리가 들리는데, 자신의 몸에서 아무 통증이 느껴지지 않자 자신이 온전히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고 합니다. 마취제는 통증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약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마취 상태로 있다가는 다시는 깨어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통증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다가 의식마저 무감각하게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김수영 시인의 <사령(死靈)> 중 한 구절을 중얼거려봅니다.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 김수영, <사령> 중에서
아픔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순간, 다시 살아나는 그 순간에 느껴지는 고통은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살아 있다는 감사한 깨우침입니다. 아픔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이건 사는 게 아니라고, 이건 삶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픔은 오히려 살아 있다고, “깨어서” 살고 싶다고 외치는 온몸의 아우성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고통스런 기억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방어기제는 고통뿐 아니라 생의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들까지 함께 차단합니다. 그럼으로써 타인에 대한 깊은 친밀감과 사랑, 신뢰감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방어기제는 우리의 깊은 내면을 감옥으로 만들어 우리의 참자아를 고립시킵니다. 딸아이가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때 쓴 가슴 아픈 고백처럼 말입니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다가 이제 난 기쁨마저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렸어. 내가 진 거야.”
아픔을 아파하지 마세요
출처: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photo by bhlee(Seattle)
다시 올까? 이 순간이, 지금처럼 너와 내 외로운 마음이 "순하게" 겹쳐진 그 순간의 행복감, 지극함이 다시 읽힌다. 하지만 이어서 나도 시인처럼 그 뒤에 그림자가 따라온다.
그냥 왜 지극히 아름다운 것에 감동받을 때 알 수 없는 슬픔이 따라올까? 어려서부터 난 이것이 의문이었다. 슬픔이 반드시 아픔은 아님도....
이제는 슬픔 뒤에 따라오는 아름다운 여명, 그 노을을 본다.
갑자기... 우리 손녀가 생각난다. 4돌이 채 안된 손녀가 서울 우리집에 왔었다. 첫 한국방문.
====================== 해묵은 사진 한장으로 긴 추억들, 다시 오지 않는 그 시간들이 다시 떠오른다.
[댓글] *ㄴㄷㄴㅁ: 이미 그 순간이 악세비치님의 순간에 남아있는듯한데요? -->acsebichi 2009-04-17 01:01:14 [답글] 무언가 서로 연결된 고리가 있다,,끝없이 이리저리 이어지는. *라디오 2009-04-17 23:16:23 [댓글] 저도 고리 하나 달고 갑니다, 계속 생각하시라고..^^; *jubilate 2009-04-19 20:57:27 [답글] 멀리 가도 좋은 걸요. 얘기 나눌 수 있어서..^^ 제가 얼마 전 인터넷을 이용하다 우연히 악세비치님에 관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이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조심스러웠는데..솔직하기로 했어요.^^
'전과 같을 수 있을까?' 그렇죠.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말도 결국 같은 물음 아닐까요, 오후님!
============ 나는 이 온라인 모임이 있던 때가 참 자주 그립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멀리서 빈다... 오늘은 귀국에 딱 맞춰 의뢰가 들어온 이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특강/워크숍을 위해 내가 찍었던 사진이 하나 떠올라서 이 시를 같이 읽어보기로 했다. (문학치료자료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멀리서 멀리로 떠나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저 바라보는 나뭇잎 다 떨군 나무의 심정이, 이리저리 가시처럼 찢긴 그 매마른 손짓이 가슴에 남아있었던 사진이었기 때문일까?
보내는 나무의 모습처럼 망망대해를 향해 떠나는 배도 그리 행복한 유람선 같지는 않아서일까?
길 포말로 남은 저 떠나는 배의 마음은 무엇일까? 두려움일까 미련일까 아쉬움일까 회한일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상처투성이 마음일까 혹은 미안함일까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못남일까. 그 모두일까.......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Kafka and the traveling doll by Jordi Sierra i Fabra Illustrator: (C) Isabel Torner
-------------------- 카프카가 40살 때의 어느날 베를린의 스티글리츠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한 소녀가 자신이 아끼는 인형을 잃어버리고 눈이 붓도록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소녀와 함께 인형을 찾아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카프카는 그 소녀에게 다음날 다시 공원에서 만나서 함께 인형을 찾아보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카프카는 그후 날마다 인형이 보낸 편지를 써서 읽어주었다. 두 사람이 만날 때마다 카프카는 그 인형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험과 대화를 세밀하게 써서 읽어주곤 했고 소녀는 그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마침내 그 인형이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오게 될 때 카프카는 인형을 하나 새로 사서 소녀에게 주었다. 그 인형을 보자 소녀는 "이 인형은 내 인형과 전혀 닮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카프카는 소녀에게 다시 인형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 편지에는 "여행을 하면서 나는 많이 변했어요."라고 적혀있었다. 소녀는 그 인형을 소중히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그 다음 해) 카프카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이제 어른이 된 소녀는 그 인형 속에 감춰져 있던 편지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 작은 편지에는 카프카의 자필 서명이 적혀있었다. 카프카는 그녀에게 이렇게 글을 남겼다: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쉽게 잃을 수 있어. 하지만 결국 사랑은 다른 형태로 반드시 네게 돌아온단다." -------------------- <내가 상실한, 잃어버린 사랑은 내게 어떤 다른 모습, 어떤 다른 사랑으로 돌아왔을까?>
카프카가 전해 준 이 말은 사랑과 (상실의) 슬픔이 어떻게 연결되고 순환하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다.
삶에서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 혹은 장소든 우리의 애정의 대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변화를 겪고 상실될 수 있다. 하지만 애착관계가 상실된다고 해서 슬픔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상실이 슬픔은 우리의 기억속에서 사랑했던 행복한 추억으로, 또는 감사함으로 변할 수 있다. 또는 새로운 형태인 타인과 세상에 대한 관심과 돌봄과 유대감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돌아오기도 한다. 결국 사랑은 상실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이다.
삶에서 수 없이 경험하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는 (여러 의미의) 이별과 상실의 슬픔이 '사랑의 상실'은 아니다.
내가 베푼/나눈 사랑은 또 다른 형태로 반드시 내게 돌아온다. 어쩌면 상실의 슬픔과 아픈 경험이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고 더 깊은/넓은 사랑으로 내게 다시 돌아오니까.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For who makes you different from anyone else? What do you have that you did not receive? And if you did receive it, why do you boast as though you did not?
교수로서, 치료자로서 그리고 삶의 모든 관계와 장에서 내가 갈등을 겪을 때마다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말씀 중 하나인데 요즘 내가 어떤 사람을 보면서 또 다시 이 구절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가진 좋은 것, 그것에 대한 나의 확신이 타인에게 강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요는 무례함이라는 것을. 내가 깨달은 좋은 것, 내가 누리는 좋은 것을 알려주고 싶은 뜨거운 열정 그 깊은 아래에 그것을 전해도 깨닫지 못하거나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은근한 비난과 경멸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를. 그 사람은 늘 자기 말을 못알아 듣는다는 듯이 한숨을 쉰다. 아니면 웃는다. 답답하다는 뜻이다.
나의 확신과 열정때문에 상대에 대한 사랑과 관심 보다는 먼저 누린자의 교만함이 도사린 것은 아닌지. 정말 배려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랑하는 것인가. 상대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는 그 맘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 마음이 사실은 인내하는 귀찮음에 대한 포장과 합리화는 아닐지....
그래서 늘 우리는 내가 이것을 깨닫기 전 처음 섰던 자리, 그리고 지금에 이르는 과정에서 경험한 절망과 회의와 좌절, 포기하고 싶던 마음 등을 기억하고 상대를 바라보려 노력해야하지 않을까. 진정한 배려는 사람들의 수많은 다양성과 각자의 형편을 존중하고 끝까지 진정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을 주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줄 수 있는 것 밖에는 도움을 주지 못하며) 그 사람이 성장하기까지 기다려주고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인데....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아니하며....."
무례함의 근거는 우월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리 문 앞에서 간절한 맘으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시는 그 분을 기억한다.
041119/09242007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르상티망(ressentiment) 르상티망은 라틴어의 접두사 "다시(re)", 그리고 "감정을 느낌(sentiment)"에서 온 말로 영어로는 resentment(원한)를 뜻하는 프랑스어이다. 르상티망은 철학(특히 실존주의 철학자들)과 심리학이 관심을 가졌던 개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르상티망을 인간의 본성 중 하나로 약자(힘없는 입장의 사람)가 강한자에 대해 갖는 질투, 원한, 열등감 등의 감정이며 시기심이라고 보았다. 실존주의자들은 르상티망이 좌절감을 느낄 때 그 책임을 좌절감의 원인이 되는 것에 부여, 혹은 전가함으로써 갖는 적대감이라 말한다. "원인"을 제공한 대상에 직면한 약점이나 열등감, 그리고 질투심은 그 원인/원인제공자를 공격하거나 혹은 부정하는 거부, 정당화시키는 가치 체계 또는 도덕성을 만들어 자신을 방어하게 된다. 즉 이 가치 체계는 선망의 원천이 되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열등한 것이라고 판단함으로서 자신의 약점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질투심을 느끼거나 상대적으로 분개한 사람이 자신의 불안정과 결함을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좌절감과 고통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단절시키기 위해 방어기제로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원인/대상을 오히려 비난하고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흔히 어떤 사건에 대해서 늘 타인/외부요인에 책임을 전가하는, 즉 습관적으로 남 탓을 하고 모든 문제를 외부탓으로 돌리는 사람을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된다. 아니 우리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팀 켈러는 blame shifting(책임전가)를 죄라고 말하기도 했는가보다.
"삶을 변화시키는 뉘우침은 남 탓하기를 멈추는 곳에서 시작됩니다......진정한 뉘우침은... 남 탓하기('사실 내 잘못은 아니었어')와 자기 연민과 이기심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 팀 켈러
우리의 잘못/죄를 감추는 방법은 많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직면과 성찰, 뉘우침은 먼저 나의 불완점함, 나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하고 온전히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당연히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하며 삽니다. 그것을 나무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그 실수를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책임을 지기도 하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가 입니다. 자기 성찰이 전혀 안되는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되면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남 앞에서 인정하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하는 거 같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남들보다 스스로 절대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분들은 자신에게처럼 남에게도 가혹합니다. 상황이나 타인을 탓하며 자신의 잘못(행위 뿐 아니라 심리적 불완전함과 상처로 인한 왜곡, 혹은 남의 부족함을 용납하지 못하는 미움과 교만함)을 정당화하거나 축소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내면 깊은 곳의 자기연민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팀 켈러도 "진정한 뉘우침이 남 탓하기를 멈추는 곳에서 시작되듯, 자기 연민을 버리는 곳에서도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자기연민은 모순되게도 우리를 영적으로 교만하게 하니까요. ----- 내가 늘 생각하는 주제중 하나가 자기성찰 능력(의 불가능), 남탓을 하는 습관, 그런 문제에 대한 것이었고 (문학작품 속에는 이런 인물들로 인한 비극을 이야기할 때 다른 주제에 몰두하는 것을 본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참 좋은 당신 - 김 용 택 -------------------
너무나 잘 알려진 시이다.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나는 어떤 사람이 참 좋은가? 늘 환히 웃어주는 자? 누가 늘 환히 웃을까?
시인은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ㅡ그는 어둠을 건너온 자라고 말한다. 그의 웃음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어둠을 아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이다.
삶이 끝나는 날까지 수없이 지나야할 어둠의 길목과 터널마다 그 자신이 빛이 된 사람, 참 좋은 당신.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상담이나 소수 집단문학치료 뿐 아니라 특강과 활동을 이 블로그에 올리지 않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저 아직 특강/워크숍/집단문학치료/상담 하고 있답니다. 수많은 온라인 및 학회특강을 일일이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상담사들, 대학원생들, 학부생들, 학회 수련생들, 교사(상담교사 포함)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뻤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 고립과 단절의 시대: 글쓰기문학치유로 외로운 내 마음을 만지다.
------------------------- 단절, 고립, 외로움에 대해서는 오랜 동안 생각하던 주제였습니다. 시간이 늘 모자라 100쪽 넘게 준비한 이야기를 1/5도 못하고 (당연하죠!!!) 돌아오면서 마음이 참 아프고 미안하고 그랬는데 00님의 편지가 저를 위로해주었습니다.
-------------- 2026년 5월 25일
[00] 교수님~ 먼저 연락드릴려했는데 그렇게 못했어요ㅜㅜ 죄송해요... 오늘 학회에서 뵐 수 있어서 선물같은 만남이였어요~
[BHLee] 00씨 뜻밖에 뵈어서 정말 선물처럼 기뻤어요. 더 성숙하고 멋져보였어요. 학기 잘 마무리 하시고 존재하는 기쁨을 누리시는 날들 되시기를 기원드려요.
[00] 요즘 정말 삶을 살아내는거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는데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서 생존했음에 감사함을 다시 리마인드하게되어서 좋았어요! 더 나아가서는 상담사로서 프로그램을 돌리는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에게 집중해야한다는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상담사의 태도를 배우게 되어서 상담사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던 저에게 큰 깨달음이 되었어요!! 트라우마 생존자.. 라는 말도 많이 와 닿았어요.
학회 당일날 기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지금까지 "살아내셔서" 감사드린다고 저의 마음을 담아 전달해드렸어요! 그리고 진중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좋은 시간을 갖게되었어요~ 부모님과 정말 힘들었었는데 이 변화가 2년전 교수님의 강의와 개인집단상담에서 부터 시작된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또 이번주 주일에 교회에 오랜만에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오랜만에 청년들과 만나 반가운 환대를 받으며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힘들었던 일들을 다 이겨내고 품게된 것 같아요ㅎㅎ
[BHLee] 와. 정말 기쁘고 감사해요. 힘겹던 관계였던 부모님과 그런 대화를 하셨다니!!! 00씨가 정말 내면에 좋은 자원이 풍부하신거 같아요. 어떤 곳에 계시든 그 좋은 힘이 어느새 내면에서도, 세상에서도 어둠을 밝히는 빛이되고 꽃을 피우시리라 믿어요.
[00] 정말 정말 저에게 큰 힘이되는 말씀이에요. 감사합니다^^ 힘내서 이길을 잘 걸어가볼게요! 교수님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뵐 때마다 하나님의 때가 정말 경이롭고 신비롭다는 것을 경험하게되어서 좋습니다.
2026년 6월 10일 안녕하세요^^ 감사하는 마음에 다시 문자드립니다. 선생님을 만나서 “운이좋았다.” “하나님의 때에 만남을 허락하신 은혜.”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왜냐하면 살아 숨쉬려 나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보려고 용기내고 있거든요. 그 용기에 시작점이 선생님께서 선물로 주신 ‘내 마음을 만지다’ 책이거든요!
책 맨 앞쪽과 맨 뒷쪽에 저에게 적어주신 메세지를 보면서 이제서야 큰 울림으로 저에게 다가왔지만 이제라도 큰 울림이 되어 저에게 중요한 양분이 됨을 깨닫고 경험하게되어 참 다행이다 생각합니다^^
“살아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하루하루 소중히 살아내렵니다! 이봉희 선생님께 정말 감사함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긴글로 연락남겨봅니다. 감사합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우셨을텐데…감사한 마음을 너무 전하고 싶었어요~ 오늘 하루도 잘 마무리하시고 행복한 하루되세요. 00올림
[BHLee] 아구 감사해요 00씨. 사실 학회특강 다녀와서 2주정도 좀 아팠어요. 전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는데 운만 떼고 와서 속상하고 미안해서요. 그도 내 욕심일까 생각도 해보고. 3번째나 초청해주신 학회부회장님은 다들 정말 너무나 좋아했다고 하셨지만 의자배열 상 모두 둥글게 앉아계셔서 제가 눈을 마주치지 못해서 더 그랬나봐요. 온라인 강의처럼^^ 00씨의 편지가 주님께서 ‘씨를 심고 물주는 건 우리의 일이고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라’는 바울의 고백을 기억나게 해주시고 저를 새삼 일깨워 주시네요. 감사해요.
[00] 그러한 속사정이있으셨군요.. 많이 속상해하셨군요… 운만 떼었다고 하셨지만 저희에게 전달하고자하신 마음은 고스란히 잘 전달되었어요. 개인적으로는 “내가 나로 있어도 된다”라는것을 깨달았고 상담사로서 내담자를 대할때 “고치려하지말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잠재력을 보아주어라”라는 것. “설득하기보다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질문하고 기다려줘야 한다”라는 것... 등등 많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여서 정말 좋았어요! 저의 감사함 마음의 편지가 선생님에게 좋은 씨앗이되셔서 또 한번 감사한 경험을 하게 되어 좋아요. --------------- 늘 스스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내담자분들의 모습이나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결심 - 전욱진
휘청거리다 넘어지려다 그래 무너지자, 하고 마음먹은 나를 옆에서 꼭 붙잡는 사람은 마치 곁에 있는 사람처럼
그리워하지도 잊지도 않은 채 마음의 눈으로 보았다 절대로 지지 말라는 듯 무너지는 마음 정도는 괜찮다는 듯
----- '나'의 곁에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