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terview with :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소장・나사렛대학교 영어학과/대학원 문학치료학과 교수 이봉희

 인터뷰|2012.5월호

 

아픔없는 휴먼브랜드 되기, 나와의 화해 

《내 마음을 만지다》에서 당신은 "누구도 아픔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남은 모르겠지만) 나는 아프지 않다'며 문학치료의 필요성 자체를 못 느낄 듯 하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처음에 어떤 이야기를 해주는 편인가?

이봉희 그들에게 내가 말하는 '아픔'의 정확한 의미가 뭔지 이야기 해준다. 세상을 살면서 작은 상처 하나 안 입고 사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상처를 올바르게 치유하거나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란적으로 자신이 상처가 있거나 불완전하다거나, 아프다는 걸 인정하는 게 굉장히 부끄러운 일처럼 여겨지다 보니 자기가 상처를 받았는지, 그 상처가 나의 생애에 어떻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조차 하지 않고 무의식 깊은 곳에 묻어두는 경우가 많다 특히 어린 시절 받은 상처는 스스로도 잘 모른다. 그러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바람직하지 않게 삶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상처를 받더라도 이를 잘 극복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스스로 치유했다고 믿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사람은 대게 고통을 받으면 잊고, 피하려고 한다. 대면하기가 싫으니까 다른 데 집착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흔히 알코올, 게임, 운동, 일 등에 '중독'된다. 아니면 책상 정리나 글씨체 등의 작은 일에 집착해 자기를 괴롭히는 진짜 문제로부터 떠나려 한다. 그걸 우리는 '바보되기'라고 부르는데 낮은 수준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면 진짜 문제는 직면할 수 없게 되고 해결할 기회도 놓치게 된다. 그런데 해결의 첫 단계는 대면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치유 전에 무엇이 진짜 내 삶의 문제인지 고통스럽더라도 캐내야만 하는 것인가?

이봉희 오해할 수도 있는데 문제를 일부러 캐내라는 건 절대 아니다. 지금 내 삶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데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내가 뭔가 불완전하다거나, 어느 순간에 도무지 내 뜻대로 나를 컨트롤 할 수 없다거나, 알 수 없는 열등감 혹은 분노가 나를 사로잡고 대인관계에서의 불편함과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며 회의감이 든다면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물론 내 경험상 '내가 이것 저것 누리는 것도 많고, 외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는 분들도 센터에 와서 글을 쓰고 얘기하다 보면 생각지 못한 어린 시절의 상처나 과거를 들추게 될 때가 있다. 그래서 많이 울기도 하고, 자신을 알게 되면서 치유된다.

 

휴먼브랜드 관점에서 이런 치유가 필요한 이유는 자신을 잘 알고 좀 더 나답게 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이봉희 물론이다. 더불어 이걸 꼭 해결해야 하는 이유는 나는 문제가 없다고 느낄지라도 남에게는 심각한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자기 상처를 누군가에게 대물림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해자는 가해자이기 이전에 피해자였다. 사람에게는 내가 받은 것을 남에게 되갚고 싶어하는 충동이 있는데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도 같은 맥락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 상처에 대한 복수로 가까운 삶에게 피해를 주는 반복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강함을 느낀다. 제일 흔한 예가 부모님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사람들이 자녀를 가해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가해라고 해서 꼭 물리적인 폭력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못할 것이 없다. 그래서 아이에 대한 모든 것을 컨트롤하며 아이를 제물로 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상처를 자녀에게 대물림 한다. 마찬가지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쥐는 작은 권력을 무분별하게 행사하면서 비인간적으로 살고 있다. '권력이 생기면 나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 않을거야' 다짐하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면 본대로 똑같이 한다. 제일 흔한 예가 회사, 군대다. 당하 대로 똑같이 하게 된다. 시어머니께 호된 시집살이를 당하면 억울해서 자기 며느리에게 반복하게 된다. 이걸 나는 '흡혈귀론'이라고 부른다. 흡혈귀가 피해자를 만들면 그 사람이 또 흡혈귀가 되어 다른 사람을 물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공동체 전체가 고통을 받는다. 제 아무리 독특하다 해도 그 사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다면 그런 사람이 브랜드가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렇기 때문에 나 혼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혹시 누군가에게 줄지 모를 상처를 생각하며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반대로, 부모가 아니거나 나보다 약한 사람이 주변에 없다 느끼는 연약한 사람은 스스로를 폭행한다. 그게 낮은 자존감이 되고 우울증이 된다. '네가 할 수 있는 게 무야. 네 까짓 게 뭘 할 수 있겠어. 넌 한심한 존재야' 하는 생각이 일종의 '내적 비판자'가 되어 스스로를 짓누른다. 잘 살다가도 난관에 부딪히면 자존감이 꺾여 버리고 항상 전전긍긍하게 된다. 이느 가치관 정립을 불가느아게 만들고 고유한 독특함마저 사라지게 함으로 휴먼브랜드 관점에서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매우 근보넉인 문제다.

 

치유를 위한 글쓰기 A to Z

휴먼브랜드가 되기 전에 악순환을 만드는 흡혈귀 같은 리더가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내가 좀 더 나답게 살기 위해서 낮은 자존감으 높이기 위한 치유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봉희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기만 하면 자존감이 높아질 거야'라고 생각하는 데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심리학자는 낮은 자존감을 '내가 나를 잃어버린 상태와 같다'고 말한다. 부모나 사회가 나에게 매긴 점수의 통제를 받고 그들이 허용하는 강점만을 느끼며 사는 상태에서 내가 나인 것, 있는 그대로의 나, 그리고 내가 느낀 감정과 생각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그 모습 그대로의 내가 괜찮다고 받아들일 수가 없다. 문학 치료의 목적은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이고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참 자아를 찾게 도와주는 것이다. 구스타프 융은 참 자아를 원더풀 차일드(wonderful child), 즉 '인간 내면의 놀라운 아이'라고 불렀다. 모든 사람 안에는 이런 아이가 있는데 다들 억압하고 산다. 종종 창의적으로 자기가 하는 일이 너무 좋아 행복한 사람들에겐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함이 엿보인다. 왜 그럴까? 원더풀 차일드가 드러난 것이다. 감정은 하나의 에너지인데 (부정적일 해도) 그걸 흐르지 못하게 억압하면서 살면 나의 일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고, 고로 참 자아도 드러날 수 없다. *문학 치유 때 사용하는 글쓰기 방법들은 이런 자기 감정들을 해방시키는 데 탁월하다.

*문학 치유

이 기사는 문학 치료의 여러 가지 바업 중 글쓰기를 통한 저널 치료를 주로 다루고 있으나 본래 문학 치료에는 다양한 문학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찾고 치료하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 이 소장은 "자신의 구체적인 문제를 알고 문학 치료를 받는 경우는 글쓰기를 통한 치유가 좀 더 쉽지만 원인을 모르는 경우에는 문학이 매우 유용하다. 시나 소설 작품 중에서 발췌한 부분을 주고 거기에서 어떤 부분이 와 닿았는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분명히 내 무의식 중에 뭔가 응답한다. 어떤 구절이 그런 무으식적인 응답을 끌어낼 수 있었는 지를 선별하고 이끄는 것이 전문 치료사들의 몫이다.' 라고 전한다. 문학 치료에 대해서는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journaltherapy.org) 블로그를 참고하면 좋다.

 

말로 감정을 풀어내는 것보다 글쓱가 더 좋은 이유가 있나.

이봉희 말도 글처럼 스트레스나 억압된 감정을 풀어낸다는 의미에서 글과 마찬가지로 효과가 있으나 글쓰기가 더 나은 이유는 감정의 해방과 동시에 저장하기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성찰할 수 있어서다. 그래서 해방하는 글쓰기를 할 때는몇 가지 기법들을 통해서 우선 걸러냄 없는 무의식적인 글쓰기를 하게 한 뒤에 꼭 다시 성찰하는 글을 쓰도록 한다.

 

무의식적인 글쓰기는 어떤 글쓰기를 말하는 것인가?

이봉희 우리는 평소 남을 의식하는 글쓰기를 많이 한다. 일기 조차도 들키기를 두려워하며 쓴다. 그런데 누군가를 의식하면서 글을 쓰면 진정찬 자기 성찰이 어렵다. 그런 이유로 전문가들이 토해내는 글쓰기를 하도록 돕는 것이다. 문학 치료에 더러 시인이다, 수필가다, 등단했다며 자부심을 가지고 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글 실력은 치유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정말 솔직하게 '누군가가 죽었으면 좋겠다' 같은 극단적인 글쓰기를 하더라도 그게 돌아보면 진짜 원하는 것, 원하는 해결책은 아니다. 순간의 감정을 내놓은 뒤 다시 성찰해 진짜 문제를 찾은 뒤 소각하면 된다. 쓰고 성찰한 뒤 없애면 된다는 생각으로 솔직한 글을 써야 한다.

 

문학 치료 때 사용하는 방법도 같은 프로세스인가?

이봉희 치료를 집단으로 하는 경우에는 글을 개별로 쓴 뒤 발표를 하는데 물론 원하지 않는 부분은 절대로 하지 않고 성찰문만 읽는다. 놀라운 것은 글을 쓸 때 우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발표하면서 통곡하는 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나도 왜일까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가 쓴 글을 읽는 행위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자기가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에게 읽어주지 못할 경우에는 집에서 스스로에게 읽어주라고도 한다. 단순히 털어놓는 것만이 아니라 글을 읽을 때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그 순간 쓴 글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다.

 

확실한 치료를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나 일상 속에서 글쓰기를 통해 감정의 해방과 치료를 원하는 우리 독자들을 위해서 권하고 싶은 글쓰기 방법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

이봉희 여러 가지 저널 기법을 활용하는 게 좋ㅇㄴ데 직장인들에게는 '5분 집중 글쓰기'를 권한다. 전철 안에서, 아니면 10분 정도 일찍 출근해서 커피를 마시면서 업무 시작 전 5분 동안 급히 글을 쓰는 것이다. 급히 글을 쓸 때는 글씨체나 맞춤법을 의식하지 말고 나오는 대로 멈추지 말고 써야 한다. 오늘 하루 내 느낌과 업무, 스트레스에 대해 쓰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5분 집중 글쓰기는 특히 스트레스가 많을 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또 한가지는 '보내지 않는 편지'를 쓰는 것이다. 말을 정돈하거나 통제하지 말고 우선 다 쓰고 나서, 누구도 볼 수 없게 완전히 없애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이메일에도 활용할 수 있는데 누군가에게 화가 날 경우 받는 주소를 자기 이메일로 하거나 임시 저장하는 형태로 쓰고 없애는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그 사람과는 아주 차분하고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이런 저널 치료나 문학 치료 과정을 통해 자신을 극복하고 자존감을 회복해 참 자아를 발견하는 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사례라 할 만한 것들이 있나?

이봉희 많이 있다. 일례로 영문과 편입생 한 명은 겉보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너무 많은 아픔을 혼자 감당해왔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본인을 희생하면서 산 것이다. 진짜 자기를 찾고 싶어 첼로, 바이올린, 작곡이며 영어며 안 해본 게 없었는데도 불안하고 두려워했는데 문학 치료를 받으면서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것, 창의력을 제일 잘 발휘할 수 있는 게 바로 미술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어린 시절부터 국제 미술 공모전 등에서 상도 받은 재능 있는 아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린 시절 상처 때문에 그림 그리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다 상처가 치료되면서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고 대회에서 상도 받으며 진로를 바꿨다. 또 어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받은 상처와 미움이 너무 컸는데 치료를 하면서 실제로 시어머니는 변한 게 없지만 자신이 바뀌면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내가 미국에서 만난 한 일본인 역시 자신이 몰랐던 두려움을 치료하면서 뜻밖에 영어 실력이 확 느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아픔에서 회복된다는 것은 그저 아무일 없이 잘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참 자아에서 오는 창의력을 발아시켜 자기가 원하는 삶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참 자기로, 리드lead하는 휴먼브랜드 되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픔을 그야말로 '완전히' 치료하고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이봉희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하다. 이 세상에 완벽한 치유가 있겠나. 사는게 아픔인데. 하나의 문제가 해결도면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마치 욕망과 같이 하나의 욕망이 해결되면 또 다른욕망으로, 욕망의 대상만 바뀌는 것처럼 말읻. 그러나 자족은 있을 수 있다. 자족이 모든 걸 해결하는 데서 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치유하기 어렵더라도 그 과정에서 던지는 끊임없는 질문들이 나를 성장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오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기르는 것, 그게 치유의 마지막 목적이다.

 

'참 자아'를 계속 이야기하면서 자기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많이 강조하셨는데, '자기답다'는 말의 정의는 무엇인가?

이봉희 그게 맘대로 행동하며 산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고, 혹은 흔히 생각하듯 나를 가렸던 가면을 벗는다. 하는 단순한 논리도 아니다. 벗는 게 아니라 자신을 직시하는 것이다. 내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브랜드는 '상품화'하는 것, 즉 나를 모아 타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거라 생각한다. 타인과 무관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과거 에리히 프롬이 '현대의 문제는 인간이 죽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가 과거 상품 또는 노동력을 사고팔고 했었다면 지금은 나 자신을 사고파는 시대라 인간이 상품처럼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로는 '잘 팔리는 인간'이 되면 성공했다, 하는 거다. 우리도 습관처럼 이래야 잘 팔려, 이 전공을 해야 잘 팔려, 이런 직업을 가져야 잘 팔려, 하지 않나. 그래서 내가 브랜드가 되려면 구매자, 즉 세상 사람들의 욕구에 맞춰야 한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브랜드는 그들의 욕구에 맞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앞서서 리드하는 것이다. 단순히 대중이 원하는 상품이 되는 게 브랜드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건 내가 나로부터 소외된다는 증거다. 대중이 원하는 내가 되려고만 하면 내가 원하는 내가 될 수 없다. 개성도 없어진다. 브랜드는 결국 자신이 가진 가치관, 정체성, 개성을 사람들이 소비하기를 바라는 것이기에 일반 시장 상품과 다른 거라 생각한다.

 

유니타스브랜드가 좋은 브랜드의 조건이라 말했던 부분과 매우 흡사하다.

이봉희 그런가. 내가 본 브랜드도 개성뿐만 아니라 가치관이나 철학이 있었다. 그런 건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까 말한 고통의 치료에 대해 잠시 떠올려 보라. 물론 고통 자체가, 그 에너지가 나를 성공을 위해 달리도록 동기가 되어줄 수 있다. 그러나 고통에서 끝나면 절대 안 되고 그것을 극복해야 진짜 '브랜드'가 나올 수 있다. 고통에 매몰되어 '복수하겠다'는 관점으로 브랜드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동기가 되어준 고통에서 더 성장하지 못하면 다시 그 고통에 함몰되어 원치 않은 리더가 될 수밖에 없으니 정말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열정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상처를 받아야 한다는 식의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대단한 낭비가 있을 수 있다. 가진 에너지 조차 극복에 쓸 테니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간의 고통 때문에 지금 내가 되었다고 치료를 받으면 멍청해지는 것도 아니니 걱정 말라. 치료는 말한 대로 참 자아가 솟아나오는 것이다. 그 참 자아가 세상에 끌려가는 내가 아닌 리드(lead)하는 나, 휴먼브랜드가 되게 해 줄 것이다.

 

이봉희 성균관대학교 및 동대학원 영문학과, 미국 남가주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덴버대학교 대학원 문학치료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2004년 전미문학치료학회(NAPT)에서 공인문학치료사와 저널치료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 나사렛대학교 영어학과 교수이자 NAPT공식 한국 대표,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소장으로 있다. 저서로 《내 마음을 만지다》, 공저로 《예술의 사회적 기여에 관한 실증 사례 연구》등이 있다.

 

출처 : 유니타스브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