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글이다. 내 개인 홈페이지에서 HS학생(지금은 유학중. 아기아빠이며 전도사님이다.)과 주고 받았던 글.

2003년 9월 15일
"발가벗은 한 그루 가을 나무의 용기와 겸허로
밤새도록 밤비처럼 처절한 기도로 울 수 있게 하소서" (유안진)

hs가 다녀갔다. 온 단 말도 없이  조심스런 노크소리와 함께.
자기에게 이 가을 필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 글을 적은 책 한권을 내밀었다.

반가운 손님은 그 자체가 큰 선물이다. 예기치 못한 기쁨. 어느 시린 봄날 아침 아직 다 떠나지도 않은 겨울을 이기고 고개내민 파란 싹을 만나는 기쁨처럼 가슴이 훈훈해진다.

삶의 고달픈 여정에도 항상 길가에는 의자모양 돌이, 누운 고목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 쉬어가라고.  감사한 일이다.

쌓인 일들과  두번 다시 쳐다보기도 싫은 교정원고 앞에서 봄볕에 녹는 겨울 눈처럼 졸다가 불현듯 깨어나 hs가 주고 간 책을 들쳐본다. 내 졸음은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한 내 육신의 소리없는 반항임을 알기에.  어쩌면 하나같이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수 있을까? 어떻게 이들은 온실에 비친 햇살같은 따뜻함을 황야 한복판에서 일궈내어 도란도란 여성스럽게 들려줄 수 있을까?  질투심 섞인 부러움에 이번엔 또 다른 졸음이 날 마비시킨다.

난 아직 입원중이다.
내게 세상은 거대한 병원이다.  
---------
RE: 9. 16. by HS

세상은 거대한 병원... 어떤 병원인가요?
한 때, 세상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한눈에 보기에도 결벽증과 약간의 정신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만한 한 아주머니를 보며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더러움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 눈에 결벽증 환자처럼 보이는 저 아주머니가 정상일지 모른다고,
미친 세상에 우리 모두가 미쳤기 때문에 그 더러움을 모른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나도 미쳤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거라고...

그 때 저는 창조주란 없다고, 있어도 떠나겠다고, 벌을 내리려면 내려보시라고 반항하던,
그리고 점점 염세적으로 생각이 번지던,
그래서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던 때였습니다.
죽음이란 결국 정상인이 미친 세상에서 택하는 마지막 탈출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 그러나 저는 그 때에 이미 벌을 받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때로는 축복입니다.
옛 선지자들이 그토록 외치던 "돌이키라"는  명령에 귀를 기울일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벌인지도 모른채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은 그 얼마나 큰 형벌인지요.

너무나 감사하게도 저는 형벌을 받고 있는 상태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때에 "돌이키라"는 명령을 깊이 생각했으며,
그리고 지금의 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언제든지 어두움을 택할 수 있는 유약한 존재임에는 틀림없겠지요.

이런 말씀은 드리지 못했지만,
비젼이 확고부동해야 한다는 말에 대해 동의는 하면서도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처럼 염세적인 생각은 아닙니다만,
때로는 '세상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란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은 확신을 하고 있지만,
어쩌면 신의 존재를 있다 없다 논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싶어(다만 믿을 뿐이라는 뜻에서)
불가지론에 매력을 느끼기도 합니다.
위험한 생각인가요?

세상은 거대한 병원이라는 글귀가
지난날의 저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를 또 생각하게 합니다.

"발가벗은 한 그루 가을 나무의 용기와 겸허로 밤새도록 밤비처럼 처절한 기도로 울 수 있게 하소서"

진정 제게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렸던가요?
어릴 때 선생님이나, 대학에 와서 교수님이나,
그 앞에 서면 너무나 어렵고 불편한 생각만 들었었다는 것을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선생님은 많이 다르네요.
불편한 마음이 전혀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지금까지 제가 만난 다른 선생님이나 교수님들과는 많이 아니 전혀 달라요.
감사합니다.
늘 거기 계셔서 들어주시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RE:RE to HS
9. 17.

어둠은  밝음을 사모하기에 인식되는 어둠입니다
애통함은  나의 연약함에 대한 끊임없는 깨어있음으로 인한 절망입니다.
세상의 온갖 아픔을 바라보기에, 그들의 시기 질투 욕망 외로움 갈증 두려움 대인기피 과대망상 피해의식 맹목적인 사랑 우매함 판단과 지혜의 눈이 먼 안과질환 이기심 착각... 모든 것이 다 그들의 '아픔'이기에 그것을 바라보는 슬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쁜 사람입니다. 기어이 환희와  밝음과 따스한 웃음 뒤에 다시 찾아올 어둠을 너무 또렷이 찾아내고야 맙니다.  누군가의 밝음이 딛고 선 발밑에 눌린 어둠을 또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변성과 무상함을 알면서 나도 이 땅위에 중력의 법칙 속에 얽메어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바울처럼 말합니다. 내가 둘 사이에 끼었으니... 나의 원하는 바는 이곳을 떠나는 것...이지만 만일 내가 이 곳에 존재할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다면, --너희에게 유익하다면-- 이곳에 있는 것이 내게 옳다는 것이지요. 그게 사나 죽으나 의미있고 유익하다는 거지요.  세상이 병원이라는 말은 나를 제외시킨 비판적인 말이 아닙니다.  나를 포함한 인간들의 "아픔"--악함이라는 궁극적인 병, 죄(허물)라는 깊은 병에서 스스로를  치유할 길 없는 그 사실을 바라보는 슬픔을 이야기 합니다. 누가 감히 아, 기쁘다 주님이 그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나는 기쁩니다. 정말 기뻐요. 불가능이 없어요. 주님만 믿으면... 이라고 용사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절대 나는 배반하지 않아요. 죽기까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확신했던 베드로처럼요?   우리도 주를 배반했던 베드로처럼 기껏해야 이렇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백할 뿐이지 않은가요?  

"네가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나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감히 맹세하듯이 큰소리 칠 수 없어요. 난 언제 또 당신을 부인할 지 몰라요. 언제 또 세상과 타협하거나 외로움에 몸을 떨며 모든 걸 포기해 버리고 싶어지거나, 나태해져서 세상을 포기한듯 우울해 질지 몰라요. 언제또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저주하거나 내 알량한 선악의 판단으로 남을 정죄하며 미워할지 모릅니다. 언제 또 당신을 외면한 채 골방에서 혼자 쓰러져 꼼짝도 않고 생을 낭비할지 모릅니다.  오직 당신만이 지금 고백하는 이 사랑이 진심임을 아시며 동시에 그 "진심"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도 아십니다.  내 고통이 무서워 그 진심을 언제 가치없는 것인양  부인할지도 아십니다. 내 진심은 그렇게 거짓으로 어느순간 변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은 그리도 여전히  '사랑합니다....'입니다.  당신만이 나의 진심을 아십니다...

병들지 않는 사람이 없기에 아무도 대적할 수 없어서 --사실은 미운데, 저러면 안되는 데 하고 화가 나는데--내 속에서 늘 싸웁니다. 이것도 나의 무기력함에 대한 교묘한 합리화이면 어쩌나하고 갈등합니다.

또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맘 깊이 상처를 안고 병을 앓고 살아가는 것을 보는 아픔이 너무 큽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내가 해주고 싶어도 그 도움이 그들에게는 무의미하기에.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 중 가장 힘겨운 것은, 아니 가장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연약함과 별볼일 없음과 절망을 안고도 등에 지고도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의 길을 또 무겁게 무겁게 발자국을 떼며 조금씩 가는 것이지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갖는 것은,  내 속에 없는 그 무엇을 믿음으로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각오가 없이는 난 언제 또 쉽사리 넘어져 버릴지 모릅니다.  난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 각오 없이는 하루에도 열번도 더 분통을 터뜨리거나 나를 미워하거나 남을 비난할지 모릅니다.  항상 환자복을 입고, 때로는 병든 몸위에 가장 깨끗한 의사의  가운을 입고 나와 남을 대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면하는 사람들은 모두 연약한 환자들( 나처럼) 이니까요.  사랑스럽지 않기에 오히려 더 큰 사랑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이며 우리모두이니까요.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들 어딘가 아파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해본 사람은  상대가 앓고 있는 병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용어를 좀 쓰자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 더 "제도화된" "학습된" 용어를 쓰자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아,  이 놀라운 두렵고 떨리는 엄청난 말을 사람들은 구구단 외듯이, 군번 외듯이 외워서  나의 존재이류라 소리높여 외치지요.--는 것이 무엇인가 아주 쬐끔이라도 매일 생각하며 산다면 )  매일아니라도 어쩌다라도 진지히 생각하며 산다면 내가 병들어 있으며 치유받아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바로 병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사랑할 수 없고 의로울 수 없는 우리를 그것이 가능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것 아닌가요. 이 병든 영혼으로는 사랑은 불가능하니까요.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랑을 받는 일도 못하니까요.
-----

===============
내가 너무 바빠서 그 후 그의 편지에 답장도 못하고, 소식을 주고 받은 지도 한참 되었다.

언젠가 내가 인천으로 특강을 가면서 버스 멀미로 거의 몸을 가눌 수 없었던 적이 있었지.
그때 용케 강의는 끝내고 HS에게 도움을 청했었다.  다시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갈 수 없을 듯해서.
그리고 그의 차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중간 중간,  하다못해 고속도로에서도 갓길에 세우고 토할 것도 없는

빈 속에서 초록색 물을 토하며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가 했던 말, 교수님도 정말 힘드시고...... 가족들도 힘드시겠어요.....  그 말이 내게 비수처럼 꽂혔던 기억도 난다.

 

그는 지금 미국에서 목사님으로 목회하고 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미 예전에 그랬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