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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위하여ㅡ김시태

 

 

​너무 많이 걸었습니다
희미한 고향집과 어머니
그 개구쟁이들
그들을 도로 돌려주소서
조그만 카드 속에 정성을 담던
그 소년들도 돌려주소서
첫아이 보았을 때 기도드리던
그 아빠와 엄마도 돌려주소서
아이들과 손잡고 이야기하며
성당을 찾던 그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한 번 더 그 종소리 듣게 하시고
눈 내리는 아침을 걷게 하소서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소서

<데스마스크 Death Mask -허만하>

  바다 위에서 눈은
  부드럽게 죽는다.

  죽음을 덮으며 
  눈은 내리지만

  눈은 다시
  부드럽게 죽는다

  부드럽게 감겨 있는
  눈시울의 바다.

  얼굴 위에 쌓인
  눈의 무게는
  보지 못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1999/솔출판사)

21세기 한국시단 - 이봉희

 

[사랑] - 이봉희

 

고통이 말했다

내게 기대렴

고통이 말했다

너 혼자 살 수 없단다

고통이 말했다

내 품에 안기렴

고통이 말했다

내게 돌아와

널 사랑해

 

 

계간 『문예연구』 2010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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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희 시인

2003 문예연구로 등단. 나사렛대학교 교수. 미국공인문학치료전문가(CPT)/공인저널치료전문가(CJT).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 소장(https://www.journaltherapy.org). 한국시인협회회원. 전미문학치료학회공식한국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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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번역하지 말라, 악몽- 구토, 마지막 잎새. 박제 - 이봉희 / 21세기 한국시단

 

 

[나를 번역하지 말라] - 이봉희

 

나를 함부로 펼치지 말라

나를 분석하지 말라

당신의 문법으로 띄어 쓰고

쉼표를 넣고, 밑줄을 치고, 마침표를 찍지 말라

나의 말없음표를 당신의 언어로 채워 넣지 말라

아직 다 쓰이지 못한 나를

꼬리말, 머리말, 주석과 요약문을 달지 말라

나는 바벨의 언어니

당신의 언어로 이해했다 함부로 전하지 말라

당신의 진부한 해석은 오직

당신을 위한 빛나는 업적일 뿐이니

눈물 한 방울 나눈 적 없는

나의 옷을 입어본 적 없는

번쩍이는 당신의 언어로

나를 목 메달아

덜렁 덜렁 간판으로 내걸지 말라

나는 강물처럼 흐르는 노래이니

나를 움켜쥐지 말라

나는 당신과 다른 언어이니

나를 함부로 번역하지 말라

 

10회 전국계간문예지 사화집, 2008 중에서

 

 

[악몽-구토] - 이봉희

 

구토증에시달린다.모든소리와활자가허기지고목말라죽어가는귀에서목에서코에서눈에서가슴에서출혈을일으키며도로토해져나온다.삼킬수가없다.화려하고끈적이는플라스틱언어들이신기루처럼과일쟁반에탐스럽게올려져나오고알수없는구토증은계속된다.당신은누구인가.당신도플라스틱인가.드럼처럼머리를두드려대는삼킬수없는기계음인가.한가지주제의변주만반복하는지루한악기인가.영원한무한대복제인가.저춤추는무희는누구인가.거짓예언자의머리를받쳐들고무희에게다가가는당신은누구인가.저입맞춤은무엇인가.저위에손짓하는탐스러운포도송이의향기는무엇인가.손을뻗어도뻗어도닿을수없는저터질듯한노래는신기루인가깔깔대는환상일뿐인가.아,목마르다.

 

계간 문예연구2010년 겨울호 발표

 

 

[마지막 잎새] - 이봉희

 

내가 네게

이미 시들어

죽어버린 생명이라면

불가능한 현실이라면

 

난 차라리 가난한 화가의

마지막 잎새이고 싶다

 

못 견딜 눈서리 된바람에도

현실보다 강인한

생명을 나누는 죽음

 

그렇게 영영 지지 않는

아름다운 환상이고 싶다

 

계간 문예연구2008년 가을호 발표

 

 

[박제]- 이봉희

 

 

영원히 곁에 두기위해

신성한 제의처럼

새를 잡았다.

피를 다 빼어내고

가슴을 다 후벼 가져가고

그 속에

건조한 짚을 넣었다.

살아 있을 때 보다 더 빛나도록

유리 눈을 박고

날개를 닦아주고

다시는 이 땅에 내려오지 말라고

영원한 비상의 몸짓으로

펼쳐놓았다.

 

새는

다시는 이 낮은 곳에

내려앉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그러나

노래하지도

통곡하지도

못할 것이다

안식의 날개를 접지도

눈을 감지도

못할 것이다, 영원히

 

계간 문예연구2006년 봄호 발표

 

물레방아가 있는 좁다란 오솔길로 두꺼비 한 마리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맨드라미처럼 생긴 볏이 붉은 해처럼 고운 수탉 한 마리가 두꺼비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두껍아, 너 혼자서 참 외롭겠구나. 내가 친구가 되어 줄께. 두툴두툴 네 징그러운 몸뚱이를 보면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을 거야. 게다가 네 발로 어기적 어기적 걸아가는 모습은 바보같이 보이거든, 아무도 널 좋아할 사람은 없는 게 마땅해. 난 이렇게 멋지게 잘 생겼다고 모두들 칭찬을 한단다. 그래서 다투어 친구가 되려 하지만 그건 도리어 귀찮은 일이야. 친구란 마음이 맞아야 된다는 걸 난 알고 있거든."

수탉은 친절하게 두꺼비와 나란히 걸아가면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두꺼비는 조금 부끄러운 듯이 웃었습니다.

"고맙다, 수탉아."

둘은 시냇물이 흐르는 둑길을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수탉은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보리알, 과자 부스러기, 죽은 메뚜기의 시체, 여러 가지 벌레들이랑, 길바닥엔 먹을 것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주워 먹느라 수탉은 숫제 아래만 내려다보고 걸었습니다. 반대로 두꺼비는 그 큰 눈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한나절을 함께 걸었어도 둘은 얘기 한마디 나눌 수 없었습니다. 두꺼비가 잠깐 멈춰 서더니, 수탉을 향해 말했습니다.

"너처럼 잘 생긴 친구와 걷는 것은 좋지만, 줄곧 땅만 내려다보고 먹을 것만 찾는 너하고는 아무래도 사랑하는 친구가 될 수 없어. 먹을 것이란 세끼 필요한 양식만 있으면 그만이야."

그러고 나서, 두꺼비는 주저하지 않고 혼자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수탉은 멍청해진 채 그 자리에 서서, 두꺼비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권정생-[ 아기 소나무와 권정생 동화나라 ]중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1941)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