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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교수로서, 치료자로서 그리고 삶의 모든 관계와 장에서 내가 갈등을 겪을때마다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말씀 중 하나인데 요즘 내가 어떤 사람을 보면서 또 다시 이 구절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가진 좋은 것, 그것에 대한 나의 확신이 타인에게 강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요는 무례함이라는 것을.

내가 깨달은 좋은 것, 내가 누리는 좋은 것을 알려주고 싶은 뜨거운 열정 그 깊은 아래에 그것을 전해도 깨닫지 못하거나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은근한 비난과 경멸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를.

 

나의 확신과 열정때문에 상대에 대한 사랑과 관심 보다는 먼저 누린자의 교만함이 도사린 것은 아닌지.

정말 배려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랑하는 것인가.

상대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는 내 마음이 인내하는 귀찮음에 대한 포장과 합리화는 아닐지....

 

그래서 늘 내가 이것을 깨닫기 전 그 과정에서 경험한 절망과 회의와 좌절, 포기하고 싶던 마음 등을 기억하고 상대를 바라보려 노력해야하지 않을까.  진정한 배려는 사람들의 수많은 다양성과 각자의 형편을 존중하고 끝까지 진정 내가 줄 수 있는도움을 주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줄 수 있는 것 밖에는 도움을 주지 못하며) 그 사람이 성장하기까지 기다려주고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인데....  결국 어떤 것도 책임질 능력이 없지 않은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아니하며....."

 

무례함의 근거는 우월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 사람을 보면서...
나도 나의 열정에 무례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또 다시 돌아본다.

우리 문 앞에서 간절한 맘으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시는 그 분을 기억한다.

4/11/19

크리스마스를 위하여ㅡ김시태

 

 

​너무 많이 걸었습니다
희미한 고향집과 어머니
그 개구쟁이들
그들을 도로 돌려주소서
조그만 카드 속에 정성을 담던
그 소년들도 돌려주소서
첫아이 보았을 때 기도드리던
그 아빠와 엄마도 돌려주소서
아이들과 손잡고 이야기하며
성당을 찾던 그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한 번 더 그 종소리 듣게 하시고
눈 내리는 아침을 걷게 하소서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소서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 상실의 회복 (c)2011이봉희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잘 알려진 작가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잃어버린 조각The Missing Piece》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 동그란 피자의 한 조각을 슬쩍 먹어치운 것처럼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그 주인공입니다. 동그라미는 그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하지만 완벽한 원이 아니어서 빨리 굴러갈 수 없습니다. 동그라미는 완벽해지기 위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열심히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여러 조각을 대보아도 잘 맞지 않습니다. 어떤 조각은 너무 크고, 다른 조각은 너무 작습니다. 또 어떤 것은 서로 모양이 맞지 않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에게 꼭 맞는 조각을 만나서 완벽한 동그라미가 된 주인공은 기쁨이 넘쳐납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빠르게 굴러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없이 바삐 굴러가다보니 꽃의 향기를 맡을 수도 없고, 지나가는 벌레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고, 행복한 노래를 부를 수도 없습니다. 결국 동그라미는 “아, 이런 거였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다니던 조각을 내려놓은 뒤 다시 불완전한 채로 덜컹거리며 천천히 길을 떠납니다. 물론 잃어버린 조각은 길 위에 혼자 남겨지게 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욕망하는 이유 

우리도 내 안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잃어버린 조각을 찾고 있지는 않나요? 나의 빈 곳과 꼭 맞는 조각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어렵사리 잃어버린 조각을 만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꼭 붙잡아주지 않아서 그만 조각이 떠나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난 조각은 놓치지 않으려고 집착하다가 또다시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신화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태초에 남녀가 결합된 양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반으로 쪼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지요. 반으로 나뉜 인간은 스스로 불완전함을 느끼고는 완전성을 갈망하며 자신들의 반쪽을 영원히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전성을 향한 충동과 갈망을 남녀 간의 사랑의 욕구로 비유한 것입니다.

 

동그라미는 그렇게 찾아다니던 자신의 조각을 찾았지만, 이내 다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빈 곳을 채우러 길을 떠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하게 찾는 탐구 욕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욕망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욕망(desire)은 라틴어로 ‘별(sire)이 없음(별에서 멀어짐)’을 뜻합니다. 별이란 본질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이란 본질적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절하게 원하던 것을 찾았다고 해서 완성은 아닙니다. 누구나 경험했듯이 인간은 끝없이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하나의 욕구 충족은 완성이 아니라 또 다른 것을 욕망하는 시작입니다. 즉, 욕망의 대상만 바뀔 뿐이지요. 어렵사리 찾아낸 조각을 도로 내려놓고는 또다시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길을 떠나는 동그라미처럼 말입니다. 본질상 채워질 수 없는 것을 끝없이 욕망하며 사는 존재, 영원히 한 구석이 비어 있는 존재, 그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사랑하는 사이도 서로에게 허기져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왜 여전히 공허함을 느낄까요? 폴 발레리(Paul Valery)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다. 그런데, 아직 고독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는 더 한층 고독을 알게 하기 위해 짝을 만들어주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공허함은 카뮈의 《페스트》에서 의사 류가 말하듯 인간이 한 조각의 관념이 아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인식하는 존재이며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상대를 사랑해도 한 조각 관념처럼 상대를 온전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육체를 소유할 수는 있어도 그 순간조차 자유로운 그의 의식이나 영혼까지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소유욕은 (실버스타인의 이야기에서처럼) 상대를 부서지게 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나와 일치를 이루었던 사람이 점점 정신과 영혼이 성숙해져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조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 변해버린 모습 앞에서 우리는 다시 외로워집니다. 세상에 완벽하고 영원한 ‘나의 잃어버린 조각’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서로에게 영원히 허기져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릴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강도 높고도 심오한 고독입니다.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융합이나 헌신 그리고 상대와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개인이 성숙하기 위한, 자기 안에서 무엇이 되기 위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즉 상대를 위해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숭고한 동기입니다. 사랑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위대하고도 가혹한 요구입니다.

-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중에서

 

실버스타인은 5년 뒤《잃어버린 조각》의 후편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발표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잃어버린 조각이 큰 동그라미를 만나다The Missing Piece Meets the Big O》는 첫 번째 책의 끝부분에 홀로 남겨진 그 잃어버린 조각이 주인공입니다. 피자의 한 조각처럼 생긴 그 잃어버린 조각은 모가 나서 홀로 굴러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서서 마냥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자신에게 꼭 맞는 동그라미를 만나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불완전한 동그라미가 찾아와야만 그와 하나가 되어 온전한 동그라미로 굴러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만날 수가 없습니다. 무심히 지나가는 동그라미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번쩍이는 치장을 하고 아름답게 꾸며도 보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수많은 동그라미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자신을 원하는 동그라미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긴 외로움과 기다림 끝에 잃어버린 조각은 드디어 자신에게 꼭 맞는 동그라미를 만났습니다. 둘은 하나의 완전한 원이 되어 행복해하며 함께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잃어버린 조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조금씩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동그라미와 맞지 않게 되어, 결국 잃어버린 조각은 동그라미에게서 떨어져 나옵니다. 그는 또다시 홀로 남겨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동그라미, O를 만납니다. 잃어버린 조각은 그에게 매달려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합니다. 하지만 O는 이렇게 말합니다.

 

“넌 나와 함께 굴러갈 수 없어. 하지만 어쩌면 너 혼자 구를 수는 있겠지.”

“나 혼자? 잃어버린 조각은 혼자서 구를 수 없어.”

“노력이라도 한번 해봤니?”

 

자신을 데려갈 동그라미를 기다리다 지친 조각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스스로 일어서기를 시도합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혼자 힘으로 굴러보려 애를 씁니다. 그렇게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동안 모난 부분들이 조금씩 닳아서 잃어버린 조각은 자그마한 o가 됩니다. 작은 동그라미가 된 잃어버린 조각은 이제 스스로 구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전에 만났던 커다란 O를 다시 만났습니다. 마침내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굴러갑니다.

 

내 안의 공허함, 어떻게 채울까? 

실버스타인은 동그라미가 떨어뜨리고 간, 그래서 다시 길에 홀로 남은 잃어버린 조각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그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이 놀라운 두 권의 그림책은 우리가 생의 여정 중에 겪는 다양한 관계들을 간결하고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버려진 잃어버린 조각은 이별과 상실의 상처를 입고 남겨진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꼼짝하지 못한 채 자신을 완벽한 O로 완성시켜줄 다른 O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하나의 조각일 뿐인 존재. 그런 조각이 희망과 절망을 오가면서 차차 상처에서 회복되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회복이란 상대가 나를 품어주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내 스스로 완벽한 동그라미가 되어 다른 동그라미와 함께 굴러가는 것이라고. 결국 내 안의 결핍은 누군가에 의해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채워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쓸쓸함은 남습니다. 인간이란 그저 각자가 완벽한 원이 되어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 채 동반자로 굴러가야 할까요? 딸아이는 어릴 때 이 이야기를 읽고는 “그래, 내가 완전해야 남과 온전히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거야”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대체 어른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답니다. 타인과의 모든 접점을 잃어버린 채 스스로 누구 하나 품어주지 못하는 원이 되는 것, 결국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깨닫는 것이 어른인가, 그래서 앞으로 굴러가는 것밖에 모르는 외로운 바보가 되는 것이 어른인가, 하고 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본질적으로 외롭고 절망적으로 지어졌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카뮈의 말을 떠올릴 뿐입니다.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은 거대한 고독뿐이다.”

 

인간은 공허하고 고독합니다. 실버스타인은 단순한, 그러나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이 두 권의 그림책에서 우리 존재의 쓸쓸함과 모순, 그리고 공허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진실 앞에 우리는 공감하며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런 공허함을 나의 실존과 삶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인도의 철학가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의 말처럼 “어느 누구도 그대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의 공허함과 마주해야 한다. 그것을 안고 살아가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c)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중에서

<데스마스크 Death Mask -허만하>

  바다 위에서 눈은
  부드럽게 죽는다.

  죽음을 덮으며 
  눈은 내리지만

  눈은 다시
  부드럽게 죽는다

  부드럽게 감겨 있는
  눈시울의 바다.

  얼굴 위에 쌓인
  눈의 무게는
  보지 못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1999/솔출판사)

물레방아가 있는 좁다란 오솔길로 두꺼비 한 마리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맨드라미처럼 생긴 볏이 붉은 해처럼 고운 수탉 한 마리가 두꺼비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두껍아, 너 혼자서 참 외롭겠구나. 내가 친구가 되어 줄께. 두툴두툴 네 징그러운 몸뚱이를 보면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을 거야. 게다가 네 발로 어기적 어기적 걸아가는 모습은 바보같이 보이거든, 아무도 널 좋아할 사람은 없는 게 마땅해. 난 이렇게 멋지게 잘 생겼다고 모두들 칭찬을 한단다. 그래서 다투어 친구가 되려 하지만 그건 도리어 귀찮은 일이야. 친구란 마음이 맞아야 된다는 걸 난 알고 있거든."

수탉은 친절하게 두꺼비와 나란히 걸아가면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두꺼비는 조금 부끄러운 듯이 웃었습니다.

"고맙다, 수탉아."

둘은 시냇물이 흐르는 둑길을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수탉은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보리알, 과자 부스러기, 죽은 메뚜기의 시체, 여러 가지 벌레들이랑, 길바닥엔 먹을 것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주워 먹느라 수탉은 숫제 아래만 내려다보고 걸었습니다. 반대로 두꺼비는 그 큰 눈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한나절을 함께 걸었어도 둘은 얘기 한마디 나눌 수 없었습니다. 두꺼비가 잠깐 멈춰 서더니, 수탉을 향해 말했습니다.

"너처럼 잘 생긴 친구와 걷는 것은 좋지만, 줄곧 땅만 내려다보고 먹을 것만 찾는 너하고는 아무래도 사랑하는 친구가 될 수 없어. 먹을 것이란 세끼 필요한 양식만 있으면 그만이야."

그러고 나서, 두꺼비는 주저하지 않고 혼자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수탉은 멍청해진 채 그 자리에 서서, 두꺼비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권정생-[ 아기 소나무와 권정생 동화나라 ]중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1941)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