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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담 한마디- 김지하]

 

    새해에는 빛 봐라
    사방문 활짝 열어제쳐도
    동지 섣달
    어두운 가슴속에서 빛 봐라
    샘물 넘쳐흘러라
    아이들 싱싱하게 뛰놀고
    동백잎 더욱 푸르러라
    몰아치는 서북풍 속에서도
    온통 벌거벗고 싱그레 웃어라
    뚜벅뚜벅 새벽을 밟고 오는 빛 속에
    내 가슴 사랑으로 가득 차라
    그 사랑 속에
    죽었던 모든 이들 벌떡 일어서고
    시들어가는 모든 목숨들
    나름나름 빛 봐라
    하나같이 똑 하나같이
    생명 넘쳐흘러라
    사방문 활짝 열어제쳐도
    동지 섣달
    어두운 가슴속에서
    빛 봐라
    빛 봐라
    빛 봐라

패랭이꽃 | 2007.02.23 00:43 | PERMALINK | EDIT/DEL | REPLY
하룻사이에 이렇듯 많은 시와 그림과 음악이 올라와 있으니 마치 보물찾기에서 꼭꼭 숨겨진 보물을 찾아낸 느낌입니다.
송아지 | 2007.02.23 09:17 | PERMALINK | EDIT/DEL | REPLY
뚜벅뚜벅 새벽을 밟고 오는 빛 속에 내 가슴 사랑으로 가득차라...덕담 한마디에 가슴에 햇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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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할머니

2010. 3. 12 금.  

 

어제 언니가 내가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닌 초저녁에 집으로 전화를 한 모양이다. 

"낮에도 전화 안 받고.... "
"언니 낮엔 당연히 없지. 학교에 가 있지."

"아. 어디 다녀온다고 했잖아. 중국출장." 

"응. 그건 엊그제 돌아 왔지. 그래서 어제 밤에 통화도 했잖아. " 

"아. 그랬나. 내가 정신이 이렇게 없어." 

언니가 무료해서 낮에도 전화 했구나.....

"저녁 먹었어?" 언니가 묻는다.

"지금 먹으려고..". 막 식사를 끝냈지만 거짓말을 한다.

고속도로로 출퇴근 하는 학교에서 종일 복잡한 일로 지쳐 돌아온 밤, 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만 주면 되는데,  간단한 대답 몇 마디만 해주어도 되는데 그것도 버거워 혼자 있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래? 그럼 어서 식사해. 밤낮 이렇게 한 밤중에 저녁을 먹으니 어떻게 해. "

"늘 그런데 뭐. 언니 이따가 또 잠 안 오면 전화해. 나는 2시에 자니까 걱정 말고."

"알았어."


이기적이고 못된 동생. 그냥 좀 들어주지.  어제 밤에 통화했다는 말은 뭐하러 해서 언니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는지. 전화를 끊고 후회를 한다. 
전날 밤 통화 때는 목소리도 멀쩡하고 기억도 또렷하더니 하루 사이 갑자기 다시 기억을 못하는 언니. 죽음의 고비를 2-3번 넘기고 겨우 중환자실에서 살아남은 언니. 하나뿐인 폐에 삽관을 하다가 구멍이 나서 잠시 산소공급이 끊긴 사이 두뇌 어딘가 잘못된 것일까? 그 깔끔하고 총기 있던 언니가 3달 후 퇴원하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 애기같이 변했다. 그리고는 머리에 새집을 짓고 하루 종일 집에서만 갇혀 지내고 있다. 온갖 병이 스쳐지나간 몸으로 한 쪽 뿐인 폐로 힘겹게 살았는데 그렇게 질곡 많은 생의 마지막을 어린아이로 돌아가 새장에 갇힌 어린 새처럼 살 것이다.

 

어제 언니와 통화한 일을 쓰다보니, 언니 때문인지 얼마전부터 떠오르던 기억이 있다. 

 

청주에서 서울로 막 올라와 전학 온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셨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 손영자선생님. 지금은 어디계시는지, 생존해계시기는 하시는지.... 오빠가 동생들을 다 학교 보내고 돌봐준다는 것에 감동하시면서 내 손을 잡고 교회도 가시고(우리집은 불교집안이었는데)  늘 자신의 집에 데려가 주셨다. 선생님은 이혼인지 사별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홀로 반신이 마비된 뼈만 남은 70이 넘은 친정어머니와 숙명여고 다니는 딸과 함께 3식구가 살고 계셨다. 할머니는 나를 유별나게 예뻐 하셨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얼마나 외로우면 그러셨을까 싶다. 나는 툭하면 선생님 댁에 가서 할머니 방에서 말동무 해드리면서 그 집에 있는 위인전기며 책들을 읽었다. 아이들의 보드라운 뺨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듯이 노인들의 뻣뻣한 살가죽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할머니 방은 중풍병자의 방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늘 깔끔하게 참빗으로 머리를 넘겨 쪽을 찌고 하얀 모시옷이나 무명옷을 입고 계셨지만 방에서는 알 수 없는 고통스런 냄새가 났다. 그래서 모두 ‘학교 다녀 왔어요’ 하고 문 열고 한 마디 하고는 나가버리는 쓸쓸한 방에 홀로 남겨진 할머니. 하루 종일 빈 방에서 식구들의 발소리만 기다리셨을 텐데. 그런 할머니의 냄새나는 방에 나는 방학 때면 종종 찾아가 한 나절 곁에 앉아서 배 깔고 누워 책을 보았던 거 같다. 할머니는 그게 좋아서 나만 가면 마비되어 어눌한 입으로 우우 거리시고 기억자로 곱은 손으로 손짓을 하시고는 동그랗게 끝을 말아서 고리처럼 굽혀놓은 파리채 손잡이로 곁에 놓인 작은 장을 열고는 그 속에 있는 곶감이나 다른 먹을 것을 꺼내 주셨다.

 

하루는 선생님이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또 일하는 식모가 그만 두겠다고 한 것이다. 선생님은 친정어머니 방문 앞, 마당에서 어린 나에게 호소를 했다. “다 할머니 때문이야. 똥오줌 받기 싫어서 아무도 붙어 있으려 하질 않아.” 매일 같이 출퇴근을 해야 하고, 할머니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고, 일할 사람은 오고 싶지 않다고 하고...... 선생님도 나름대로 삶의 서러움과 어려움이 있을 텐데 남편도 없이 혼자서 감당해야하는 일들이 좀 많았을까. 울음이라도 터질 듯 폭발하기 직전의 표정으로 분노인지 절망인지 원망인지 설움인지 모른 심정을 초등학생 철부지 제자에게 호소하는 선생님과 방에서 그 말을 듣고 계실  할머니 사이에서 어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그 기억은 지금도 내 뇌리에 깊이 박혀있어서 가끔 선명히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선생님이 나를 늘 집에 데려가신 이유는 나를 이뻐하셔서이기도 하지만 빈집에 할머니 혼자 둘 수 없어서 나를 할머니 곁에 두고 외출하셨던 것 같다.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참 어리숙하고 남에게 잘 이용당하고 어떤 땐 그 속이 다 보여도 그냥 속아주는 아주 바보 같은 사람이니까.  (영악스럽게, 아니면 자신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서,  자신을 지킬 줄 모르는 바보?)   내가 다음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그 학교 후배가 된 선생님의 딸은 얼굴에 주근깨가 약간 있었고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약간 통통하고 키가 컸던 언니로 기억이 난다. 내게도 잘해주었지만 살갑지는 않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할머니 때문에 귀찮아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던 언니였었다. 할머니는 그 모든 것을 다 빤히 눈치채고 계셨을 텐데 얼마나 외롭고 서럽고 또 구차했을까? 당신이 원해서 그런 병이 드신 것도 아닌데. 

 

인간의 생명이란 무엇일까? 몸과 마음은 죽은 자와 방불한데 숨 쉬고 살아있는 수치심과 그럼에도 살고 싶은 맹목적인 욕망은 무엇이며, 아니 그럼에도 죽을 수도 없는 무기력은 또 무엇일까.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져 홀로 미지의 세계로 사라지는 공포일까? 

 

잉여인간... 자신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맘대로 할 수 없어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존재, 그리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한 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  

 

이상하게 얼마전부터 그 할머니가 기억난다. 철없이 그냥 찾아와 곁에서 동화책을 읽고 집어주는 곶감을 먹어드린 것뿐인 데, 그런 나를 기다리고 예뻐하시던 정에 주린 할머니의 외로움이, 그리고 철부지 초등학생 제자 앞에서 울음이 터질듯 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면서 삶의 무게를 호소하시던 선생님의 고달픈 삶과 외로움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갑자기 그 선생님은 (어떤 의미로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길 바라셨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들 모두 속에서 나 자신의 여러 편린들을 본다.

 

2010.3.12. 금. 흐림. 바람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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