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에 해당되는 글 5건

picture by bhlee

 

<물속의 사막- 기형도>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10222006

 

(c)sgm2013

 

[밤편지 - 김남조]

 

편지를 쓰게 해다오.

이날의 할말을 마치고

늙도록 거르지 않는

독백의 연습도 마친다음

날마다 한 구절씩

깊은 밤에 편지를 쓰게 해다오

밤기도에 이슬 내리는 적멸을,

촛불에 풀리는 나직이 습한 樂曲들을

겨울 枕上(침상)에 적시이게 해다오

새벽을 낳으면서 죽어가는 밤들을

가슴저려 가슴저려 사랑하게 해다오

 

세월이 깊을수록

삶의 달갑고 절실함도 더해

 젊어선 가슴으로 소리내고

이 시절 골수에서 말하게 되는 걸

고쳐 못 쓸 유언처럼

기록하게 해다오 

 

날마다 사랑함은

날마다 죽는 일임을

이 또한 적어 두게 해다오

눈오는 날엔 눈밭에 섞여

바람 부는 날엔 바람결에 실려

땅 끝까지 돌아서 오는

영혼의 밤 외출도

후련히 털어놓게 해다오

 

어느 날 밤은

나의 편지도 끝 날이 되겠거니

가장 먼 별 하나의 빛남으로

종지부를 찍게 해다오

 

정념의 기 - 김남조  (1927. 9. 2-2023. 10. 10)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c)Photos by bhlee 102419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 이형기

-----------

 

약속을 지키는 것은 약속을 한 사람의 몫인데
오히려 그 약속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은 기다리는 사람의 일이 되었다. 

어쩌면 약속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데...

비가 오면 편지를 쓰겠다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혹여 비 오는 날에 어쩌다 문득 그 약속을 기억할까?

 

시월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 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旅程)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 한 탓이리.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 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황동규, “시월(十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