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서적 - 기형도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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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곰팡이 피어/ 나는" --곰팡이 핀 나와,
"곰팡이 피어--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가 내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아무도 들어다 보지 않는 책, 곰팡이 피어나는 책, 축축한 세계 속에 버려진 나.
그 책이 살아온 것이 거의 기적이다.
출생뿐인 경력의 책인 나를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보고는 모두 나를 떠나간다.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나를 누가 펼쳐보고 싶어 하겠는가.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고 있다고 말하는 그--누군가가 읽어야 할 존재.
그가 믿고 싶은 기적은, 그가 바라던 간절한 기적은 무엇이었을까?
시의 첫마디가 "내가 살아온 것이 거의 기적적"이라고 말했는데,
마지막 남긴 말은 "나는 기적은 믿지 않는다"이다.
이게 그가 써 내려간 "어쩌면 한 줄"일 수 있는 (또 다른) 책의 마지막 페이지이다.
기형도의 시는 그냥 어둡고 아프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치열한 눈빛이 있다.
충돌하는 이미지들과 그 충돌 속에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빛ㅡ그러나 부싯돌의 충돌로 탄생하듯 아주 짧은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그의 언어들.
진실--하나의 꿈--을 향해 그 어둡고 고통스러운 길을 용감히 걸어간 그. 그로테스크하다는 평을 듣는 그의 언어들, 그의 아픔과 어둠이 얼마나 찬란한지 그래서 독자인 우리는 저절로 눈을 감고 싶은지 모른다.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그만 그 책을 떠나갔다.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엘리엇의 말대로 인간은 너무 벅찬 진실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 "Human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 T.S. Eliot, "Burnt Norton"/Four Quart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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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가 내게 말했었다. 왜 너는 늘 슬픈 글을 쓰니?
사실 행복한(?), 밝은 글도 무척 많이 있지만.... 그 친구는 어두운 글이 불편했던 거 같다.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못했을까? 어떻게 한 줄로 대답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누구의 것이든 슬픔에 무척 민감하다. 음악도 아다지오 악장을 가장 좋아한다. E. 디킨슨의 말대로 고뇌의 표정에는 거짓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