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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ㅡ길들이기와 길들여지기ㅡ

"서로 사랑했는데 그 사람은 떠나고 나만 여기에 남아 있을까요?
우리는 함께 사랑한 것이 아니었나요?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대체 무엇이었죠?

남겨진 사람은 또 어떻게 혼자서 살아가야 하나요? "

이별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 같은 질문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대답해줍니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사랑이란 서로를 길들여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지요. 그렇기에 누군가가 내게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를 위해 보낸 시간” 때문이라고요.

“관계를 맺는다고?”
“그래”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네가 없어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아. 너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난 너에게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입니다. 그리고 여우 덕분에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는 여우를 떠나 자신의 장미에게 돌아가려고 합니다. 어린왕자는 자신의 장미가 특별한 이유를 그를 위해 보낸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우에게는 어린 왕자와의 짧은 만남이 어린왕자와 장미와의 만남 못지않게 중요하고 '긴 시간'입니다.

이별의 순간, 어린 왕자는 홀로 남겨지는 여우에게 말합니다. 너를 길들인 것, 그것은 네가 원한 것이었다고. 그러니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는 떠나가 버립니다. 출발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여우는 말합니다.

“아아! 난 울음이 나올 것 같아.”
“그건 네 잘못이야. 나는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널 길들여 주길 원한 건 바로 너잖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런데 넌 울려고 하잖아!” 어린왕자가 말했다.
“그래. 정말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러니 넌 얻은 게 아무것도 없잖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얻은 게 있지. 저 밀밭의 색깔이 있으니까.”

물론 여우의 고통은 지난날의 행복에 이미 포함되어 있던 것인지 모릅니다. 여우는 “지난날의 행복의 일부”로 존재했던 현재의 고통을, 그런 사랑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우도 언젠가는 어린 왕자가 장미를 찾아 자신을 떠날 거라고, 그 미래의 고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행복을 선택했고, 자신을 길들여달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고독하고 외로운 여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홀로 남겨진 여우는 어린왕자의 금발을 닮은 밀밭을 보면서 어린왕자를 기다릴 것입니다.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미 습관이 된, 그의 말대로 ‘길들여진’ 기다림과 그리움이 없다면 여우는 어떤 희망으로 하루를 살 수 있을까요? 그런 여우를 어린왕자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혹시 부담스러워할까요? 그래서 밀밭을 피해 멀리 도망치지는 않을까요?

함께 길들이기를 연습했는데 여우는 남겨지고, 어린왕자는 자신의 장미를 찾아 떠납니다. 이처럼 길들이기란 서로 함께 같은 맘으로 이뤄가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린왕자의 금발을 닮은 밀밭이 유달리 바람에 일렁이는 날이면 여우는 바보 같이 두 팔을 벌리고 어린왕자를 만나러 달려갈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어린왕자의 금발이 아닌 밀밭에서 소리 없이 울어버릴지 모릅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밀밭 한구석이 들썩이고 있다면 그것은 바람이 아닌 여우의 울음 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어린 왕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시간을 되살려내는 건 사랑의 힘이니까요. 상대방이 떠났다 해도 그때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열정 속에서 그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마치 예술작품처럼 변치 않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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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오래된 서적 - 기형도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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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곰팡이 피어/ 나는" --곰팡이 핀 나와,

"곰팡이 피어--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가 내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아무도 들어다 보지 않는 책, 곰팡이 피어나는 책,  축축한 세계 속에 버려진 나.
그 책이 살아온 것이 거의 기적이다. 

출생뿐인 경력의 책인 나를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보고는 모두 나를 떠나간다.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나를 누가 펼쳐보고 싶어 하겠는가.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고 있다고 말하는 그--누군가가 읽어야 할 존재. 

그가 믿고 싶은 기적은, 그가 바라던 간절한 기적은 무엇이었을까? 
시의 첫마디가 "내가 살아온 것이 거의 기적적"이라고 말했는데,
마지막 남긴 말은 "나는 기적은 믿지 않는다"이다. 

이게 그가 써 내려간 "어쩌면 한 줄"일 수 있는 (또 다른) 책의 마지막 페이지이다. 

기형도의 시는 그냥 어둡고 아프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치열한 눈빛이 있다. 
충돌하는 이미지들과 그 충돌 속에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빛ㅡ그러나 부싯돌의 충돌로 탄생하듯 아주 짧은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그의 언어들. 
진실--하나의 꿈--을 향해 그 어둡고 고통스러운 길을 용감히 걸어간 그.  그로테스크하다는 평을 듣는 그의 언어들, 그의 아픔과 어둠이 얼마나 찬란한지 그래서 독자인 우리는 저절로 눈을 감고 싶은지 모른다.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그만 그 책을 떠나갔다.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엘리엇의 말대로 인간은 너무 벅찬 진실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 "Human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 T.S. Eliot, "Burnt Norton"/Four Quart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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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가 내게 말했었다. 왜 너는 늘 슬픈 글을 쓰니?
사실 행복한(?), 밝은 글도 무척 많이 있지만.... 그 친구는 어두운 글이 불편했던 거 같다.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못했을까?  어떻게 한 줄로 대답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누구의 것이든 슬픔에 무척 민감하다.  음악도 아다지오 악장을 가장 좋아한다. E. 디킨슨의 말대로 고뇌의 표정에는 거짓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