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문학치료 [문학치료와 저널치료]/bk'에 해당되는 글 6건

꽃샘 - 정희성

 

봄이 봄다워지기 전에

언제고 한 번은 이렇게

몸살을 하는가보다

이 나이에 내가 무슨

꽃을 피울까마는

어디서 남몰래 꽃이 피고 있기에

뼈마디가 이렇게 저린 것이냐

 

----

평생 함께 하는 아픔은

꽃을 피우는 일일까?

꽃을 피우는 것은 내가

"나"다워지는 일일까?

"나"다워지는 일은 평생

완성이 없는 일이기에 

이 아픔도 몸살도 끝이 없나보다

그러니 아픔도

감사한 일 아닌가 

풀잎 소리-  정 호 승

나의 혀에는 칼이 들어 있지 않다
나의 혀에는 풀잎이 들어 있다
내가 보고 싶은 친구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바람에 스치는 풀잎소리가
풀잎 하고 난다

 

---
언어의 폭력은 물리적 폭력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 들었던 많은 폭력적 언어, 특히 한 존재에게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언어때문에
일생동안 원인 모르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육체적으로 난 상처는 그 흉터가 남아 있어도 흉터를 보면서 예전의 아픔이 다시 우리를 사로잡아오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어의 상처가 낸 흉터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불사조처럼 살아남아 예기치 않은 순간에 어디선가 되살아나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칼은 아닌지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내가 남에게 듣는다면 내 마음은 어떨지요.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말이 언어생활에서만큼 절실히 요구되는 곳도 없는 듯 합니다.




나는 금세 바보 같은 울보로 변할 참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아담이 작전을 바꾸었다.


"창밖을 봐, 제제. 날씨가 아주 멋지잖아. 하늘이 무척 푸르고 구름은 마치 어린 양 떼들 같아. 모든 것이 네가, 가슴 속에서 노래하던 작은 새를 놓아주던 바로 그날 같아."

아담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저 태양을 봐. 제제. 하느님의 태양이야.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꽃. 세상을 따뜻하게 하고 씨앗들을 싹트게 해주는 그 태양이야......하느님의 태양이 저렇게 아름다우니 다른 태양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나는 깜짝 놀랐다.


"다른 태양이라니, 아담? 나는 그 자체로도 엄청나게 큰, 저 태양만 알고 있는데." 

 

 

"지금 저것보다 더 큰 다른 태양을 말하고 있는 거야.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솟아오른 태양 말이야. 우리들의 희망의 태양. 우리의 꿈을 뜨겁게 달구기 위해 우리가 가슴속에서 달구고 있는 태양 말이야."
나는 감탄했다.


"아담, 너 시인이구나?"

 

"아냐. 그저 너보다 조금 먼저 내 태양의 중요성을 알았을 뿐이라구."

 

"'나의' 태양?"

 

"제제. 네 태양은 슬퍼, 비 대신에 눈물로 가려진 태양. 아직 자신의 모든 능력과 힘을 발견하지 못한 태양. 아직 자신의 모든 삶을 아름답게 만들지 못한 태양. 조금 피곤하고 나약한 태양이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별것 아니야. 그저 원하기만 하면 돼. 삶의 아름다운 음악들이 들어오도록 마음의 창을 열어야 해. 따뜻한 정이 가득한 순간들을 노래하는 시 말이야....제제, 무엇보다도 넌 삶이 아름답다는 걸 배워야 해. 그리고 우리가 지금 가슴속에 달구고 있는 태양이, 하느님께서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더 풍요롭게 하려고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임을 깨달아야 해."


(바스콘셀로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2: 햇빛사냥] )

 

  090517

<새가 있던 자리 -천양희>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새가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 수 앞이 아니라
한 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완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 모두 방황한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어디에서나 나를 지켜보는 새의 눈이 있다.

*출처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창비, 2011

-----

https://www.journaltherapy.org/55

待人春風 持己秋霜(대인춘풍 지기추상) - 채근담(菜根譚)

 

 

타인을 대(대접)할 때는 춘풍, 봄바람처럼 따스하고 부드럽게 하고

자기한테는 추상, 가을 서릿발처럼 매섭고 엄함을 가져야 한다.

 

 

 

-----------

맞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문득.... 자기 자신의 부족함과 실패, 실수도 따뜻하게 부드러운 눈길로 받아주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본다. 

그렇다고 무책임하거나 불성실하거나 함부로 행동하라는 뜻은 아니므로. 

최선다해도 실수할 수 있음을 알고 그럴 때 자신을 지나치게 비난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다시 또 시도하고 일어서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리는 일,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그게 내 가능성의 전부가 아님을 믿고 실수와 부족함을 통해서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일까? 그래서 역기능적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추상같은 사람이 진정 남을, 부족한 사람을, 남의 실수를, 해도해도 안되는 그 한계를  춘풍처럼 받아줄 수 있을까?    이때 남에게 춘풍이라는 말은 일의 성공여부,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한 사람의 부족한 인품, 이해할 수 없는 성품과 성격, 비뚤어진 마음... 그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말일 것이다.   그 부족함이 우리 속에도 있음을 알고 그것을 수용하는 훈련과 마음없이 타인을 비난하고 미워하지 않고  따듯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기막힌 일이다. 나는 울고 괴로워하는데 주위에는 기술자들이 초점을 잡느니 보드를 치느니 조명을 켜느니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으니. 정말 돌아 버릴 노릇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이 자기 일을 한다고 나를 보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 앞에서 고통에 몸을 내맡긴 채 언제든 사인만 떨어지면 그것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데니스 호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