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를 다 닦아내는 박명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

ㅡㅡ
3월 7일 오늘은 기형도가 돌연 우리 곁을 떠난 날입니다(1989).  참 아까운 사람...

기형도시인이 내 나이만큼 되었다면 그는 어떤 시를 썼을까...
문득 문득 이 사람의 시를 읽을 때면 혼자 물어봅니다.
나이가 들면  저 끝모를 절망과 아픔은 어떤 언어로 변할까...

참, 아까운 사람.

Journal Therapy | 2014.03.04 15:20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태그 2009-03-08 22:36:07 어제, 알라딘에 책 주문 하러 들어갔는데, 시집 중 베스트셀러 하나가 기형도 시인의 <잎속의 검은 잎>이더군요. 살아있었다면 아마 사십대 중반 아닌가요? 지금쯤이면 더 중후한 울림이 있는 시를 쓰지 않았을까요?
기형도 시인의 시, 근데 많이 우울해서요, 보통 시인과는 완전히 다른 소리를 내지만......

Re: bhlee2009-03-09 00:23:22 그러게요. 기형도의 언어는 그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는 정말 독특한 세계인 거 같아요.
젊어서 이미 늙어 버린, 그러나 늙은 이와 달리 또 펄펄 살아 너무 젊어버린 그 사람의 시에서 아직도 내가 찾던 이야기를 찾는 나는 무엇일까, 그런 생각 가끔 합니다. 아직도 사춘기 소녀들처럼 정신없이 수다떨고 작은 일에도 깔깔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운 날 더욱 그렇습니다. 태그님 참 오랜만에 뵙습니다. 새학기 시작해서 또 많이 바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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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 2009-03-10 19:33:53 저 날 홍대 이리카페에서 추모일정이 잡혀있던데 들려보려다가 그냥..;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

Re: bhlee 2009-03-11 05:02:22 바람에 날리는 폐휴지 같은 잎새들, 머물 곳 없이 타다남은 햇살, 머물 곳 없는 눈발, 머물 곳 없는 바람, 부유하는 그리움..
로즈 | 2019.05.19 00:37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이 시가 좋아서 이 시를 읽어보라고 보냈을 어떤이에게 사랑에 빠져버렸었는데, 실은 이시에 반한거였었지요.
bhlee | 2019.05.20 14:44 | PERMALINK | EDIT/DEL
로즈님.. 그런 애틋한 추억이 있으셨군요. 이런 시를 함께 나눌수 있는 분이 있었다는게 참 소중한 추억 같아요.

이곳에 실린 이 시가 그 시간을 기억나게 해주었다니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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