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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도 동행자는 있다 - 혼자라는 외로움
하늘의 별빛이 몇 백, 혹은 몇 억 광년을 건너 나에게로 오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어쩌면 그 별은 나에게로 오기 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별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 빛은 우리에게 희망과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줍니다. 별빛이 없는 암흑의 밤을 상상하면 별과 달이 새삼 고맙습니다. 혹시 그 별은 알까요? 자신이 보낸 그 빛을 몇 억 년 후 누군가가 바라보며 삶의 소중함과 아름다움과 희망을 찾았다는 것을.
밤의 몽유도원도 속으로 별똥별 하나 진다 몽유도원도 속에 쭈그리고 앉아 울던 사내 천천히 일어나 별똥별을 줍는다 사내여, 그 별을 나를 향해 던져다오 나는 그 별에 맞아 죽고 싶다 - 정호승, <별똥별> 중에서
생후 7개월 된 아이와 단 둘이 남겨져 공부해야 했던 유학 시절, 기숙사 건물에서 유독 내 방에만 항상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불이 켜져 있곤 했습니다. 새벽 두 시까지는 건너편 기숙사 방에도 불이 켜져 있었지만, 두 시가 지나면 어김없이 그 방도 불이 꺼졌습니다. 그 순간이 되면 나는 망망대해와도 같은 어둠 속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절망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 건너편 기숙사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면서, 두 시면 잠자리에 드는 그 학생이 부럽기도 하고, 또 아직도 과제를 다 끝내지 못하고 나 혼자 어둠 속에 남았다는 게 절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 순간들은 때때로 나의 집중을 방해했습니다. 혼자 어둠 속에 남겨진다는 것이 절망과 외로움의 영역을 더 크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기억은 더 있습니다. 시간강사 시절, 가까운 지방으로 강의를 다니던 때의 일입니다. 내비게이션은커녕 아직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인 데다, 고속도로나 큰길도 생기기 전이라서 시골길을 몇 시간씩 운전하며 다니던 때였습니다. 날이 일찍 저무는 늦가을, 학교에서부터 가로등도 없는 어둑해진 좁은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다 보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인생이란 길이 없는 숲속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 말을 머릿속에 되뇌면서 어둠 속에서 홀로 길을 찾아 헤매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좁은 일차선 도로 위에 내 차가 아닌 다른 차의 불빛이라도 보일라치면 그 반가움이란……. 더군다나 맞은편으로 스쳐가는 불빛이 아니라, 내 차와 앞뒤로 서서 나란히 달리는 불빛은 마치 인생의 동행자를 만난 것처럼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바른 길”을 가고 있구나 싶어 안심이 되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지친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를 인도하듯 앞서 가던 빨간 미등이 어느새 다른 길로 접어들거나, 뒤따르던 차들이 하나둘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 찾아왔지요. 안도하고 있다가 문득 들여다본 자동차 뒷거울에 불빛 한 조각 없이 어둠만이 들어차 있는 걸 확인하게 되면, 갑작스레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이 밀려들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공연히 두렵기도 했습니다. 인생길이 사실 이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 건너편 기숙사의 학생은 알고 있었을까요? 자신이 매일 밤 고독에 휩싸인 한 유학생과 어둠 속을 동행해 주었다는 것을. 그 자동차들은 알고 있었을까요? 자신들이 무심코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한 이름 모를 중년 여인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불안함과 두려움을 몰아내도록 함께 해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을까요? 내가 삶의 한구석에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때 내 안에서 작은 빛이 피어나고, 그 빛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준다는 것을. 한 사람이 성실하게 묵묵히 제자리에 ‘존재’할 때, 그 존재자체, 그 생명력은 아름다움이며 빛입니다. 그 빛은 그가 사라진 후에도 소멸하지 않습니다. .............. (이후 생략).............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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