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9'에 해당되는 글 3건

동안(童顔), 그리고 마스크

   
  이탈리아의 작가 피란델로는 『각자 자기방식대로』의 주인공을 통해 "변해 가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내 얼굴을 감춘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수치심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집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늙음이라는 변화를 즉각 인간의 모습에 판화처럼 새겨 넣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극의 인물을 통해 피란델로는 늙음은 “인간의 차원으로 축소시킨 고통스런 시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모를 겁니다. 늙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느끼는 그 쓰라린 경험을. 기억력이 사라짐에 대한 놀라움보다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슬픔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 때의 경험을. 늙은 육체 속에 젊고 뜨거운 심장을 느낄 때의 그 외설적인 수치심을 당신은 모릅니다."(『내가 다른 사람일 때』)

   육체는 형상입니다. 그러나 그 형상은 무엇이든 삼키는 굶주린 시간의 눈 아래서 변하는 형상입니다. 시간을 멈추기 위해, 정지하기 위해, 피란델로의 인물들은 마스크를 씁니다. 마스크'의 역할연기를 통해 그들의 부끄러운 '얼굴'을 가려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작가의 주인공들은 서글픈 피에로처럼 그로테스크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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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동안(童顔)은 마음의 순수함과 따뜻함을 유지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시기와 질투, 허세로 가득한 자기기만의 마스크를 쓴 얼굴이 아무리 주름이 없다한들 “어리고 아름답다”고 여겨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롭다(젊어진다)’고 말한 바울의 당당함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남들이 보지 않는 나만의 거울 앞에 설 때, 아니, 나 자신의 환상의 거울도 아닌 나의 참 얼굴을 비추는 거울 앞에 설 때, 그 때 그 거울에 비칠 내 후패하지 않은 “얼굴”을 위해 오늘도 깨끗하게 세수하고 단장하고 싶습니다.
(bhlee 문학칼럼, '내 영혼의 작은 새' 중에서)

by bhlee

 

[겨울눈 나무숲-기형도]


눈(雪)은
숲을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 저기 쌓여 있다.
'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쿵, 그가 쓰러진다.
날카로운 날(刃)을 받으며.
나는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잔가지를 치며
나무의 沈默(침묵)을 듣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假面(가면)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는
서로 닮은 아픔을 向(향)하여
불을 지피었다.
窓(창)너머 숲 속의 밤은
더욱 깊은 고요를 위하여 몸을 뒤채인다.
내 淸潔(청결)한 죽음을 確認(확인)할 때까지
나는 不在(부재)할 것이다.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距離(거리)를 두고
그래, 心臟(심장)을 조금씩 덥혀가면서.
늦겨울 태어나는 아침은
가장 完璧(완벽)한 自然(자연)을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
그 後(후)에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우리의 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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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그가 날카로운 날을 받으며 쿵, 쓰러진다.  나는 그를 끌고 집으로 와 홀로 그의 몸의 잔가지를 치며 그의 침묵을 듣는다. 서로 닮은 아픔을 향해 불을 지피며,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거리를 두고 심장을 조금씩 덥혀가야지.  그렇게 나무와 함께 청결한 죽음을 확인할 때까지 나는 존재하지 않으려 한다. 녹아 흐르는 겨울 눈을 거슬러 봄이 다가오는 그때 나 다시 존재하기 시작할 것인가?

(120211)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있는가. 곧 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기형도 -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