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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더 꽃이다 - 유안진

어린 매화가 꽃 피느라 한창이고
사백 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섰다
등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으로 보이는가
백 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 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 맡아 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꽃인 것을

새를 사랑하기 위하여
조롱에 가두지만
새는 하늘을 빼앗긴다

꽃을 사랑하기 위하여
꺾어 화병에 꽂지만
꽃은 이내 시든다

그대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 마음에 그물 쳤지만
그 그물 안에 내가 걸렸다

사랑은 빼앗기기
시들기
투망 속에 갇히기

길가에 버려진 돌 -  이어령

 

길가에 버려진 돌

잊혀진 돌

비가 오면 풀보다 먼저 젖는 돌

서리가 내리면 강물보다 먼저 어는 돌

 

바람 부는 날에는 풀도 일어서 외치지만

나는 길가에 버려진 돌

조용히 눈 감고 입 다문 돌

 

가끔 나그네의 발부리에 채여

노여움과 아픔을 주는 돌

걸림돌

 

그러나 어느날 나는 보았네

먼 곳에서 온 길손이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

여기 귓돌이 있다 하셨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집을 지을

귀한 귓돌이 여기 있다 하셨네

 

그 길손이 지나고 난 뒤부터

나는 일어섰네

입 열고 일어선 돌이 되었네

 

아침 해가 뜰 때

제일 먼저 번쩍이는

일어서 외치는 돌이 되었네

행복을 향해 가는 문 - 이해인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 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걸음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