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에 해당되는 글 6건

<허락된 과식 - 나희덕>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
  근래 보기 드문 일

  오랜 허기를 채우려고
  맨발 몇이
  봄날 오후 산자락에 누워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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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당시 건축공학 전공이던 딸이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린 그림.
초등학교 때 미술학원 3일 가고 재미없다고 그만둔 게 미술교육(?)의 전부였다.
고난 주간을 맞아 다시 이 그림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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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ㅡ문태준

 

 

@New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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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무감각한 뿌리들을 흔들어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듯이 지켜주었지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어주고
희미한 생명을 마른 뿌리로 먹여주었지

-T. S. 엘리엇, <황무지>중에서 / bhlee역

(from "The Burial of the Dead," The Waste Land- T. S. El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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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올 들어 첫 꽃을 보았습니다. 캠퍼스 길가에 노란 수선화 두 송이가 수줍은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곁에는 어느새 푸르러진 풀 섶 속에 작은 제비꽃이 숨어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보아주는 이 있든 없든 말없이 성실히 피어있는 작은 꽃과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나도  '살아서 살아있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슴을 흔드는 4월을 시인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합니다. 이 시는 4월이면 누구나 한번쯤 중얼거려보는 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의 첫 구절입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생명수 같은 봄비가 무감각하던 겨울뿌리를 흔들어 망각의 잠에서 깨워주는데 왜 잔인한 달인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현대인을 메마른 불모의 대지 황무지에 사는 살아있는 죽은 자(the living dead)”라고 말합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것은 참된 사랑에 접근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인식하고 감동할 수 있는 감각들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의식의 무감각함을 흔들어 일깨우면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봄이 때로는 진실의 태양빛처럼 너무 부시고 아려서 그만 눈을 감고 싶어집니다. 4월이 잔인하다든 것은 이렇게 살아있으나 죽은 자처럼(little life) 잠든 채 살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의식의 죽음, 그 비극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들에게 생명과 의식을 일깨우는 4월은 잔인하기만 합니다. 우리 모두 엘리엇의 또 다른 시 구절처럼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어 낼 수 없는(Human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존재들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4월입니다. 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어김없이 푸르러 오는 생명의 계절, 가끔 가던 길 멈추고 물어봅니다. "나는 살기 위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c)2004이봉희, 덴버 중앙일보 연재 문학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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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나무들 - 정현종

  세상의 나무들은
  무슨 일을 하지?
  그걸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
  허구한 날 봐도 나날이 좋아
  가슴이 고만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리는

  그런 사람 땅에 뿌리내려 마지않게 하고
  몸에 온몸에 수액 오르게 하고
  하늘로 높은 데로 오르게 하고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들리지 나무들아 날이면 날마다
  첫사랑 두근두근 팽창하는 기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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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ㅡ 전동균>

산밭에
살얼음이 와 반짝입니다

첫눈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고욤나무의 고욤들은 떨어지고

일을 끝낸 뒤
저마다의 겨울을 품고
흩어졌다 모였다 다시 흩어지는 연기들

빈손이어서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군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왔고
저희는
저희 모습이 비치면 금이 가는 살얼음과도 같으니

이렇게 마른 입술로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당신을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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