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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립지 않겠습니까 - 김현태

 

왜 그립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낙엽 하나 뒤척거려도 내 가슴 흔들리는데

귓가에 바람 한 점 스쳐도

내 청춘 이리도 쓰리고 아린데 

 

왜 눈물겹지 않겠습니까

사람과 사람은 만나야 한다기에

그저 한번 훔쳐본 것뿐인데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매스꺼운 너울 같은 그리움 

 

왜 보고 싶은 날이 없겠습니까

하루의 해를 전봇대에 걸쳐놓고

막차에 몸을 실을 때면

어김없이 창가에 그대가 안녕 하는데

문이 열릴 때마다

내 마음의 편린들은 그 틈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데 

 

왜 서러운 날이 없겠습니까

그립다는 말

사람이 그립다는 말

그 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저 달빛은 오늘도 말이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진정 사랑한다면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두고두고 오래도록 그리워해야 한다는 말,

어찌 말처럼 쉽겠습니까 

 

달빛은 점점 해를 갉아먹고

사랑은 짧고 기다림은 길어지거늘 

 

왜 그립지 않겠습니까

왜 당신이 그립지 않겠습니까

비라도 오는 날에는

기댈 벽조차 그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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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라도 오는 날에는 기댈 벽조차 그리운데 
왜 당신이 그립지 않겠습니까 

문 열어라 - 허형만

  산 설고 물설고
  낯도 선 땅에
  아버지 모셔드리고
  떠나온 날 밤

   문 열어라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가
  잠긴 문 열어젖히니
  찬바람 온몸을 때려
  꼬박 뜬눈으로 날을 샌 후

   문 열어라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 문 다시 닫혀졌는지
  어젯밤에도

   문 열어라

   - [비 잠시 그친 뒤] 문학과지성사 1999

명사산 추억 - 나태주

헛소리 하지 말아라
누가 뭐래도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먼지 날리는 이 모래도 한때는 바위였고
새하얀 조그만 뼈 조각 하나도 한때는
용사의 어깨였으며 미인의 얼굴이었다

두 번 말하지 말아라
아무리 우겨도 인생은 고해 그것이다
즐거울 생각 아예 하지 말고
좋은 일 너무 많이 꿈꾸지 말아라
해 으스름 녘 모래 능선을 타고 넘어가는
어미 낙타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들어보아라

하지만 어디선가 또다시 바람이 인다
높은 가지 나무에 모래바람 소리가 간다
가슴이 따라서 두근거려진다
그렇다면 누군가 두고 온 한 사람이 보고 싶은 거다
또다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고 싶어
마음이 안달해서 그러는 것이다

꿈꾸라 그리워하라 깊이, 오래 사랑하라
우리가 잠들고 쉬고 잠시 즐거운 것도
다시금 고통을 당하기 위해서이고
고통의 바다 세상 속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또다시 새롭게 꿈꾸고 그리워하고
깊이, 오래 사랑하기 위함이다.


빈 곳 - 배한봉

  벽 틈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풀꽃도 피어 있다.
  틈이 생명 줄이다.
  틈이 생명을 낳고 생명을 기른다.
  틈이 생긴 구석.
  사람들은 그걸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팔을 벌리는 것.
  언제든 안을 준비 돼 있다고
  자기 가슴 한쪽을 비워놓은 것.
  틈은 아름다운 허점.
  틈을 가진 사람만이 사랑을 낳고 사랑을 기른다.
  꽃이 피는 곳.
  빈곳이 걸어 나온다.
  상처의 자리. 상처에 살이 차오른 자리.
  헤아릴 수 없는 쓸쓸함 오래 응시하던 눈빛이 자라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