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문학치료 [문학치료와 저널치료]/성서와 나'에 해당되는 글 4건
[예전 공개된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공개된 글]- 제자와의 대화
*이 글은 한 제자가 공개글로 쓴 것이며 동의에 의해 실었음.
난 회사에 묻어 있다. 오물처럼
내가 일하고 있는 부서는 총무부 라는 곳이다. 영어로는 General Administraion Dept. 총무부는 회사 살림을 하는 곳이다. 집살림과 마찬가지로 눈에 띄는 일은 아니지만, 분명히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일이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들이 모여 회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은 큰 즐거움이다.
회사는 단지 사장과 Executive member들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아침에 우편물이 발송 또는 배달되고, 신문이 배달되고, 서류들이 도착하고, 전화가, 컴퓨터 네트웍 프로그램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하고, 전기가 들어와야 한다.
우편물이 배달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전화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정상적으로 되기 위해선 365일 휴가 한 번 제대로 못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적은 월급과 훨씬 안 좋은 근무 환경에서 성실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날 직원들이 회사에 출근했을 때 전화가 정상적으로 가동되게 하기 위하여, 담당 직원과 업체 사람들은 새벽까지, 주말도 반납하며, 성실하게 기계처럼 일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총무부 일은 잘하면 본전, 못하면 욕 한바가지라고 한다.
회사가 실적 위주와 성과 위주로 그 직원의 능력을 평가하는 인사고과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난 정말 난감하다. 내 일은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일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실적으로 혁혁한 뭔가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성격의 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날 힘들게 하는 건 상사와 소통이 안 된다는 거다. 내 부서에 대한 나의 태도와 내 생각을 말을 하지만,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신다. 내 말을 알아 듣는 능력이 아예 결여되어 있는 분 같다. 내가 그렇게 어렵게 말을 했나? 내 친구들은 내 얘기들을 잘 알아 듣는데… 정말 신기한 경험들이다.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나 혼자 아득한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외로움과 창피함, 수치심, 부끄러움이 뒤섞여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은 경험이다.
요즘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그런 현상을 자주 겪는다. 나의 일하는 스타일이 고집스럽게 미련해 보이지만, 그렇게 밖에는 할 수가 없고, 그렇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 때문에 절망스럽다.
자기가 필요할 때만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이용만 하려는 야박한 사람들. 알고보면 다 도둑들. 더 큰 도둑이 될려고 출세하려는 사람들.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들.
이용 당해줄려고 마음 먹었는데, 결국 내 실력은 뽀록이 난다. 난 실은 그걸 감당할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난 오늘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어정쩡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냥 회사에 묻어 있다. 오물처럼.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위로를 해준다고 한 말.“그래도 암선고 받고 한 달밖에 못사는 사람들도 있어. 네 처지가 그 사람들 보다는 낫잖아?” 정말 어이가 없다. 그래도 목숨 부지하고 살아 있는게 나은 거라니… 그게 나를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라니…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
RE: 아, 얼마나 사무치게 고독한 일인데... 그 무리들 속에서 혼자 표정 관리하고 있는게. 심장이 멎는 일이지. 그 무리들이 그런 나의 연약함을 짐승 같은 본능으로 냄새맡고 덤비면 안되니까 들키지 않으려고 숨을 죽여 울어야 하지.
살면서 너무 자주 그런 걸 느껴. 사람들은 너무나 당당하게 뻔뻔스럽게 이기적이라는 걸. 눈에 불을 켜고 자신에게 유익한 일을 위해 덤벼든다는 걸. 오직 자신이 누구인지 그걸 드러내기 위해 24시간 호흡하는 것 같다는 생각. 그걸 어린 학생들에게서도 종종 본단다. .
모두가 비겁한 벙어리가 되어야만 가장 평화롭다는 생각이 서글프다.
세상은 갈 수록 사막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곳에서 모두는 그저 눈에 불을 켠 맹수들로 변하고 있어. 너무 서글픈일이야. 기가 죽어서 살고싶지조차 않단다. 고독이 사무칠 지경이란다. === RE:RE:
선생님, 세상이 점점 낯설어요. 전 마치 트루먼쇼에 나오는 주인공 같아요. 저만 철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요,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이 정말 똑똑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학교도 저보다 더 좋은 곳을 나왔구요, 학위도 높고, 외국에서도 공부했고, 저보다 좋은 경험들을 많이 한 사람들이예요,
정말 미치겠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최소한 상식적이지도 못하다는 거예요. 인격적인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 좋은 머리와 많은 공부, 경험이 대체 뭐였나 싶어요.
최소한의 상식과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이기적이고 무례한 그리고, 도둑의 대가들. 그들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어요. 무슨 끝없이 먹어 치우는 괴물같아요. 전혀 소통을 할 수 없는 똑똑하고 잘난 괴물들이예요.
그 괴물들이 돈과 지위 앞에서 얼마나 추하게, 얼마나 쉽게 자신의 인격과 인간됨을 가차없이 버려버리는지... 실은 그 모습을 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들 편에 서볼려고 한때는 분발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바로 뽀록이 났어요. 너무 어설퍼서. 결정적으로 제가 그들 앞에서 너무 기가 죽어서 연습한대로 하나도 못했어요. 쩔쩔매다가 나왔어요. 그들한테는 사람을 그 앞에서 꼼짝 못하게 하는 기술까지 갖고 있더라구요.
선생님, 그들과 소통도 안돼지만, 전 아직 견딜 실력도 없어요. 가끔은 그들한테 붙어서 부스러기라도 두둑히 챙기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어요.
====== RE:RE:RE: 아, 그렇게 말하는 그 맘 알아. 나도 그런 생각 수도 없이 오간단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사라진 세상에 나만 표류하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외로워서.
네가 당하는 일들이 버거워서라기 보다는 외로워서 더 견디기 힘든 거야. 아무도 너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혼자이지 않기 위해, 외톨이가 되는 두려움에 가장 비참해지거나 비굴해지지.
힘내. 넌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그 사람들을 멀리서 떨어져서 바라 봐. 그들도 속에는 모두 두려움을 숨기고 있단다. 어쩌면 정말 바보들이야. 눈을 감고 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내일이면 사라질 안개를 움켜쥐려 일생 자신을 파는 사람들. 그것을 행복이라고 속고 사는 사람들. 그냥 한 발 멀리서 바라 봐. 네가 속한 곳은 여기가 아니야. 힘내. 네 곁에 있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친구들을 봐..
[ 우리의 특권, 우리의 긍지 ]
졸면서졸면서 한참을 썼는데 컴이 갑자기 움직이질 않아서 다 날렸네.
어제 밤 네 글에 답을 쓰고부터 갑자기 인터넷이 안되어서 이제야 고쳤어. 참 말성이야.-말썽 ( 난 새끼 손가락이 힘이 없어서 늘 쉬프트 누르는 글자는 두번 쳐야해. )
Y아, 네 말 한마디 한마디 너무나 공감해. 네가 처한 상황이 유리창밖에서 보듯 환히 보여... 너무 맘이 아프다... 너무 아파.. 너희들은 세상에서 잘 적응하고 살 줄 알았는데. 너희들은 나처럼 되지 않기를 그렇게 원했는데.
네 글 읽고 난 후 요즘 또 다시 읽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서 뽀르뚜가의 죽음 부분을 읽다가 엉엉 소리내어 한참을 울었단다.
Y아 넌 혼자가 아니야. 많은 말을 썼었는데 다 지워져서 그대로 다시 쓸수가 없네.
그들의 그런 행동은 지극 당연한 거야. 그게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야. 슬픈 일이지만...
그리고 우리는 절대 그들의 방법으로 그들을 이길 수 없어.
그런데 그게 우리의 긍지요 특권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니? 조용히 패배하는 것. 이 세상의 법칙과 이 세상의 가치, 이 세상의 잣대로는 우리의 정당성과 우리의 옳음과 우리의 억울함을 인정받을 곳이 없어. 우리의 정당함을 판결해줄 법정은 이세상엔 없어. 그래서 늘 그 싸움에서 지고 고통의 형을 사는 거야. 추방되고 낙인찍히고. 무고히 무고히. 그저 혼자 조용히 존재할 자유조차도 보장받을 수도 없지. 그게 순교야. 그게 바울이 말한 "날마다 죽노라"라는 의미야.
날마다 날마다 내가 세상에서 없는 자처럼, 수치를 당하고 부당하게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소리나지 않는 총을 등 뒤에서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사는 거. 그게 날마다 죽는 거야. 우리를 "미말에 둔 자 같이 하셨다"고 하잖아. 미말이란 사형장에 끝려가는 걸 말해. (투기장에서 맨 마지막..) 자기들은 소리나지 않는 총과 칼로 나를 난도질하고도 내가 한번 정당방위로 총을 쏘면 당장 체포당하지. 감히 소리내면서 총질이냐고... 그리고 유배당하는 거야.
그래도 난 믿는단다. 그래도 난 믿어... 그래도 내가 통곡하고 울어도 끝까지 다시 일어서는 이유는, 당당한 이유는, 내가 비록 육신은 세상에 속해 있어 두려움을 느낄지라도 (바울처럼, 다윗처럼) 결론은 "내가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 않음은 -- I fear not evil--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야.
주님은 우리 곁에 계서. 잊지마. 넌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그들 앞에 나아갈때 늘 기도로 무장을 해. 다윗의 말을 봐. 그가 사망의 골짜기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해받는" 거야. 우리가 생각하는 남들이 해꼬지하는 해- 가 아니라 EVIL, 즉 내 영혼을 타락시키는 악을 두려워한다는 거지. (우리 수업 중에 오셀로 공부하면서 했던 말 기억나? 진정 비극은 무엇인지.)
얼마나 차원이 다른 기도요 고백이니. 세상에는 우리가 진정 바라봐야 할 멋진 사람들이, 멋진 믿음의 선배들이 여기 저기 숨어 있어. 내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70명을(400명인가??) 두었노라 고 하시잖아. 우리 시시한 사람들 바라보지 말고 저 높은 곳을 보자. 저 넓은 곳을 보자. 아무리 못 견딘다 해도 생은 꿈같이 지나간단다.
아직 다 안썼어. 또 쓸게.
우선 시 하나 보낸다. 오래전에 누구에게 보낸 시인데 그걸 전도사님이 방에 붙여 놓고 있더라구 해서 용기내서 올려본다.
다시 또 쓸게... 힘내. 네 곁에 주님이 부리시는 천군천사가 있어. 그리고 이기고 지고 그런 거 하지마. 우린 그들이 모르는 양식이 있자나. 세상을 두려워하지마...
야고보서와 로마서 앞부분을 읽어봐. 하늘로서 온 지혜와 땅에서 난 지혜의 차이가 무엇인지. 사람들의 행동이 어쩌면 그렇게 자세히 정확히 적혀있는지. 시기, 질투, 당파지어 남을 거부하기, 자기 사랑, 거짓말, 뒤에서 수근거림.... 너무나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그게 인간의 모습이야. 우리도 옛사람은 그런 사람이었어. 그러니 놀라지 마. 두려워 마. 알았지?
얼마나 인간의 속성이 악하면 10계명에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하셨겠니. 거짓을 '밥먹듯' 먹으며 양식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그게 인간의 타고난 모습이야.
네 생각만 하면 왜 이리 가슴에 마구 분노와 안타까움과 설움이 몰려오는지. 그렇게 똑똑하고 시원시원한 네가. 깔끔하고 깨끗한 성격의 네가 힘든 거 맘이 너무 아프다. 겉만 강하고 "아무치도 않아요 괜찮아요" 하면서 속으론 위경련이 나도록 두려워하고 위축되고 외로워하는 널 알고 있어. 내가 알 때 주님이 모르실 리 없잖아.
왜 우리에게 고난이 닥치는지 나도 모른단다.
얼마전에 E와 백화점 갔다가 갑자기 "잠간 어디가서 쉬자... "하더라구. 내가 금방 알았지. "너 울고 싶구나.." 했더니 끄덕이며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거야. 화장실에서 한참 울면서 그애가 말했어. "고난은 그냥 고난일 뿐이야. 무슨 의미가 있어. 이렇게 망가진걸. 그 고통 때문에 이렇게 불쑥 불쑥 병을 앓고 있는 걸... "
나도 말했어. 그럼. 고난은 그냥 고통일 뿐이야. 뜻이고 뭐고 몰라... 그냥 운명처럼 운이 없어서 걸리는 거야. 그리고 운명을 받아들이듯이 그냥 그걸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어.
그애의 그 천사같이 예쁘던 옛날 얼굴이 점점 어두운 그늘로 덮여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든지..
나도 모른단다. 세상은 왜 이리 엉망진창 진흙탕같은지. 왜 그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꽃을 피우려고 이렇게 아파해야하는지. 다만 세상은 어둠이기에 주님께서우리에게 빛이 되라 하셨지. 세상이 얼마나 악하면 예수님을 못박겠니?
역사상 가장 억울하신 분은, 가장 고독하신 분, 그분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고 그 비밀을 배우며 살자. "네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힘내. 힘내. 넌 혼자가 아니야., -----------------------------------------
그만 아프십시오 |  |  |
바울이 실라와 함께 감옥에 갇혀 찬송을 하였을 때 옥문이 열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찬송이 가져온 기적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 찬송할 수 있다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이때 "기적"은 무엇입니까? 옥문이 열리는 게 기적이 아닙니다. 때로는 스테반처럼 야고보처럼 고스라니 순교당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그 억울하고 알 수 없는 고통 중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며 반항하고 회의에 빠져야 마땅할 상황에서 "찬송"을 할 수 있는 힘, 그 믿음이 기적인 것이 아닙니까? 우리 속에 행하시는 주님의 기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뜻이 있으면 옥문이 열릴 것이고 뜻이 있으면 순교를 당할것이 아닙니까?
바울의 찬송은 옥문이 열리기를 간구하거나 기대한 찬송이 아니었습니다. 옥문이 열리자 죄수를 다 놓쳤다고 당할 일이 두려워 간수는 자결을 하려합니다. 그때 바울이 우리가 여기 있다며 그를 말렸습니다.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그가 할일을 했습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간수와 가족이 모두 믿고 간수는 그의 매맞은 상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기적은 바울을 탈출시킨게 아니라 한 가정을 구원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이보다 더 한 일도 할 수 있거니와 그런 나를 믿는가? 베드로가 흥분하여 예수님을 결박해 가려는 로마병사에게 칼을 휘둘렀을 때 그가 병사의 잘린 귀를 도로 붙여주시며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까? (그 기적을 행하시면서 왜 자신은 무력하게 매를 맞고 수치를 당하고 끔직한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까? 그가 세상에 온 이유를 완성하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에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을 줄 아느냐... "
바울이 자신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인생의 상황들을 "믿음"으로 받았을 때 주님은 바울이 사는 이유를 하나하나 성취해 나가셨습니다. '내가 저를 통하여 내 뜻을 이루리라' 하셨던 다윗이 실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또 시험에 들고 하였습니다만 주님은 그를 만들어 가셨고 그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결코 나를 포기할 수 없는 그 사랑으로 내 속에서 시작하신 "착한일--선한 그 뜻"을 다 이루시기 까지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연금당한 (물론 지하감옥에서 나왔습니다) 5년동안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로마의 정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정치인,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었던 그 사람들로 인해 결국 로마가 후일 기독교 국가가 되게 됨을 바울은 모르고 숱한 고난 끝에 순교를 당합니다. 그는 가장 큰 실패자였지만 동시에 성공자였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수용하는 눈--그것이 생의 아이러니를 깨닫는 눈입니다. 생의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이중시각을 줍니다. 즉 우리가 겪는 사건을 인간의 눈으로 볼 뿐 아니라 동시에 영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영원의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영혼의 눈"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눈입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는' 믿음의 눈은 우리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되는 축복을 줍니다.
바울의 선언을 보십시오.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한 그가 "범사에 감사하라"합니다. "항상 기뻐하라"합니다. 이런 아이러니는 성경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이 남긴 잠언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게 헛되다"입니다. 세상에 새것이 없더라. 내가 지혜마저 구해보았으나 그도 헛되다...
당신이 그렇데 포기하고 싶고 버리고 싶어하는 '세상'은 그만큼 속하고 싶어하는 그래서 자꾸 더 상처입는 세상이 아닙니까? 내가 관심없다고 자꾸 밀어내는 것은 사실은 상처받기 두려워 관심없다 먼저 밀쳐내며 돌아서서 혼자 아파하는 것아닙니까? 맞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무관심합니다. 참으로 냉혹하게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부축이고는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외로운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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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우연히 가롯유다에 대한 한구절을 읽다가 다시 머리를 끄덕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가 예수를 판 것을 후회하고 스스로 뉘우치고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내가 무고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며 예수 판 값으로 받은 은 30량을 돌려주려하자 그들이 말하지요.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마태27) 참 무서운 말입니다. 네가 그 죄값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악한 행위를" 부추기고는 책임은 져주지 않는 세상... 우리는 그 세상을 쫓아가느라 지칩니다. 그것 세상이 준 보상은 은돈 30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그렇게 버리고 싶은 그런 세상을 버리는 길은 하나입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다시 말하거니와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하지만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악을 행하는 자들도 모두가 가해자이기 전에 피해자(불완전함이야말로 실존적 죄를 가르키는 말이라 생각합니다.)임을 이해하고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잘못이 아닙니다. 내가당하는 모든일에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세상이 그럴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를 용서하고 상대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큰 자가 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들은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예수님이 고난받으시기전 제자들을 위한 긴긴 기도에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분명 고통을 인정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너희의 믿음이라(요한 1서)
진정 진정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아무곳에도 우리를 이르게하지 못할 허망한 생각 대신 진리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때 진리는 예수님 자체입니다. 그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인격체"인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내가 곧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우리의 영혼과 생각이 양식으로 삼지 않으면 안되기에 자신을 떡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이유도 그때문입니다.
당신은 정말 계속 자신을 그 아픔속에 방치하고 싶은건가요? 정말 낫고 싶기는 한 것입니까? 아프지 않을까봐 두려운건 아닌가요? 진리속에서 아픔이 진정한 생산적인 아픔인 것을 알지 않나요? 그렇지 않은 아픔은 나를 어느곳에도 데려가주지 못합니다. 퇴행과 허망한 챗바퀴, 두려움과 끝없는 도피밖에 없습니다.
용감히 뒤돌아 서서 뛰어 나오길 바랍니다. 그 흐름에서 표류하지 말고 날아 올라 자유를 얻기 바랍니다. 더 이상 당신의 아픔을 바라보는 일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아픈 당신을 보느라면 너무 내가 아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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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글이다. 내 개인 홈페이지에서 HS학생(지금은 유학중. 아기아빠이며 전도사님이다.)과 주고 받았던 글.
2003년 9월 15일 "발가벗은 한 그루 가을 나무의 용기와 겸허로 밤새도록 밤비처럼 처절한 기도로 울 수 있게 하소서" (유안진)
hs가 다녀갔다. 온 단 말도 없이 조심스런 노크소리와 함께. 자기에게 이 가을 필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 글을 적은 책 한권을 내밀었다.
반가운 손님은 그 자체가 큰 선물이다. 예기치 못한 기쁨. 어느 시린 봄날 아침 아직 다 떠나지도 않은 겨울을 이기고 고개내민 파란 싹을 만나는 기쁨처럼 가슴이 훈훈해진다.
삶의 고달픈 여정에도 항상 길가에는 의자모양 돌이, 누운 고목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 쉬어가라고. 감사한 일이다.
쌓인 일들과 두번 다시 쳐다보기도 싫은 교정원고 앞에서 봄볕에 녹는 겨울 눈처럼 졸다가 불현듯 깨어나 hs가 주고 간 책을 들쳐본다. 내 졸음은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한 내 육신의 소리없는 반항임을 알기에. 어쩌면 하나같이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수 있을까? 어떻게 이들은 온실에 비친 햇살같은 따뜻함을 황야 한복판에서 일궈내어 도란도란 여성스럽게 들려줄 수 있을까? 질투심 섞인 부러움에 이번엔 또 다른 졸음이 날 마비시킨다.
난 아직 입원중이다. 내게 세상은 거대한 병원이다. --------- RE: 9. 16. by HS
세상은 거대한 병원... 어떤 병원인가요? 한 때, 세상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한눈에 보기에도 결벽증과 약간의 정신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만한 한 아주머니를 보며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더러움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 눈에 결벽증 환자처럼 보이는 저 아주머니가 정상일지 모른다고, 미친 세상에 우리 모두가 미쳤기 때문에 그 더러움을 모른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나도 미쳤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거라고...
그 때 저는 창조주란 없다고, 있어도 떠나겠다고, 벌을 내리려면 내려보시라고 반항하던, 그리고 점점 염세적으로 생각이 번지던, 그래서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던 때였습니다. 죽음이란 결국 정상인이 미친 세상에서 택하는 마지막 탈출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 그러나 저는 그 때에 이미 벌을 받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때로는 축복입니다. 옛 선지자들이 그토록 외치던 "돌이키라"는 명령에 귀를 기울일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벌인지도 모른채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은 그 얼마나 큰 형벌인지요.
너무나 감사하게도 저는 형벌을 받고 있는 상태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때에 "돌이키라"는 명령을 깊이 생각했으며, 그리고 지금의 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언제든지 어두움을 택할 수 있는 유약한 존재임에는 틀림없겠지요.
이런 말씀은 드리지 못했지만, 비젼이 확고부동해야 한다는 말에 대해 동의는 하면서도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처럼 염세적인 생각은 아닙니다만, 때로는 '세상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란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은 확신을 하고 있지만, 어쩌면 신의 존재를 있다 없다 논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싶어(다만 믿을 뿐이라는 뜻에서) 불가지론에 매력을 느끼기도 합니다. 위험한 생각인가요?
세상은 거대한 병원이라는 글귀가 지난날의 저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를 또 생각하게 합니다.
"발가벗은 한 그루 가을 나무의 용기와 겸허로 밤새도록 밤비처럼 처절한 기도로 울 수 있게 하소서"
진정 제게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렸던가요? 어릴 때 선생님이나, 대학에 와서 교수님이나, 그 앞에 서면 너무나 어렵고 불편한 생각만 들었었다는 것을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선생님은 많이 다르네요. 불편한 마음이 전혀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지금까지 제가 만난 다른 선생님이나 교수님들과는 많이 아니 전혀 달라요. 감사합니다. 늘 거기 계셔서 들어주시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RE:RE to HS 9. 17.
어둠은 밝음을 사모하기에 인식되는 어둠입니다 애통함은 나의 연약함에 대한 끊임없는 깨어있음으로 인한 절망입니다. 세상의 온갖 아픔을 바라보기에, 그들의 시기 질투 욕망 외로움 갈증 두려움 대인기피 과대망상 피해의식 맹목적인 사랑 우매함 판단과 지혜의 눈이 먼 안과질환 이기심 착각... 모든 것이 다 그들의 '아픔'이기에 그것을 바라보는 슬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쁜 사람입니다. 기어이 환희와 밝음과 따스한 웃음 뒤에 다시 찾아올 어둠을 너무 또렷이 찾아내고야 맙니다. 누군가의 밝음이 딛고 선 발밑에 눌린 어둠을 또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변성과 무상함을 알면서 나도 이 땅위에 중력의 법칙 속에 얽메어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바울처럼 말합니다. 내가 둘 사이에 끼었으니... 나의 원하는 바는 이곳을 떠나는 것...이지만 만일 내가 이 곳에 존재할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다면, --너희에게 유익하다면-- 이곳에 있는 것이 내게 옳다는 것이지요. 그게 사나 죽으나 의미있고 유익하다는 거지요. 세상이 병원이라는 말은 나를 제외시킨 비판적인 말이 아닙니다. 나를 포함한 인간들의 "아픔"--악함이라는 궁극적인 병, 죄(허물)라는 깊은 병에서 스스로를 치유할 길 없는 그 사실을 바라보는 슬픔을 이야기 합니다. 누가 감히 아, 기쁘다 주님이 그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나는 기쁩니다. 정말 기뻐요. 불가능이 없어요. 주님만 믿으면... 이라고 용사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절대 나는 배반하지 않아요. 죽기까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확신했던 베드로처럼요? 우리도 주를 배반했던 베드로처럼 기껏해야 이렇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백할 뿐이지 않은가요?
"네가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나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감히 맹세하듯이 큰소리 칠 수 없어요. 난 언제 또 당신을 부인할 지 몰라요. 언제 또 세상과 타협하거나 외로움에 몸을 떨며 모든 걸 포기해 버리고 싶어지거나, 나태해져서 세상을 포기한듯 우울해 질지 몰라요. 언제또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저주하거나 내 알량한 선악의 판단으로 남을 정죄하며 미워할지 모릅니다. 언제 또 당신을 외면한 채 골방에서 혼자 쓰러져 꼼짝도 않고 생을 낭비할지 모릅니다. 오직 당신만이 지금 고백하는 이 사랑이 진심임을 아시며 동시에 그 "진심"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도 아십니다. 내 고통이 무서워 그 진심을 언제 가치없는 것인양 부인할지도 아십니다. 내 진심은 그렇게 거짓으로 어느순간 변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은 그리도 여전히 '사랑합니다....'입니다. 당신만이 나의 진심을 아십니다...
병들지 않는 사람이 없기에 아무도 대적할 수 없어서 --사실은 미운데, 저러면 안되는 데 하고 화가 나는데--내 속에서 늘 싸웁니다. 이것도 나의 무기력함에 대한 교묘한 합리화이면 어쩌나하고 갈등합니다.
또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맘 깊이 상처를 안고 병을 앓고 살아가는 것을 보는 아픔이 너무 큽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내가 해주고 싶어도 그 도움이 그들에게는 무의미하기에.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 중 가장 힘겨운 것은, 아니 가장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연약함과 별볼일 없음과 절망을 안고도 등에 지고도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의 길을 또 무겁게 무겁게 발자국을 떼며 조금씩 가는 것이지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갖는 것은, 내 속에 없는 그 무엇을 믿음으로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각오가 없이는 난 언제 또 쉽사리 넘어져 버릴지 모릅니다. 난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 각오 없이는 하루에도 열번도 더 분통을 터뜨리거나 나를 미워하거나 남을 비난할지 모릅니다. 항상 환자복을 입고, 때로는 병든 몸위에 가장 깨끗한 의사의 가운을 입고 나와 남을 대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면하는 사람들은 모두 연약한 환자들( 나처럼) 이니까요. 사랑스럽지 않기에 오히려 더 큰 사랑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이며 우리모두이니까요.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들 어딘가 아파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해본 사람은 상대가 앓고 있는 병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용어를 좀 쓰자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 더 "제도화된" "학습된" 용어를 쓰자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아, 이 놀라운 두렵고 떨리는 엄청난 말을 사람들은 구구단 외듯이, 군번 외듯이 외워서 나의 존재이류라 소리높여 외치지요.--는 것이 무엇인가 아주 쬐끔이라도 매일 생각하며 산다면 ) 매일아니라도 어쩌다라도 진지히 생각하며 산다면 내가 병들어 있으며 치유받아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바로 병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사랑할 수 없고 의로울 수 없는 우리를 그것이 가능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것 아닌가요. 이 병든 영혼으로는 사랑은 불가능하니까요.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랑을 받는 일도 못하니까요. -----
=============== 내가 너무 바빠서 그 후 그의 편지에 답장도 못하고, 소식을 주고 받은 지도 한참 되었다. | 언젠가 내가 인천으로 특강을 가면서 버스 멀미로 거의 몸을 가눌 수 없었던 적이 있었지. 그때 용케 강의는 끝내고 HS에게 도움을 청했었다. 다시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갈 수 없을 듯해서. 그리고 그의 차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중간 중간, 하다못해 고속도로에서도 갓길에 세우고 토할 것도 없는
빈 속에서 초록색 물을 토하며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가 했던 말, 교수님도 정말 힘드시고...... 가족들도 힘드시겠어요..... 그 말이 내게 비수처럼 꽂혔던 기억도 난다.
그는 지금 미국에서 목사님으로 목회하고 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미 예전에 그랬었듯이............ |
You needed me, Sung by Anne Murray
내가 눈물 흘렸을 때 당신이 닦아 주었고
내가 혼동 중에 방황할 때 당신은 내 의심을 씻어주었습니다.
내 영혼을 팔았지만 당신이 내게 되찾아 주었고
날 높이 올려 존귀함 주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내가 필요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다시 홀로 설 힘을 주었고
내 혼자 힘으로 세상과 맞설 수 있게 해주었고
날 높이 올려 존중해 주니 너무 높아 영원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필요했어요, 당신은 내가 필요했어요.
바로 당신이라는 게 믿을 수가 없어요, 그게 사실이라는 게,
나 당신이 필요했는데 당신이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난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내가 왜 바보같이 떠나겠어요?
마침내 진정으로 나를 염려해주는 그런 사람 찾았는데.
내가 추울 때 당신은 내 손 잡아주었고
길을 잃었을 때 날 집으로 데려다 주었고
막다른 길목에 몰렸을 때 내게 희망을 주었으며
나의 거짓도 진실로 다시 바꾸어 주었습니다
날 친구라고 부르기까지 하면서.
당신은 내가 필요했던 거에요. 당신은 내가 필요했던 거에요. -------- 이 노래가사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힘들고 지치고 넘어지고 외로운 것은 나였는데... 그런 내게 "당신이" 다가와 손 내밀어주었는데, 내가 그렇게 절실히 바라고 필요로 하던 "당신"이었는데... 오히려 "당신이 나를 필요로 했었다(You needed me)"고 노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린 말하죠. '난 당신없인 안돼.' 그거 아세요? 부모님도 나 없인 안되는 것을요. 밤낮 속썩이고 실망만 시키는 연약한 내가 부모님을 필요로 하는 줄 알았는데 뭐든 다 하실 수 있는 어른인 부모님이 바로 날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심바에게 고백하던 아버지의 고백을 기억하세요?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하지 못할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동물의 왕인 아버지 사자가 '오늘 두려워서 죽는 줄 알았다.'고 "사랑하는 널 잃을까봐 두려웠다고" 고백하는 것을.. )
하나님도 우리 없인 안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아십니까? '난 네가 필요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이때 피곤, 곤비는 영어로 sick and tired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쳐서 진력이 난다는 뜻입니다. 실망하고 포기하고 싶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내게 피곤해하지 않으십니다. 나도 자꾸 나에게 실망하고 지쳐가는데 그래서 자존감도 용기도 희망도 다 사그라져 그저 누워버리고 싶은데 주님은 아니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보다도 더 잘 이미 "나의 불가능성과 나의 나약함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대신 내 안에서 그의 일 (착한일, 선한일, 나를 주님 닮아가게 키우는 구원의 완성-빌립보서)을 시작하시고 이루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자여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나의 가는 길이 이렇게 캄캄하고, 외롭고, 고단하고 힘들어도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도 나는 어제의 나와 하나도 달라진 거 없는 것처럼 또 실패를 반복하는데 주님은 나를 붙들고 계시다 합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어디 곁에 있다는 말인가 하고 대뜸 반발심이 일지 않습니까?
시편 23편에서의 고백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쉴만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며...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여호와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이라.
가만히 보십시오.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에 그가 탄탄대로로 걸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쉴 만한 물가로 인도받는 그 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valley of the shadow of death)"입니다. 그런데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죽을 것 같이 힘든 그늘진 골짜기에서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바로 "害(해)" 이기 때문이며 그 해로 부터 보호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해란 손해보고 세상에서 실패하고 외면당하는 것이 아니라 Evil, 즉 악을 말합니다. 내가 악으로 부터 보호받는 것 이것이 "부족함이 없는 삶"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달할 쉴만한 물가,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 비밀을 깨달아 안 사람들은 인생길에서 피곤하고 곤비하고 넘어지고 자빠지되 여호와의 지팡이(인도)와 막대기(보호)로 인해 독수리처럼 날개치는 존재인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자 같고 이름없는 존재이며 외톨이인 우리가 가진 "그럼에도"의 권리와 승리와 힘의 "비밀"입니다. 세상과 나의 삶과 나를 새롭게 보는 눈입니다.
나의 귀한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강하다는 게 무엇인줄 아느냐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이것이 바로 그 친구가 말한 웃을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신음소리까지 다 듣고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힘이되는 지요.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나보다 더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침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다. (이사야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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