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갑자기 하늘 나라로 가신지 벌써 4년이 되었다.  까마득해 보이기도 하고,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오늘 밤엔 저 먼 곳 별이 되신 보고픈 얼굴들이, 별이 되어 내 가슴에 뜨고 지는 분들이 자꾸만 그립다.

아버지, 엄마, 언니, 오빠.... 

떠나간 사람들이 남긴 빈 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길이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훗날 아쉬워할 일들을 아무 생각없이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은 내 곁에 머물러 있을 거라 합리화하면서.....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고,  내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더 급하다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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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4.

 

큰오빠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신 지 일주일 째 되는 날이다.

물론 오래 앓으셨지만 갑자기 어느날 아침 떠나실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에게 아주 특별했던 큰오빠, 가족 중에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시고 보살펴주시고, 내가 아버지 같이 의지했던 오빠.

어린 시절 서울에서 내려올 때마다 동화책을 한 아름 사다 주시면 외도록 그 책을 있으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오빠 방에는 철학책, 시집, 화집, 문학전집 등 책으로 가득 찬 책장이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일어, 불어, 영어 등 외국어 책을 쑤알라 쑤알라 하면서 읽는 흉내를 내었던 기억이 난다.

오빠방 하얀 커버가 씌워진 안락의자에서 나는 엄마 품에 안긴 듯, 참 포근했었다.

오빠가 벽에 걸어 놓은 고흐, 고갱, 세잔, 르노와르, 마티스 등등의 그림들은 어린 내게도 얼마나 큰 경이로움과 알 수없는 위로와 기쁨을 주었던지.

오빠가 전축에서 들려주시던 클래식 음악들,  오빠가 즐겨 부르던 영화 "셰인"의 주제곡,....

 

어린 시절 오빠는 가끔 나를 불러서 외국 시를 읽어주셨다.  10대의 시인이라면서 프랑스 여자아이의 시를 읽어주던 기억도 난다. 긴 겨울 밤 한 이불 속에서, 또는 짧은 여름 밤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별을 보면서 듣던 엄마의 구수한 옛날 얘기처럼 오빠의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내게는 참 따뜻하고 소중하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교내 글짓기대회 교장상은 물론이고, 시장, 그리고 도지사 상을 늘 받았던 기억이 닌다.  그 어린시절 내 꿈은 소설가였다.  그 꿈을 하얗게 잃어버린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그래서 나도 오빠처럼 대학교 때 모든 선택과목을 철학으로 했었을까? 
철학과 문학과 음악과 미술.....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는 마음의 문을 열어준 오빠. 

 

7남매의 막내로 그것도 다섯째 딸로 엄마 나이 40에 태어난 나(어쩌면 반갑지 않아서였을까?)-- 엄마는 간난아기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던거 같다. 어느 날 오빠가 안방에 들어가보니 핏덩이인 내가 빈 방에서 혼자 꼬므락거리면서 오빠를 쳐다보는데 갑자기 그렇게 측은할 수가 없으셨단다. 그때부터 오빠는 날 유난히 사랑하셨다.  크면서 유달리 애교가 많았던 나를 보며 오빠는 늘 우리집에 막내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어요, 라고  하셨단다.  엄마 젖이 나오지 않아서였을까, 간난아기 때 몇일이고 밤 새 울기만 하여서 엄마는 얘가 이러다 죽으려나보다 하셨단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아이용 분유도 우유도 없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날 오빠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분유(당연히 전지분유)를 사오셔서 그걸 (젖병도 없던 시절이니) 그릇에 타서 수저로 떠 넣어주었더니 간난애가 한 대접을 다 받아먹고 그 날로부터 색색 잘 자더란다. 그래서 엄마는 그 때 미안했다고, 넌 어려서 젖을 주려서 몸이 약하다고 늘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 오빠가 명동 찻집에 친구들 만나려가면 나를 꼭 데리고 다니시면서 따뜻한 우유(역시 분유를 탄 것)을 시켜주셔서 그때 그 맛을 못 잊어서일까,  나는 유난히 따듯한 우유를 좋아한다.  아직도 여름에도 우유를 뜨겁게 데워 마시곤 한다. 

 

결혼하고 뒤늦은 나이 유학을 떠났다 돌아왔을 때 친정 가까이 살면서 엄마가 우리 딸을 키워주셨기에 오빠는 자연스레 우리 딸을 키워주신 셈이 되었다. 내가 수없이 이런 저런 일로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아플 때 마다, 무슨 교통사로라도 날 때마다,  성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기우뚱기우뚱 걸으시며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달려오셨던 오빠...... 내게는 은인인 오빠.  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하는 삶을 가르쳐주신 오빠. 병약하셨던 아버지 대신 내가 의지했던 오빠.

 

헌칠한 키에 넓은 이마, 오똑한 콧날,  멋스런 모습.
나이들어서 병원에 초췌한 모습으로 입원해 있을 때도, 요양병원에서도 모두들 잘 생기셨다고 하던 오빠.

담배를 좋아하셔서 늘 손에서 구수한 옥수수 냄새가 났던 오빠.

머리가 유달리 뛰어나신 오빠.

옷을 멋스럽게 입었던 오빠.

미술재능도 뛰어나셔서 그림으로 중고시절 정부에서 보내줘 중국까지 다녀오신 오빠.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던 철학공부를 못하고, 예술공부도 못하고 맏이라서 실용적인 공부를 하셨어야 했던 오빠.

(결국 문리대 철학과를 학사편입으로 나오시긴 했지만)

7남매를 다 보살펴주신 오빠. 책임감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고 성실하셨던 오빠. (그래서 얼마나 버거운 삶이었을지... 그래서 그런 조건 때문에 원하는 결혼도 할 수 없었던 오빠)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 주변에 힘든 사람들을 늘 가족처럼 초대해서 함께 지내고 돌봐주던 오빠.

늘 아랫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했던 오빠.

그렇게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오빠.

꽃과 나무를 좋아하셨던 오빠.

이제는 우리 곁에 없다.

내 곁에 없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리 허망히 가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찾아뵐 걸.....


 

육신의 고통이, 통증이 이리 절대 고독인 걸 내가 그때는 왜 미처 몰랐을까?
왜 우리는 늘 나 살기 바쁘다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곁에 있을 것처럼 착각을 선택하는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일까?

오빠 사랑해요.  감사해요.
그리고... 너무 미안해요...

아픔 없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너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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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해야하는 세가지

그건 죽기 마련인 모든 것을 사랑하기,

당신의 삶이 거기에 기대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은 가슴 깊이 끌어안기,

그리고 놓아보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놓아 보내기. 

(M. 올리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