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인사동에 모였다가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하모니즘으로 유명한 김흥수 화백(1919-2014)의  작고 1주기전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의 강렬한 색채에 매료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수십점에 이르는 대작들을 맘 껏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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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1919-2014)의 작품 세계는 구상과 추상의 이질적인 요소 간 조화를 꾀하는 ‘하모니즘’으로 통한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17세의 나이로 제16회 조선미전전람회에 입선해 실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1955년 프랑스 유학을 통해 야수파, 입체파 등을 섭렵하며 다채로운 색채의 쓰임을 터득한다. 1967년부터 12년간 미국에 체류하며 교직과 창작활동을 병행했던 그는 귀국할 무렵인 1977년 하모니즘을 선언하며 예술가로서의 전환점을 맞는다. 하모니즘은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동양사상이 모태다. 구상과 추상이 공존할 때, 즉  서로 상반되는 극과 극이 하나의 세계로 어우러질 때 화면이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미술관을 담고 있다. 즉 화면에 대상은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정신은 추상으로써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 당시 추상회화의 출현 그 자체는 나의 흥미를 끄는 초점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새로운 양식을 무조건 따를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비전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음과 양이 하나로 어울려 완전을 이룩하듯 사실적인 것과 추상적인 두 작품 세계가 하나의 작품으로서 용해된 조화를 이룩할 때 조형의 영역을 넘은 오묘한 조형의 예술세계를 전개하게 된다. 이것은 궤변이 아니다. 진실인 것이다. 극에 이른 추상의 우연의 요소들이 사실 표현의 필연성과 조화를 이룰 때 그것은 더욱 넓고 깊은 예술의 창조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피카소'로도 불렸던 김 화백은 '누드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43세의 나이차를 극복한 사제지간의 사랑과 결혼으로 작품 외적으로도 큰 관심을 받았다. 30년 세월을 함께 한 아내는 1년 6개월 먼저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국민일보 손영옥기자 글과 네이버 뉴스 정순민의 글을 참고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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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는 88올림픽 때 초기 하모니즘 대표작품 16점이 당시 표구상의 화재로 인해 모두 불타버리는 사건을 겪었었다. 그 충격은 우리들은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그 일을 떠올리면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간 것 같아 그 후로도 계속 악몽에 시달린다고 할 정도였다.  (그 당시 우리에겐 김흥수의 그림이 한 점 있었고 김흥수화백이 자신의 그림을 찾는다는 말이 있었다. 어느날 슬그머니 그 그림은 없어졌다.... ) 전해지는 말로는  전화로 소식을 먼저 전해들었던 김흥수에게 표구상 사장님이 집문서를 들고 찾아갔으나 화백은 아파트가 떠나가라 “으으음!” 하는 동물울음 같은 괴성을 토해내고 그뿐이었다고 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할 수 없지. 다시 그려야지” 하면서 찻잔을 드시더란다. 물론 손해배상 같은 말은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마음에 계속 남아있는 그림들 중  몇 점만 찾아서 올려본다.

 

김흥수- 허세

 


음과 양

 

 

망부가

 

 

 

미의 심판

 

 

 

 


전쟁과 평화 

 

올 여름엔 뉴욕을 못가서 허전했는데 김흥수전과 디올전으로 조금이나마 위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