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마음 풍경: 그림저널쓰기

(c)2009BongheeLee

 

 

 

이봉희, PhD

미국공인문학치료전문가(CPT)

공인저널치료전문가(CJT)

상담심리사

나사렛대학교대학원 문학치료학과 교수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 소장 

 

 

 

저널치료의 기법 중에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그림저널이 있다. 치료로서의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저널에 그리는 그림은 자기표현의 수단이지 남을 보이기 위한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또 화가들을 무척 부러워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미술시간에 특별한 칭찬을 받아본 적도 없다. 하지만 때로 언어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언덕 끝에 서는 날은 저널에 그림을 그린다. 이곳에 나의 해묵은 그림저널 중에서 시와 연관된 단상 몇 개를 실어본다. 어떤 글은 신문에 연재되었던 본인의 문학칼럼에서 가져온 것도 있다.

 

 

I. 집이 없었다.

 

(그림: 이봉희)

 

외딴 곳

집이 없었다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어디 울 곳이

없었다 (김용택 - 슬픔)

 

지난주는 갑자기 눈보라가 쳤다. 슬픈 재즈 같이 젖은 눈이 아프다는 소리도 없이 잿빛 바람에 마구 휩쓸려 불려 다녔다. 누군들 곱게 하얗게 내려 쌓이고 싶지 않을까....

세상은 온통 고장 난 시계처럼 하루 종일 희미한 눈을 뜨고 있었다. 다 타고난 재가 불어오고, 불려 다녔다. 공연히 해묵은 아픔이 가슴을 적셨다. 이 작은 냉기에도 마음이 또 다시 위축된다. 하루하루 손에 남은 건 녹아버린 눈송이 같은 젖은 방울 몇 점 뿐.

해 놓은 일도, 남겨진 것도 없이 무산된 계획만 헛손질하며 가버리는 하루, 하루, 그리고 또 하루....늘 손잡아 주던 엄마가 이젠 혼자 가라고 나를 남겨둔 정류장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초조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이런 날은 어려서부터 공연히 서둘러 집에 가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시인은 그런데 집이 없었다고 한다.

외딴 곳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늘 반복되는 일상의 삶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익숙하던 길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날이 있다. 잿빛 바람이 불고 날은 쉽게 어둑어둑해지는 겨울날이 우리 삶의 여정에는 누구에게나 있다. 외딴 곳, 침침한 곳에서 시인이 집을 찾는 이유는 울 곳이 필요해서이다. 우리 모두 길을 잃은 듯 외로운 날,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서로에게 이슬을 막아주는 지붕이 되고 기대어 울 수 있는 벽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는 동으로 난 작은 창이 되어 이 외딴 세상에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내 맘대로 시를 고쳐 써본다. “외딴 곳,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작은 창에 불이 켜졌다. 나는 그대의 가슴에 들어가 내 이름 없는 설움을 비워내며 조용히 울었다.” (2005)

 

 

II. 나도 시를 쓰고 싶다.

 

"갈매기가 푸른 하늘에 를 쓰고 있다.

나도 시를 쓰고 싶다."

 

어느 누구의 시인지 모른다. 다만 대학시절 노트 표지에 적어 두었던 인 것만 기억한다. 시인은 어느 날 시를 쓰기 위해, 아니 어쩌면 사랑하는 이에 대한 묘사를 하기 위해 애를 써 본다. 이렇게 표현해도 저렇게 그려봐도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다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언어의 한계를 느낀 시인은 아무 것으로도 채우지 못한 작은 하얀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절망하고 만다. 그리곤 피곤한 눈을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 때 시인은 놀랍게도 갈매기가 그 넓은 푸른 종이 위에 시를 적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인이 발견한 시는 무엇이었을까. 갈매기는 하늘 위에서 사랑한다고 언어로 시를 쓴 것이 아니다. 세상을 향해 소리 높여 노래와 찬양을 한 것도 아니다. 갈매기는 다만 푸른 하늘 위를 날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 바로 이것이 시인이 발견한 시였다. 시인은 갈매기의 삶 자체,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시가 된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독일의 한 철학자는 신들의 말, 우주의 말을 눈짓이라고 표현하면서 시인은 이러한 눈짓을 포착해서 다시 사람들에게 눈짓으로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닮아간다. 그렇기에 우리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나의 사랑의 표현, 즉 나의 시는 바로 그렇게 그 대상을 닮은 눈짓과 날갯짓이어야 한다.

말보다 더한 나의 삶으로, 그분의 모습 닮은 내 존재 자체로 쓰는 시, 이것이야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 세상에서 내가 평생토록 써야 하는 연작시이라는 것을 저 짧은 한 줄의 시가 어느 날 내게 깨우쳐주었다. 횔더린은 빵과 포도주라는 비가(悲歌)에서 '이 궁핍한 시대에 누구를 위한 시인인가?'라고 묻고 있는데 이 가난한 시대에 그 분을 위해 연약한 나는 어떤 시가 되어 살아가야 하나 눈감고 기도해본다.

제 영혼은 저 높은 곳을 향해 푸드덕거리는 어린 새입니다. 세상이 나를 땅위에 묶어 놓을 수 없게 높이 나는 새가 되고 싶습니다.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그런 새처럼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 힘찬 날개를 달아 주세요. 자유로이 저 높은 창공 위에 시를 쓸 수 있도록. 나의 삶 자체가 당신께 바치는 진실 되고 아름다운 시가 되도록.”

 

III. 나는 슬픔은 건널 수 있어요

 

나는 슬픔은 건널 수 있어요

가슴까지 차올라도

익숙하거든요.

하지만 기쁨이 살짝만 날 건드리면

발이 휘청거려 그만

넘어집니다취해서.

조약돌도 웃겠지만

맛 본 적 없는 새 술이니까요

그래서 그런 것뿐입니다.

(에밀리 디킨슨-“나는 슬픔은 건널 수 있어요일부/필자 역)

 

 

(그림:이봉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몇 꼽으라면 주저 없이 에밀리 디킨슨을 떠올린다. 에밀리 디킨슨을 알게 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대학교 2학년 때 한 선배가 편지에 적어 보내준 시(A Bustle in a House)를 통해서이다. 나는 곧 이 여자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평생을 자신이 태어난 곳과 집을 떠나 살아 본 적이 없는 여자. 항상 흰 옷을 입었다고 알려진 여자. 이루어질 수 없는 한 사람을 사랑하고 혼자 살았던 여자. 그런데 그녀의 시는 마음 깊은 곳과 저 먼 우주를 종횡하고 있다.

영혼의 여행자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 “나는 슬픔은 건널 수 있어요는 나이가 들도록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는 오랜 친구 같은 노래이다. 저벅저벅 가슴에 출렁이는 물을 건너 하룻길 삶을 살다가 문득문득 목이 차오르면 꺼억꺼억 울며 나는 물새들이 부러웠다. 그 때마다 나는 꺼억꺼억 우는 대신 이 시를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슬픔은 저벅저벅 건널 수 있어.......그래, 익숙잖아. 뭘 새삼.

위태롭게 금이 간 유리병 같은 내 몸엔 항상 물이 넘칠 듯 고여 있어서 누군가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늘 홀로 걸었다. 황혼이 너무 뜨거워, 고개 숙인 내 눈길을 맞아주는 풀 섶에 숨은 좁쌀만큼 작은 꽃이 너무 반가워, 새벽 별이 너무 시려, 누군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너무 따스해, 아무 뜻 없이 지나가는 바람일 뿐인데 꼭꼭 덮어둔 간절한 마음이 펄럭여.... 그만 삐걱하고 발을 헛디디며 흔들리면, 바보처럼 휘청거린 나에게 말해주곤 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맛보지 못한 새 술이잖아. 다시 꼿꼿이 걸어가면 돼.

나는 거인도 아니며 거인이 되고 싶지도 않지만 내 삶은 늘 그것을 내게 요구하는 듯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건 당신이 그렇게 선택한 것이라고.

거인들에게 향유를 주어보세요/ 평범한 인간들처럼 나약해질 테니./ 그들에게 히말라야 산을 주면/그 산을 번쩍 들고 갈 것입니다.” (2008)

 

 

IV. 여러 개의 언어를 알았으면 했지

 

사람들의 끝없는 잡담. 퍼붓는 그 위로 나는 쓰러진다. 그들은 공허하게 지껄이고 또 되뇐다. 얼굴을 맞대고 있으나 눈길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람들. 그들이 들어줄, 혹은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된다면?” (마틴 발저)

 

 

(그림:이봉희)

 

물질문명, 고도로 성장한 기계문명이 낳는 인간사이의 단절을 단적으로 예견하는 신화가 있다. 바로 황금의 손, 마이다스(Midas) 이야기다. 경제계에서 마이다스의 손'은 황금알을 낳는 성공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 만큼 비극적인 인물도 없다.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변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딸조차 금으로 변하고 마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접촉마저 불가능한 저주로 변한 물질과 성공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마이다스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접촉 불가능성을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신화의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기계문화 속에서 인류역사상 어느 때 보다도 그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산다. 이제는 내 책상에서 세계로 가는 창인 컴퓨터로도 모자라 손에 들고 다니는 작은 기계 속에 온 세상이 들어와 있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의 통로가 열려있다. 내 손안에 들어온 세계. 그러나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해보면 내 손안에 세계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이테크시대의 거대한 기계문명의 손바닥 속, 가상공간이 만들어 내는 환상의 손바닥 속에 우리가 갇혀있는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갈수록 소외되고 의사소통은 무의미한 언어들로 단절되고 있다. 난무하는 말장난들, 기호들, 부호들, 은어들, 거짓말들이 언어의 폭력이 되어 우리의 귀를 오염시켜버렸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진정 존재를 지키는 파수꾼인 시인들은 없는 것일까? 의사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언어는 너무나 허망한 그리고 때로는 위험한 암호라는 생각이 든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없다면. 추측은 고통이다. 그렇기에 추측하도록 버려두는 것은 무례한 행동을 상대에게 부추기는 잔인한 일 일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 말이 무섭다. 제 맘대로 오해를 불러오는 괴물 같기도 하다. 아니면 사람들이 각자 암호이며 부호(sign. cipher)인 언어에 제 생각의 숨결을 불어넣어 원하는 대로 자의적으로 살려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각자 자신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는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자의적인 해석에 따른 의미"를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중요시해서 자신이 만든 괴물이 살아있는 생명을 잡아먹게 하고 있다. 모두가 인간 대 인간의 진실 된 의사소통의 수단인 언어가 하이테크시대의 기기들을 매개로, 그리고 그 문화와 문명이 부추기는 가짜 욕망과 일회용 인스턴트 희망을 매개로 왜곡되고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왠지 사람들의 거짓언어에 지쳐버린 오늘은 나도 마틴 발저의 말처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가지고 싶다. “여러 개의 언어를 알았으면 했지. 내가 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만 사용할,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내 심연의 언어와 알 수 없는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많은 낯선 말, 말들을.(마틴 발저)”(2006)

 

 

V.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별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은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안도현-‘그대에게 가고 싶다일부)

 

 

 

(그림:이봉희)

 

밤 새 눈이 왔다.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거짓말처럼 창문 가득 부신 햇살이 맘속의 그리움을 깨워준다. 밤새 가슴속에서 퍼붓던 잿빛 번민의 눈발을 그치고 햇살이 가득한 아침을 열 때는 누구나 저 햇살처럼 방금 헹구어낸 희망이 되어 그대에게 찾아가고 싶을 것만 같다. 나도 내 영혼의 긴 긴 밤 어둠 속에서 시리도록 쌓이던 절망으로 인해 그 누구의 창가엔가 빛나는 희망의 별로 뜰 수 있다면 좋겠다고 소망해본다.

우리는 무엇인가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란 생각을 한다. 그것이 일이든, 사람이든, 예술이든, 사람들은 무엇엔가 마음을 주고 그리워하지 않고는 하루하루 살아있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그리움은 우리를 영원히 살아있게 하는 힘이요 희망이니까. 무엇과의 이별이든 이별의 슬픔은 다름 아닌 희망의 상실, 그리워할 무엇의 상실이다. 그래서 신경숙의 소설, 깊은 슬픔에 나오는 한 시인도 그리워할 그 무엇을 잃었을 때 삶이 지옥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리워할 무엇이 없어 가슴이 사막이 되거나 눈보라치는 잿빛하늘이 되는 것보다는 영원히 잡히지 않아도 그리워하며 바라볼 별 하나 가슴에 띄우고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래서 어쩌면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이라고 시인은 말하는 것일까.

오늘 밤엔 내 맘 창가에도 오랜만에 별이 들까? 아니면 그 누군가의 창가에 내 그리움이 별이 되어 찾아갈 수 있을까? 그리워할 무엇이 있음에 감사하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그리움하나로 무장무장 타는 가슴이 오히려 행복임을 알 수 있다면 좋겠다. (2006)

 

 

VI. 자아의 감옥

 

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 열 수가 없었습니다. 손잡이를 만질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왜 나의 감옥에서 걸어 나가지 못했던 것일까요?

무엇이 지옥입니까? 지옥은 우리 자신입니다.

지옥은 혼자입니다. 그곳의 다른 이들은

단지 투영된 그림자들일 뿐. 도망쳐 갈 것도 없고

도망하여서 갈 곳도 없습니다. 누구나 언제나 혼자니까요.

(T. S. 엘리엇, 칵테일 파티중 에드워드의 대사/필자 역)

 

 

(그림:이봉희)

 

문은 열려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절망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이젠 문이 열려있는데도 외면하고 무기력하게 앉아서 날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설거지를 하다말고 책상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새장을 그리고 열린 문을 그리고 횃대에 문을 외면하고 돌아앉아 눈을 감고 절망만하고 있는 새를 그렸다. 그래도 희망을 그리고 싶어서 파랑새로 그렸다. 그런데 어느새 내가 쇠창살을 그리는 대신 나무들을 그려 넣고 있었다. 숲이었다. 비록 나뭇잎이 무성하지는 않아도 새가 갇힌 곳은 새장이 아니라 숲이었다. 그래, 새는 갇혀있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맘껏 날 수 있는 숲인데 스스로 눈을 감고 자신의 무기력을 새장에 갇혀서라고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나는 내가 갇힌 쇠창살 감옥이 고통스러워 숲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경우든 문은 열려있다. 나는 날갯짓을 해야 한다. 이 자아의 감옥에서 나와야 한다. “당신이 자신의 적이 아닌 한/ 당신을 묶은 속박은 당신의 의식/ 자유도 마찬가지다. (E. 디킨슨)”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