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 - R. 프로스트 (1874~1963)>

 

여기가 누구의 숲인지 알 것 같다.

그 사람 집은 마을에 있으니

그는 모를 것이다 내가 여기 서서

그의 숲이 눈에 덮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일 년 중 가장 캄캄한 저녁

가까운 데 농가도 없는 이곳

숲과 얼어 붙은 호수 사이에 가던 길 멈춰 서있으니

내 조랑말은 분명 이상하게 여기나 보다

 

무슨 문제라고 있느냐고

방울을 한번 흔들어 본다.

그 밖에 들리는 다른 소리란 오직

부드러운 바람과 솜털 같은 눈송이 스치는 소리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 

(bhlee역)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by Robert Frost>

 

 

ㅡㅡ

시인은 “한 해 중 가장 어두운 날 저녁(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눈 오는 숲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다 그 숲의 깊고 어두운 아름다움에 끌려가던 길을 멈추고 말 위에서 한참을 바라봅니다. 

이리 들어오렴... 손짓하며 부르는 듯한 숲!!!

일 년 중 가장 어두운 겨울 저녁은 어떤 저녁일까요? 나의 마음이 가장 춥고 어두울 때는 어떤 때일까요? 

그럼에도 홀로 길을 가던 긴 여정 여기서 멈추고 들어가고 싶은 그 곳.

깊고 조용하고 어두운 그러나 아름다운 그곳의 유혹—그곳이 그냥 깊고 아름답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분명 그곳이 어둡다(dark)말합니다. 

어두운 곳, 눈이 내려 덮이고 있는 깊은 아름다운 숲에서 그가 발견한 어둠, 그 어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긴긴 인생의 여행길, 어두운 겨울밤과 같은 먼먼 길을 홀로 가다가 누구나 한 번쯤, 아니 몇 번쯤

그냥 그 고요한 곳으로 모든 것 다 덮는 눈 속으로, 망각의 눈 속으로 들어가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시인도 그랬을까요? 한참을 그렇게 바라봅니다. 이 묘한 텐션 속에 시를 읽는 나도 빨려든 그 순간

영문 모르는 작은 조랑말은 뭐가 잘못 되었나 방울을 울리고 시인은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이 먼 외로운 겨울 길을 계속 가야 할 이유를 기억합니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길이 아직 멀다고.

 

힘겨워서 고요하고 깊은 아름다운 어두움의 유혹 앞에 잠시 망설이게 될 때마다

나를 지탱해주는 약속! 그리고 가야 할 남은 길에 대해 기억해야한다고 일깨워줍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이렇게 방울을 울려주는 작은 말(馬)을 생각해봅니다.
나 여기 있다고 같이 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그 작은 조랑말을 생각해봅니다. 

 

---------------------------------

나의 조랑말의 방울소리 082020:

요즘은 내가 살면서 난 무엇을 남기며 살았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앞으로 가야할 길도 생각해본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정말 무지무지 많은데 왜 이렇게 기력이 없는지, 왜케 자꾸 몸이 가라앉는지 한해의 2/3를 허망히 보내고 이대로 주저앉아 “나와의 약속/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도 제대로 못 지키고 의미 없이 남은 삶을 사는 건 아닌지 슬프고 두렵고 야속하다.

 

그런데 어제는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닌데 문자를 몇 개 받았다. 이게 내가 걸어온 외로운 길과 지켜야 할 약속을 다시 일깨우는 말방울소리인 것일까?? 그 많은 세월 동안 부족한 내가 제자들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수 없이 받은 편지와 분에 넘치는 사랑을 기억해 본다.

내가 건강이 정말 많이 안 좋았던 어느 해 일 년 간 매주 연구실 문 앞에 말없이 두고 간 녹두죽과 과일,

얼려놓고 매일 먹으라고 하나하나 작은 용기에 포장해 건네주던 녹두죽과 김치,

때로는 밤늦게 일하던 내 방문 앞에 아무말없이 걸어두고 간 고구마.

때로는 노크만 하고 두고 간 꽃다발.

아니 몇 십 년 전, 사은회 때마다 다른 교수들 몰래 내 선물은 내 연구실이 건조하다고 (그때는 낡은 건물에 석유난로를 피던 시절) 가습기를 따로 준비해서 슬그머니 건네주던 학생들, 담요나 베개 같이 정말 세밀하게 살펴서 몰래 준비해주던 학생들.

내가 다리와 허리를 굽히지도 못하게 통증에 시달릴 때 말없이 서서 신을 신을 수 있게 긴~ 구둣주걱을 사다 준 제자.

수업 중에 핫팩을 준비해 주는 제자. 말없이 의자에 방석을 놓아주는 제자.

내가 좋아한다고 늘 일부러 한방 찻집에서 대추차를 사서 수업 전에 가져다 놓는 제자.

중국에서 출장 다녀올 때마다 대추를 사다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해서 가져다주던 제자.

일 년 내 철마다 농사지은 너무나 맛있는 김치를 보내주는 10년 넘게 오래된 내담자

외국에서 보내주는 내담자의 선물들.

예전에 고속도로 운전하며 출퇴근할 때는 오늘 날씨가 추운데.... 눈이 오는데.... 비가 오는데... 안개가 낀다는데... 운전 조심하시라고 전화해 주던 제자들.

어떻게 다 이루 말할 수가 있을까? 책으로 엮어도 몇 권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의 가장 훌륭한 삶의 동반자였으며, 실수 많고 부족한 나의 참 스승이었다.

나는 참 많은 빚을 진 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수없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상처받았지만

정말 수도 없이 오해도 받고, 그걸 견디며 살았지만 감사할 일이 더 많다........라고

나의 작은 말(馬)이 방울을 울리며 나의 갈 길을, 지켜야 할 나의 약속을 일깨워 준다.

 

힘들고 지칠 때, 나만 혼자 가는 길이 너무 외로울 때 수없이 받았던 이런 작은 격려들, 아니 그보다, 내가 함께 해줄 수 있는 마음이 아픈 분들, 아니,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아직도 깊은 곳에서 기다리는 내면의 목소리--그런 것들을 기억한다.

자꾸 머물고 싶고 잠들고 싶은 깊고 어둡고 아름다운 눈 오는 숲 곁에서 나도 방울소리에 깨어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이 눈 오는 겨울 길을 계속 가야한다. 날 깨워주는 작은 조랑말의 방울소리에 감사드린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제자들과 인연들에 감사드린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 Dylan Thomas

-------------------

<오늘 우연히 받은 편지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떻게 지내시는지.. 건강은 어떠신지 안부 여쭙니다^^ 너무나 늦은 시간인 줄 알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메시지 드려요~~

제가 아이 둘을 키우면서 독서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있어요 그중 문학의 중요성을요.. 얼마 전 아이와 함께 읽으려고 황소와 도깨비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갑자기 교수님과 함께 했던 오셀로가 생각나더라고요.. 두 작품은 상황도 배경도 다른 내용이지만 오셀로에서 상징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교수님이 설명해 주신 것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지표로 삼게 된 것이 Trifles라는 작품이에요.. 교수님과 함께하던 시간에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고 현재도 가장 좋아하는..^^ 인생을 살면서 도움이 많이 된 작품이에요. 문학이라는 건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 혹은 앞으로 경험할지도 모르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주는 너무나 중요한 보물이더라고요.. 아이를 키우면서 특히나.. 결혼해서 모르는 남이 가족이 되면서 특히나.. 문학을 배우길 잘했단 생각이 듭니다^^

좋은 감정과 생각을 잊지 않고 전하고 싶어 두서없이 메시지 드렸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지치실 때도 있으시겠지만 교수님 덕분에 마음속에 보물을 품고 살아가는 제자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20년 전 제자 RR>

ㅡㅡ

교수님을 처음 뵙던 날~

2018년 8월 23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속 고통의 깊이를 모른 채 왜 이렇게 삶이 공허할까 싶었던 순간, 교수님의 강의에서 영혼이 맑고 마음이 따뜻한 그리고 참여자 모두를 품어주시는 교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이 제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성과 열정사이에서 이성적 가르침과 열정적 사랑을 보여주시는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특강을 듣고 무척 높은 연봉의 전문직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온 정말 소중한 선생님의 글>

ㅡㅡ

교수님~

맛있는 거 먹을 때면 교수님 생각이 자꾸,

보내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선배에게 교수님 주소를 받아놓고도 후딱 실행을 못 하고 있었네요.

교수님, 맛있는 누룽지 보내드릴게요. 입맛 없을 때 누룽지가 좋더라고요.

 

그리고, 저 00대 대학원 상담심리학과 박사과정 하고 있어요. 아직 일을 할 만큼의 체력은 아닌 듯하고, 시간이 아까워서요.

지난 1학기 수업받으면서 교수님 생각이 더 많이 났어요.

'우리 이봉희 교수님같이 열정이 있는 교수님이 없구나'하고~.

공부하면서 교수님 말씀이 이런 거였구나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경험도 합니다.

 

가까이 있으면 자주 뵐 수 있으련만.

건강도 잘 챙기시고, 식사도 잘 챙기세요.

 

<나에게 배우려고 먼 곳에서 천안으로 이사까지 ㅡ아이도 전학시키고ㅡ와서 공부했던 샘. 논문 쓰고 석사학위 따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암이 발견되어 수술했었지. 문학치료의 특수함 때문에 여기저기 좋은 곳에 취업이 되어서 일하고 계신 선생님. 내가 좋아하는 대추차를 무겁게 낑낑 사들고 서울까지 왔었던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