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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사과를 먹다 -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데."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나무에 대하여 - 호승

나의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 주고 싶다. 불을 켜서

오래 꺼지지 않도록

유리벽 안에 아슬하게 매달아 주고 싶다.

나의 슬픔은 언제나

늪에서 허우적이는 한마리 벌레이기 때문에

캄캄한 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거나

아득하게 흔들리는 희망이기 때문에.


빈 가슴으로 떠돌며

부질없이 주먹도 쥐어 보지만

손끝에 흐트러지는 바람소리,

바람소리로 흐르는 오늘도

돌아서서 오는 길엔 그토록

섭섭하던 달빛, 별빛.


띄엄띄엄 밤하늘 아래 고개 조아리는

나의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불을 켜서

희미한 기억 속의 창을 열며

하나의 촛불로 타오르고 싶다.

제 몸마저 남김 없이 태우는

그 불빛으로

나는 나의 슬픔에게

환한 꿈을 끼얹어 주고 싶다


나의 슬픔에게 - 이태수


8월 한낮의 지는 더위쯤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밀물처럼 밀려오는 밤은 정말

견딜 수가 없다.

나로 하여금 어떻게

이 무더운 여름날의 밤을

혼자서 처리하라 하는가

내 주위를 머물다 떠난 숱한

서러운 세월의 강 이쪽에서

그리운 모든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지만

밤이 찾아오는 것만은 죽음처럼

견딜 수가 없다.

차라리 8월의 무더위 속에 나를 던져

누군가를 미치게 사랑하게 하라.

빈 들에서 부는 바람이 되어

서러운 강이 되어.......

[서러운 강 - 박용삼]

나의 느려터진 걸음이 다 지나갈 때까지
고욤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매미 한 마리
울음 뚝 그치고
참고 있습니다
사람처럼 무서운 것이 지나갈 때에는 울음도 이렇게 참고 있어야 한다고, 그렇다고!

[말복-유홍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