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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있던 자리 -천양희>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새가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 수 앞이 아니라
  한 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완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 모두 방황한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어디에서나 나를 지켜보는 새의 눈이 있다.

    - 출처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 2011

천장호에서 -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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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얼어붙은 호수.

한때 깊은 가슴에 품었던 빛도, 그림자도 상실한 채 

꽁꽁 언 마음

깨뜨려볼 수 있을까 돌멩이를 던져본다.

자꾸자꾸 네 이름을 불러본다.

작은 돌맹이 하나에도, 

아주 작은 부름 하나에도

부서지듯 포말선을 그리던 그 섬세하던 네 마음 
이제는 노래마저 떠나버린

네 굳어버린 차디찬 마음에 

쩡쩡 부딪쳐 되돌아오는

그래도 불러보는 네 이름

 

너라고 외롭게 얼어버리고 싶었을까
제 스스로 얼어붙는 마음이 있을까
얼마나 대답하고 싶을까


봄은 반드시 올 거야

지치지 않는다면
나도,

그리고 너도

 

(너는 누구일까.. 

네 이름은 누구일까... 생각해 본다. 

봄은 오겠지....)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박수근 - 나무와 여인 

 

 

귀로- 박수근 

 

 

박수근의 나목 - (c)2013이봉희 


그의 나목은 정직하고 당당하다. 어떤 수식어도 치장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혹은 가리는 일체의 언어도 없이 그 존재 자체로 세상에 서 있는 나무.  그런데 나무들은  땅에 뿌리내리고 있어도 한결같이 하늘로 머리를 두고 하늘로 손을 뻗고 있다. 모든 나무가 그럴지라도 그의 나목들은 그것이 더 당당히 드러나있다. 

 

그 밑 허기지고 지친 여인들의 [귀가]길에 묵묵히 서 있는 나무는 그림 속에서  그 여인들의 삶을 대변해 주고 또 지켜주는 또 다른 인물이다.  고흐의 나무들처럼 달려가고 용솟음치고 몸부림치는 열정대신 그의 나무들은 희망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무채색으로 삶의 고단함을 끌어안고 자신의 이름 없는 존재의 몫을 다하는 그리고 묵묵히 견디는 인내 속에 담긴 희망을.... 

 

[나무와 여인]은 [귀가]와 달리 아침 풍경처럼 보인다.  아이를 업은 한 여인과 머리에 함지를 이고 장사를 나가는 여인.
아이를 업은 여인은 함지를 이고 가는 여인을 목을 꺾어 바라보고 있다. 등에 업은 아이는 다른 곳에 관심이 있는지 다른 곳을 보고있는데 이 여인은 일을 나가는 여인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다. 그 사이에 서 있는 나목... 
그 나무는 두 여인을 나누는 구도 속에 서 있지만  나누기 보다는 오히려 두 여인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든 밖으로 일을 나가든 두 여인 모두 그 나무처럼 이 겨울을 견디는 희망의 상징이며 두 여인을 대변하는 나무이다.  어쩌면 그 나무는 아낙들만 나오는 그림 속에 부재중인 이 춥고 가난한 시대의 모든 가장을 대변하는 존재로 거기 그렇게 서있는지 모른다.  당당하고 늠름하게 비록 잎도, 꽃도, 열매도, 그 무엇 하나 줄 수 없는 앙상한 가지뿐이지만 가정을 지키는 힘으로.  박수근 자신으로...

(c)2013. 2. 이봉희

 

박수근의 그림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끌어 내었다. 박완서 외에도 많은 시인들이 그의 작품을 소재로 시나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