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에 해당되는 글 3건

<허락된 과식 - 나희덕>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
  근래 보기 드문 일

  오랜 허기를 채우려고
  맨발 몇이
  봄날 오후 산자락에 누워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

세상의 나무들 - 정현종

  세상의 나무들은
  무슨 일을 하지?
  그걸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
  허구한 날 봐도 나날이 좋아
  가슴이 고만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리는

  그런 사람 땅에 뿌리내려 마지않게 하고
  몸에 온몸에 수액 오르게 하고
  하늘로 높은 데로 오르게 하고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들리지 나무들아 날이면 날마다
  첫사랑 두근두근 팽창하는 기운을!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ㅡ 전동균>

산밭에
살얼음이 와 반짝입니다

첫눈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고욤나무의 고욤들은 떨어지고

일을 끝낸 뒤
저마다의 겨울을 품고
흩어졌다 모였다 다시 흩어지는 연기들

빈손이어서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군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왔고
저희는
저희 모습이 비치면 금이 가는 살얼음과도 같으니

이렇게 마른 입술로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당신을 불러도 괜찮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