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학교 연구실 책상 위에는 빛바랜 아주아주 오래된 작고 낡은 액자가 하나 있었다. 

화집이 정말 귀했던 내 어린시절 TIME지 표지에 난 고흐의 자화상 모음 사진을 오려서 액자에 넣은 것이었다.

(위 그림은 내 액자의 그림은 아니다.)

고흐는 언제부턴가 어딜가나 내 곁에 있는 동반자였다. 그림으로 때로는 글로.
고등학교때 벽에 붙은 화집에서 가져다 액자에 넣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던 별밤이나 싸이프러스 나무나 밤카페나 그런 그림이 아니라) 그림그리러 가는 화가를 밤새 바라만 보던 적도 있었다.  

 

자화상은 고흐의 자서전처럼 느껴진다.

"나는 무한한 고독과 신에 대한 경건함에 익숙해진 나의 얼굴을 왜곡시킬 수는 없었다.
터치 하나하나에 나의 심상을 담으며 일정한 선들의 흐름을 그려보았다."(-Gogh/1887)

고갱에게 바친 자화상(1888.9)에서 고흐는 말했다. 

"당신이 내 모습을 볼텐데 이 작품은 동시에 우리의 모습이며
사회로부터 희생당한 가련한 자들이고, 모든 것을 사회에 친절로 반환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라고.

 


오래 전 파리에 갔을 때 정말 우연히 숨막히는 전시회를 만나게 되었다. 오르세 미술관 특별전시회 Musée d'Orsay: Van Gogh/Artaud- Le suicidé de la société (고흐/아르토: 사회에 의해 자살당한 사나이)였다. 그때의 감동은 MoMa(NY)에서 만났던  "Van Gogh and the Colors of the Night(반 고흐와 밤의 색깔들)"과 함께 평생잊지 못할 감격의 선물이었다. 전시회의 포스터는 그 유명한 사진작가 만 레이의 아르토사진과 고흐의 초상화로 되어있었다.

 

아르토(Artaud)는 잔혹극의 창시자이다. 영문학을 공부할 때 그가 고흐에 대해 책을 낸 것을 알지 못했었다. 
아르토는 말한다.  누구든지 한번이라도 인간의 얼굴을 제대로 볼 줄 알았던 사람이 있다면 고흐의 자화상를 보게 하라고. 어떤 정신치료사도 고흐처럼 인간의 얼굴을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심리학으로 마치 칼로 해부하듯이 해부하면서 그렇게 강렬한 힘으로 세밀히 살펴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거라고.

 

귀에 붕대를 하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SP with Bandaged Ear and Pipe.  1889)에 나오는 고흐의 눈은 소크라테스도 갖지 못했던, 다만 니이체만이 갖고 있던 눈, '육체를 혼에서 해방시키고, 정신의 속임수를 발가벗긴 눈'이라고.

 

나는 이런 것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이다. 
그래서 너무 행복하고 그래서 이상하게  외롭고 슬프다.....

4/19/09

 

 

<쓰러진 나무 - 나희덕>

  저 아카시아 나무는
  쓰러진 채로 십 년을 견뎠다

  몇 번은 쓰러지면서
  잡목 숲에 돌아온 나는 이제
  쓰러진 나무의 향기와
  살아 있는 나무의 향기를 함께 맡는다

  쓰러진 아카시아를
  제 몸으로 받아 낸 떡갈나무,
  사람이 사람을
  그처럼 오래 껴안을 수 있으랴

  잡목 숲이 아름다운 건
  두 나무가 기대어 선 각도 때문이다
  아카시아에게로 굽어져 간 곡선 때문이다

  아카시아의 죽음과
  떡갈나무의 삶이 함께 피워 낸
  저 연초록빛 소름,
  십 년 전처럼 내 팔에도 소름이 돋는다.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고사목(枯死木)을 보며 - 박두규

자꾸만 변해야 한다고
변해야 살아남는다고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사는 일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변하는 것은 나를 살리는 궁리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너를 위한 궁리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내가 본 세상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변치 않는 것들에 있었으므로
사랑은 지난 사랑이라도
변치 않아야 했으므로.

- [숲에 들다](2008:애지)

<길을 묻고 싶다>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박두진)
---

하늘의 동과 서가 서로 마주하는 시간들이 있다.  서쪽엔 사그라져가는 그러나 아직도 남은 붉은 빛, 동쪽엔 냉정한 이성 혹은 엄연한 현실이 하얗게 떠올라 마주보고 있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내가 서 있다.

가끔 가던 길 가운데 멈춰서서 또 하루가 흔적 없이 저물어가는 하늘에 대고 죄스런 맘으로 길을 묻고 싶다.

이만큼이나 멀리 왔는데 아직도...

9월의 시 - 문병란

9월이 오면
해변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된다

나무들은 모두
무성한 여름을 벗고
제자리에 돌아와
호올로 선다

누군가 먼 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
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
기도를 마친 여인처럼
고개를 떨군다

울타리에 매달려
전별을 고하던 나팔꽃도
때 묻은 손수건을 흔들고
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은
무성했던 여름 허영의 옷을 벗는다

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
먼 항구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되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
눈물에 젖는다.

- [새벽이 오기까지는](1994:일월서각)

  숲 - 백무산

  비 개인 숲이 옷을 벗는다
  터진 구름 사이
  바람 몇 점 푸르게 일더니
  새들이 울기 시작한다
  새들 소리에 후드둑 후둑 떨구더니
  초록의 물결이
  철철철 넘쳐난다
  숲이 쏟아놓고 숲이 잠긴다

  여기 와서 침묵하니
  내 침묵에 내가 잠긴다
  숲이 숲 같지 않구나
  내 몸 밖의 것 같지 않구나
  터진 구름 사이 푸른 하늘도
  내 마음 밖의 것 같지 않구나.

    ([인간의 시간] 창작과 비평사 1996)

상처는 천천히 녹여낸다

- 과거의 상처

 

누구나 가슴 속에 쓸어도 쓸어도 치워지지 않는 굳어버린 덩어리 하나쯤 떠안고 살아갑니다. 이미 죽은 색깔을 하고 있는 과거의 덩어리이지만, 없다고 외면하고 잊었다고 눈 감아도 문만 열면 꼭 발끝에 차이는 돌부리처럼 가슴 안에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억지로 쓸어버리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공동주택

밖의 계단을 비질하는데

안 쓸리는 작은 덩어리

죽은 나뭇잎 색깔의

알 수 없는 덩어리

이 꼼꼼한 비질에도

떨어지지 않는

 

지금 안 쓸리는 것은

지금 쓸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장맛비가 한 차례 다녀간 뒤에

굳은 그것은 저절로 풀릴지 모릅니다

죽은 색깔의 그것은 빠져나갈지 모릅니다

 

(......)

 

사는 동안 쓸렸으면 더 좋았을

계단 밖에 나와 앉은

꼼짝 않는 덩어리

- 이진명 <지금 안 쓸리는 것은> 중에서

 

때로는 환상도 위로가 된다

   문학치료 시간에 각자에게 그 ‘덩어리’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다음은 그때의 답변 중 일부입니다.

 

“내 안에 안 쓸리는 것은 하소연이다. 제발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말에 지지해달라고 애걸하는 것이다. 그것은 엄마의 하소연을 닮았다. 9년간 지속된 나의 직장 동료인 B의 하소연을 닮았다. 이들과 나의 하소연의 공통점은 자기주장이 없고, 자기 색깔이 없고,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 삶인데, 본인은 한이 많아서 자신들이 양육해주어야 할 어린 사람에게 투덜거리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희생자였는데, 가해자로 살고 있다.”  

 

“시에서는 ‘계단 밖에 나와 앉은 꼼짝 않은 덩어리’라 했지만 난 그 덩어리를 바로 ‘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나도 모르게 ‘나는 계단 밖이 아니라 아직 계단 안에 있는 덩어리인 것 같다’라고 글을 쓰고 있어서 놀랐다. 내가 덩어리였던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뭉쳐온 것이다. 그 누구에 의해서도 아니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온 것이다. 이제는 그 덩어리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그래서 갇힌 내가 아니라 밖으로 나가고 싶다. 이제는 조금씩 그 덩어리를 밀어내고 싶다.”

 

  ‘덩어리’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보면 사람마다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누구는 살면서 쓸어도 쓸어도 사라지지 않는 그 덩어리가 ‘하소연’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어느새 가슴 속 그 응어리를 길고 긴 글로 실컷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덩어리가 분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주 작은 일에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 무척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그 덩어리가 자기 자신임을 발견하고는 왜 단단한 덩어리 속에 자신이 갇혔는지를 성찰했습니다.

상처가 아물 때는 딱지가 생깁니다. 상처는 그 딱지가 떨어져야 낫습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불편하다고 억지로 딱지를 떼어냈다가 상처에서 다시 피가 나던 기억,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딱지 아래 새로운 살이 돋아나야만 딱지는 저절로 떨어집니다. 그러니 지금 쓸리지 않는 덩어리가 아직은 아프더라도 그 또한 내게 필요한 추억일 수 있습니다. 아직은 그거라도 붙잡아야 내가 살 수 있는 환상일 수 있습니다. 환상이라도 마음을 붙여야 살 수 있는 게 사람이니까요. 가끔 환상은 고통스런 현실을 견디게 해줍니다. 다만 잠시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상처는 천천히 조금씩 녹여내야 한다

   얼마 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다시 보다가 그만 눈물이 났습니다. 젊어서도 이미 몇 번이나 본 영화였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전에 볼 때와 전혀 다른 장면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남부가 전쟁에서 패하고 스칼렛은 그 화염 속 전쟁터에서 천신만고 끝에 자신이 평생 짝사랑하는 애슐리의 부인 멜라니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녀는 힘들 때마다 마음속으로, 마치 기도처럼 애슐리를 부르면서 견딥니다. 그와 한 단 하나의 약속 때문입니다. “스칼렛, 나의 부인 멜라니를 지켜줘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현실과 대결하는 스칼렛의 용기는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스칼렛은 애슐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줄만 알고 그 사랑을 구원의 약속처럼 의지하며 온갖 어려움을 견딥니다. 결국 뒤늦게야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닫지요. 환상에 매달린 그녀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은 맞지만 그녀에게 그 환상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그 고난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그런 스칼렛을 보면서 환상일지라도 사랑의 힘이 필요하고, 결국 그것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게 인간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물론 스칼렛은 그 환상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놓치고 말지요).

   제자 중 한 사람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외도한 남편과 그것을 감싸고도는 시어머니 사이에서 고통 받다가 어린이를 데리고 이혼을 했습니다. 이후 그 제자는 다시 좋은 사람과 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이유로 상대는 마음을 접고 떠났습니다. 그때 제자가 했던 말이 가슴에 남아 나를 아프게 했습니다. “선생님, 요즘 저는 그 사람이라도 그리워하는 힘으로 살고 있어요. 저와는 인연도 아니고 사랑할 만큼 사귄 것도 아니지만 환상이라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으면 지금 상황이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요.” 물론 지금 그녀는 더 이상 그 환상에 기대어 살지 않습니다. 자신의 갈 길을 용감히 가고 있지요. 환상은 현실을 견딜 수 없는 인간들이 잠시 쉬어가는 섬일 뿐입니다. 다만 그 환상을 현실과 혼동할 때 또 다른 상처를 만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또 다른 병이 드는 것과 같습니다.

 

슬퍼하는 것을 허락하기

  상처는 그 깊이와 크기마다 새살이 나는데도, 그 굳은 딱지가 풀어지는데도 각기 다른 시간이 걸립니다. 그 덩어리가 무엇이든 간에 쏟아지는 장맛비에 응어리가 풀려 떠내려가듯 그렇게 기다려야 하는데, 우리는 상처의 딱지가 채 굳기도 전에, 그리고 상처에서 새 살이 돋기도 전에 이내 그 딱지를 뜯어내버리고 싶어 합니다. 없던 일처럼 억지로 잊으려는 것이지요. 차라리 그 굳은 아픔과 기억을 용감히 끌어안고 조금씩 녹여내야 합니다. 그 아픔을 녹여내는 ‘장맛비’는 고통 속에 갇힌 ‘나’를 끌어안고 함께 울어주는 스스로의 따뜻한 연민과 무조건적인 사랑의 눈물일는지도 모릅니다.

  슬픔은 곧 치유의 감정입니다. 브래드쇼는 만일 슬퍼하는 걸 허락받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치유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의 분출과 표현은 그것이 분노의 외침이든, 장맛비 같은 통곡이든 부끄러운 것도 나약함의 표시도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살아나기 위한’ 절실한 무엇입니다. 눈물이 죽은 이를 살려내거나 과거를 되돌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과거와 함께 죽어 있는, 살아남았으나 죽은 자처럼 굳은 덩어리가 되어 있는 나를 녹여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살아날지 모릅니다.

  가슴 한구석에 돌부리처럼 남아 있는 단단한 덩어리와 그 속에 갇혀 혼자 두려워하고 있는 ‘과거의 나’를 보듬으며 이렇게 말해주세요.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그리고 장맛비 같은 눈물로 흠뻑 다독여 녹여주세요.

--출처: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카페]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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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빈다... 
가을에 주로 읽던 시인데 

오늘은 귀국에 딱 맞춰 의뢰가 들어온

이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특강/워크숍을 위해 

내가 찍었던 사진이 하나 떠올라서 이 시를 같이 읽어보기로 했다. 

(문학치료자료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멀리서 멀리로 떠나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저 바라보는 나뭇잎 다 떨군 나무의 심정이,

이리저리 가시처럼 찢긴 그 매마른 손짓이 가슴에 남아있었던 사진이었기 때문일까?  

 

보내는 나무의 모습처럼

 망망대해를 향해 떠나는 배도 그리 행복한 유람선 같지는 않아서... 

 

가을이다.. 를 6월이다/ 초여름이다/ 그 어느 때면 어떠랴... 

우리는 언제나 아픈데... 

아프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나에게

그에게

 

길 포말로 남은 저 떠나는 배의 마음은 무엇일까?

미련일까 아쉬움일까 회한일까 미움일까 미안함일까 두려움일까.....  그 모두일까....... 

모래- 이형기

 

모래는 작지만 모두가 고집 센 한 알이다.

그러나 한 알만의 모래는 없다.

한 알 한 알이 무수하게 모여서 모래다.

 

오죽이나 외로워 그랬을까 하고 보면

웬걸 모여서는 서로가

모른 체 등을 돌리고 있는 모래

모래를 서로 손잡게 하려고

신이 모래밭에 하루 종일 봄비를 뿌린다.

 

하지만 뿌리면 뿌리는 그대로

모래 밑으로 모조리 새 나가 버리는 봄비

자비로운 신은 또 민들레 꽃씨를

모래밭에 한 옴큼 날려 보낸다.

싹트는 법이 없다.

 

더 이상은 손을 쓸 도리가 없군

구제 불능이야

신은 드디어 포기를 결정한다.

신의 눈 밖에 난 영원한 갈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