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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 도종환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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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쓰다 - 김용택 어머니는 글자를 모른다. 글자를 모르는 어머니는 자연이 하는 말을 받아 땅 위에 적었다. 봄비가 오면 참깨 모종을 들고 밭으로 달려갔고, 가을 햇살이 좋으면 돌담에 호박쪼가리를 널어두었다가 점심때 와서 다시 뒤집어 널었다. 아침에 비가 오면 "아침 비 맞고는 서울도 간다"라고 비옷을 챙기지 않았고 "야야, 빗낯 들었다"며 비의 얼굴을 미리 보고 장독을 덮고 들에 나갔다. 평생 바다를 보지 못했어도 아침저녁 못자리에 드는 볍씨를 보고 조금과 사리를 알았다. 감잎에 떨어지는 소낙비, 밤에 우는 소쩍새, 새벽하늘 구석의 조각달, 달무리 속에 갇힌 보름달, 하얗게 뒤집어지는 참나무 잎, 서산머리의 샛별이 글자였다. 난관에 처할 때마다 어머니는 살다가보면 무슨 수가 난다고 했다. 세상에는 내가 가보지 못한 수가 얼마나 많은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했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고 했다. 어머니는 해와 달이, 별과 바람이 시키는 일을 알고 그것들이 하는 말을 땅에 받아 적으며 있는 힘을 다하여 살았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 이혜숙 >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엄마와 어머니 사이 - 목필균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쉽게 쓰여진 시- 윤동주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우리들의 시간 - 박경리
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딛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뽑내어 본들 徒勞無益(도로무익) 時間(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 * 徒勞無益(도로무익) 헛되게 애만 쓰고 아무 이로움이 없음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주말을 여는 책 | ‘내 마음을 만지다’] 마음의 상처와 고통, 읽고 쓰면서 치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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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공인문학치료전문가 이봉희 교수가 펴낸 에세이 ‘내 마음을 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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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숨을 내쉬고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공중에 퍼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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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중에서>
--------------- 5월이 터질듯 피어오르는 날이면 쉰이 넘은 나이에도 어김없이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때론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5월의 설렘은 청년들의 특권인 것만 같아서 가을 중턱에 들어선 나이에 느끼는 그런 [철] 모르는 감정을 숨겨야 할 것만 같은 부끄러운 맘이 들기까지 합니다. 자라오면서, 그리고 세상 속 세월을 거치면서 가장 흔히 하는 말 중 하나는 철이 들어야 한다는 말, 철이 없다는 말, 철 모르는 어린아이 같다는 말.. 이 아닐까 합니다. 인생도 계절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사철이 나뉘어 있기 때문일까요. 다만 계절은 돌아오지만 인생은 겨울이 지나도 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만 다르기에 한편 서글프고, 또 한편으로 그렇기에 우리의 하루하루가 더더욱 의미 있고 소중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리교수처럼 우리 안에 내 인생의 사계절을 모두 품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순수함을 잃지 않는 어린아이의 맘을 간직하고, 그 눈에 호기심이 별처럼 반짝이며 때로는 젊은 청년의 열정으로 내가 뿌리 내린 곳보다 더 아름답고 높고 깊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정신이 아직도 살아 숨 쉬며, 그러면서도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잘 제어하고 나의 옮길 발걸음과 내 몸과 맘을 앉혀놓을 자리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진 노년이 함께 내 안에 공존하고 있다면 그보다 아름다운 인생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문득 감상주의적 환상과 순수함을 혼돈하거나,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찬 이기적 호기심과 심리적 불안정을 모험심으로 착각하거나, 때로는 쌓아 놓은 정보와 지식이 지혜인 양 허세를 부리거나, 세월과 성숙함이 저절로 비례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연륜을 내세워 허망한 자기 자랑과 주장만 화석처럼 굳어지는 그런 노년이 될까 봐 무척 두렵습니다. 젊음이란 의지와 상상력이며 활력이 넘치는 감성이며, 삶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이라는 사무엘 울먼의 유명한 글, [젊음]에서의 말도 결국은 우리 속에 살아 공존하는 모든 계절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울만은 60살 노인이든 16살 청소년이든 우리들의 가슴 한 복판에는 무선 전신국이 있다고 합니다. 그 무선전신국이 인간과 저 높은 초월자에게서 오는 아름다움, 희망, 환호, 용기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한 우리는 주름과 관계없이 청년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청년이라도 이미 수 십 년을 더 늙어버린 주름투성이 노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 합니다.
오늘 무너지도록 부신 햇살아래서 내 영혼의 안테나를 저 5월의 하늘, 그 가슴 한복판을 향해 높이 올리며 소리쳐 말하렵니다. [내 나이를 물어 무엇하랴. 나는 5월에 있다](피천득)라고... [이봉희- 덴버 중앙일보 문학칼럼 중에서 2005]
2007. 6. 1.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Vincent van Gogh- Cherry trees in full bl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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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 여러겹의 마음을 가졌기에 그 나무가 까닭 없이 불편하였습니까. 멀리로 멀리로 지나쳐가며 혼자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 스스로에게 그 나무 탓을 했나 봅니다. "내가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다 말하기 불편하였을까...... 그러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여 나무를 멀리서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멀리서 멀리서 보면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그동안 눈이 부셔서 직시하기 불편했을까요? 그리고 그 여러 겹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합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아서라고, 하나의 꽃빛을 피우기엔 너무 많은 소망과 열정이 있어 켜켜히 마음을 피우고 있는 그 나무가 참 외로웠겠구나.......... 깨달았다 합니다.
그러다 또 생각합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아 외로웠을 것이지만 그 나무는 어쩌면 외로운 줄로 몰랐을 거라고. 그렇게 고고하게 홀로 제 열정을 따라 여러 꽃빛을 피우고 있는 그 나무는 외로운 줄도 몰랐을 거라고.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서 또 알았다 합니다. 그 오랜 시간 당신은 그 나무를 떠나지도 못하고 멀리서 멀리서 계속 지켜보았군요. 외롭게 피워 올린 꽃잎들 다 흩어져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에야 그 나무 이제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려 겹 꽃잎 같은 마음 다 흩날아가버리고 맨 몸으로 선 그 시간에야 비로소 당신은 그의 그늘에 앉았습니다.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진 나무라 생각하던 그 나무 아래, 당신은 그제야 다가가 앉았습니다. 심심한 얼굴을 한 나무 곁에.
알 수 없네요. 그 나무가 심심한 얼굴을 하고 나서야 당신은 편하게 그에게 다가간 것인지 다가가 보니 외로운 줄도 몰랐을 듯, 열심히 겹겹이 피워내는 마음을 가진 그도 어쩌면 참 심심한 것을 알았다는 것인지. 심심하고 외로워서 더 여러겹 꽃빛을 피워 제 맘을 감싸 입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인지. 그리고 당신은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이제, 어둠이 머지않아 내려올 소리를.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다 하십니다. 그 몇 겹의 색깔을 읽어 보셨을까요. 까닭 없이 부담스러워 멀리서 멀리서 떠나지도 못하고 지켜만 본 당신, 당신도 그 나무처럼 외로웠나요?
그 저녁 당신이 찾아와 앉았던 그 나무, 여려 겹 꽃잎 다 흩어 보낸 그 나무를 생각할 때마다 수천의 꽃잎이 비명도 없이 떨어져 날아와 내 마음에 쌓입니다. 바람도 불어주지 않는데 바람도 불어주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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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의 언어로 말한다 - 소통의 한계
딸아이가 오래전 외국에서 외롭게 공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나는 도심의 늑대 같아. 혼자서 인간들 속에 살고 있는…….” “오늘 말로 하는 대화는 딱 한 마디 했어. 내 목소리를 잊을 지경이야.” 우리는 종종 대화를 포기하고 차라리 외로움을 택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소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고장 난 피아노 건반처럼 제 음을 전달할 수 없거나 서로 불협화음을 내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이 상대에게 낯선 나라의 말처럼 소통되지 않는다는 좌절 때문입니다. 누군가와의 소통이 더없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통 수단은 대부분 언어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참 불완전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그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각자 타인 앞에서 해석하고 번역해야 하는 하나의 언어로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자신만의 사전으로 상대의 말을 해석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언어 이상의 의사소통 수단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습니다.
나는 조용조용 설명한다. 당신은 고함치는 말로 듣는다. 당신은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한다. 나는 오래된 상처가 들추어짐을 느낀다. ....... 나는 비둘기다. 당신은 매로 보인다. 당신은 올리브 가지를 내민다. 나는 가시를 느낀다. - R, 맥거프, <당신과 나> 중에서
상대의 말과 그 속내는 똑같을까? 우리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전화 통화를 하고, 또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그게 짧은 글이든 목소리든 언어는 그 사람을 여지없이 드러내준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너무 수식어가 화려해서 읽으면서 살얼음을 딛듯 아슬아슬한 경우도 있습니다. 대체 이 사람은 언제부터 나를 얼마나 안다고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걸까? 한두 번 보았다고 마치 나를 다 알기라도 한 듯 온갖 아름다운 말로 나를 포장하는데, 왜 그러는 걸까? 미사여구로 상대를 잔뜩 포장해놓고는 “내 마음과 똑같았어요. 마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시는 것 같았어요”라는 말로 상대에게 되돌려주기도 합니다. 그런 진심이 의심스런 말을 들을 때면 빌려 입은 옷을 입고 무대에 선 것처럼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혼자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혼자 토라져서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맘대로 투사해 상대를 영웅처럼 바라보다가 결국 실망했다며 평가절하하고 떠나가 버립니다. 때로는 자신의 일방적인 감정을 소화하지도 못한 채 분풀이를 하는 언어도 있습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이모티콘을 사용하고, 말끝마다 웃음으로 포장해도 자신의 날 감정은 그 포장 속에서도 진한 냄새를 풍겨옵니다.
그래서일까요. 한 사람의 말투는 그 사람의 인격뿐 아니라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꾸며도 그 뒤의 이기적인 계산을, 아무리 친절히 말해도 그 뒤의 적대감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웃으며 말해도 그 뒤의 두려움을, 아무리 당당하게 말해도 그 뒤의 패배감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잔인하게 말해도 그 뒤의 사랑은, 아무리 무뚝뚝하게 말해도 그 뒤의 관심은 묻어둘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숨겨둔 사랑과 관심보다는 당장 내 뇌리에 깊숙이 파고드는 뾰족한 언어의 칼에 얼마나 아파하는지요. 하지만 그 안의 사랑과 관심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상처 입고 되돌아가기에 너무 늦어버립니다.
나도 내가 하는 말을 모른다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언어 습관을 객관적으로 안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는 곧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안다는 자체가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내가 다르다는 사실은 종종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이 괴리는 자신의 사진을 볼 때의 첫 느낌, 즉 낯설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잘 나타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남들에게는 사진 속의 내가 그들이 보는 실제의 나와 달라 보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시각의 괴리만이 아닙니다.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처음으로 방송극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내 목소리가 어찌나 낯설던지 어린 마음에 그냥 밖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는 창문 밖에서 간이 오그라드는 심정으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던 때였습니다. 엄마가 곁에 없어도 아이가 엄마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나는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녹음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녹음이 끝난 후 들어본 목소리는 너무나 끔찍하고 낯선 목소리여서 무척이나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 낯설음이 주는 당혹감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남편과 아이는 그게 내 목소리라고 인정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타인이 알고 있는 나와 내가 알고 있는 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진실한 나의 모습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과 목소리, 성격 그리고 습관화된 나의 말투들이 타인이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소통의 한계 앞에서 한 번 더 자신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동명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내 책상 위의 천사》로 잘 알려진 작가 쟈넷 프레임(Janet Frame)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이야기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글로 써서 찢어버리지 않고 친구에게 전달한 이야기다. 들어주어서 고맙다고, 내 마음의 귀에 분별력 있는 열쇠 구멍을 내주어서 고맙다고 그 보상으로 해준 이야기다.” 그렇기에 시인이며 작가인 로오드(Audre Lorde)의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상처 받아 멍들고 오해받을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언어화하고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말처럼 대화를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고장 난 피아노 건반처럼 화음을 낼 수 없는 존재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고 오해를 불러오더라도 언어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소통입니다. -중략-
상대의 말에 자주 상처 받지는 않나요? 이런 언어의 한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소통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 친구와 했던 약속이 기억납니다. 우리가 혹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면 그건 진심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임을 서로 굳게 믿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로 인해 무척 맘이 상한 오늘, 나는 신뢰를 갖기로 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그 사람 자신도 모르는 언어습관이나 언어의 한계 때문에 생긴 것이지, 그 사람의 본심이거나 의도는 아니라고 믿으며, 그가 준 상처와 언어의 불완전함을 포용하기로 합니다. 언어가 나아갈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해결책은 대화의 단절이 아니라 바로 상대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C)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중에서
https://www.journaltherapy.org/3632- "여러개의 언어를 알았으면 했지"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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