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을 푸르게 하는 것은 잡초다 -이문조

 

  저 푸른 들판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들판을 푸르게 하는 것은
  잘난 장미도 백합도 아니다

  이름도 없는
  있어도 불려지지도 않는
  잡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각기 자리 잡아
  제 역할에 충실한 들풀

  그들이 들판을 푸르게 한다
  소리 없는
  그들이 세상을 지탱한다.

 

   - 2009년 월간 <한비문학> 

<비오는 날 - 마종기>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날 때
환한 불이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ㅡㅡ

 

오늘 빗속을 오래 걸었다
옷과 발이 다 젖었지만
마음은 메마른 사막이었다.

참 오래도 그리 걸어왔다
젖지 못한 채,

마냥 퍼붓던 굵은 빗속을. 

그래, 그래,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끄덕 끄덕
시인의 말을 중얼거리며.

 

 

MP 080420

반 고흐, 빗속의 밀밭(1889)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김수영, "비"(1958) 일부>

르상티망(ressentiment)

르상티망은 라틴어의 접두사 "다시(re)", 그리고 "감정을 느낌(sentiment)"에서 온 말로 영어로는 resentment를 뜻하는 프랑스어이다. 이것은 철학, 심리학, 특히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개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르상티망을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약한 입장의 사람(약자)이 강자에 대해 갖는 질투, 원한, 열등감 등의 감정인 시기심과 연결지었다. 

 

실존주의자들에 따르면, 이것은 좌절감을 느낄 때 그 책임을 좌절감의 원인이 되는 것에 부여함으로써 가지게 되는 "적대감"이다. "원인"을 제공한 것에 직면한 약점이나 열등감, 그리고 질투심은 그 원인을 공격하거나 부정하는 거부, 정당화의 가치 체계 또는 도덕성을 만들어 자신을 방어한다.  즉 이 가치 체계는 선망의 원천이 되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판단함으로서  자신의 약점을 정당화한다.  그럼으로써 질투심을 느끼거나 상대적으로 분개한 사람이 자신의 불안정과 결함을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로 작용한다. 자아는 자신을 보잘것없는 것으로부터 단절시키기 위해 적을 만드는 것이다. 

내게도 넘어질 권리가 있다

- 실패의 힘

 

어느 날 직장에 다니는 제자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선생님, 요즘 들어 마치 제가 먼지처럼 회사에 붙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몇 가지 실수로 요즘 많이 힘들었거든요. 게다가 제가 하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일이어서 특별히 내세울 게 없어요. 그래서 성과 위주로 능력을 평가하는 인사고과에서 늘 뒤처지고 말아요. 모두가 인정받는 곳에서 저만 부족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부끄럽고 외로워요. 실수를 할까봐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하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있어요. 모두들 어떻게든 잘하려고 열심인데, 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무의미한 존재로 어정쩡하게 회사에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먼지처럼, 오물처럼 말이에요. 요즘은 대체 내가 누구인지 혼돈이 와요."(글쓴이의 허락하에 사용함)

편지를 읽고 그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내 자신이 먼지처럼 작게 여겨지는 순간들, 누구나 살면서 때때로 느껴지는 감정입니다.해변의 수많은 모래알 중 하나처럼 작고 초라한 존재. 세상 사람들은 모두 환하게 웃고 있는데 유독 나만 실패자인 듯 우울하고 힘 빠지는 날도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호승, <햇살에게>


 

하지만 정호승 시인은 그런 먼지를 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이른 아침 먼지를 보는 일이 뭐 그리 감사할까 싶은데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먼지처럼 무시하고 쓸어버릴 수 있는 일상의 아주 작은 존재들을 볼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을 통해 나 역시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나도 실패할 수 있다

- 중략-


 

축복(benediction)은 라틴어의 ‘누군가에 대해 좋은(bene) 말을 한다(dictio)’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욕구 중 하나는 바로 타인에게서 ‘좋은 말’을 듣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받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헤겔(Hegel)은 인간이 존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타인으로부터 받는 인정”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명력이 되는 ‘좋은 말’이란, 나의 업적이나 재능, 혹은 성공에 대한 인정이나 칭찬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먼지 같은 나’라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 누구에게서도 ‘좋은 말’을 듣지 못한다면, 즉 인정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햇살을 받지 못한 새싹처럼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꽃을 피우고, 열매나 씨앗을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안에 존재하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명력이 싹을 틔우기도 전에 시들시들 말라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를 그대로 긍정하고 축복하기

 

헨리 나우엔(Henri Nowen)은 누군가를 축복하는 일은 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긍정이란 당신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그 존재 자체에 대해 “예스”라고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서로를 인정해주고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항상 서로를 찬란하게 비춰주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햇살 같은 축복이 절실할 때는 자신이 먼지처럼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그럴 때 축복의 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먼지처럼 작은 존재이지만, 동시에 별처럼 반짝이는 존재입니다. 작은 문틈으로도 축복 같은 햇살이 찾아와 나와 함께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오늘의 햇살로, 또 내일은 내일의 햇살로 절망의 순간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그 찬란한 빛이 날마다 우리를 축복해주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예스”라고 긍정해주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을 헛디뎌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잘해보려고 애썼지만 실패의 쓴맛을 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먼지처럼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마야 안젤루(Maya Angelou)의 시처럼 이렇게 말해보세요.

 

당신들 나를 땅에 눕혀 짓밟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 먼지처럼 일어나리라

(……)

자꾸 솟는 달처럼 해처럼

어김없이 밀려오는 조수처럼

높이 솟는 희망처럼

그래도 나, 솟아오르리라

- 마야 안젤루, <그래도 나는 일어서리라Still I Rise> 중에서

 

그리고 사무엘 베케트의 말처럼 자신에게 이렇게 격려해주세요. “끊임없는 시도, 끊임없는 실패, 그 무슨 상관인가.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훌륭히 실패하라.”   더불어 나를 긍정해주고 축복해주는 사람들과 교감하고 교류를 나눠보세요. 적극적으로 그런 모임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내가 나를 긍정해주는 연습을 부단히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 Ⓒ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중에서)

경험했으나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 뒤늦은 깨달음

 

과거의 어떤 사건의 의미를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는 경험, 혹시 해보았나요? 그 순간 우리는 너무나 큰 아쉬움을 느끼곤 합니다. 그래서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Hobbes)는 “지옥은 너무 늦게 발견한 진실”이라고 말했나봅니다. 세월이 흐르고 그 경험을 되살려내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때의 경험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깨달은 의미는 그 경험을 할 당시와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의미 속에서 되살아난 그 경험은 보편적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우리는 경험을 했으되 그 의미를 몰랐다,

그리고 의미에 다가감은 그 경험을 되살려내는 일이다

우리가 행복에 부여하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전혀 다른 형태로. 내가 전에 말했었다

의미 속에서 되살아난 경험은

다만 한 인생의 경험이 아니라

여러 세대의 경험이라고

- T. S. 엘리엇, <네 개의 사중주Four Quartets 중에서>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겠지만, 언니의 일기를 훔쳐본 적이 있었습니다. 언니는 어디선가 이런 저런 멋진 말들을 인용해 일기장에 적어놓곤 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었는데 그 중 한 이야기가 어린 내 맘에 깊이 남아 있었나봅니다. 어른이 되고 영문학을 강의하면서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을 읽을 때였습니다. 순간 초등학교 때 언니의 일기장에서 읽었던 이름 모를 프랑스 작가의 이야기가 섬광처럼 떠올랐습니다. 이런 것을 ‘아하!’의 순간이라고 합니다. (시나 글을 읽을 때 또는 영화의 대사를 접할 때,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간 어떤 과거의 경험이 떠오르면서 그때는 몰랐던 의미가 되살아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학의 연상 작용으로 우리 내면의 무의식적, 의식적 이야기를 불러일으켜서 그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언니의 일기장에서 훔쳐본 인용문은 난해했던 조이스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면서 내 삶의 문제를 좀 더 다른 시간 속에 놓고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한 어린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바로 5살무렵의 내 이야기이기도 했지요. 희미한 기억 속에 마음에 남아 내가 해석한 대로 그 이야기를 각색해보겠습니다.

 

어린 소녀가 넓은 꽃밭에 혼자 앉아 놀고 있습니다. 언니, 오빠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큰 집에는 엄마랑 소녀 둘뿐입니다. 엄마는 큰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일을 하느라 바쁘고, 어린 소녀는 언제나처럼 혼자 꽃밭에 앉아 작은 풀꽃을 꺾기도 하고 꽃잎을 따 소꿉놀이도 합니다. 그러다 그만 소녀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무릎을 보니 빨갛게 피가 납니다. 소녀는 ”아앙!“ 하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런데 엄마는 오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더 크게 ”아아앙!“ 하고 웁니다. 아파서 운다기보다는 엄마가 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엄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급히 달려옵니다. ”우리 아가 왜 울어? 누가 그랬어?“ 엄마는 항상 소녀가 울면 ”누가 그랬어?“라고 말합니다. 그게 누구든 반드시 소녀 편을 들어줄 것처럼 말입니다. 소녀는 얼른 무릎을 가리키며 ”피, 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아가, 이건 피가 아니라 꽃잎이야. 이제 울 아가 안 아프지?“ 하며 소녀를 꼬옥 안아줍니다. 엄마에게는 누구에게도 맡을 수 없는 포근한 엄마냄새가 납니다. 엄마가 할머니 댁에라도 다니러 갈라치면 소녀는 그 사이 옷장 문을 열어 엄마 옷에 코를 대보곤 합니다. 그렇게라도 엄마냄새를 맡고 싶어서입니다.

엄마 품에서 소녀는 무척이나 행복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소녀를 떼어놓으며 말합니다. “울 아가 착하지? 엄마 바쁘니까 혼자 놀고 있어.” 엄마는 다시 집안일을 하러 갑니다. 소녀는 갑자기 소꿉장난도 시시해지고 꽃잎 따기도 시시해집니다. 엄마가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것 같아 공연히 심통이 나기도 합니다. 소녀는 무심코 하늘을 바라봅니다. 순간 쨍하게 눈부신 봄 햇살이 가슴에 들어와 꽂히면서 가슴 한구석이 끄응, 하고 아파옵니다.

지금 깨닫지 못한다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 작가는 단 한 구절로 이야기를 끝맺었습니다. “후에 그 소녀가 커서 어른이 되었을 때, 그녀는 그때의 아픔이 외로움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 한 구절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읽다가 어린 시절의 기억 너머에서 또렷하게 기억해낸 말입니다. 어린 소녀는 그때 아파오던 가슴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겠지요. 어린 마음에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그래서 가슴이 끄응, 하고 아팠다고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아니면 엄마가 놀아주지 않아서 속이 상한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그때의 일은 다 잊고 어른이 되었겠지요.

그런데 그 소녀가 어른이 된 어느 날,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에 울지 않으려고 올려다본 하늘에서 마주친 따가운 햇살이 화살처럼 가슴에 와 꽂힙니다. 그리고는 문득 그 어린 시절의 아픔을 기억해냅니다. 아, 내가 그때 느꼈던 그 이름 모를 아픔이 바로 외로움이었구나, 하며 경험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가슴 한편이 알 수 없이 시려오는 날 어느 날 이 외로움이 인간의 실존적 외로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이겠지요. “당신이 곁에 있어도 나는 당신이 그립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누구나 살면서 답을 찾지 못한 때로는 행복했거나 또 더 많은 경우 아팠던 경험들이 있습니다. 풀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그 삶의 의미들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 가치없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지금 내가 깨달은 의미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훗날 알게 됩니다. 부모님의 그리고 선생님들의 말과 행동, 친구의 행동, 또는 내가 겪은 여러 상처 입고 원망했던 많은 사건들이 나중에 새롭게 경험되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그 의미가 상처와 고통만은 아니었다는 깨달음 그리고 삶을 배우고 나를 성장시킨 귀중한 경험, 나아가 축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직은 내게 고통스러운 사건, 아픈 경험, 원망스런 사건, 억울하고 부당한 일들이 내가 지금 생각하는 의미라고 절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쩌면 반대로 내게 지금 축복이고 행복인 경험들이 지금 생각하는 의미의 전부가 아니라고 좀 더 겸손해져도 좋겠습니다.
그래서 먼 훗날 웃으면서 내 삶의 희극은 잠재된 비극이었으며, 내 삶의 비극은 다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희극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c) 출처: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카페: 내 마음을 만지다

 

 

하지만 어린왕자야,  너의 조그만 별에서는 의자를 몇 발짝 옮겨놓기만 하면 돼.
그러면 네가 원할 때면 언제라도  저무는 하루와 지는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거야.

"어느 날인가," 네가 말했지, "난 해가 지는 걸 마흔 네번이나 보았어!"
그리고는 잠시 후 너는  이렇게 덧붙였지:  "...사람들은 너무나 슬플 때 해지는 모습을 좋아하게 돼..."

"그럼 너 그렇게 많이 슬펐었니...," 내가 물었다,  "마흔 네번의 노을을 본 날?"  

그러나 어린 왕자는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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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on your tiny planet, my little prince, all you need to do is move your chair a few steps.
You can see the day end and the twilight falling whenever you like...
"One day," you said to me,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And a little later you added:
"You know-- one loves the sunset, when one is so sad..."
"Were you so sad, then?" I asked, "on the day of the forty-four sunsets?"

But the little prince made no reply.

만일 당신이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싶거든, 그 누군가를 잘 알고 싶다면.....그가 웃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의 웃음이 친절하고 후하다면, 그는 선한 사람이다.  -도스토엡스키


잎 지는 초저녁, 무덤들이 많은 산 속을 지나왔습니다. 어느 사이
나는 고개 숙여 걷고 있습니다. 흘러 들어온 하늘 일부는 맑아져
사람이 없는 산 속으로 빨려듭니다. 사람이 없는 산 속으로 물은
흐르고 흘러 고요의 바닥에서 나와 합류합니다. 몸이 훈훈해집니다.
아는 사람 하나 우연히 만나고 싶습니다.

무명씨,
내 땅의 말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그대......

[신대철 -사람이 그리운 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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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 하나 우연히 만나고 싶다'는 시 속 사람의 말이 여러겹으로 가슴에 남는다. 
그 사람은에서  사람이 없는 산, 무덤만 가득한 산에서 그늘진 빛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그가 산에서 내내 만난 이들은 만날 수 없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무명씨,

이땅의 말로는 부를 수도 없는 잠든 이들뿐. 

그가 그 산을 내려와 만난 건 

그가 지나온 산에서부터 자신처럼 굽이굽이 흘러 하산한 물 뿐이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아니,

혼자라는 걸 다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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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원광대에서 "고립의 시대"에 대해서 특강/워크숍을 마쳤다. 3번째 초청해준 그 학회에 감사하다. 
마침 내가 올해는 지난 가을부터 계속 한국에 있어서 그동안  특강을 3-4곳에서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한달 넘게 수없이 100페이지 넘는 PPT를 수정하고 또 수정하며 고립-단절-외로움에 대해서 끝없이 생각했다 
이미 몇달전부터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던 중이었기도 했었기에

나는 고립 중에 가장 중요한 한 주제에 집중하고 싶었다. 

 

다녀와서 좀 아팠다. 탈진? 아쉬움?  어떻게 그 짧은 시간 그 길고도 깊은 이야기를 다 나눈단 말인가?

메인 디쉬는 맛도 못보여주고 애피타이저로 끝난 듯해서  와서 끙끙 앓았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칼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바람이 너희 사이엣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말라

그보다 너희 영혼과 영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속에 묶어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질만이 너희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