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달처럼
밤엔 해처럼
그렇게 살아도 좋으리…

 
photos by bhlee(1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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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nSS
산은 산, 물은 물처럼, 낮엔 해, 밤엔 달인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선생님 말씀 중에 어둠속에 빛이 있으면 더 이상 어둠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밤에 해가 있으면 밤이 낮이되고 낮이 밤이 되는, 혁명적인 상황이네요^^
선생님 미적 감각은 따라갈 수가 없네요, 어쩜 이런 사진을 찍으실 수 있는지요!

-->bhlee
고마워.
맑고 밝은 하늘을 기다려도 기다려고 인색하던 가을이  요몇일간 마침내 가을 햇살을 환히 내려주니 참 감사했지?
길고 긴 겨울이 오기 전..... 

사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이란 말이 우리에겐 참 익숙하지. 
노래도 있고 ㅡ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하지만 그냥 난 빛과 어둠 너머에 그것에 가려,
또는 우리의 시각과 고정된 의식에 의해 보이지 않는, 그렇지만
여전히 거기 있는 소중한 존재에 대해 생각해봤어.
낮 달과 밤의 해처럼…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FBk에서 가져옴)
 

 

 

아주 오래전 언젠가 이런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도도히 버티던 안나푸르나 봉도 결국 인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히말라야 정상 등반에 성공할 때마다 언론은 대대적인 보도를 합니다. 이때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바로 ‘정복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생각하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루어낸 승리지, 자연과 싸워서 이기거나 정복해서 얻은 승리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승리를 내 밖의 어떤 적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여길까요? 더군다나 자연은 우리와 싸우기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자연과 사람을 꼭 싸워 이겨야 하는 경쟁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이 이기적인 가치관은 우리의 마음을 씁쓸하게 합니다. 이런 씁쓸한 표현 말고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저 멀리서 우리를 기다리던, 너무 높고 험한 곳에 존재해서 만날 수 없었던 봉우리를 드디어 만나러갔다고요. 그 만남을 위해 모험을 했고, 드디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등정 과정에서 실패한 사람들, 때로는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모두 "정복"에 실패한 낙오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마치 무슨 침략 전쟁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모두 같은 승리자입니다. 그들 역시 ‘산이 거기 있어서’ 만나러 갔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매 순간 살아 있었던 분들입니다. 이런 도전은 그 자체로 이미 승리입니다. 만일 우리의 행동을 모두 결과로만 판단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거나, 심하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지 모릅니다. 봉우리에 오르지 못하면 그동안의 내 모든 노력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저 높고 험한 산에 오르는 일이 결국엔 다시 내려오기 위함이듯 우리들의 모든 여행은 역설적이게도 결국 집으로 향하는 일입니다. 집으로 향하는 외출이 곧 여행입니다. 다만 집으로 다시 돌아온 우리는 예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내가 되어 있습니다. 힘겨운 여정을 거쳐 오는 동안 우리는 한 걸음 더 ‘나’를 실현시키며 한층 성숙한 ‘나’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결과만으로 나의 여행, 나의 사랑, 나의 꿈과 모험이 허망했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어떤 과정도 무의미한 실패는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성실하고 묵묵히 나를 도전하며 나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해안가의 수많은 모래알들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찾아내든 그것은 결국 언제나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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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맥락에서

토끼는 낮잠을 자서 거북이에게 졌다.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토끼가 잠을 잔 이유는 승리가 너무나 뻔해서 성실하게 끝까지 뛰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승리가 뻔한 경주를 왜 했을까요? 이기는게 목적이니까요.  그런데 거북이는 왜 바보 같이 "결과"가 너무도 뻔한, 당연히 패배할 웃음거리가 되는 경주에 참여했을까요? 거북이는 토끼를 이기는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스스로에게 도전한 것입니다. 이 기회를 통해 자신에게 도전한 것입니다. 토끼와 경주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경기를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승리자"일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비유적으로 우화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에서 발췌 수정 

 

집 - 김용택

 

외딴집,

외딴집이라고

왼손으로 쓰고

바른손으로 고쳤다

 

뒤뚱거리면서 가는

가는 어깨를 가뒀다

 

불 하나 끄고

불 하나 달았다

 

가물가물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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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혼자 있어서만은 아닐 터인데

거리 한복판에서, 모두 목적지가 있어서인지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특히 하루가 저물어 환하게 불 밝힌 거리에서, 

나만 빛없는 한 점같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어디로 가야 하나.

기다리는 얼굴들, 기다리는 따듯한 집이 있어서 사람들은 저리 분주히 걸음을 옮길까 생각할 때가 있다. 

나만 그 거리에서 동떨어진 외딴집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외딴집ㅡ이라고 가슴으로 쓰고

머리로 고친다.  아니, 지웠을까? 

그림을 그린다. 뒤뚱거리면서 가는 사람, 

그 사람의 가느다란 어깨를 감싸는 집을 그렸다. 

그런데 그 집이 그 사람을 가두었다. 

외로운 사람은 차라리 스스로를 가둔다.

더 외롭지 않으려고 숨어버린다. 

자신이 만든 외딴곳에. 

 

외로움의 불 하나 끄고  또 다른 불 하나 켠다. 

희망의 불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가둔 외딴집에서 나오기 않고 지내려는 불일까? 

가물가물,  집 밖에선 얼어버린 눈물이 하늘에서 소리 없이 내려온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대신 울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넉넉한 위로가 된다, 

넉넉하고 참 감사한 위안. 

 

가을-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가을날 맑아-나태주

 

잊었던 음악을 듣는다.

잊었던 골목을 찾고

잊었던 구름을 찾고

잊었던 너를 찾는다

아, 너 거기

그렇게 있어줘서

얼마나 고마운가 좋은가

나도 여기 그대로 있단다

안심해라 손을 흔든다

photo by bhlee

 

모순: 우연 그 기묘한 필연 - bhlee 

열어보고 또 열어본다
창에 비친 내 그림자에
열어보고 또 열어본다
지나는 바람이 조용히 흔들리는 소리에
열어보고 또 열어본다
숨죽인 빗방울의 흘러내림에

아, 이젠 그만
굳게 닫아 잠그고
벽을 향해 돌아 누었다
그 눈감은 찰라의 절망 그 사이로
그가 다녀갔다

잠긴 문 앞에서
돌아갔다

아, 난 오늘도
열어보고 또 열어본다
절망하는 그 순간
당신과 나를 놓쳐버리는
그 어리석은 찰라까지

——
올해 초 찍었던 이 사진을 늘 그렇듯 ‘우연히’ 발견했는데 또 우연히

정말 오래 전 쓴 이 글을  얼마전 두 주에 걸친 특강/워크숍 자료를 찾다가 외장하드에서 발견했다.

 

우연,  그 기묘한 필연

코스모스 - 이형기

 

언제나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ㅡ희망도, 절망도,
불타지 못하는 육신

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는 섬돌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어룽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홀로 달래며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 가슴이 파랗게 부셔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   

 

ㅡㅡ 

가을하늘이 숨이 막히도록 푸르게 점점 높아만 갑니다. 어느새 한해도 이 가을이 질 때 함께 저물어갈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은 물처럼 내 손에 잡히지 않지만 우리에겐 잊히지 않는 이야기들이 시간의 굽이굽이마다 꽃으로 피어납니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꽃은 국화와 코스모스입니다. 싸늘한 국화의 향기가 쓸쓸함과 외로움, 고독함의 냄새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코스모스는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트이고 싶은 마음,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던 우리 가슴 깊은 곳의 이루지 못한 '간절함'을 그리움이란 설움으로 말없이 피워내고 있는 코스모스를 보면서 남은 한 해, 나의 그 간절함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고 싶습니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이 오늘도 목이 가늘도록 날 바라보며 손짓하고 있는 데 나는 무심히 등 돌리고 부지런히 세상의 물결을 쫓아 떠밀려가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 한해가 저물기 전에,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문득 뒤돌아 달려가 그 그리움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그리움은 내 가슴 깊은 속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이며 온전히 꽃피워야할 '나의 참 모습'입니다. 고달프고 외로운 나그네로 세상에 살되 영원한 고향을 기억하며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나를 일깨워 살아있게 하는 손짓입니다. 저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가 파랗게 파랗게 부셔져 하늘과 나,  하나가 되는 그날을 위해..
-[ 덴버 중앙일보 칼럼, <내 마음의 작은 새>중에서] 
04

 

여름 한때 -천양희 

 

 

   비 갠 하늘에서 땡볕이 내려온다. 촘촘한 나뭇잎이 화들짝 잠이 깬다. 

공터가 물끄러미 길을 엿보는데, 두 살 배기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간다

  생생한 생(生)! 우주가 저렇게 뭉클하다

  고통만이 내 선생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몸 한쪽이 조금 기우뚱한다

 

  바람이 간혹 숲 속에서 달려나온다. 놀란 새들이 공처럼

튀어오르고, 가파른 언덕이 헐떡거린다.

웬 기(氣)가 ― 저렇게 기막히다

 

  발밑에 밟히는 시름꽃들, 삶이란

  원래 기막힌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다시

  숨을 쉬며 부푼다. 살아 붐빈다.

그래도 

 

사랑했다

좋았다

헤어졌다

그래도 고마웠다.

 

네가 나를 버리는 바람에 

내가 나를 더 

사랑할 수 있었다. 

 

ㅡ나태주 

 

 

9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9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9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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