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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없이 나를 견딥니다
묵은 베개의 메밀 속처럼
나날이 늙어도 꼭 그만큼입니다.
[ 이성복]

 

072812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기형도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 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기형도, 메모(1988.11)/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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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모를 쓴 몇달 후 1989년 3월 그는 뇌졸중으로 홀로 외롭게 세상을 떠나갔다.
겨우 만 29세. 아까운 사람. 아까운 천재.
그는 "또 다른 세상," 그가 견딜 수 있는 날씨가 있는 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몄을까.
하고 싶은 말이 그곳에서도 공중에 흩어졌을까?
그 곳은 어디일까.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만을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바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거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손가락 빗질인 양 쓸어 올려보다가, 목을 꺾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진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려오는 실낱같은 향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이다. 갈 수 없어도 사랑이다. 魂이라도 그쪽으로 머릴 두려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꽃잎 - 도종환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다.
피었다 저 혼자 지는 오늘 흙에 누운 저 꽃잎 때문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형언 할 수 없는
시작도 아지 못할 곳에서 와서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의 저 외로운 나부낌
아득하고 아득하여

 

받아쓰다 - 김용택

어머니는 글자를 모른다. 글자를 모르는 어머니는 자연이 하는 말을 받아 땅 위에 적었다. 봄비가 오면 참깨 모종을 들고 밭으로 달려갔고, 가을 햇살이 좋으면 돌담에 호박쪼가리를 널어두었다가 점심때 와서 다시 뒤집어 널었다. 아침에 비가 오면 "아침 비 맞고는 서울도 간다"라고 비옷을 챙기지 않았고 "야야, 빗낯 들었다"며 비의 얼굴을 미리 보고 장독을 덮고 들에 나갔다. 평생 바다를 보지 못했어도 아침저녁 못자리에 드는 볍씨를 보고 조금과 사리를 알았다. 감잎에 떨어지는 소낙비, 밤에 우는 소쩍새, 새벽하늘 구석의 조각달, 달무리 속에 갇힌 보름달, 하얗게 뒤집어지는 참나무 잎, 서산머리의 샛별이 글자였다. 난관에 처할 때마다 어머니는 살다가보면 무슨 수가 난다고 했다. 세상에는 내가 가보지 못한 수가 얼마나 많은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했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고 했다. 어머니는 해와 달이, 별과 바람이 시키는 일을 알고 그것들이 하는 말을 땅에 받아 적으며 있는 힘을 다하여 살았다.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 이혜숙 >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차창바람 서늘해
가을인가 했더니
그리움이더라

그리움 이 녀석
와락 안았더니
눈물이더라

세월 안고
그리움의 눈물 흘렸더니
아~ 빛났던 사랑이더라  


엄마와 어머니 사이 - 목필균

  스물네 살 딸 시집보내고
  친정어머니 되고
  서른세 살 아들 장가보내고
  시어머니 되었다

  엄마와 어머니 사이
  비탈진 품 안으로
  조금은 멀게 자리 잡은
  자식들

  진액 모두 빠져나간
  텅 빈 거실에서
  리모컨으로 들려오는
  세상 이야기

  어머니 시절보다
  엄마 시절이
  더 힘이 있고

  엄마 시절보다
  어머니 시절이
  더 둥글더라고.

쉽게 쓰여진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우리들의 시간 - 박경리

 

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딛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뽑내어 본들 徒勞無益(도로무익)

時間(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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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徒勞無益(도로무익) 

   헛되게 애만 쓰고 아무 이로움이 없음

[주말을 여는 책 | ‘내 마음을 만지다’] 마음의 상처와 고통, 읽고 쓰면서 치유하기

2011-12-23 오후 2:37:33 게재

 


차미례 언론인·번역가

한국사회와 그 구성원인 우리는 마치 대지진을 겪은 나라, 재해 속을 헤쳐나온 생존자들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성한 사람이 없다.

경제대국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사회의 불운은 가장 부도덕한 정치인들이 불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것이 물질적 풍요와 유착되어 가치관의 혼란을 부르고, 무수한 정신적 희생자들을 낳았다는 점일 것이다.

좋은
교육을 받고 멀쩡한 외양을 하고 풍요와 쾌락을 구가하는 듯 보이는 사람들도 많은 사연과 어두운 상처를 가지고 있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이 직업인 신문기자를 수십년 하다보니 노동문제, 여성-청소년 문제같이 표면화되고 공식화(?)된 사회문제 외에도 숨은 지뢰밭-사람마다 가슴 속에 크고 작은 한(恨)과 분노, 상처를 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 잘못 다치면 큰일 난다. 찬사로 가득찬 인터뷰기사를 쓰고도 "첼로가 어려워
콘트라베이스로 바꿨다"는 연주가의 말을 그대로 썼다가 평생 원수가 되고 소송까지 당한 기자도 있다. 그의 상처를 모르고 건드린 것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이성복 시인의 시구를 서문에 인용한 이봉희 교수의 이 책은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는 한국인의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선을 끈다.

저자의 생각은 이렇다. 오랫동안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억압하는데 길들여져왔지만, 감정이란 그렇게 쉽게 눌러 막을 수 없다. 안전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해소하지 않으면 슬픔 분노 두려움 같은 미해결의 에너지는 몸속에 다른 형태로 저장되어 예기치 못했던 모습으로 불시에 돌출된다.

원인불명의 만성 질병이나 정서적인 문제가 그것이다. 너나할 것 없이 위태로운데 아픔을 느끼거나 인정하는대신 잘 숨기고 방어하며 살아간다. 몸이 아픈건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마음이 아프면 마치 인격적 결함이나 사회적 실패자인양 수치심까지 느낀다. 그래서 치유가 필요하다.

문학을 이용한 마음의 건강회복법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자존의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내 마음을 만지다'라는 타이틀 처럼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는데서 시작된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우리에게 약간 생소한 '문학을 이용한 마음의 건강회복법'을 담았다. 정신의학분야에서
음악치료, 미술치료, 연극치료가 소개되어 있고 유학파 전공자들도 활동하고 있지만 문학작품을 읽고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치유법이 일반인 대상의 책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다.

문학전공교수(영문학)로 문학치료사 자격을 정식으로 취득한 저자의 실전경험과 풍부한
컨텐츠가 설득력을 발휘한다. 여기서 문학이란 시나 소설 뿐 아니라 신문기사, 노래가사, 연극이나 드라마 대본, 영화시나리오, 일기등 모든 텍스트를 말한다.

즉 문학치료사는 정신적, 육체적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텍스트를 제시해주고 거기에 대한 반응이 있을 때 연관된 다른 것을 읽히는 식으로 접근한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아프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그것을
스스로 발견하고 치유하게 하는 것이다. 문학치료의 방법으로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심리가 가장 가까운 장르인 시가 많이 이용된다.

이봉희 교수는 셰익스피어 전공자이다. 그는 많은 학생들이 문학작품 읽기를 통해 상처를 털어놓고 치유를 경험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2004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가서 전미문학치료학회를 통해서 새롭게
공부를 시작, 3년만에 공인문학치료사와 저널치료사 자격을 취득한 뒤 '한국 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격'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이지만 저자의 진정한 무기는 자격증이 아니다.

그는 시종일관 아주 쉬운 말로 우리가 어디선가 습득해서 부지중에 금과옥조로 삼고 있을법한
현대의 신화들을 한방에 날려버린다.

예를들어 성과(성적)제일주의를 무색케 하는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기대와 칭찬의 불편한 역효과를 다룬 '칭찬은 고래를 병들게 한다' 진실보다는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는 사회에서 상처받는 피해자를 다룬 '그 누구도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왜곡된 자기방어를 성찰한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더 공격적이다'같은 글들이 그렇다.

'칭찬은 고래를 병들게 한다'

저자는 부드럽고 겸손하게 글을 전개해, 읽는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위로해준다. 강한 주장을 담은 글을 이렇게 맑고 유연하게 쓰는 것은 상담자로서의 대단한 내공의 증거다.

"건강하지 못한 수치심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느끼며 실패자로 생각하고, 결국은 자신을 병들게 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아프면 아프다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아픔은 살아있음의 증거입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받기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라고 간언한다. 스스로 마음이 아픈 것을 인정할 때 묵은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나 세상과 화해할 수 있다.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 나, 너, 사회와 화해해야한다며 책의 내용도 나와의 화해(왜 나는 아프다고 말하지 못할까), 너와의 화해(소중한 사람이 더 아프게 한다), 사회와의 화해(살아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의 3장으로 나누어 42편의 글을 실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불행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자신이 겪어보지도 못한 고통을 이해하는 척, 뭔가 해주려고 나서지 말고 말없이 옆에 있어주기, 도움을 청할 때 도와주기를 권한다.

이봉희 교수의 모토도 '이해하려 하지 마라. 다만 함께 하자. 도우려 하지 마라. 다만 사랑하자'라고 한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함께 해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칭찬을 퍼붓는 일도 고래를 춤추게 할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부담을 주는 일이다.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파악하고 잘 알고 세상사에 대처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는 할수 있어'라는 과장된 자기 최면과 허상속에서 자신의 기대치를 잔뜩 높여 설정해놓고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거나 자기 학대의 오류 속에서 첨벙대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을 스스로 파악하는 내면의 힘, 환상에서 깨어나 한계를 받아들이는 치유의 과정을 이 책은 안내해 주고 있다.

생각속의 집
이봉희 지음
1만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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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경제 2011-12-23 10:16  각질이 돼버린…묻어둔 상처 지금 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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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3 08:02  문학치료전문가 이봉희 교수, “아프다고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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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공인문학치료전문가 이봉희 교수가 펴낸 에세이 ‘내 마음을 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