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에 해당되는 글 7건

<쓰러진 나무 - 나희덕>

  저 아카시아 나무는
  쓰러진 채로 십 년을 견뎠다

  몇 번은 쓰러지면서
  잡목 숲에 돌아온 나는 이제
  쓰러진 나무의 향기와
  살아 있는 나무의 향기를 함께 맡는다

  쓰러진 아카시아를
  제 몸으로 받아 낸 떡갈나무,
  사람이 사람을
  그처럼 오래 껴안을 수 있으랴

  잡목 숲이 아름다운 건
  두 나무가 기대어 선 각도 때문이다
  아카시아에게로 굽어져 간 곡선 때문이다

  아카시아의 죽음과
  떡갈나무의 삶이 함께 피워 낸
  저 연초록빛 소름,
  십 년 전처럼 내 팔에도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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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잎 - 이기철]

 

나는 이 가을을 성큼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과 물속에 떠있는 물방개와
길섶의 앉은뱅이 꽃에 눈 맞추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버린 지푸라기 같은 세상사들,
그것들을 토닥여 잠재우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망 없이 피었다 진 들국화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갈잎 스치는 소리 그리운 날 나는 문득 신던 신발 벗어놓고
지고 온 세상사 던지고 가겠습니다
흔들림이 아름다운 잎새들은 흔들리면서 생을 이룩합니다
그 잎새들 속으로 나는 추운 발 옮깁니다
지는 잎 속으로, 가을 속으로

 

- 출처: 이기철,『 잎, 잎, 잎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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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22

샤갈의 마을도 아닌 데 지난주에도 눈보라가 몰아친 3월, 어느새 중순이다.

그래도 어느새 아파트 근처 공원들의 꽃밭마다 설강화(snowdrops)가 하얀 꽃을 피우고

좁쌀만 한 이름 모를 풀꽃들과 호기심에 겨워 뾰족이 얼굴 내민 초록초록 작은 새싹들, 

나무에는 아가의 솜털 같은 봉오리들이 햇살을 쬐고 있다. 
거인처럼 느껴지던 길고 긴 겨울이 미련인지 혹 심술인지 가던 길 되돌아 서성이며 머뭇거려도

작고 여린 봄을 이기진 못한다는 걸 매년 확인하는 3월인데.... 
왠 갑자기 가을 시인가 나에게 묻는다. 

 

"나는 이 가을을 성큼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라는 첫 고백에서 내 삶의 계절을 읽어서일까?
우주에는 어김없이 회생의 봄이와도

내 삶의 계절은 뒤돌아서거나 반복되는 길이 결코 아닌 제 갈 길을 가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나는 이 계절을 그냥 "성큼" 건너갈 수가 없다는 시인의 고백에서 위로를,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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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에게 부침 - 권대웅>

언제나 지쳐서 돌아오면 가을이었다.
세상은,
여름 내내 나를 물에 빠뜨리다가
그냥 아무 정거장에나 툭 던져놓고
저 혼자 훌쩍 떠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나를 보고 빨갛게 웃던 맨드라미
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단지 붉은 잇몸 미소만으로도 다 안다는
그 침묵의 그늘 아래
며칠쯤 푹 잠들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일어서는 길에
빈혈이 일어날 만큼 파란 하늘은 너무 멀리 있고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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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빈혈이 일어날 만큼 멀리 있는 파란 하늘 말고
기대면 체온이 전해져 오는 빨간 맨드라미 같은 가슴을 가진
그런 친구 평생 기다려왔다.
평생 그런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일까?
그건 환상일 뿐일까....

너무 바빠서 외롭다 말하니까 누군가 웃었다.
복에 겨운 소리라고....
너무 바빠서 나 자신에게서 유기되고 방치된 나는
어느 정류장에 툭! 짐짝처럼 던져져 있을까?

울컥
각혈하듯 깊은 속에서 치미는 뜨거운 고백 한마디...
오늘도 그 말을 발설해선 안되는 비밀처럼 주어 삼킨다.
나는.....

 

091609 MP

bhlee | 2017.09.11 14:50 | PERMALINK | EDIT/DEL | REPLY
시간이 무서운 것은
나를 두고 떠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기 때문이다
내가 원치도 않았고 알지도 못한 곳에
내가 예측도 할 수 없는 때에
나를 툭, 떨어뜨려 놓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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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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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목(枯死木)을 보며 - 박두규

자꾸만 변해야 한다고
변해야 살아남는다고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사는 일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변하는 것은 나를 살리는 궁리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너를 위한 궁리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내가 본 세상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변치 않는 것들에 있었으므로
사랑은 지난 사랑이라도
변치 않아야 했으므로.

- [숲에 들다](2008: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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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고 싶다>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박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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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동과 서가 서로 마주하는 시간들이 있다.  서쪽엔 사그라져가는 그러나 아직도 남은 붉은 빛, 동쪽엔 냉정한 이성 혹은 엄연한 현실이 하얗게 떠올라 마주보고 있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내가 서 있다.

가끔 가던 길 가운데 멈춰서서 또 하루가 흔적 없이 저물어가는 하늘에 대고 죄스런 맘으로 길을 묻고 싶다.

이만큼이나 멀리 왔는데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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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시 - 문병란

9월이 오면
해변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된다

나무들은 모두
무성한 여름을 벗고
제자리에 돌아와
호올로 선다

누군가 먼 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
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
기도를 마친 여인처럼
고개를 떨군다

울타리에 매달려
전별을 고하던 나팔꽃도
때 묻은 손수건을 흔들고
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은
무성했던 여름 허영의 옷을 벗는다

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
먼 항구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되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
눈물에 젖는다.

- [새벽이 오기까지는](1994:일월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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