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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칼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바람이 너희 사이엣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말라

그보다 너희 영혼과 영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속에 묶어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질만이 너희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득료애정통고.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실료애정통고,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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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의 다듬어져 알려진 5월이라는 글보다 이 처음 글이 더 좋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하지만 피천득 선생님이 "지금 가고 있다"고 말한 5월, 

그 5월의 의미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읽을 때마다 의미가 깊어진다. 

그리고, ....그리기 by bhlee12.07

17년 전이네.  학회초정 강의/워크숍을 준비하다가 또 우연히 마주친 이 그림을 보다가 마종기 시긴의 시가 생각났다. 
못견디겠다고 외치는 듯 피어나는 찬란한 봄의 꽃들-- 그 화려한 향연 속에서 시의 내용이 계절에 어울리지는 않아서 몇구절만 발췌해서 올려본다.  이 그림도 늦가을 아님 초겨울에 그린 그림으로 기억난다. 

 

(내겐 이런 만남이 늘 우연이다. 내가 그린 그림이나 시나... 글... 원고 등등 나는 모으지도 신경쓰지도 않는 편이어서 늘 어딘가에서 툭 튀어나온다. 나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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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기 5 - 마종기>

그리던 나무를 아무래도 지워야겠다
............
마무리하던 나무를 지우고, 그 위에
모든 색깔을 다 지우고
짧고 간단한 향기를 그린다.

편안하다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나무 곁에 서 있는 향기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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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도 동행자는 있다

- 혼자라는 외로움

 

하늘의 별빛이 몇 백, 혹은 몇 억 광년을 건너 나에게로 오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어쩌면 그 별은 나에게로 오기 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별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 빛은 우리에게 희망과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줍니다. 별빛이 없는 암흑의 밤을 상상하면 별과 달이 새삼 고맙습니다. 혹시 그 별은 알까요? 자신이 보낸 그 빛을 몇 억 년 후 누군가가 바라보며 삶의 소중함과 아름다움과 희망을 찾았다는 것을.

 

밤의 몽유도원도 속으로 별똥별 하나 진다

몽유도원도 속에 쭈그리고 앉아 울던 사내

천천히 일어나 별똥별을 줍는다

사내여, 그 별을 나를 향해 던져다오

나는 그 별에 맞아 죽고 싶다

- 정호승, <별똥별> 중에서

 

생후 7개월 된 아이와 단 둘이 남겨져 공부해야 했던 유학 시절, 기숙사 건물에서 유독 내 방에만 항상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불이 켜져 있곤 했습니다. 새벽 두 시까지는 건너편 기숙사 방에도 불이 켜져 있었지만, 두 시가 지나면 어김없이 그 방도 불이 꺼졌습니다. 그 순간이 되면 나는 망망대해와도 같은 어둠 속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절망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 건너편 기숙사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면서, 두 시면 잠자리에 드는 그 학생이 부럽기도 하고, 또 아직도 과제를 다 끝내지 못하고 나 혼자 어둠 속에 남았다는 게 절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 순간들은 때때로 나의 집중을 방해했습니다. 혼자 어둠 속에 남겨진다는 것이 절망과 외로움의 영역을 더 크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기억은 더 있습니다. 시간강사 시절, 가까운 지방으로 강의를 다니던 때의 일입니다. 내비게이션은커녕 아직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인 데다, 고속도로나 큰길도 생기기 전이라서 시골길을 몇 시간씩 운전하며 다니던 때였습니다. 날이 일찍 저무는 늦가을, 학교에서부터 가로등도 없는 어둑해진 좁은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다 보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인생이란 길이 없는 숲속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 말을 머릿속에 되뇌면서 어둠 속에서 홀로 길을 찾아 헤매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좁은 일차선 도로 위에 내 차가 아닌 다른 차의 불빛이라도 보일라치면 그 반가움이란……. 더군다나 맞은편으로 스쳐가는 불빛이 아니라, 내 차와 앞뒤로 서서 나란히 달리는 불빛은 마치 인생의 동행자를 만난 것처럼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바른 길”을 가고 있구나 싶어 안심이 되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지친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를 인도하듯 앞서 가던 빨간 미등이 어느새 다른 길로 접어들거나, 뒤따르던 차들이 하나둘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 찾아왔지요. 안도하고 있다가 문득 들여다본 자동차 뒷거울에 불빛 한 조각 없이 어둠만이 들어차 있는 걸 확인하게 되면, 갑작스레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이 밀려들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공연히 두렵기도 했습니다. 인생길이 사실 이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 건너편 기숙사의 학생은 알고 있었을까요? 자신이 매일 밤 고독에 휩싸인 한 유학생과 어둠 속을 동행해 주었다는 것을. 그 자동차들은 알고 있었을까요? 자신들이 무심코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한 이름 모를 중년 여인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불안함과 두려움을 몰아내도록 함께 해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을까요, 내가 삶의 한구석에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때 내 안에서 작은 빛이 일어나고, 그 빛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준다는 것을? 한 사람이 성실하게 묵묵히 제자리에 존재할 때, 그 존재자체와 생명력은 아름다움이며 빛입니다. 그 빛은 그가 사라진 후에도 소멸하지 않습니다. 모차르트가 죽은 지 200년을 넘어서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생명의 별똥별’로 다가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 되던 해, 그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다큐에 에릭의 이야기가 잠시 소개되었습니다. 에릭은 우울증으로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살 직전 우연히 모차르트의 노래를 듣게 되었습니다.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에 듣게 된 모차르트의 음악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는 자살을 포기했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더 듣고 싶은 마음에 다시 살고 싶어진 것입니다. 에릭은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생명은 축복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울증도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에릭은 친구가 에이즈로 죽거나 사랑하는 가족이 죽음을 맞이하는 등 여러 차례의 고통스런 순간들을 맞이했는데, 그때마다 모차르트에게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모차르트에게 편지를 쓰면 그는 내게 음악으로 답장을 해줍니다. 내가 모차르트라고 말할 때 그는 모차르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모차르트는 내게 하나의 메타포(은유)입니다. 삶의 가장 아름다운 것들, 희망, 행복, 기쁨의 은유입니다.”  에릭은 그의 마음속 열정과 고통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기 위해 250년 전 존재했던 모차르트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충동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그 후 이어지는 생의 고통스런 순간들을 헤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삶의 중요하고 절실한 순간에 듣고 기억하는(읽는) 시 한 구절, 음악 한 소절은 우리의 내면에서 우리를 초대하는 목소리입니다. 이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글자에 목소리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에 목소리를 주는 것입니다. “내 안 깊은 데서 소리치는 외침에 대해 한 마디의 대답도 듣지 못하는 것, 그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부치지도 않는 편지로 대화하면서 에릭이 만난 것은 모차르트가 아니라 바로 자신 속에 잠재된, 진정 ‘살아 있고 싶어서 죽고 싶었던’ 자신의 생명력이었습니다. 그렇게 에릭은 잠재되어 있던 자신의 삶의 의욕을 되찾은 것입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별에 맞아 죽고 싶을” 만큼 살고 싶은 내 가슴에 별똥별이 떨어지는 날을 소망하며 기다립니다. 나도 어둠 속 어디선가 나의 별을 주워보렵니다. 그 빛이 몇 광년을 거쳐 내게 왔든, 아니면 바로 지금 내 곁에서 빛나는 작은 꼬마별이든 그 빛과 동행하며 나도 작은 별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슬픔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모습으로 당신 눈앞을 가로막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삶이 당신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의 손을 꼭 잡고 있다는 것을. 결코 당신의 손을 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a Young Poet》중에서

 

출처: (c)[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S대교 남단 카페에서 문득 창밖을 내다봅니다. 한쪽은 한강을 건너려는 차들이 답답하게 막혀서 좀처럼 움직이지 못합니다. 건너편 차선은 거의 비어 차들이 시원하게 달리고 있습니다. 신호가 푸르게 바뀌어도 잘 움직이지 못합니다. 한강을 건너려는 차들이 이 길 하나뿐 아니라 다른 길에서 다 함께 몰리니까요. 얼마나 답답할까요. 빨리 집(가려던 목적지)에 가고 싶을 텐데요.

꼭 내 삶에서 내 길만 이렇게 빨간 불이 켜지고 막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밤 늦은 시간 다들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하나 둘 정류장을 떠나는데 내가 기다리는 버스만 오지 않는다고 느끼듯이 말입니다. 그럴 땐 곁에서 어둠을 밝혀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가로등도 위로가 되지 않더군요.

 

그런데 내가 깜박 잊고 있었네요. 건너편 차들도 저쪽 강너머에서 다리를 건너기 전 지금 나처럼 한참을 막혀서 기다렸다는 것을요. 누군가가 지금의 파란 신호를 만나기 전 얼마나 많은 붉은 신호 앞에서 기다리고 인내하며 통과해야 했는지 자꾸 잊습니다. 늘 현재의 상황만 보고 ‘나만’ 뒤쳐졌다고, ‘내 길만’ 막힌다고, ‘내 삶만’ 힘들다고, 그렇다고 생각하지요. 마치 상대가 내가 누려야 할 무언가를 대신 가져간 듯이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절망하곤 하지요.

갑자기 박탈감에 대한 생각이 납니다.  박탈감을 느낀다면, 억울하다고 느낄 때면  나 자신에게 또는 그런 호소를 하는 분들과 대화할 때 가끔 비유를 듭니다. 절망하지 마시기를 바라니까요.  

운명? 아니면 내 삶에 복을 주는 포도원 지기는 세상이 아는 그런 주인이 아닙니다. 그렇게 가난하지 않습니다. 100개면 나와 다른 일군에게 50씩 나눠줘야 한다고,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그에게 70을 주면 내 거 30을 빼앗아서 그 일군에게 준 거라고요. 그래서 나는 겨우 30만 받는 거라고요 생각하실 수 있죠. 그게 세상의 셈법이니까요. 그런데 아세요. 그에게 100을 줄지라도 내 것은 그게 얼마이든 그대로 있습니다. 포도원지기는 겨우 100개밖에 가진 그런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 다 주어도 결코 부족함이 없어요.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공평하며 모든 일군 각자에게 줄 것을 주시며 남의 것을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그런 "째째한" 분도 아닙니다. 넘치도록 더 주십니다.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남의 것으로, 세상의 것으로는 아니 그 무엇으로도 세상은 내 근본적인 복을 채울 수 없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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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신호등 앞, 자꾸 막히는 삶의 길을 생각하다가 엉뚱한 생각이 또 듭니다. 저 막힌 길 위에 당당히 서 있는 트럭이 전하는 말 때문일까요? ㅡ "행복 충전소"!!

퇴임하기 전, 50분이면 올 집을 주차장처럼 막힌 고속도로에서, 때로는 앞이 안 보이는 안갯속, 눈보라, 폭우 속에서 졸음과 싸우며 3시간 걸려 집에 오는 적이 많았지요. 그런데 그때 차에 “갇혀서” 아무 방해 받지 않고 맘껏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내 마음 과 생각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 허가 받은 나만을 위한 차 안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감사한 기회였는지요. 빨리 도달하려는 열정, 목적지와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비록 원한 것이 아닌 붉은 신호등, 엉뚱한 날씨 등 가로막는 일을 마주하는 그 과정도 내 삶이고 나의 의미있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내가 좋은 기회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도 배웠죠. 바꿀 수 없는 상황은 받아들여야하고 그것을 새롭게 "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걸 알아도 너무 지치거나 피곤한 날은 참 힘들었습니다. 삶은 안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요.  성장을 향한 끝없는 연습이니까요. 그래서 피곤한 오늘 생각합니다. 무조건 심리적 성숙만 강요하지 말자고요.  (원래 욕심이 없어서 인지 '네 안의 거인을 깨워라'와 같은 멋진 말이, 이겨내라는 수많은 훈계와 경구들이 때로는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저 막힌 길 위의 내 삶, 그것이 내 무능력도, 내 잘못도, 외면당한 내 운명도 아니라고.  낡은 차처럼 자꾸 주저앉는 것도 내 게으름이나 무기력이 아니라 그동안 참 긴 길을 달려와서 이제는 좀 힘이 달리는구나, 지쳐있구나라고. 그러니 당황하지 말라고요. 슬퍼하지도 말라고 나를 다독입니다.
내가 몸이 강건하면 마음도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니 나를, 내 몸도 친절히 따듯이 받아줘야지 하고 혼자 말해줍니다.  

 

오래된 농담-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 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photo by bhlee 041526

 
<비현실의 현실성>


사람들이 인생은 꿈과 같다고 할 때 현실의 비현실성 때문에,
아니 어쩌면 비현실의 현실성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고 오래 전 막연히 생각했었다.
이제보니 아마 인생도 꿈처럼 혼자서 겪으며 가는 길이기에,
그 누구도 내 꿈을 대신 꾸어줄 수 없기에,
같은 꿈을 공유할 수도, 그 곳에 함께 할 수도 없기에 그런가 보다.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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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KS: 그림 같아요~

-->Bonghee Lee: 감사합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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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 꿈을 대신 꿀 수도, 공유할 수도, 함께 할 수도 없지만, 제가 선생님 꿈에 보조출연자로나마 나오기를 바랍니다^^

물에 비친 하늘과 나무네요, 너무 멋진 사진입니다!

-->Bonghee Lee: 보조가 아니라 메인으로 와도 돼. 함께 늙어가도록 긴세월 한결같은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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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Ahn: 사진이 좋습니다. 화가의 그림같네요.

-->Bonghee Lee: 교수님 잘 지내시죠? 미국에 계신가요? 사모님과 두 분 늘 강령하시길 빕니다.

--> CKAhn: 네 감사합니다. 미국에 있어요.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를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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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 비스듬히여.
시인은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라고 말한다.
가만히 읽어보면 마치 비스듬히 하고 그 이름을 불러주며 말하는 것 같다.
비스듬히는 이제 어딘가에 기대는 기울어진 모습의 특징을 묘사하는 부사가 아니다.
'다른 비스듬히'라고 말하면서 시의 후반에서 더욱 확실해지지만
그런 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라고 명명하고 호명해주는 것이다.
다정하게 불러주는 것이다. 괜차나 그렇게 서로 기대는 거야.
 
맑기도 흐리기도 한 공기에 기대는 존재, 당연히 맑기도 흐리기도 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시인의 다정한 호명에 의해 아름다운 이름과 정체성이 된다. 
 
"공기에 기대다"ㅡ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가.
공기에라도 기대며 살아가는 우리가 당연하고 당당해진다. 

나, 비스듬히도 오늘 흐린 공기에 편안히 기댄다. 
이젠 흐림 속에서도 그 너머 여전히 존재하는 맑음과 빛을 알기에
공기의 흐림도, '나의 흐림'도 의미있고 소중하다는 걸 믿으며,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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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hlee4426



  


작은 일에서 의미를 찾을 줄 아는 사람, 작은 것에서 사랑을 찾아내고 느끼는 사람은 참 아름답다. 
그래서 난 ER가 더더욱 사랑스럽고 소중하고 귀하다. 그 앤 늘 나를 깨어있게 해준다.
우리는 친구다. 작은 것들과의 교감, 감동--그것도 없이 삭막하고 외로워 어찌 산단 말인가?
어제 밤 우리는 카드 하나를 놓고도 그렇게 행복했는데...

애린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지.
엄마 난 왜 엄마가 없을 때 우는지 알겠어. 무서워서만이 아냐. 바로 이것 때문이었어.
그 카드의 구절이다:
Mom, when I think how you've always been there, the moments you've filled with your love and your care, the way you encouraged me to try my best, I look back and know just how much I've been bl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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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게 언제 쓴 일기인지 날짜가 없다. 막막하다. 왜 나는 일기에 날짜 혹은 연도가 없는 날짜만 있을가??? 그냥  끄적이는게, 그 독백이 유일한 대화이며 나의 숨쉬는 일이었기에?
어떤 시구절을 찾다가 언제나처럼 읽게된 길고 긴 일기모음. 어디서 가져다가 모아 놓은 것인 듯하다. 1998년-2000년 쯤? 내 딸이 중학교 들어간 이후니까.  내가 천안으로 출근하면서 학교에서 천안으로 이사를 오라는게 조건이어서 나는 연구실에서 하루라도 자야만 했었다. 무엇보다 일이 많아서 (외국인총장이 나에게 늘 추가로 준 업무 --학교책자를 영어로 만드는 일이라든가 여러 잡다한 영어번역 --내가 잘 모르는 신학관련 업무까지--외국에서 공부한 신학부교수들도 쟁쟁했건만 내가 맘이 편했을까?--으로 나는 늘 11시 넘어 귀가했었다.  그리고 새벽에 또 5시면 일어나 출근.. 고속도록 운전...  그래서 나중엔 일주일에 한번은 --새벽교직원 기도모임-이 있는 날은 그나마도 잠을 잘 수 없어서 할수 없이 하루는 연구실 소파에서 잤었지. 그때엔 어린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애린이는 혼자서 집에 있어야했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평일엔 엄마가 반겨주는 일이 없는 외롭고도 외로운 어린시절을 보낸 우리 불쌍한 딸. 
나는 울딸에게 평생 죄인이다. 상처만 준...  지금도 그렇겠지.....
그런데도 울딸은 늘 나를 이렇게 감동을 주었다.  항상.

일기에 써놓은 이 이야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네. 너무 고맙다. 고맙고도 고마운 우리 애린이... 

 

미안해 지금도 늘...  그리고 고마워
내 딸로 와줘서 너무 미안하고 또 너무 고마워.

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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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무감각한 뿌리들을 흔들어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듯이 지켜주었지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어주고
희미한 생명을 마른 뿌리로 먹여주었지

-T. S. 엘리엇, <황무지>중에서 / bhlee역
(from "The Burial of the Dead," The Waste Land- T. S. Eliot)

 

지난주 올 들어 첫 꽃을 보았습니다캠퍼스 길가에 노란 수선화 두 송이가 수줍은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그 곁에는 어느새 푸르러진 풀 섶 속에 작은 제비꽃이 숨어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보아주는 이 있든 없든 말없이 성실히 피어있는 작은 꽃과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나도  '살아서 살아있고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슴을 흔드는 4월을 시인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합니다. 4월이 시작되면 누구나 한 번쯤 중얼거려 보는  이 시는 T. S. 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의 첫 구절입니다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생명수 같은 봄비가 무감각하던 겨울뿌리를 흔들어 망각의 잠에서 깨워주는데 왜 잔인한 달인 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현대인을 메마른 불모의 대지 황무지에 사는 살아있는 죽은 자(the living dead)”라고 말합니다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것은 참된 사랑에 접근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인식하고 감동할 수 있는 감각들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그 의식의 무감각함을 흔들어 일깨우면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봄이 때로는 진실의 태양빛처럼 너무 부시고 아려서 그만 눈을 감고 싶어 집니다. 4월이 잔인하다든 것은 이렇게 살아있으나 죽은 자처럼(little life) 잠든 채 살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의식의 죽음그 비극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그들에게 생명과 의식을 일깨우는 4월은 잔인하기만 합니다우리 모두 엘리엇의 또 다른 시 구절처럼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어 낼 수 없는(Human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존재들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4월입니다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어김없이 푸르러 오는 생명의 계절가끔 가던 길 멈추고 물어봅니다. "나는 살기 위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c) 2004 이봉희, 덴버 중앙일보 연재 문학칼럼 중에서

장욱진- 밤과 노인


[원시(遠視)-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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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직 젊은 사람들이 늙었다 말하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듣는다.
내 나이 이별이란
멀어지는 일이 아니라
머얼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들을  눈이 시리도록 기억하는 일이다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것들을 그 어디쯤엔가 새겨놓고 더듬어보는 일이다.
머얼리서 바라다 보던 그 얼굴들을
식어가는 가슴에 꼬옥 품고 감사하는 일이다.

지상의 꽃 - 오세영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설령 그것이 죄가 된다 해도
이제 어찌 할 수 없구나.
아침마다 우짖는 산새도,
저녁마다 바자니는 다람쥐도
지금은 눈에 없어.
나는 다만 하늘을 우러르는 한 마리
슬픈 짐승,
낮에는 햇빛으로 환하게 눈멀고
밤에는 등불로 활활 타오를 뿐이다.
지상은
어느덧 가을,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어이 할꺼나,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영원한 그리움이 끝내
한 떨기 불길로 타오르다 사라지는
지상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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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할 거나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들 하늘을 가릴 수 있을까?


상처가 더 꽃이다 - 유안진

어린 매화가 꽃 피느라 한창이고
사백 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섰다
등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으로 보이는가
백 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 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 맡아 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꽃인 것을

3월의 바람 속에 - 이해인

  필까 말까
  아직도 망설이는 꽃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열까 말까 망설이며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쌀쌀하고도 어여쁜 3월의 바람
  바람과 함께
  나도 다시 일어서야지
  앞으로 나아가야지.


사랑이란?
ㅡ길들이기와 길들여지기ㅡ

“왜 서로 사랑했는데 그 사람은 떠나고 나만 여기에 남아 있을까요?
우리는 함께 사랑한 것이 아니었나요?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대체 무엇이었죠?
사랑이 길들이기라면 그것은 서로를 함께 길들이는 것 아닌가요?
길들여져 남겨진 사람은 또 어떻게 혼자서 살아가야 하나요? “

이별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 같은 질문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사랑이란 서로를 길들여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여우는 누군가가 내게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를 위해 보낸 시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관계를 맺는다고?”
“그래”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네가 없어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아. 너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난 너에게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입니다. 그리고 여우 덕분에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는 여우를 떠나 자신의 장미에게 돌아가려고 합니다. 어린왕자는 자신의 장미가 특별한 이유를 그를 위해 보낸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우에게는 어린 왕자와의 짧은 만남이 어린왕자와 장미와의 만남 못지않게 중요하고 긴 ‘시간’입니다.

이별의 순간, 어린 왕자는 홀로 남겨지는 여우에게 말합니다. 너를 길들인 것, 그것은 네가 원한 것이었다고. 그러니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는 떠나가 버립니다. 출발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여우는 말합니다.

“아아! 난 울음이 나올 것 같아.”
“그건 네 잘못이야. 나는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널 길들여 주길 원한 건 바로 너잖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런데 넌 울려고 하잖아!” 어린왕자가 말했다.
“그래. 정말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러니 넌 얻은 게 아무것도 없잖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얻은 게 있지. 저 밀밭의 색깔이 있으니까.”

물론 여우의 고통은 지난날의 행복에 이미 포함된 것인지 모릅니다. 여우는 “지난날의 행복의 일부”로 존재했던 현재의 고통을, 그런 사랑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우도 언젠가는 어린왕자가 장미를 찾아 자신을 떠날 거라고, 그 미래의 고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행복을 선택했고, 자신을 길들여달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고독하고 외로운 여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홀로 남겨진 여우는 어린왕자의 금발을 닮은 밀밭을 보면서 어린왕자를 기다릴 것입니다.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미 습관이 된, 그의 말대로 ‘길들여진’ 기다림과 그리움이 없다면 여우는 어떤 희망으로 하루를 살 수 있을까요? 그런 여우를 어린왕자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혹시 부담스러워할까요? 그래서 밀밭을 피해 멀리 도망치지는 않을까요?

함께 길들이기를 연습했는데 여우는 남겨지고, 어린왕자는 자신의 장미를 찾아 떠납니다. 이처럼 길들이기란 서로 함께 이뤄가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어린왕자의 금발을 닮은 밀밭이 유달리 바람에 일렁이는 날이면 여우는 바보 같이 두 팔을 벌리고 어린왕자를 만나러 달려갈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어린왕자의 금발이 아닌 밀밭에서 소리 없이 울어버릴지 모릅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밀밭 한구석이 들썩이고 있다면 그것은 바람이 아닌 여우의 울음 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어린 왕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시간을 되살려내는 건 사랑의 힘이니까요. 상대방이 떠났다 해도 그때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열정 속에서 그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마치 예술작품처럼 변치 않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추억입니다.

--출처: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 상실의 회복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잘 알려진 작가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잃어버린 조각The Missing Piece》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 동그란 피자의 한 조각을 슬쩍 먹어치운 것처럼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그 주인공입니다. 동그라미는 그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하지만 완벽한 원이 아니어서 빨리 굴러갈 수 없습니다. 동그라미는 완벽해지기 위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열심히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여러 조각을 대보아도 잘 맞지 않습니다. 어떤 조각은 너무 크고, 다른 조각은 너무 작습니다. 또 어떤 것은 서로 모양이 맞지 않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에게 꼭 맞는 조각을 만나서 완벽한 동그라미가 된 주인공은 기쁨이 넘쳐납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빠르게 굴러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없이 바삐 굴러가다보니 꽃의 향기를 맡을 수도 없고, 지나가는 벌레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고, 행복한 노래를 부를 수도 없습니다. 결국 동그라미는 “아, 이런 거였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다니던 조각을 내려놓은 뒤 다시 불완전한 채로 덜컹거리며 천천히 길을 떠납니다. 물론 잃어버린 조각은 길 위에 혼자 남겨지게 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욕망하는 이유 

우리도 내 안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잃어버린 조각을 찾고 있지는 않나요? 나의 빈 곳과 꼭 맞는 조각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어렵사리 잃어버린 조각을 만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꼭 붙잡아주지 않아서 그만 조각이 떠나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난 조각은 놓치지 않으려고 집착하다가 또다시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신화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태초에 남녀가 결합된 양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반으로 쪼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지요. 반으로 나뉜 인간은 스스로 불완전함을 느끼고는 완전성을 갈망하며 자신들의 반쪽을 영원히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전성을 향한 충동과 갈망을 남녀 간의 사랑의 욕구로 비유한 것입니다.

 

동그라미는 그렇게 찾아다니던 자신의 조각을 찾았지만, 이내 다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빈 곳을 채우러 길을 떠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하게 찾는 탐구 욕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욕망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욕망(desire)은 라틴어로 ‘별(sire)이 없음(별에서 멀어짐)’을 뜻합니다. 별이란 본질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이란 본질적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절하게 원하던 것을 찾았다고 해서 완성은 아닙니다. 누구나 경험했듯이 인간은 끝없이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하나의 욕구 충족은 완성이 아니라 또 다른 것을 욕망하는 시작입니다. 즉, 욕망의 대상만 바뀔 뿐이지요. 어렵사리 찾아낸 조각을 도로 내려놓고는 또다시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길을 떠나는 동그라미처럼 말입니다. 본질상 채워질 수 없는 것을 끝없이 욕망하며 사는 존재, 영원히 한 구석이 비어 있는 존재, 그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사랑하는 사이도 서로에게 허기져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왜 여전히 공허함을 느낄까요? 폴 발레리(Paul Valery)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다. 그런데, 아직 고독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는 더 한층 고독을 알게 하기 위해 짝을 만들어주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공허함은 카뮈의 《페스트》에서 의사 류가 말하듯 인간이 한 조각의 관념이 아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인식하는 존재이며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상대를 사랑해도 한 조각 관념처럼 상대를 온전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육체를 소유할 수는 있어도 그 순간조차 자유로운 그의 의식이나 영혼까지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소유욕은 (실버스타인의 이야기에서처럼) 상대를 부서지게 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나와 일치를 이루었던 사람이 점점 정신과 영혼이 성숙해져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조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 변해버린 모습 앞에서 우리는 다시 외로워집니다. 세상에 완벽하고 영원한 ‘나의 잃어버린 조각’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서로에게 영원히 허기져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릴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강도 높고도 심오한 고독입니다.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융합이나 헌신 그리고 상대와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개인이 성숙하기 위한, 자기 안에서 무엇이 되기 위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즉 상대를 위해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숭고한 동기입니다. 사랑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위대하고도 가혹한 요구입니다.

-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중에서

 

실버스타인은 5년 뒤《잃어버린 조각》의 후편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발표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잃어버린 조각이 큰 동그라미를 만나다The Missing Piece Meets the Big O》는 첫 번째 책의 끝부분에 홀로 남겨진 그 잃어버린 조각이 주인공입니다. 피자의 한 조각처럼 생긴 그 잃어버린 조각은 모가 나서 홀로 굴러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서서 마냥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자신에게 꼭 맞는 동그라미를 만나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불완전한 동그라미가 찾아와야만 그와 하나가 되어 온전한 동그라미로 굴러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만날 수가 없습니다. 무심히 지나가는 동그라미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번쩍이는 치장을 하고 아름답게 꾸며도 보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수많은 동그라미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자신을 원하는 동그라미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긴 외로움과 기다림 끝에 잃어버린 조각은 드디어 자신에게 꼭 맞는 동그라미를 만났습니다. 둘은 하나의 완전한 원이 되어 행복해하며 함께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잃어버린 조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조금씩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동그라미와 맞지 않게 되어, 결국 잃어버린 조각은 동그라미에게서 떨어져 나옵니다. 그는 또다시 홀로 남겨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동그라미, O를 만납니다. 잃어버린 조각은 그에게 매달려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합니다. 하지만 O는 이렇게 말합니다.

 

“넌 나와 함께 굴러갈 수 없어. 하지만 어쩌면 너 혼자 구를 수는 있겠지.”

“나 혼자? 잃어버린 조각은 혼자서 구를 수 없어.”

“노력이라도 한번 해봤니?”

 

자신을 데려갈 동그라미를 기다리다 지친 조각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스스로 일어서기를 시도합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혼자 힘으로 굴러보려 애를 씁니다. 그렇게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동안 모난 부분들이 조금씩 닳아서 잃어버린 조각은 자그마한 o가 됩니다. 작은 동그라미가 된 잃어버린 조각은 이제 스스로 구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전에 만났던 커다란 O를 다시 만났습니다. 마침내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굴러갑니다.

 

내 안의 공허함, 어떻게 채울까? 

실버스타인은 동그라미가 떨어뜨리고 간, 그래서 다시 길에 홀로 남은 잃어버린 조각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그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이 놀라운 두 권의 그림책은 우리가 생의 여정 중에 겪는 다양한 관계들을 간결하고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버려진 잃어버린 조각은 이별과 상실의 상처를 입고 남겨진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꼼짝하지 못한 채 자신을 완벽한 O로 완성시켜줄 다른 O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하나의 조각일 뿐인 존재. 그런 조각이 희망과 절망을 오가면서 차차 상처에서 회복되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회복이란 상대가 나를 품어주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내 스스로 완벽한 동그라미가 되어 다른 동그라미와 함께 굴러가는 것이라고. 결국 내 안의 결핍은 누군가에 의해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채워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쓸쓸함은 남습니다. 인간이란 그저 각자가 완벽한 원이 되어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 채 동반자로 굴러가야 할까요? 딸아이는 어릴 때 이 이야기를 읽고는 “그래, 내가 완전해야 남과 온전히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거야”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대체 어른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답니다. 타인과의 모든 접점을 잃어버린 채 스스로 누구 하나 품어주지 못하는 원이 되는 것, 결국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깨닫는 것이 어른인가, 그래서 앞으로 굴러가는 것밖에 모르는 외로운 바보가 되는 것이 어른인가, 하고 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본질적으로 외롭고 절망적으로 지어졌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카뮈의 말을 떠올릴 뿐입니다.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은 거대한 고독뿐이다.”

 

인간은 공허하고 고독합니다. 실버스타인은 단순한, 그러나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이 두 권의 그림책에서 우리 존재의 쓸쓸함과 모순, 그리고 공허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진실 앞에 우리는 공감하며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런 공허함을 나의 실존과 삶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인도의 철학가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의 말처럼 “어느 누구도 그대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의 공허함과 마주해야 한다. 그것을 안고 살아가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c)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중에서

출처: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내 마음을 만지다

기대가 클수록 사랑은 멀어진다

“선생님,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요?” 

한 학생이 편지로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갈까요. 물론 기본적인 육체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분명 그 이상의 어떤 힘이 필요합니다. 바로 사랑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등장하는 천사 미하일이 이 지상에 내려와 찾은 답 또한 바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이란 말로 넘쳐납니다. 하지만 바닷물처럼 넘실대는 사랑이라는 말 속에 빠져 살면서도 모두들 정작 사랑에 목말라하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사랑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너무 커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 고정희, <사랑법 첫째> 중에서

 

왜 사랑은 항상 내 기대에 못 미칠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한없이 쓸쓸하다면 그 원인 중 하나는 그 사람이 내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기대한다는 것,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이 한 가지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누구도 나와 같은 존재일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타인이 나의 기대를 채울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늘 어딘가 비어 있다고 느낄 때 문득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은 그 누구도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밖에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나의 일방적인 기대에 불과합니다. 나 역시도 상대의 기대를 온전하게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잊은 채 상대가 항상 나의 기대에 맞춰주기를 요구합니다. 때로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상대에게 대신 밀어놓고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원망을 그에게 전가시키기도 합니다.

 

생전에 어머니는 나와 내 딸을 참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불편하신 일흔의 몸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손녀를 돌봐주러 집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오셔서는 늘 원치 않는 일만 하셨습니다. 식구도 적은데 날마다 밥솥 한가득 밥을 해놓으시거나 냄비가 넘치도록 국을 끓여놓으시고는 먹으라고 권하셨습니다. 정작 어머니께 원한 것은 바빠서 치우지 못한 채 출근하는 집을 간단히 정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날마다 다 먹지도 못하는 밥을 가득가득 해놓으시며 오히려 집안일을 더 만들어놓고 계셨습니다. 제발 밥 좀 많이 해놓으시지 말라고, 차라리 아무것도 하시지 말라고 말씀을 드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일 년이 넘도록 같은 일로 다투다가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당신이 주실 수 있는 것밖에는 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머니를 통해 그것이 우리 모두의 사랑의 방식임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상대를 사랑해도 내가 가진 것, 내가 줄 수 있는 것밖에는 줄 수 없습니다. 그 이후로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밥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상대도 나에게 뭔가를 기대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대합니다. 부모에게, 자녀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하고 실망합니다. 우리의 언어 습관을 살펴보면 얼마나 자연스럽게 또 일방적으로 기대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남편으로서 그 정도밖에 못하니?” “어떻게 선생님이 저럴 수 있지?” “어쩌면 넌 친구라면서 그럴 수가 있니?” 등등. 흔히 말하는 어떻게 누구누구가 이럴 수 있는가에서 보듯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대하기를 당연시하고, 그 기대를 꼭 충족시켜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상대도 나에게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 남성은 영화 속 여주인공의 모습을 자신의 아내나 여자 친구에게 기대합니다. 여성 역시 남자주인공의 모습을 자신의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기대합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우리는 상대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쉽게 포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에 대한 상대의 기대는 쉽게 무시합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지배이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기대가 선한 의도일 때도 있습니다. 영화 <조이럭 클럽>의 등장인물인 준은 울면서 엄마에게 고백합니다. 어려서부터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서 늘 괴로웠다고, 그래서 상처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엄마 : 난 뭘 기대한 게 아니야. 네게 뭘 바란 적이 없어. 다만 희망을 가졌을 뿐이야. 네게 최선의 것을 희망하고 있을 뿐이야. 희망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야.

준 : 아니라구요? 난 그 때문에 상처를 받아요. 엄마가 내가 해낼 수 없는 무언가를 희망할 때마다 상처가 된단 말이에요. 엄마, 그것이 날 아프게 해요. 엄마가 무엇을 희망하든 난 내 모습 이상이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엄만 그걸 모르세요. 엄마는 내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해요.

 

어느 사십대 주부와 문학치료 모임에서 이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녀에 대한 자신의 일방적인 기대와 강요가 아이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주었다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후기를 썼습니다.

 

아이는 그동안 무진장 노력하고 있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 기대 안에서만 아이를 보려고 했다. 내 시야 안에서만 아이를 봐왔다. 갑자기 울컥하며 목이 멘다. 네가 잘되기를 바란다면서 내 기대로만 널 대했던 나를 보며 네가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목이 멘다.

 

나의 기대를 온전하게 채워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많은 연인과 부부들이 일방적인 기대로 서로에게 실망하고는 섣부르게 돌아서거나 이별을 고합니다. 이혼을 결심한 어느 젊은 부부 역시 늘 상대에 대한 일방적인 자신의 요구만을 강요하다보니 마주보기만 하면 서로 폭언을 퍼붓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문학치료를 통해 각자의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를 차분하게 서로 글로 쓰고 주고받으면서 각자 스스로를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기대를 낳은 각자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상대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이혼의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소중한 사랑과 그 사랑의 보금자리를 지켜내는 일은 적의 공격과 침략으로부터 성(城)을 지키는 것 이상의 힘겨운 싸움입니다.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겹습니다. 나의 기대를 포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사랑할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사랑은 지독한 자기희생이면서 동시에 그만큼 지독한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기대 때문에 (상대가 누구든) 소중한 나의 ‘그대’를 잃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항상 사랑에도 노력해야 합니다. 상대의 사랑의 방식을, 그리고 그가 줄 수 있는 것 외의 것을 바라지 않도록 말입니다. 나도 그럴테니까요.  ‘내 기대’를 ‘그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 또한 그대도 ‘그대의 기대’와 ‘나’를 바꾸지 않기를 바라며 함께 노력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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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법 첫째 - 고정희 (전문)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하여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마지막 공부 - 홍윤숙 

무거운 몸 함께 갈 수 없어
자리에 눕혀 놓고
마음 홀로 문을 나서면
동서남북 캄캄한 밤
길도 없는 하늘에 별 하나 뜰까

어린 왕자 사는 별은
어디쯤일까
몸을 떠난 혼은 그 때
어떤 마음으로 어느 산 굽이 돌며
지척일까

한 생애 무거운 살 벗어 놓고
고통의 뼈도 내려 놓고
가볍게 가볍게 깃털 하나로
약속된 시간 지체없이 돌아가는
귀향의 길

마침내 알리라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그리고 눈뜨고 귀 열리리라
삶은 끝없이 꾸는 꿈이고
죽음은 비로소 깨어나는 현실임을

그날을 위해 날마다
은사시나무 가지 끝에 부는 바람
가슴으로 새기며
남모르는 마지막 공부에
밤이 깊다

따뜻한 슬픔- 홍성란

너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차마, 사랑은 네 여윈 얼굴 바라보다 일어서는 것. 묻고 싶은 맘 접어 두는 것. 말 못 하고 돌아서는 것. 하필, 동짓밤 빈 가지 사이 어둠별에서, 손톱달에서 가슴 저리게 너를 보는 것. 문득, 삿갓등 아래 함박눈 오는 밤 창문 활짝 열고 서서 그립다, 네가 그립다, 눈에게만 고하는 것. 끝내, 사랑한다는 말 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것.

숫눈길,
따뜻한 슬픔이
딛고 오던
그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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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법이 있다는 것을 사랑받는 동안은 아무도 모른다.
홀로 뒤돌아 오는 길목에서나 가슴 시리게 깨닫는 것, 그게 사랑의 법인지 모른다.
아니, 그 시린 한겨울 굳은 가슴 저 아래에 여전히 따스한 봄 같은 사랑의 강이 흐르는 그런 사람만이 깨닫는 게 사랑의 법인가 보다.  외길 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아는, 서로 사랑하는 동안은 알 필요 없는 이상하게 빛나는 사랑의 법. 

그 어둡고 추운, 푸른 - 이성복 

겨울날 키 작은 나무 아래
종종걸음 치던
그 어둡고 추운 푸른빛.

지나가던 눈길에
끌려나와 아주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살게 된 빛

어떤 빛은 하도 키가 작아.
쪼글씨고 앉아
고개 치켜들어야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