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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이중섭그림- 소

 

[소의 말 - 이중섭]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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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 이기철
  
저녁이 되면 먼 들이 가까워진다
놀이 만지다 두고 간 산과 나무들을
내가 대신 만지면
추억이 종잇장 찢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겹겹 기운 마음들을 어둠 속에 내려놓고
풀잎으로 얽은 초옥에 혼자 잠들면
발끝에 스미는 저녁의 체온이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야 하리라
내 등뒤로 사라진 어제, 나 몰래 피었다 진 들꽃
한 번도 이름 불러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
눈 속에 묻힌 씀바귀
겨울 들판에 남아 있는 철새들의 영혼
오래 만지다 둔 낫지 않은 병,
추억은 어제로의 망명이다
생을 벗어버린 벌레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가벼워서 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집
그렇게 생각하니 내 생이 아려온다
짓밟혀서도 다시 움을 밀어 올리는 풀잎
침묵의 들판 끝에서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이것은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그리고 가장 슬픈 풍경이다. 이것은 앞 페이지의 것과 같은 풍경이지만 여러분에게 잘 보여주기 위해 다시 한 번 그린 것이다. 어린 왕자가 지상에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진 곳이 여기다.

이 그림을 자세히 잘 보아 두었다가 여러분이 언젠가 아프리카 사막을 여행할 때, 이와 똑같은 풍경을 꼭 알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혹시 그리로 지나가게 되거든 발걸음을 서두르지 말고 잠깐 별빛 밑에서 기다려 보길 간곡히 부탁한다! 그때 만일 한 어린아이가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웃으면, 그리고 그의 머리칼이 금빛이면, 그리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으리라. 그러면 내게 친절을 베풀어 주길! 내가 이처럼 마냥 슬퍼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고 그애가 돌아왔다고 빨리 편지를 보내 주기를.   

 

- 생떽쥐베리 [어린왕자]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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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가 너무나 소중해서
누군가가 너무나 감동을 주어서

나도 모르게 울어본 적이 있나요?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서

어린 왕자가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다

 

MP 072607


 

There is a speciall providence in the fall of a sparrow.
If it be now, 'tis not to come; if it be not to come, it will
be now; if it be not now, yet it will come. The readiness is all.
(Hamlet V-ii)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이죠.
와야 할 때가 지금이라면 앞으로 오지 않을 것이요,
오지 않을 것이면 지금이 그 때인 것이요. 때가 지금이 아니라해도
언젠가 때가 오기는 할 것이니,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늘 준비가 되어있는 일이지요.
(『햄릿』 5막2장)

선생님과 할머니

2010. 3. 12 금.   

어제 언니가 내가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닌 초저녁에 집으로 전화를 한 모양이다. 

"낮에도 전화 안 받고.... "
"언니 낮엔 당연히 없지. 학교에 가 있지."

"아. 어디 다녀온다고 했잖아. 중국출장." 

"응. 그건 엊그제 돌아 왔지. 그래서 어제 밤에 통화도 했잖아. " 

"아. 그랬나. 내가 정신이 이렇게 없어." 

언니가 무료해서 낮에도 전화 했구나.....

"저녁 먹었어?" 언니가 묻는다.

"지금 먹으려고..". 막 식사를 끝냈지만 거짓말을 한다.

고속도로로 출퇴근 하는 학교에서 종일 복잡한 일로 지쳐 돌아온 밤, 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만 주면 되는데,  간단한 대답 몇 마디만 해주어도 되는데 그것도 버거워 혼자 있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래? 그럼 어서 식사해. 밤낮 이렇게 한 밤중에 저녁을 먹으니 어떻게 해. "

"늘 그런데 뭐. 언니 이따가 또 잠 안 오면 전화해. 나는 2시에 자니까 걱정 말고."

"알았어."


이기적이고 못된 동생. 그냥 좀 들어주지.  어제 밤에 통화했다는 말은 뭐하러 해서 언니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는지. 전화를 끊고 후회를 한다. 
전날 밤 통화 때는 목소리도 멀쩡하고 기억도 또렷하더니 하루 사이 갑자기 다시 기억을 못하는 언니. 죽음의 고비를 2-3번 넘기고 겨우 중환자실에서 살아남은 언니. 하나뿐인 폐에 삽관을 하다가 구멍이 나서 잠시 산소공급이 끊긴 사이 두뇌 어딘가 잘못된 것일까? 그 깔끔하고 총기 있던 언니가 3달 후 퇴원하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 애기같이 변했다. 그리고는 머리에 새집을 짓고 하루 종일 집에서만 갇혀 지내고 있다. 온갖 병이 스쳐지나간 몸으로 한 쪽 뿐인 폐로 힘겹게 살았는데 그렇게 질곡 많은 생의 마지막을 어린아이로 돌아가 새장에 갇힌 어린 새처럼 살 것이다.

 

어제 언니와 통화한 일을 쓰다보니, 언니 때문인지 얼마전부터 떠오르던 기억이 있다. 

 

청주에서 서울로 막 올라와 전학 온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셨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 손영자선생님. 지금은 어디계시는지, 생존해계시기는 하시는지.... 오빠가 동생들을 다 학교 보내고 돌봐준다는 것에 감동하시면서 내 손을 잡고 교회도 가시고(우리집은 불교집안이었는데)  늘 자신의 집에 데려가 주셨다. 선생님은 이혼인지 사별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홀로 반신이 마비된 뼈만 남은 70이 넘은 친정어머니와 숙명여고 다니는 딸과 함께 3식구가 살고 계셨다. 할머니는 나를 유별나게 예뻐 하셨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얼마나 외로우면 그러셨을까 싶다. 나는 툭하면 선생님 댁에 가서 할머니 방에서 말동무 해드리면서 그 집에 있는 위인전기며 책들을 읽었다. 아이들의 보드라운 뺨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듯이 노인들의 뻣뻣한 살가죽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할머니 방은 중풍병자의 방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늘 깔끔하게 참빗으로 머리를 넘겨 쪽을 찌고 하얀 모시옷이나 무명옷을 입고 계셨지만 방에서는 알 수 없는 고통스런 냄새가 났다. 그래서 모두 ‘학교 다녀 왔어요’ 하고 문 열고 한 마디 하고는 나가버리는 쓸쓸한 방에 홀로 남겨진 할머니. 하루 종일 빈 방에서 식구들의 발소리만 기다리셨을 텐데. 그런 할머니의 냄새나는 방에 나는 방학 때면 종종 찾아가 한 나절 곁에 앉아서 배 깔고 누워 책을 보았던 거 같다. 할머니는 그게 좋아서 나만 가면 마비되어 어눌한 입으로 우우 거리시고 기억자로 곱은 손으로 손짓을 하시고는 동그랗게 끝을 말아서 고리처럼 굽혀놓은 파리채 손잡이로 곁에 놓인 작은 장을 열고는 그 속에 있는 곶감이나 다른 먹을 것을 꺼내 주셨다.

 

하루는 선생님이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또 일하는 식모가 그만 두겠다고 한 것이다. 선생님은 친정어머니 방문 앞, 마당에서 어린 나에게 호소를 했다. “다 할머니 때문이야. 똥오줌 받기 싫어서 아무도 붙어 있으려 하질 않아.” 매일 같이 출퇴근을 해야 하고, 할머니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고, 일할 사람은 오고 싶지 않다고 하고...... 선생님도 나름대로 삶의 서러움과 어려움이 있을 텐데 남편도 없이 혼자서 감당해야하는 일들이 좀 많았을까. 울음이라도 터질 듯 폭발하기 직전의 표정으로 분노인지 절망인지 원망인지 설움인지 모른 심정을 초등학생 철부지 제자에게 호소하는 선생님과 방에서 그 말을 듣고 계실  할머니 사이에서 어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그 기억은 지금도 내 뇌리에 깊이 박혀있어서 가끔 선명히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선생님이 나를 늘 집에 데려가신 이유는 나를 이뻐하셔서이기도 하지만 빈집에 할머니 혼자 둘 수 없어서 나를 할머니 곁에 두고 외출하셨던 것 같다.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참 어리숙하고 남에게 잘 이용당하고 어떤 땐 그 속이 다 보여도 그냥 속아주는 아주 바보 같은 사람이니까.  (영악스럽게, 아니면 자신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서,  자신을 지킬 줄 모르는 바보?)   내가 다음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그 학교 후배가 된 선생님의 딸은 얼굴에 주근깨가 약간 있었고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약간 통통하고 키가 컸던 언니로 기억이 난다. 내게도 잘해주었지만 살갑지는 않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할머니 때문에 귀찮아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던 언니였었다. 할머니는 그 모든 것을 다 빤히 눈치채고 계셨을 텐데 얼마나 외롭고 서럽고 또 구차했을까? 당신이 원해서 그런 병이 드신 것도 아닌데. 

 

인간의 생명이란 무엇일까? 몸과 마음은 죽은 자와 방불한데 숨 쉬고 살아있는 수치심과 그럼에도 살고 싶은 맹목적인 욕망은 무엇이며, 아니 그럼에도 죽을 수도 없는 무기력은 또 무엇일까.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져 홀로 미지의 세계로 사라지는 공포일까? 

 

잉여인간... 자신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맘대로 할 수 없어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존재, 그리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한 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  

 

이상하게 얼마전부터 그 할머니가 기억난다. 철없이 그냥 찾아와 곁에서 동화책을 읽고 집어주는 곶감을 먹어드린 것뿐인 데, 그런 나를 기다리고 예뻐하시던 정에 주린 할머니의 외로움이, 그리고 철부지 초등학생 제자 앞에서 울음이 터질듯 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면서 삶의 무게를 호소하시던 선생님의 고달픈 삶과 외로움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갑자기 그 선생님은 (어떤 의미로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길 바라셨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들 모두 속에서 나 자신의 여러 편린들을 본다.

 

2010.3.12. 금. 흐림. 바람이 심하다.

 

(언니는 하늘나라로 갔다. 코로나 때문에 뉴욕에서 한국으로 가보지도 못한 때 어린아이처럼 뼈만 남은 몸으로 홀로 떠나셨다.

이런 글이라도 남아서 언니의 기일인 엊그제 다시 미안한 마음을 기억한다.)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귀가 - 도종환]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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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지 못하면 내일도 없다.
내일은 언제나 오늘 다음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평생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중에, 나중에, .....라고 하면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목표를 위해서는 현재를 인내하고 참아야한다는 것이 너무 깊이 학습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목표지향적이고 성과지향적인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은 늘 내일만 바라보고 현재를 건너뛰라는 듯했다.

내일 쓰려고 오늘 쓰지 않은 편지는 영원히 쓰지 못할 것이다.
오늘을 살지 못하면, 나는 그저 영원한 귀가길에 있을 뿐 집에는 영영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득료애정통고.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실료애정통고,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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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의 다듬어져 알려진 5월이라는 글보다 이 처음 글이 더 좋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하지만 피천득 선생님이 "지금 가고 있다"고 말한 5월, 

그 5월의 의미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읽을 때마다 의미가 깊어진다.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를 다 닦아내는 박명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

ㅡㅡ
3월 7일 오늘은 기형도가 돌연 우리 곁을 떠난 날입니다(1989).  참 아까운 사람...

기형도시인이 내 나이만큼 되었다면 그는 어떤 시를 썼을까...
문득 문득 이 사람의 시를 읽을 때면 혼자 물어봅니다.
나이가 들면  저 끝모를 절망과 아픔은 어떤 언어로 변할까...

참, 아까운 사람.

 

해지는 들길에서 - 김용택

 

사랑의 온기가 더욱더 그리워지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먼 들 끝으로 해가

눈부시게 가고

산그늘도 묻히면

길가의 풀꽃처럼 떠오르는

그대 얼굴이

어둠을 하얗게 가릅니다

​​

내 안의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한 계절의 모퉁이에

그대 다정하게 서 계시어

춥지 않아도 되니

이 가을은 얼마나 근사한지요​

 

지금 이대로 이 길을

한없이 걷고 싶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앞에

하얀 풀꽃

한송이로 서고 싶어요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2008. 마로니에북스  

살아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 일상의 재발견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요? 그것도 매순간을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살아 있는 건 멋진 거야!>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난 지금도 여기 이렇게 살아 있지.

아마도 계속 살아갈 거야.

내 사랑, 아가씨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겠지만

난 살려고 태어난 것 아니겠어.

 

외치는 내 소리 당신이 듣게 될지도 모르고

우는 내 모습 당신이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 죽는 걸 보게 되는 일은, 사랑하는 아가씨,

앞으로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살아 있는 건 멋진 거야!

포도주처럼 멋진 거야!

살아 있는 건 멋진 거야!

- 랭스턴 휴즈, 살아 있는 건 멋진 거야!Life is Fine중에서

 

시의 주인공(시적 화자)은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생명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죽음만은 생각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일종의 다짐 같은 것이지요. 간혹 울어버릴 수도 있고 소리 지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결코 죽지는 않겠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Life is fine”이라고. 나는 Life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모두들 번역한 대로 인생으로 번역하고 보니 시인의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생이 고통스러워서 죽음까지 생각한 사람이, 살면서 다시 울어버릴 수도 있고 소리 지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갑자기 인생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포도주와 같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는 삶이 고달플지라도  살아 있는 건 멋진 거야(좋은 거야)”라고 생명의 소중함을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꼭 극적이어야 멋진 인생일까?

 

미국의 극작가 손턴 와일더(Thornton Wilder)우리 마을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을 의미 있게 보여줍니다. 즉 사람들이 태어나고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죽음을 맞이하며 그 죽은 자들이 또 산자들을 바라보는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극입니다. 이 작품을 읽은 후 학생들의 반응은 한결같았습니다. 아무런 극적인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이 지루하다고 말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좀 더 극적이기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이런 평범한 하루하루를 그린 극은 지루하고 무의미하며 실망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극중에서 에밀리는 다릅니다. 세상을 떠난 그는 단 하루만이라도 이 세상에 다시 돌아와 자신의 생을, 평범했던 열두살의 생일 하루만이라도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다시 살게 된 그 하루 동안 엄마와 가족과 이웃의 말 한마디, 엄마가 아끼는 꽃 한 송이, 그리고 무심코 지나쳤던 하루의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를 뒤늦게 깨달으며 이렇게 말합니다세상아, 너는 인간들이 깨닫기엔 너무도 멋진 곳이구나.”

 

그리고는 극중 스테이지 매니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살면서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것도 매순간순간을요.”

 

그러자 스테이지 매니저가 대답합니다. 아니, 없지. 어쩌면 성자나 시인 중에는 있을지 몰라.”

 

극 중에서 죽은 자로 나오는 사이먼이라는 인물은 에밀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너도 알았구나. 그게 살아 있다는 거야. 무지의 구름 속을 걸어 다니는 것.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짓밟으면서 살아가는 것. 마치 백만 년이라도 살 듯 시간을 낭비하면서 사는 것. 이런 저런 이기적인 열정에 자신을 맡기고 사는 것. 이제는 알겠지. 그게 바로 네가 돌아가고 싶어 했던 삶이라는 것을. 무지와 몽매함.

- 손턴 와일더, 우리 마을Our Town중에서

 

극적이고 가슴 뛰는 일들을 기대하느라, 내가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날들을 기다리느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들을 놓치면서 살고 있을까요? 작은 일상이 주는 의미와 기쁨과 감사를 얼마나 자주 망각하고 사는지 모릅니다. 작은 일들의 그 우주적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을 향해, 사람들을 향해,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해 그저 싸울 태세로 달려듭니다. 절망과 끝없는 경쟁을 되풀이하면서 말입니다.

 

오늘도 나는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한 후배가 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치료를 받는 순간순간 자신이 물 없는 어항에 갇힌 물고기인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그 끔찍한 순간을 겪다가도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을 느낄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병원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 뒤뚱거리며 걸어가거나 휠체어를 탄 환자들을 바라보면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프고 나니 세상이 다시 보여요. 기어가는 벌레 하나도 너무 소중하고, 그 생명력이 무척이나 부러워요.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 알겠어요.” 그런데 벌레는 알까요? 거대한 존재들 틈에서 무심코 밟히기라도 하면 이내 사라지고 말 자신의 운명이 절망스러울 때, 힘겹게 온몸으로 기어 다녀야 하는 그 삶이 부질없게 느껴질 때, 세상의 누군가는 자신을 지켜보며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를 벌레처럼 작고 힘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은 알까요? 내가 살아서 존재하는 그 자체가 포도주처럼 더 없이 멋진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고통스럽기만 한 몇 년간의 암 치료 과정을 거치면서 그 후배는 오히려 감사함을 배우고 행복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암이 완치되고 나서 다시 교만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면서 그럴 때마다 다시 겸손과 감사의 마음을 되새긴다고 합니다. 후배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그동안 잊어버렸던 것들을 떠올리며 나 역시 감사의 마음을 갖습니다. 내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를…….

 

와일더는 우리는 자신이 가진 보물을 가슴으로 느끼는 순간에만 참으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보물 1호는 바로 오늘도 내가 살아 있다는 그 사실입니다. 욕심의 키가 커져서 사는 일이 버겁게만 느껴질 때,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해봅니다. “살아 있는 건 참 좋은 거야!” 쓸쓸해도 오늘 또 하루 감사해하며 살아 있을 것입니다. 장정일 시인의 말대로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기 때문입니다.

 

(c)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중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길로 갔거는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고난 주간을 맞아 다시 이 그림으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죽으심은 처절했고 거기서 흘러나온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라는 절규는 지금까지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발언하던  절규였다.  그것이 이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고통의 비명과 원망이 되어 몰트만의 표현을 빌자면 "버림을 받으신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스스로 버리는 음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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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아주 오래전 건축공학 전공이던 딸이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린 그림.


 

 

 

그림:  Jean Michel Basquiat(1960-1988)

 

[To define is to kill - L. Pirandello]
기자가 바스키야에게 물었다.
"그림 안에 있는 이 글자를 해석해 주시겠소?"

"해석이요? 그냥 글자에요."

"압니다. 어디서 따온 거죠?"

"모르겠어요. 음악가에게 음표는 어디서 따오는지 물어봐요.
....당신은 어디서 말을 따옵니까?"


"나의 음악을 듣고 세상은 말했다. 이건 끔찍한 소음이군
내 음악은 세상에 통하지 않았다. 낯선 불협화음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소리를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한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음악 발전에 걸림돌이라 생각한다."
ㅡCharles Ives
 
 
내가 좋아하는 작가 피란델로(Luigui Pirandello)도 말했다
ㅡTo define is to kill.( 무언가를 정의 내리는 것, 무엇이라 규정 짓는 것은 살인이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나의 불완전하고 주관적인 판단과 이기적인 관점으로 규정 짓고 정의하는 것
그것은 상대를 박제화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살인이나 다름 없다. 너무나 공감하는 말이다.
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라고.
그래서 또 잊지말고 침묵과 기다림과 겸손을 배워야겠다.

 

(c)Depollas (here only for therapue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기다린다]

 

기다림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도망쳐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그림자처럼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기다림.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차마 포기하지 못하는 고통스런 업이 되어버린 적은 없었나요?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는 “기다림은 아픔이다. 잊는 것도 아픔이다. 하지만 둘 중에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정호승 시인은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중략.......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정호승 <또 기다리는 편지> 중에서

 

차라리 기다리는 것이 덜 아프다:

나는 기다립니다. 나는 소망합니다. 오지 않는 그대를. 지친 나그네 바람이라도 머물다가겠지, 그렇게 위로하며 오늘도 마음의 문 앞에 의자 하나 내어 놓습니다. 맘 편히 쉬었다 가라고 가만히 문을 닫아놓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궁금하다면, 혹시라도 나를 기억한다면 문을 두드리리라, 그렇게 위로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만 그 의자를 치워야 할까요?

......................

우리가 진정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꿈에서 나타나는 무의식적 욕구처럼 때로 변장을 하고 나타납니다. 때로는 연인의 모습으로, 또 때로는 성공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시인의 말대로 우리가 진실로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기다려봐야 알 수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리는 님이 오지 않았기에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오지 않았기에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

나는 님을 누군지 알 것만 같다

   - 김형영,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림을 계속하는 것, 오지 않는 그 무엇을 기다리는 것, 그것은 답 없는 질문을 계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기다림은 질문입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길을 잃을지 모릅니다. 답이 없어도 질문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질문은 대상을 향한 나의 관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자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문은 기다림처럼 아직은 이해할 수 없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성실한 의지이며 희망입니다. 

 

답이 없는 질문을 계속하는 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다림을 통해 만나는 것은 ‘그’가 아닌 나 자신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기다림은 질문처럼 우리를 성숙시킵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최초의 질문이나 최초의 기다림의 이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면서 기다리던 내 마음이 차차 호수처럼 잠잠해지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참으로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쓸쓸한 아픔입니다.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작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형기, <호수>)입니다.

오늘도 쓸쓸한 날, 나를 토닥여주며 말해봅니다. “아프지, 그게 진심만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야. / 아프지, 그게 서로 부르고 있다는 증거야”라고.(마종기, <상처6>) 그리고 여전히 내 마음 문 밖에 의자 하나 내어 놓습니다. 창 앞에 섧도록 빨간 우체통 하나 세워놓습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오지 않는 그대를 기다립니다.

< 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기다린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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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나는 또 그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는가?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나는 또 그 무엇을 기다리며 한 걸음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까요?

골똘히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지치지 말자고. 포기하지 말자고.

너무 외로워하지도 말자고.

이 박사님,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아닌지에 대한 찬가>

 

당신의, 그들의, 그녀의, 그리고 그의

우리의

투쟁으로 가득한 삶의 여정에 대한

이미지들, 사진들, 이야기들

마음에 상처가 된 피아노 레슨

또는 패배한 체스 게임을 통해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를 위해” 일어나는 일이며
다 의미 있고 중요한 일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분투하는 이야기

그리고 유대감의 “빛” 속에서

과거,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밝고 어두운 빛의 미스테리를 풀어주었죠

감사합니다

많은 것을, 정말 많은 것을 함께 나눠 주셔서

마음 속 깊은데서 우러나는

감사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당신의 이야기에,

당신만이 들려줄 수 있는 서사에,

마치 아리아드네가 우리를 이끌듯이

우리 자신을 찾아가는 탐구여정에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가게 해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치유, 사랑, 평화의 정신으로진심어린 축복으로,

비아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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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Dr. Lee,

[An Ode to What is Best for Us or Not]
images, pictures, stories
  filled of striving within
    the journey
yours, theirs, hers, and his
    ours
through hurtful piano lessons
  or lost chess games
thriving to embrace willingly
  what happens matters
  not to us but FOR us
and in Light of connectedness
  unraveling the mysteries of
  bright and darker lights
past, present and to come
I thank you from a deep place of gratitude and solace
    for sharing
  so much, so very much
  for your story
        a story narrative of your own
  as Ariadne has led us
    one step further into our
       quests to our selves.

    

 All My Best...
in the Spirit of Healing, Love and Peace

Be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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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e가 내 NAPT 워크샵세미나에 참석해서 세미나가 끝나자 내게 건네 준 시. 
그녀는 영문학박사이며 교수이고 시인이며 문학치료사이다. 
정말 감동적이고 고맙다....  

내게 용기가 필요한 날이면 이런 친구를 생각하면서 힘을 내야지. 

태양이 안보인다고 달과 별이 안 보인다고 사라진 건 아니잖아. 
내게 비춰주지 않는다고 그 빛과 아름다움이 사라진 것도 아니잖아.
그럼 된 거잖아.... 그래.. 그렇지..

그녀의 시에서 비유한 Ariadne는 내 세미나의 제목을 언급하여 쓴 것이다.
내 세미나의 제목이 Ariadne's Thread였다. 
깊고 깊은 미로 속에서 테세우스가 탈출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바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였기 때문에

우리의 깊은 내면의 진정한 나를 찾아 밖으로 이끌어주는 문학치료/글쓰기의 힘을 이야기한 제목이었다. 

영화와 시를 활용했고 정말 많은 교수, 상담사, 치료자등 많은 전문가분들이 먼 한국에서 문학치료를 공부하기 위해 왔던 낯선 사람,

나의 세미나에 참석했었다. 그리고 평가에서 지난번 세미나때처럼 모두 최고 점수를 주셨었다. 

아픔을 피하려다 웃음까지 잃어버렸다

- 고통의 재인식  (2011이봉희)

 

어느 여름날, 난(蘭) 하나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꽃을 피우던 난이 겨울이 되자 어느새 가지가 노랗게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만 손을 놓아버렸나 생각하면서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겨울이 지나도록 볕 좋은 창 앞에 열심히 놓아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어버린 가지를 달고 있는 뿌리가 새 가지를 내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원래 피어오른 줄기가 말라버리자 어느새 뿌리는 그 곁으로 하나의 새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나봅니다. 말라버렸다고 줄기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뿌리 채 뽑아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작은 꽃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죽어가는 가지에도 새 가지를 내고 꽃을 피우는 뿌리의 생명력이 있다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니 문득 이 시가 떠올랐습니다.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 줄 때도

사실은

참 아픈 거래

- 이해인 <꽃이 필 때> 중에서

 

 

살아 있으니 아픈 것이다

아픔은 선인장의 가시처럼 생명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박경리 씨의 말이 생각납니다. 20년간 《토지》를 쓰면서 참 힘든 일도, 고통스런 기억도 많지 않았냐는 기자의 물음에 박경리 씨는 망설임 없이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산다는 게 고통 아닌가요? 인간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고통을 겪지 않나요? 내 생각엔 생명이 있다는 자체가, 산다는 게 고통인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생명은 앓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앓음 알음’이라는 것, 앓아가면서 알아가는 여행길이라는 것을.

 

괴테는 “모든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라고 말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색채들은 빛의 고통에 의해 존재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뿐 아니라 자연 속에서도 아픔 없이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도 나는 사는 동안 뜨겁게 타오르는 노을과 시린 새벽빛과 소나기 뒤의 그 장엄한 하늘빛을 보면서 한 번도 빛의 고통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묘한 빛깔의 많은 꽃들을 보며 감탄만 했지, 그것을 피워내는 아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때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면서 책상 앞에 “난 이미 죽었는데 왜 아직도 아픈 걸까?”라고 써 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프지 않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자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인간도 우주도 그 모든 생명은 아픔과 함께 하는 것인데 우리는 아픔으로부터 피하고만 싶어 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죽은 자처럼 살고자 모든 느낌을 차단합니다. 마취제를 맞으면 아픔이야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 마취된 시간 동안 죽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부분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던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의식이 또렷해서 의사들의 메스소리가 들리는데, 자신의 몸에서 아무 통증이 느껴지지 않자 자신이 온전히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고 합니다. 마취제는 통증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약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마취 상태로 있다가는 다시는 깨어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통증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다가 의식마저 무감각하게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김수영 시인의 <사령(死靈)> 중 한 구절을 중얼거려봅니다.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 김수영, <사령> 중에서

 

 

아픔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순간, 다시 살아나는 그 순간에 느껴지는 고통은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살아 있다는 감사한 깨우침입니다. 아픔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이건 사는 게 아니라고, 이건 삶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픔은 오히려 살아 있다고, “깨어서” 살고 싶다고 외치는 온몸의 아우성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고통스런 기억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방어기제는 고통뿐 아니라 생의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들까지 함께 차단합니다. 그럼으로써 타인에 대한 깊은 친밀감과 사랑, 신뢰감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방어기제는 우리의 깊은 내면을 감옥으로 만들어 우리의 참자아를 고립시킵니다. 딸아이가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때 쓴 가슴 아픈 고백처럼 말입니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다가 이제 난 기쁨마저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렸어. 내가 진 거야.”

 

아픔을 아파하지 마세요. 아픔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이 아픔을 대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아픔과 절망의 끝에서 어느 날 활짝 터지는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리라는 것을. 고치를 벗어난 나비처럼 영롱한 빛으로 날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나만의 아름다운 색깔로 세상을 그리게 되리라는 것을. 그 순간 왜냐고 묻던 모든 항거와 의구심의 무게는 꿈처럼 가볍게 흩어져버리겠지요. 그때 우리는 조용히 웃음 지으며 끄덕일 것입니다. 왠지 몰라도 이제는 문제되지 않으며, 이제는 고백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모든 게 다 협력해서 선한 결과를 이루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픔의 순간에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고 말하겠지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름 없이 피고 지는 꽃들과 내 아픔을 함께 느끼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사랑이 내 곁에 함께 존재했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픔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힘이 될 수 있었다고,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겠지요. 아프지만 나는 아픔보다 더 용감했다고 말입니다.  2011이봉희  

 

출처: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적막한 봄 - 정완영 (1919~2016)

  산골짝 외딴집에 복사꽃이 혼자 핀다
  사람도 집 비우고 물소리도 골 비우고
  구름도 제풀에 지쳐 오도 가도 못한다.

  봄날이 하도 고와 복사꽃 눈멀겠다
  저러다 저 꽃 지면 산도 골도 몸져눕고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건가.

   - 출처 <시암(詩庵)의 봄>(2011)

존재의 크기ㅡ소인국에서 거인으로 살기

(©이봉희 2011)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철학의 여러 문제들The Problems of Philosophy》이라는 저서를 통해 철학의 실용성과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하나의 발견과 발명으로 눈에 보이는 변화와 사람들의 삶에 실용적 유익을 가져오지만 철학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철학은 모든 확실하고 과학적인 답을 찾은 질문들이 학문(science/과학)화 되고 난 후 잔재된 답이 없고, 비실용적인 질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고통에도 불구하고 왜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영혼은 육체가 소멸한 후 함께 소멸하는 것일까, 사랑이란 무엇일까, 삶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는 왜 불행할까, 왜 인간은 실존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가와 같은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쪼개듯 쓸데없어 보이며 답도 없는 이런 질문들은 인간의 존재와 삶의 궁극적 가치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결국 인간을 변화시키는 간접적인 실용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답이 없어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계속해야 하고, 그 질문에 대한 생각을 멈춰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참된 앎이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생각처럼 우주를 인간 이성과 지식의 한계 속으로 축소해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러셀은 참된 앎이란 “자아(사고의 주체)와 비자아(사고의 대상)와의 결합”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고의 대상이 광대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현상의 세계를 뛰어넘는 보다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고민할 때, 우리는 그 거대한 문제와 “하나가 되어” 자아가 확대됩니다. 이런 “자아의 확대(enlargement of self)”야말로 철학의 궁극적인 선(ultimate good)이며 가치라는 것입니다.

 

[자아의 확대, 거인되기]

어떻게 문학이 문제 해결과 자아 성장으로 이끄는 치료적 힘을 지니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문학의 선(善)과 가치도 철학처럼 우리를 보다 더 큰 존재로 확대해주고 성장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학도 철학과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다만 문학은 동일한 질문들을 통해 좀더 시적(詩的)으로 세계의 광대함과 아름다움, 생의 수수께끼에 다가갑니다. 문학의 치료적 힘은 무엇보다 문학 속의 시적 요소들이 우리 정서에 미치는 영향력에서 옵니다. 시란 인간 조건에 대한 특별한 언술이지요. T. S. 엘리엇의 말대로 우리의 삶은 대부분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도피”이기 때문에 시는 때로 보다 더 심오한 이름 없는 감각들을, 우리 존재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우리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이름 없는 느낌들을 우리가 좀더 잘 인식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늘 이런 말을 해주곤 합니다. 문학수업을 듣고 문학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얻었는가에 수업을 잘했는지 아닌지 초점을 두지 말고 내 생각의 눈이 얼마나 커졌는가를 살펴보라고. 즉, 문학을 통해 내 생각에 자극을 받고 그 생각이 조금이라도 확대되었는지,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커져서 자연과 사물, 그리고 내 곁의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이런 자아의 확대를 우리가 ‘거인이 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문학이 갖는 치료의 힘을 '소인국의 걸리버론'이라고 부릅니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중 소인국 릴리푸트 이야기는 동화로도 각색되어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지요. 소인국에 도착한 걸리버를 소인국 사람들이 아무리 결박해도 그는 떨치고 일어납니다. 소인국끼리 전쟁이 났을 때도 걸리버는 수없는 화살에 맞습니다. 하지만 아프고 상처가 나더라고 그는 쓰러지거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바로 이렇게 소인국 릴리푸트에서 걸리버로 살아가는 게 궁극적인 문제 해결이며 치료입니다. 어른이 되면 아이가 아무리 싸움을 걸어와도 더 이상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서로 다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와 싸우는 어른은 아이처럼 너무나 작은 소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보다 더 크게 내 존재를 키우기]

에리히 프롬은 <현대 인간의 조건Present Human Condition>이라는 글에서 우리가 참으로 인간다워질 때 우리의 문제는 “원래의 크기대로 줄어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문제의 원래 크기는 작은 것이었다는 아주 적절한 지적입니다. 거인이어야 하는 우리가 소인으로 살아가면 같은 문제라도 커다란 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내가 거인으로 성장한다면, 즉 내가 회복된다면 그 산처럼 보이던 돌(문제)은 내가 쉽게 들어서 치울 수 있는 작은 돌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나의 갈 길을 가로막거나 나를 쓰러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은 상대방이 변화하거나, 세상이 바뀌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상대가 바뀌어도 내가 변화하지 않으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변화하면 상대와 세상이 바뀌지 않아도 나는 그렇게 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만일 문제 해결이 반드시 내 밖의 조건이 바뀌어야만 가능하다면 세상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를 고문하고 가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자유롭기를 원하면 나 스스로 ‘자유인’이 되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유인이 되면 감옥에 갇혀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내가 자유인이 되기 전에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외부 조건에 의해 내게 자유가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흥미롭게도 감옥에서 고통을 받는 사도 바울이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자유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에밀리 디킨슨도 말합니다. 자유도, 나를 스스로 고문하고 가두는 것도, 모두 나 자신이 판단하기 마련이라고. “나의 의식”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고문대도 나를 고문할 수는 없어

내 자유로운 영혼을

이 죽음으로 사라질 뼈 뒤에

더 담대한 뼈가 숨어 있으니

 

톱으로 켤 수도 없고

커다란 칼로 찌를 수도 없지

두 몸이 함께 존재하기에

하나를 묶으면 또 다른 하나는 날아가니

 

독수리도 당신보다

더 쉽게

자신의 둥지를 떠나

하늘을 얻지는 못하리라

 

당신 스스로가

당신을 고문하는 적이 아닌 한

당신을 가두는 것은 의식이다

자유도 그렇다

-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어떤 고문대도 나를>

 

[상대가 아닌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독성적 관계

세상이 뒤집히지 않는 한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은 그 누군가와의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저널치료사인 카파키오니(Capacchione)는 ‘독성적’ 관계라고 부릅니다. 나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사람, 내 안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기운을 빼앗는 사람, 내가 못났다고 끊임없이 자책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말 한 마디로 내 자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내 안의 의심과 두려움, 자기 비난이 스스로를 사로잡게 만듭니다. 많은 경우 그런 사람들은 가까운 가족이나 직장 동료일 때가 많습니다. 피할 수 없이 함께 공존해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그들에게 아무리 당신이 잘못되었다고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말해도 좀체 달라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어느 삼십대 대학원생은 시어머니와 9년 동안 고통스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드러나기 전까지만 해도 시어머니는 그냥 상냥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과 함께 혼수 문제로 며느리에 대한 불만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친정부모에 대한 비난까지는 참겠는데, 손자들까지 미워하는 시어머니 때문에 그녀는 9년간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그녀가 쓴 글의 일부입니다.

 

쌓여만 갔던 상처도 5년쯤 지나면서부터는 무뎌졌고 상처투성이였던 가슴도 절대 다시는 들추고 싶지 않은 과거로 묻어두었다. 하지만 잊었다 싶었는데도 나도 모르게 어머니께 들었던 부정적인 언어들을 내 아이들에게 쏟아 붓는 내 거친 모습을 보며 놀랐다. “넌 생각이 있니 없니? 네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뭔데?” 그렇게 날 왜소하게 만들었던 언어들을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내 자신도 싫고 어머니도 미웠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만들고 말았다. 그것도 남이 아닌 내 가족에게……. 문학치료 시간을 통해 무겁게 엉켜버린 그 실타래가 언젠가는 내가 풀어야 할 숙제며 그 때가 바로 지금이란 걸 깨달았다. 내게서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분노 그리고 내게 행해진 ‘폭력’은 내가 잊었다고 착각하며 가슴 속에 깊이 묻어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그 상처와 분노와 폭력을 가장 사랑하는 아이에게 대물림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저널기법을 사용해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상처를 드러내고,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대화하고, 관점을 바꿔보며 3개월간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9년이나 고통 받던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거짓말처럼 해소되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용서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더 놀라운 것은 그녀 혼자 용서한 것뿐인데 시어머니도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년 후 그녀는 자신의 변화를 편지로 보내왔습니다.

 

놀랍게도 9년 동안 가슴 한쪽에 무겁게 짓누르며 아파했던 상처 덩어리가 언젠가부터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미움도 아픔도 없이 가벼워진 맘을 느낄 수 있다. 그 후론 어떠한 일에도 어머니와 싸워본 일이 없다. 서로 진정한 마음이 오가면서 시어머니는 내게 딸처럼 생각하고 대하겠다는 다짐까지 해보이셨다. 신기한 것은 글쓰기치료를 배울 때 교수님께 들은 것처럼 '치료는 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어머니의 성격은 그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어머니를 바라보는 나의 생각이 변한 것이다. 내가 달라지니 실타래처럼 엉켜 있던 해묵은 문제가 해결되었다. 문학치료에서 관계의 치료는 상대가 변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변함으로 시작된다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즉흥적인 표현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지만……. 관계가 회복되니 상처받는 일도 드물다. 그보다는 하나 더 챙겨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시어머니의 맘이 느껴질 뿐이다.

 

[거인처럼 이기는 삶을 살기]

세상에 문제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 말의 ‘ou(not, 아니다)’와 ‘topos(place, 장소)’가 합해진 말로 ‘no place’, 즉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즉 고통과 문제가 없는 유토피아란 이 세상에는 없는 이상향일 뿐입니다. 성경에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통스런 일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당연히 고통과 문제가 있기 마련이므로 다만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말합니다. 좁은 시야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인으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요.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나의 내면을 성장시켜서 세상을 이기는 걸리버로, 세상의 고통이 감당치 못할 거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출처: [내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카페]/생각속의 집)

3월의 바람 속에 - 이해인

  필까 말까
  아직도 망설이는 꽃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열까 말까 망설이며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쌀쌀하고도 어여쁜 3월의 바람
  바람과 함께
  나도 다시 일어서야지
  앞으로 나아가야지.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