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문학치료 [문학치료와 저널치료]'에 해당되는 글 76건
(c)2008 bhlee (주 1회 총 10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주최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주관 문화관광부/국민체육공단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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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점점 깜직하고 놀라운 글을 쓴다. 아이들이 너무 이쁘다..^^ 
여기 소개된 시는 모두 넌센스 시짓기이다. 부디 혹시 부모나 어른, 선생이 읽으신다면  맞춤법이 틀렸네, 글씨가 왜 저래, 말이 안되는 이야기네... 등 이상한 말을 하지 말아주시길 바란다.
모두 초등학교 1학년. 많은 글중에 가장 자신이 누군지 드러나지 않는 것만 모았다.
아이들과 [비밀이에요... 글쓰기치료]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들은 지웠다.
사실은 마음에 감동이 되거나 찡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중고등생 10대 보다 아직 '학습된 사고방식'에 길들여지기 전의 아이들이라 너무나 글쓰기를 즐거워한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선생님 오늘은 글쓰기치료 안 해요? 너무 재미있어요"하는 아이들 때문에 방학도 없이 매주 진행하고 있다.  그래도 몇몇아이들은 자신이 하는 글쓰기, 그림그리기에 대해 '못한다... 못했다..' 등 여전히 어른들의 평가에 길들여져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마음이 안쓰럽다.  겨우 1학년인데... 


제 1회, 대한문학치료학회 학술대회 및 창립총회 안내

" 문학의 치료적 힘"
 

- 일시: 2009년 12월 12일 (토) 09:30~ 18:00
- 장소: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대강당 132호
- 주최: 대한문학치료학회
- 주관: 경북대 대학원 문학치료학과
- 후원: 경북대학교

+ 학술대회 일정 

등 록: 09:30~10:00
개 회 사: 10:00~10:10 김춘경 교수(아동가족학과)
축 사: 10:10~10:20 노동일 총장(경북대학교)
기조강연: 10:00~11:00 문학치료의 정체성 / 조현춘 교수(문학치료학과장)

주제강연l: 11:00~12:30 이야기와 은유의 세계와 치료적 함의
              양유성 교수(평택대학교 상담대학원)

점심시간: 12:30~13:30

주제강연ll : 문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양선규교수 (대구 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휴식: 15:00~15:15

주제강연lll : 15:15~16:45 내 안의 시인을 깨우는 문학치료 (이론과 워크숍)
                 이봉희 교수(나사렛대학교 영어학과, 미국공인문학치료사/공인저널치료사)

휴식: 16:45~17:00

종합토론:17:00~17:40 
               
            이은주(대구사회연구소 책임연구원), 
        
            김미화(가족  사랑클리닉,비블리오문학치료연구소 소장)

창립총회:17:40~18:00 

+ 참가방법

* 참가비: 사전등록(12월9일까지) 대학생 25,000원/대학원 및 일반인 30,000원
현장등록(12월12일)대학생 30,000원/대학원 및 일반인 35,000원
(자료집/점심식사/이수증발급비용 포함)
* 사전등록방법: 아래 입금계좌로 참가비를 입금한 후, 메일 또는 전화로 이름/소속/주민번호앞자리/연락처를 알려주십시오.
임금계좌: 신한은행 110-284-357720 예금주: 조현춘
*신청마감: 사전등록-2009년 12월 5일(토)/당일등록-2009년 12월 12일(토)

환불은 12월9일 까지 접수받으면 전액환불 가능, 그 이후는 20%공제한 나머지 금액만 본인계좌로 이체가능함. --본 행사의 이수시간은 대한문학치료학회의 자격증 취득을 위한 수련시간(8시간)으로 인정됩니다.

*신청 및 문의: 이메일(gkstllwq@naver.com), 010-9516-0668 한효정 간사

+찾아오시는 길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132호 (정문과 동문에서 가깝습니다.)
교통안내: 시내버스 정문(410, 503, 937, 동구2, 북구2), 북문(300, 305, 323, 410, 좌석706, 719) 동대구역 정문(937)
* 자가용은 당일 주차비가 1,000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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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양교육학회/대학교양교육협의회 2009 추계학술대회


* 주제 : 학부교육 핵심역량 강화와 교양교육

* 일시 : 2009년 12월 11(금) 13:00 ~12일(토) 13:00

* 장소 : 경원대학교 국제어학원 국제홀


2009년 12월 11일 (금)


■ 13:00 ~ 13:30 :등록

                                                      

■ 13:30 ~ 13:40 : 개회사 사회 : 권성호 (한양대)

박충연 한국교양교육학회장/강명구 대학교양교육협의회장                 

■ 13:40 ~ 13:50 : 환영사 이길여 경원대학교 총장

■ 13:50 ~ 14:30 :주제강연 1: 교양교육의 새로운 위상과 그 강화방책

손동현 성균관대학교 학부대학장

■ 14:30 ~ 15:10 : 주제강연 2: “商工” 시대의 인문/교양교육

김진우 일리노이대학교 명예교수

▶ 15:10 ~ 15:20 휴식 및 이동

기초교양교육의 제도적/행정적 지원체제 구축을 위한 심포지움 사회 : 김영세 (연세대)

■15:20~ 16:00 : 기초교양교육의 행정적 지원방안: 주요 거점대학 교양교육센터 구축방안발표 : 강명구 (서울대)

■ 16:00 ~ 17:30 : 기초교양교육의 행정지원체제 현황과 과제

가톨릭대학교, 경원대학교, 한동대학교(각 10분)의 발제 및 자유토론


========================= 논문발표 Session 1 ==========================

                      <국제화, 다문화 시대의 교양교육>

========================== 논문발표 Session 2 =========================
                                
<교양교육의 새로운 방향>

       사회 : 윤승준(단국대)

■ 15:20~15:50 : 학부교육에서 학습 및 행동윤리 정립을 위한 제안 -미국 대학사례 연구와 그 시사점을 중심으로-
발표 : 신의항 (서울대)토론 : 김혜숙 (이화여대)

■ 15:50~16:20 : 융합 교과목을 통한 교양 교육 심화의 한 방안 - 덕성여자대학교 <정서의 이해와 조절>을 예로

발표 : 정미숙(덕성여대)토론 : 임민호 (가천의대)

■ 16:20~16:50 : 교양교육 경쟁력 강화를 위한 융합 교과목 개발

발표 : 홍병선(중앙대)토론 : 박명관 (동국대)

■ 16:50~17:20 : 교양교육으로서의 문학, 그 가치의 재평가: 문학치료를 중심으로

발표 : 이봉희 (나사렛대영어학과)토론 : 임호찬 (나사렛대심리재활학과)

▶ 17:20~ 17:30 종료 및 이동

▶ 17:30~ 19:30 리셉션 (경원대학교 총장)

 

[문학이 나를 치유한다] 문학 치료를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
치료는 나로부터 오는 것이었구나

 

 

 

 

BC 1000년경 고대 그리스의 도시 테베의 도서관 위에는 ‘영혼의 치유 장소(The Healing Place of the Soul)’라는 글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문학이 지닌 치유의 힘은 이미 고대로부터 인정되었던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참전 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 요법으로도 문학 치료가 쓰였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감정 표현 글쓰기’가 감정적 문제를 해결해줄 뿐 아니라 면역 체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저널 테라피를 통해 우울증이 호전됐다는 결과가 의학계에 보고되었고, 관절염과 천식 환자들의 증상이 완화됐다는 연구 결과도 의학 전문지에 소개되었습니다. 이렇듯 문학은 우리에게 치유의 힘을 선물합니다. 한 편의 문학 작품을 읽으며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일기 쓰기(치료를 목적으로 한)를 통해 마음의 환부를 찾아내는 일, 시 한 편에서 ‘나’라는 존재의 귀중함을 깨닫는 일, 이것이 문학 치료의 시작입니다. 무엇보다 문학은 나만을 지지해주는 최고의 비밀 상담사요 친구가 될 것입니다.

 

 

 

 


저널 치료 사례
“나는 혼수 문제에서 시작된 시모와의 갈등으로 9년을 고통받고 있었다. 교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여러 저널 쓰기 기법을 사용해 계속 글을 썼다. 그 과정은 맘속 상처 드러내기, 내 맘 전하기, 관점 바꾸기, 저널 쓰기로 나누었다. 그리고 3개월 후 9년간의 갈등이 거짓말처럼 해결되었다.

문제 해결 방법 1 맘속의 상처 그대로 드러내기(5분 집중 글쓰기)
내 맘속에 숨겨놓았던 일들, 하소연하고 싶어도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못하고 마음속에 끊임없이 써 내려갔던 무거운 책을 들어냈다.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 의사 앞에 환부를 드러내 보이듯 말이다. “언어폭력은 시간이 지나도 상처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글쓰기 치료 수업 중의 말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쓰는 행위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기에 생각나는 대로 글쓰기를 멈추지 말라”던 교수님의 말씀에 내 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글쓰기 치료 모임 중에 5분씩 멈추지 않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잠깐이었지만 내 맘을 표출해내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런 글을 썼던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수업 중에 교수님이 권해주신 대로 저널 기법으로 어머니와 내 상황을 재현하며, 대화하던 내용을 아주 재빨리 써 내려갔다. 하지만 자꾸 말문이 막힐 뿐이었다. 글쓰기에서조차 어머니 앞에서 자꾸 주눅이 들어 말도 못 잇고 한없이 작아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인물 묘사’를 통해 내게 고통스러웠던 분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원 없이 분노를 표출해보고 싶었지만 의지와는 달리 왠지 너무 버릇없이 지껄여대는 내 모습에 불안해져 화장실만 몇 번 다녀오게 되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어머니가 의식되면서 결국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난 타인을 너무 의식하며 살았기에 비밀의 글조차도 원 없이 써 내려갈 수 없는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깨달았다. 또한 내 속은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차 있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만큼은 착하고 인내심 많은 순진한 사람으로 인정받길 얼마나 원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남들에게 좋다고 인정받는 완전한 사람이길 절실히 원했던 것이다.

문제 해결 방법 2 ‘보내지 않는 편지’를 통해 내 맘 전하기
‘보내지 않는 편지’를 어머니께 써보았다. 이 방법은 그래도 맘속에서 수없이 써 내려왔던 방법이기에 잘 써졌다. 억울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줄줄이 써 내려갔던 그 말을 직접 글로 쓰고 나니 맘이 시원했다. 상처받은 말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던 언행들에 대해 써 내려갔다. 글 속에서 난 항상 피해자였고 어머니는 그야말로 생각 없이 내뱉는 모든 말 속에 독이 있는 이기적이고 야속한 분이셨다. 나의 얼굴에 미소 대신 어둠이 자리 잡게 만든 악녀였던 것이다. 날 주눅 들게 만들고 한없이 작아지게 만든 분. 어머니 앞에만 서면 잘하던 것도 떨려서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든 분. 내 하소연을 다 쏟아붓고 나니 맘 한쪽에서 ‘그럼 넌 어머니께 어떤 며느린데?’란 생각과 더불어 ‘근데 정말 그런 나쁜 분이셨을까?’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예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편협된 생각과 내 편에서 잘 해주기만을 바랐던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4주에 걸친 글쓰기에서 W 선생은 털어놓기, 대화하기, 카타르시스 등을 통해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는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이제는 관점을 바꾸어보는 저널 기법이 효과적인 단계가 된 것이다.

문제 해결 방법 3 새로운 관점에서 보기-상대방 입장에서 재해석해보기(내 생각 바꾸기)
어머니 입장에서 바라본 며느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어머니는 아들141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모든 초점이 아들에게 있었기에 내가 보이질 않았던 것이었다. (중략) 어쩜 어머니로서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말씀조차도 내 마음 밭이 좋지 못했기에 다 역겹게 들렸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어머니의 그런 즉흥적인 표현과 거침없이 쏟아부으셨던 폭언들이 도저히 나의 내성적인 성격, 싫어도 감히 싫다고 말 못하고 살아왔던 내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너무도 다른 상대방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부터 하나 둘 해나갔다. (중략) 내 생각을 바꿔 어머니 입장에서 바라보며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하나 둘 무겁게 엉켜 있던 실타래가 서서히 풀리게 되었다. 그 후로 글쓰기는 더 이상 하지 못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오해와 상처들이 회복되고 있었다. 눈이 조금씩 뜨이면서 가식이 아닌 진실된 마음으로 어머니를 이해하며 대할 수 있었다. (중략)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용서한 것이다. ‘관점 바꾸기’ 글쓰기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난 9년 동안 가슴 한쪽이 무겁게 짓눌려 아파했던 상처 덩어리가 없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더 이상 미움도 아픔도 없이 가벼워진 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론 어떠한 일에도 어머니로 인해 싸워본 일이 없었다. 서로 진정한 마음이 오가며 시어머니는 내게 딸처럼 생각하고 대하겠다는 다짐까지 내보이셨다. (중략) 일 년이 지난 지금 어머니는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인생의 선배로서 많은 조언과 믿음을 더해주신다. 서로가 자신이 생각한 그런 사람이 되길 요구했을 때는 상처투성이였지만 한 발자국 뒤에서 서로를 인정하며,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하니 사랑이 느껴졌다.
신기한 건 저널 치료를 배울 때 교수님께 들은 대로 ‘치료는 나로부터’ 오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의 성격, 언어 습관은 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어머니를 바라보는 생각이 변한 것이다. 내가 달라지니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_30대 주부 W의 글

시 읽고 모방 시 써보기
“네가 약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은 충격에도 쉬이 깨질 것 같아 불안하다/ 쨍그랑 큰 울음 한번 울고 나면/ 박살난 네 몸 하나하나는/ 끝이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큰 충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네가 바위라면/ 유리가 되기 전까지 수만 년/ 깊은 땅속에서 잠자던 거대한 바위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깨진다 한들 변함없이 바위요/ 바스러진다 해도 여전히 모래인 것을/ 그 모래 오랜 세월 썩고 또 썩으면/ 지층 한 무늬를 그리며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시 바위가 되는 것을/ 누가 침을 뱉건 말건 심심하다고 차건 말건/ 아무렇게나 뒹굴러다닐 돌이라도 되었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투명하지만 반들반들 빛이 나지만/ 그건 날카로운 끝을 가리는 보호색일 뿐/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_‘김기택의 시 ‘유리에게’
모방 시“네가 강해 보인 척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내가 아무리 울고 매달려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다/ “날 내버려 둬”라고 말한 후/ 집을 떠난 너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아 두려움에 빠진다/ 바위처럼 보이기까지/ 많은 상처를 극복하고 단단해진 굳은살이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달라진다 해도 또 다른 성장의 모습인 것을/ 그 상처 하나하나 모여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될 것을/ 내가 설명을 부탁할 때/ 너의 답답한 마음을 차분히 표현만 해준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스펀지처럼 온갖 감정을 흡수하지만/ 결국 단단한 바위로 너를 무장할 뿐/ 깨질 것처럼 보이지만 바위로 맞서는 너를 보면/ 강해 보인다는 것보다 강해 보이는 척하는 네가 더 두렵다.”
성찰 평소 F 와 내 관계를 바라봤을 때 유리와 바위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가끔 F의 내면 깊은 목소리를 들을 땐 그도 약한 존재고, 나보다 더 많은 상처를 받고 사는 사람 같다. 그렇다면 툭 터놓고 말을 하지 F는 잘 표현하지 않는다. 때론 너무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낸다. 요즘엔 부부 관계에서 내가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담이니 뭐니 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결혼상을 그렸고 F는 아직 구체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내 이상에 F의 모습을 끼워 넣으려니 그는 불편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을 표현치 못하는가? 그가 유리고 내가 바위인가. 우린 서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지향은 비슷한데도. 유리와 바위가 지층이 될 때까지 더 많은 환경적 자극이 필요하다. 내가 그의 눈치를 보는 건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한데, 그가 그 환경적 변수를 견뎌내지 못하고 속내를 드러내 유리처럼 깨져버릴 것 같은 거다. 우리의 결혼이 끝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재성찰 이 글을 쓴 후에 교수님이 내게 준 “완벽한 일치를 꿈꾸지 마라. 내가 해결해주려 하지 말고 그 사람이 해결토록 곁에 있어주고 기다려주면 어떻겠느냐”는 도움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꿈꾸는 것이 완벽한 일치여서 그도 힘들고 나도 힘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도 나도 조금씩 한발 뒤에 가서 살펴보는 자유의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_30대 직장인 신혼 주부 D의 글 자료 제공 이봉희 교수

*이곳에 실린 글은 모두 본인의 동의를 얻고 그분들이 보내준 내용을 실은 것이며 그 중에서도 사적인 내용은 생략했음을 밝힙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보다 감동적인 치유 사례가 많지만 사적인 내용이라 공개가 불가능합니다.

기자/에디터 : 최혜경・나도연
도움말 이봉희(나사렛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미국 공인 문학 치료・저널 치료 전문가) 그림 이미지 제공 유선태(화가)

출처] 행복이 가득한 집 (2009년 11월호) | 기자/에디터 : 최혜경・나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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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Bong-Hee Lee,

The National Association for Poetry Therapy invites your participation as a work shop presenter in Washington DC next year for its 30th Annual Conference, entitled Looking Forward, Looking Back, Coming Home: Celebrating Thirty Years of Promoting Growth and Wellness through Language, Symbol, and Story.

The conference is scheduled to be held April 7-11, 2010, and once again the venue will be the Crowne Plaza Washington-National Airport hotel in Washington DC.


            “Looking Forward, Looking Back, Coming Home:
Celebrating Thirty Years of Promoting Growth and Wellness         
                   through Language, Symbol, and Story
"
 

 Plan to attend the 2010 Conference for
The National Association for Poetry Therapy  
April 7-11, 2010, at the Crowne Plaza Hotel in Arlington, VA

 Workshops/Lectures/Conversations/Networking/Music & Dance/Poetry Performances

Discover how to use words in a variety of settings for growth and healing. Teachers, poets, counselors, students, lovers of words: Consider the organization’s storied history and join together to plan our future.

Beyond the usual rich array of presentations and workshops, this year’s conference highlights spoken word, featuring 1996 International Slam Poet Champion Baltimore poet Gaye Danley (www.gayledanley.com).


Poetically Yours,

NAPT


Pen, Paper, Power!
솔직한 글쓰기 몸과 정신건강에 좋다

마음속 깊은 곳의 상처 글로 옮겨
천식·관절염 증상 완화등 긍정적 연구결과도



Claudia Kalb 기자



로리 갤러웨이(40)는 수십 년 동안 친아버지와 의붓 아버지를 총이나 폭탄으로 살해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녀는 어렸을 적 몇 년 동안 성적 학대를 겪은 결과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가치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 정신적 충격에 대해 얘기만 해도 신체 반응이 금방 나타났다.

그녀는 “온몸은 물론 목소리까지 격렬히 떨리곤 했다”고 말했다. 잦은 편두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상담요법에다 항우울제까지 복용해 봤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갤러웨이는 몇 개월 전 색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어린 시절 받은 학대가 어떻게 스스로를 가치없는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었는지 30분씩 세 차례에 걸쳐 글로 쓴 것이다. 첫번째 글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세번째가 되자 그녀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곧 떨림 증상은 물론 두통도 사라졌다. 그녀는 “글쓰기가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고백에 기초한 글쓰기는 적어도 르네상스 이래 존재했다. 그러나 새 연구에 따르면 그런 글쓰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치유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자신을 괴롭히는 경험을 글로 표현하는 사람은 기분이 한결 좋아지는 것을 느낄 뿐 아니라 병원 신세를 지는 횟수가 줄어들고 질병 저항력도 강해진다는 사실이 지난 80년대 중반 이래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다.

최근에는 글쓰기와 건강의 연관성을 더 분명히 밝힌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美 의학협회보(JAMA) 최신호에 실린 연구 보고서는 글쓰기가 천식과 류머티스性 관절염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국 텍사스大(오스틴)의 심리학 교수로 진솔한 글쓰기 영역의 개척자인 제임스 페니베이커는 “믿기 어렵지만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은 건강에 유익한 일”이라고 말했다.

적응력이 강하고 건강한 사람이라도 살다보면 부담이 되는 정서적 문제를 안게 마련이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에 따른 고뇌, 친구·가족과의 갈등, 실수와 실기(失機)에 대한 회한을 예로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연구진은 대상자들에게 사나흘 연속 하루 15∼20분씩 그런 경험을 기술하도록 주문하면서 문장을 다듬거나 격식을 차리는 데는 신경쓰지 말 것을 당부한다. 완벽한 수필을 써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물 집하장으로 파고들어가 마음에 걸리는 경험을 글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페니베이커는 한 연구에서 46명의 대학생을 마음의 상처에 대해 글을 쓴 집단과 기숙사 방이 어떻게 보인다는 등 사소한 일에 대해 적는 집단으로 나눠 비교했다. 연구에 착수하기 전 각 집단이 대학 구내 진료소를 드나든 비율은 비슷했다.

그러나 글쓰기 이후 정신적 충격에 대해 쓴 집단은 대조군에 비해 진료소 출입 비율이 50%나 떨어졌다. 지난해 발표된 또다른 연구에서는 직접적인 생리학적 증거가 발견됐다. 글쓰기 덕에 혈액 내 질병을 막아내는 림프구가 증가한 것이다. 예비 연구단계에서는 글쓰기가 혈압을 다소 낮출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까지만 해도 이런 연구는 주로 건강한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 환자들에게 글쓰기 효과를 시험한 것은 JAMA에 발표된 연구가 처음이다. 그 연구에 따르면 천식 환자의 경우 자동차 사고·신체적 학대·이혼·性적 문제 같은 경험에 대해 기술한 사람의 폐기능이 평균 19% 향상됐다.

류머티스性 관절염 환자의 경우 증상이 28% 호전됐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은 일을 글로 적은 환자들에게서는 그런 변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노스 다코타 주립대의 심리학과 조교수로 이번 연구 보고서를 공동 작성한 조슈아 스미스는 “약물치료로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심리적 욕구에도 관심을 기울이면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글쓰기에 단순한 카타르시스(감정 정화) 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 글쓰기 덕에 마음을 어지럽히는 상념들이 앞뒤가 맞는 이야기로 변형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경험에 대해 쓴다는 것은 그 경험으로 인한 정서적 충격을 둔화시키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

노스 캐롤라이나州 채플 힐의 심리학자 테리 밴스가 말하는 ‘편지요법’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밴스는 98년 발간된 ‘마음의 편지’(가제·Letters Home)에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과 연관된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씀으로써 껄끄러운 관계나 갈등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소개했다.

그녀에 따르면 직접적인 대화는 감정폭발로 발전할 수 있지만 편지는 그럴 염려가 없다. 어느 환자는 가족 앞으로 편지를 띄운 결과 가족 간의 유대감이 돈독해졌을 뿐 아니라 자신의 우울증 치료에도 도움이 됐다며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일기를 쓰는 방법도 있다. 심리요법 전문가들에 따르면 일기는 전통적인 대화요법의 강력한 보조수단이 될 수 있다. 콜로라도州 덴버의 심리요법 전문가 캐슬린 애덤스는 글쓰기를 하면 “자신의 마음을 실제로 읽을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감과 자긍심을 키우고 대화요법의 효과까지 증대시킬 수 있다.

뉴욕 헌터大의 영문과 교수이자 신간 ‘치유 수단으로서의 글쓰기’(가제·Writing as a Way of Healing)의 저자인 루이스 디샐보는 자신이 앓고 있는 천식의 증상 및 그것으로 인한 정서쇠약에 대해 글을 쓴 결과 건강이 크게 호전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도 하루 두 번 천식약을 복용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상태에서 증상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글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만이 글쓰기 요법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련 책을 읽거나 글쓰기 프로그램에 등록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페니베이커는 글쓰기로 암을 치료할 순 없지만 건강에 ‘큰 효험’을 볼 수는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글쓰기 효과를 직접 시험해보는 것이 어떨까.


출처/ 분당유생 카페 last updated 2004.01.16
http://cafe.naver.com/flashactionscript/221

joins.com[HEALTH Life]
기사 입력시간 : 2008-05-19 오전 1:10:43 

문학이 ‘건강의 보약’
치료효과 배가시키고 면역력도 높아져
글쓰기 많이 한 천식 환자들 ‘폐기능 좋아졌다’ 보고서도 

인간이 내면 세계의 진실까지 여과 없이 보여주는 순간은 언제일까. 바로 삶과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는 의료 현장이다. 투병과정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의 단골소재로 등장하는 이유다.

환자의 치료효과를 배가시킨다는 ‘문학 치료’가 최근 각광을 받고 있다. 시·소설·수필 등을 읽는 환자뿐 아니라 작가가 된 심정으로 글쓰기를 즐기는 환자에게서 놀라운 치료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최근 열린 ‘의사문학제(주제: 치유수단으로서의 문학, 좌장: 연세대 의대 손명세 교수)’에서 집중 조명된 문학치료의 현주소를 알아본다.

◇본질은 심신의 건강=질병을 앓는 환자는 불안하고 쉽게 우울해진다. 스트레스는 또 면역기능을 떨어뜨려 감기를 비롯해 각종 질병에 잘 걸리도록 한다. 이처럼 한 개체에 공존하는 물질세계(몸)와 초(超)물질세계(마음·정신)는 상호 영향을 미친다. 마음을 감동시키는 문학이 현대의학에 치료법으로 도입되는 이유다. 다른 사람의 투병기를 읽으며 함께 공감하고 환자 자신을 짓누르는 병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분노·긴장 등에서 벗어난다. 카타르시스를 통해 건강한 정신과 심리상태를 되찾는 것이다.

◇문학치료의 세 단계=문학치료가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진단 ^동기부여 ^치료 등 세 단계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진단 단계는 독서치료사 혹은 정신과 전문의가 환자의 정신 상태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과정. 이후 독서와 대화를 통해 환자의 정신세계에 자극을 주고 변화를 유도하는 동기부여 과정을 거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환자에게 ‘적절한 문학작품’을 선정해 주는 일. 동기를 갖게 된 환자는 작품 속에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삶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익힌다.

놀라운 글쓰기 효과=환자 스스로 글을 쓰는 과정도 치료 효과를 배가시킨다. 대표적인 예가 세계적인 의학전문지 자마(JAMA)에 발표된 류머티스 관절염과 천식환자를 대상으로 한 문학치료 효과다. 연구자들은 한 그룹에겐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경험을 매주 3일 연속으로 20분씩 쓰게 했고, 다른 그룹에겐 단순히 그날 계획을 쓰게 했다. 그리고 2주, 2개월, 4개월 뒤에 환자 상태를 평가했다. 결과는 4개월이 지나자 스트레스 경험을 썼던 천식 환자들은 폐기능(FEV1:1초에 숨을 몰아내쉬는 검사)이 평균 63.9%에서 76.3%로 의미있게(p<0.001) 증가했다. 물론 단순 기록 그룹에서는 폐기능 변화가 없었다. 류머티스 환자 역시 스트레스 상황을 글로 표현한 환자 그룹에선 질병 심각도(0~4점)가 1.65에서 1.19(28% 감소)로 의미있게 감소한 반면 대조군은 질병 심각도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글쓰기는 정신질환도 호전시킨다. 일례로 입으로 음식을 못 먹고 주사기에 의존한 채 생명을 유지하는 환자와 보호자는 스트레스가 커 보호자의 63%, 환자의 33%가 반응성 우울증을 앓는다. 연구자들은 이들에게 매일 일기를 통해 치료과정의 고통과 사회활동에서의 소외감, 감염 위험에 대한 불안감, 경제적 곤란, 질병 악화에 대한 무력감 등을 쓰게 했다. 세 달 후 중증 우울증은 경증으로, 경증은 정상으로 회복되는 등 확연한 정신건강의 호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 검사에 참여한 환자의 72.5%, 보호자의 67.5%가 일기를 쓰면서 현재 상태에 대한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해소돼 머리가 맑아졌다고 대답했다.

단 글쓰기도 심한 정신적 충격 상태를 경험한 아동학대 가해자, 전쟁에서 돌아온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환자에겐 악화 요인으로 작용하므로 권장되지 않는다.

◇만성병·난치병 환자는 더욱 필요=문학을 접하면서 좋아지는 심신 기능은 다양하다. 스트레스 감소와 면역력 향상은 물론 혈압강하, 폐기능 증가, 간기능 호전, 입원일 감소, 기분 향상, 심리적 안정, 우울증 호전 등이 따라온다. 따라서 일단 만성병이나 난치병을 앓는 환자는 좋은 문학 작품을 접하고, 매일 자신의 느낌을 글로 표현하는 게 권장된다.

건강한 사람은 더욱 건강한 심신을 유지할 수 있다. 결근일 감소, 실업 후 빠른 재취직, 기억력 향상, 운동능력 향상, 성적 향상 등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황세희 기자 [sehee@joongang.co.kr] 
2008.05.19 01:10 입력 / 2008.06.16 16:46 수정


생각하면 기막힌 일이다. 나는 울고 괴로워하는데 주위에는 기술자들이 초점을 잡느니 보드를 치느니 조명을 켜느니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으니. 정말 돌아 버릴 노릇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이 자기 일을 한다고 나를 보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 앞에서 고통에 몸을 내맡긴 채 언제든 사인만 떨어지면 그것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데니스 호퍼)

글쓰기/문학치료 (2007 여름) 워크샵 후기

1. 저널치료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된 점.


학회에서도 글쓰기 치료라는 이름으로 분과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곳곳에서 글쓰기 치료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이번 기회에 저널이 무엇인지 저널쓰기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저널은 일기와 같다고 하신 교수님의 말씀에 공감하면서 그냥 [저널치료](학지사) 책을 봤을 때 가졌던 저널에 대한 생각이 직접 국내에서 유일한 "공인저널치료사"인 교수님의 가이드를 따라 방법을 경험하고 나니 몸으로 체득된다. 그냥 책을 봤을 때는 저널쓰기가 어차피 글쓰기 구나 생각하면서 글을 쓸라면 이런 방법들이 있구나라고 방법적인 면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직접 경험해 보니 저널쓰기의 여러 방법이 단지 도구일 뿐 진짜 중요한건 어떻게 진실되게 지금, 현재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직접 경험해보는 거랑 책만 읽은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저널쓰기 방법을 활용하고 싶은 사람은 꼭 [저널치료] 전문가의 지도를 경험해보고 활용하기를 권하고 싶다.


2. 상담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문학적으로 표현된 심리학 용어들


처음 만남에서 교수님은 자신은 심리학자가 아니고 심리치료를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워크샵을 들으면서 교수임이 표현하시는 용어는 문학적으로 달리 표현된 깊이 있는 심리학적 용어들이었다.(그렇다고 내가 심리학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는 아니다) 그것은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험과 연륜을 가진 사람만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깊이의 언어들이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상담이나 심리치료라고 하면 거부감을 먼저 느끼는 우리네 정서에 비추어 볼 때 저널쓰기는 부담이 없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치료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교수님은 끝까지 심리나 상담치료는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문학치료라는 다학문적인 상담치료를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없이 첫 걸음을 딛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3. 다양한 매체 활용의 놀라움 (문학치료와 글쓰기치료의 접목)


단순한 글쓰기치료가 아니라 무엇보다  교수님이 사용하시는 독특한 방법인 문학치료와 글쓰기치료가 접목된 방법과 다양한 형식의 텍스트를 가진 문학적 매체들이 놀랍다. 그림, 영화, 시, 글, 등 자료의 방대함과 그 자료를 구하기 위해 그동안 준비하셨을 교수님도 존경스럽다. 때로 독서치료를 진행을 하다보면 몇 가지 힘든 점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내담자들이 책을 읽을 시간이 없거나 책읽기를 별로 안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널쓰기에서 사용하는 영화의 한 부분, 그림, 책의 한 문구, 시들은 매우 공감되면서도 자료를 처음부터 모두 봐야한다는 부담감을 갖지 않게 하여 좋았다. 독서자료를 활용 할 때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을 배운 기회가 되었다. 또한 다양한 글쓰기 방법들도 재밌다. 방법이 새로운 건 아니지만 그것들이 저널쓰기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접목되는지를 알게 되었고 글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나 마인드 맵 등 자신이 쓴다는 것은 심각하게 느끼지 않도록 하는 쉬운 방법들이 글쓰기에 응용되어서 좋다.  



4.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바뀜


워크샵시간에도 말 한 적이 있는 데 나는 오래전에 일기 쓰는 것을 그만 둔 적이 있다. 왠지 글쓰기가 가지고 있던 무게감이 나를 진정으로 쓰지 못 하게 만든 것 같다. 글은 자기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나타내는 거라고 하지만 나의 글쓰기는 무의식을 의식의 검열로 검열하여 쓴 것 같았다. 정말 글을 아무 생각 없이 한번 쓸 때 끊지 않고 다시 읽어보지도 않고 써 보는 것, 그것은 아직도 얄팍한 의식의 끝을 잡고 나의 글을 검열하는 나에게 처음에는힘든 일이었지만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써 보고 나중에 다시 의식적으로 다시 읽어본 후에 써보는 후기 또한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진정한 저널 쓰기 방법이 잘 알려져서 글을 쓴다고 하면 거부감과 부담감이 먼저 드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도구로써 글쓰기를 애용하기를 바란다. 진정 부담 없는 무의식의 표현이 저널쓰기이다. 


 

저널치료를 접하고 나서 나의 변화


이 글을 쓰기 위해 저널치료 숙제로 낸 나의 글을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다시 읽어보니 새롭다. 어떤 글은 내가 왜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생각이 안 나는 것도 있고 변하지 않는 생각도 있다. 자기가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고 후기를 쓰는 것은 후기에 후기를 계속 써서 끝이 없을 것 같다. 나의 시간에 따른 생각의 변화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아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빠에 대해 글을 썼었다. 되도록 솔직하게 쓸려고 했다. 한번 썼다고 해서 그 감정이 다  라진 것은 아니지만 한번 써 보자 머릿속에서 맴돌던 묵직한 무게감이 좀 준 것 같다. 뭐랄까? 계속 나의 화두인 것처럼 따라다니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할 첫 발을 내딛었다고나 할까?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써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면서 나의 무의식이 어찌 변해가는지도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단지 지금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에 앉아 무언가를 하엔 불편한 몸이 되어서 나중에 몸이 좀 편해지면 시작해야겠다. 이제 글쓰기에 대한 부담이 줄었으니 몸이 가벼워지다면 더욱 쉽게 시작할 것이다.  막연히 언젠가 해야지 하던 것이 아닌 진짜로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하고 싶은 작업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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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문학치료와 저널치료에 대한 나의 생각

뭐든 경험을 하고 나면 바로 후기를 쓰는 것이 가장 신선하고 새롭다. 시간이 좀 지났고 또한 출산이라는 인생의 아주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는 나는 온통 신경이 그 쪽에 가 있는 관계로 그 때 느꼈던 신선함을 다 전달하지 못 할까 생각이 든다. 그래도 기억을 되살려 저널치료에 대한 내 생각을 간단히 써 보았다.

*이 글은 집중 문학/저널치료 워크샵 (4일 8회, 2007년 7월)에 참석했던 한 참여자(청소년상담사 BS선생님)가 보내주신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해외 건강토픽]천식-관절염 치료에 글쓰기 큰도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드는 생각이나 느낌을 글로 쓰면 건강이 좋아진다
는 연구결과가 "미국의학회지" 4월호에 실렸다.

미국 노스다코다주립대 심리학과 죠수아 스미스박사(연구당시 뉴욕주립
대교수)는 천식환자 70명과 관절염환자 56명을 대상으로 느낌이나 생각을
글로 적도록 한 결과 환자의 50%에서 상태가 좋아졌으며 매일 하루 스케
줄을 적도록 한 경우 24%에서 상태가 호전됐다고 발표.

스미스박사는 "천식환자는 2주 뒤부터 건강이 좋아졌으며 관절염 환자
의 경우 4개월 뒤 약간 좋아졌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그
는 "누구나 글을 쓰면 심장박동수를 줄고 혈압이 내려가며 면역기능이
강화된다는 다른 연구결과도 있다"고 소개.


from medcity.com 1999-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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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베이커의 연구에서도 글쓰기가 천식과 관절염 치료에 가장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의 문학치료모임에서는  아토피 피부염과 여드름,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는 증상, 불면증, 숨쉬기가 답답한 경우, 심지어 얼굴의 주름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아직은 소규모 모임에서 나온 개별적인 사례이며 대규모 실험을 통해 나타난 통계자료가 아니어서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이 보고 되는 변화는 역시 관계의 치료, 분노치료, 자존감 회복이었으며 자아발견, 창의적 자아 발견이었다.

그만 아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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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실라와 함께 감옥에 갇혀 찬송을 하였을 때 옥문이 열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찬송이 가져온 기적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 찬송할 수 있다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이때 "기적"은 무엇입니까? 옥문이 열리는 게 기적이 아닙니다. 때로는 스테반처럼 야고보처럼 고스라니 순교당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그 억울하고 알 수 없는 고통 중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며 반항하고 회의에 빠져야 마땅할 상황에서 "찬송"을 할 수 있는 힘, 그 믿음이 기적인 것이 아닙니까? 우리 속에 행하시는 주님의 기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뜻이 있으면 옥문이 열릴 것이고 뜻이 있으면 순교를 당할것이 아닙니까?

바울의 찬송은 옥문이 열리기를 간구하거나 기대한 찬송이 아니었습니다. 옥문이 열리자 죄수를 다 놓쳤다고 당할 일이 두려워 간수는 자결을 하려합니다. 그때 바울이 우리가 여기 있다며 그를 말렸습니다.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그가 할일을 했습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간수와 가족이 모두 믿고 간수는 그의 매맞은 상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기적은 바울을 탈출시킨게 아니라 한 가정을 구원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이보다 더 한 일도 할 수 있거니와 그런 나를 믿는가? 베드로가 흥분하여 예수님을 결박해 가려는 로마병사에게 칼을 휘둘렀을 때 그가 병사의 잘린 귀를 도로 붙여주시며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까? (그 기적을 행하시면서 왜 자신은 무력하게 매를 맞고 수치를 당하고 끔직한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까? 그가 세상에 온 이유를 완성하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에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을 줄 아느냐... "

바울이 자신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인생의 상황들을 "믿음"으로 받았을 때 주님은 바울이 사는 이유를 하나하나 성취해 나가셨습니다. '내가 저를 통하여 내 뜻을 이루리라' 하셨던 다윗이 실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또 시험에 들고 하였습니다만 주님은 그를 만들어 가셨고 그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결코 나를 포기할 수 없는 그 사랑으로 내 속에서 시작하신 "착한일--선한 그 뜻"을 다 이루시기 까지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연금당한 (물론 지하감옥에서 나왔습니다) 5년동안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로마의 정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정치인,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었던 그 사람들로 인해 결국 로마가 후일 기독교 국가가 되게 됨을 바울은 모르고 숱한 고난 끝에 순교를 당합니다. 그는 가장 큰 실패자였지만 동시에 성공자였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수용하는 눈--그것이 생의 아이러니를 깨닫는 눈입니다. 생의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이중시각을 줍니다. 즉 우리가 겪는 사건을 인간의 눈으로 볼 뿐 아니라 동시에 영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영원의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영혼의 눈"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눈입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는' 믿음의 눈은 우리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되는 축복을 줍니다.

바울의 선언을 보십시오.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한 그가 "범사에 감사하라"합니다. "항상 기뻐하라"합니다. 이런 아이러니는 성경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이 남긴 잠언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게 헛되다"입니다. 세상에 새것이 없더라. 내가 지혜마저 구해보았으나 그도 헛되다...

당신이 그렇데 포기하고 싶고 버리고 싶어하는 '세상'은 그만큼 속하고 싶어하는 그래서 자꾸 더 상처입는 세상이 아닙니까? 내가 관심없다고 자꾸 밀어내는 것은 사실은 상처받기 두려워 관심없다 먼저 밀쳐내며 돌아서서 혼자 아파하는 것아닙니까? 맞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무관심합니다. 참으로 냉혹하게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부축이고는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외로운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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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우연히 가롯유다에 대한 한구절을 읽다가 다시 머리를 끄덕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가 예수를 판 것을 후회하고 스스로 뉘우치고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내가 무고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며 예수 판 값으로 받은 은 30량을 돌려주려하자 그들이 말하지요.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마태27) 참 무서운 말입니다. 네가 그 죄값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악한 행위를" 부추기고는 책임은 져주지 않는 세상... 우리는 그 세상을 쫓아가느라 지칩니다. 그것 세상이 준 보상은 은돈 30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그렇게 버리고 싶은 그런 세상을 버리는 길은 하나입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다시 말하거니와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하지만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악을 행하는 자들도 모두가 가해자이기 전에 피해자(불완전함이야말로 실존적 죄를 가르키는 말이라 생각합니다.)임을 이해하고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잘못이 아닙니다. 내가당하는 모든일에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세상이 그럴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를 용서하고 상대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큰 자가 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들은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예수님이 고난받으시기전 제자들을 위한 긴긴 기도에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분명 고통을 인정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너희의 믿음이라(요한 1서)

진정 진정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아무곳에도 우리를 이르게하지 못할 허망한 생각 대신 진리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때 진리는 예수님 자체입니다. 그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인격체"인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내가 곧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우리의 영혼과 생각이 양식으로 삼지 않으면 안되기에 자신을 떡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이유도 그때문입니다.

당신은 정말 계속 자신을 그 아픔속에 방치하고 싶은건가요? 정말 낫고 싶기는 한 것입니까? 아프지 않을까봐 두려운건 아닌가요? 진리속에서 아픔이 진정한 생산적인 아픔인 것을 알지 않나요? 그렇지 않은 아픔은 나를 어느곳에도 데려가주지 못합니다. 퇴행과 허망한 챗바퀴, 두려움과 끝없는 도피밖에 없습니다.

용감히 뒤돌아 서서 뛰어 나오길 바랍니다. 그 흐름에서 표류하지 말고 날아 올라 자유를 얻기 바랍니다. 더 이상 당신의 아픔을 바라보는 일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아픈 당신을 보느라면 너무 내가 아픕니다.


 공개 된 카페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이봉희 교수님의 글쓰기 치료에 대한 감상문>

 

지난 주 월요일로 시간을 되돌려 놓았다.

자아야, 이상하다! 우애령 작가님은 얼굴이 좀 크던데, 얼굴 성형 수술했나?

얼굴이 완전 다르다.  이봉희 교수님인가?  “글쎄나도 모르겠는데. 이봉희 교수님을

본 적이 없으니... ” “ 에라 모르겠다.  아니면 어떻고. 기면 어떠니. 뭐라고 하시겠지.”

“ 그래, 들어봐. ”

 

교수면 나이가 오십은 넘었을 것 같은 데 사십 오 육 세 정도는 되었겠다

싶으신 고운 외모에 목소리는 작고, 말은 왜 그리 빠른지요?

교수님의 프로필을 이야기 하시며,“ 아휴, 안할 수도 없고, 그냥 할게요.” 뭔가 쑥스러워하시는 모습이 우리를 웃게 하셨다.

 

교수님 알고 있는 것을 짧은 시간에 많이 먹여주고 갈려니, 맘이 급하다고 했다.

“자아야, 나 자꾸 교수님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 소녀같네. 옛날에는 수줍음도 많아겠다. 그지?”

학생들의 글을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아준다는 말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나만이 아는 글, 보내지 않는 편지,

“이거 맘에 들지않니?  자아야, 내가

네게 보내는 편지, 이것이 나를 변하게 만든다니.... 신기하다 ”

 

“ 너, 지금 이거구나! 하잖아, 너, 지금 후회하지? 글쓰기 치료책 사놓고, 보지도 않은것

말이야.  오늘 우애령 작가님이 온다고 하니까, 안 읽고 왔잖아,”  “ 그래, 후회해,

하지만 어쩌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알아가는 재미도 있잖아.  너, 자꾸 그럴래,”

 

난화 속에서 자신이 발견한 그림을 가지고  글을 쓰게 하셨다.

쉬지말고 쓰라고 하셨다.  난화 속에서 자신만이 발견한 그림을 설명하고,

글을 읽는 내 동무들이 얼굴에 울음을 가득가득 담고 터트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닐 것 같았다.  내 차례가 되어 읽는 데 어! 어! 어! 이게 웬일이람.

뱃속에 돌멩이가 눈물이 되어 녹아 나오지 않는가!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는 뒷 통수를 맞았다.  그런데 그 뒷통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림을 보여주고 돌아가면서 보이는 그대로 자신의 생각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거르지 말고 표현하라고 하셨다.  주절주절 나는 잘도 말했다.

어떠랴.  말하라고 할땐 주저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 최고 상책이다. 

 

시를 읽고,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을 이야기 하라고 하셨다.

그리곤 왜 그러냐고 물으셨다.

자아가 나를 놀렸다.“ 너는 잘도잘도 주절주절 대더구나.

이제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다 들리나 보네.”

‘나뭇잎이 흔들리며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이거구나,

꽃들이 서로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이거구나, 나는 교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교수님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거였다.

“자아야, 나 그만 가야겠어.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나, 아이들 수업 약속이 있으니   늦었다.   남편보고 송정까지 차가지고 데리러 오라고 해야겠다.”  

 

“너, 오늘밤에 글쓰기 치료책 읽겠구나,” “ 나 지금은 버거워, 해야할 일이 많거든.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무언가 다가오는 데, 안개 속이야,”

 

나에게는 신비로운 열매를 열게하는 나무의 씨를 선물로 받았다.

그것을 마음밭에 심었다.

 

다음날이었다.

새벽 5시 30분에 산에 갔다 오면서 나는 시간과 함께 달리고 있음을 느꼈다.

시간이 형상이 되었다.  나는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날고 있었다.

어제의 눈물이  오늘 환희가 되었다.  그리고 축복이 온몸을 감쌌다.

 

글을 썼다.

조금씩 나를 썼다. 

짧지만, 하나를 완성했다.

미국의 제 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의 아주 짧은 글을 읽으며, 나는 울었다.

 

저널치료 책도 샀다. “너 언제 이 책 다 읽을래.”

“이제는 급할 것이 없어.  나는 시간과 같이 가거든.  내가 뛰면 같이 뛰고, 내가 쉬면

시간도 쉬거든.  히히, 약오르지?”

“자아야, 네가 예쁘구나,” 나와 함께 해 주어서.......

“아니야, 나를 가지고 있는 네가 참 예쁘다.”

그래, 우리 서로 아끼고, 사랑하자꾸나.

 

 

* 내가 나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아직은 무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봉희 교수님이 많은 것을 보여 주셨는데, 아주 아주 작은 부분만

내 마음속에 담아왔습니다.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정말 맛나는 하나의 열매가 되어

내 동무들과 나눠 먹어도 끊임없이 또 줄 수 있는 내가 되길 바랍니다.

이 봉희 교수님을 만난 것에 감사들 드립니다.

 

 

 

 

 

문학과 독서치료 강의 후기

 

..달이:

저녁반 이봉희 선생님의 수업은 실재 적용보다는 이론이 중심이었어요.

물론 학생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쪽 방향으로 수업이 진행되었죠.

문학치료에 대해서 더욱 많이 생각해 보는 계기였습니다.

 

이봉희 선생님과 나눈 글쓰기 치료는 새로운 문학치료적인 방법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정말, 시간이 더 많이 할애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싶을 정도로 4시간이 빨리도 지나갔네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어하시는 선생님의 열정이 느껴져서 더욱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제 마음속에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긴 말씀은... "걸리버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소인국에 살고 있는 걸리버가 되면... 화살이 날아와도 상처가 나고 아플지언정 죽지 않을 것이고,

눈앞에 높은 산이 있어도 다리 벌려서 훌~쩍 넘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또한 "내 안의 어린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계기였습니다.

어느덧 겉멋이 들어서 시니컬하게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좋은 줄 알았고,

작은 것에 감동하고 행복을 느끼는 것이 유치한 모습인 줄 착각하고 살았더라고요.

 

독서치료사를 꿈꾸는 우리 모두가 먼저 걸리버가 되어 의연하고 지혜롭게 문제를 바라봐야겠습니다. ^^

..미
: 저도 -걸리버가 되라-는 말에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07.05.17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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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e: 2007.05.16 00:09

 

제일 먼저 그림을 사용한 글쓰기와 그림을 통해 감정을 이끌어 내시던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림이 다 마음에 들었고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했어요.

그리고 실습으로 난화를 하고 선생님들마다 돌아가며 나눔을 했는데 그림 속에서 찾아낸 것이, 그리고 그것을 통한 글쓰기가 선생님들 한 분 한 분을 깊이있게 건드리고 문제를 생각나게 하고 감정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저는 참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단순한 선그리기와 글쓰기에 이렇게 큰 힘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문학치료를 통해 천식과 관절염이 나았다는 것, 그리고 오랫동안 막혔던 관계가 열리고 몇 십년 동안 대화가 단절되어 있던 관계에 대화가 열리고 했다는 경험담을 들으면서 문학의 힘을 느낄 수 있었고 심리학적 이론 없이도 문학 통해, 아름다움을 통해 사람이 치유된다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글쓰기치료가 상담자에게도 비밀을 굳이 털어놓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 하는 활동이 치유를 가져온다는 것이 자아방어가 강하고 노출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 특히 청소년층에게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된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이전에 만났던 거짓말하고 자기노출을 꺼리는 아이가 생각나면서 정말 청소년들에게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꼭 적용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화와 같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앞으로도 혼자서 사용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꼭 복잡한 이론에 기초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그림, 음악, 글을 통해 치유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자 큰 위로가 되었고 앞으로 삶 속에서 이러한 문학과 예술을 많이 접하고 제 자신을 풍요롭게 가꾸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고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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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독서치료학회에서 5월 14일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던 최OK입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저한테는 큰 신선한 충격이 들어와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책만 사놓고 읽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 글쓰기치료, 저널치료 책을 읽으며, 조금씩 내안의 나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교수님가지고 계신 자료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또한 체계적으로 교수님의 강의를 받고 싶은데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도움을 청합니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도 있어서, 나중에 시간이 날 때 교수님께 도움을 청하려 하다가 안되겠다 싶어 메일로 제 마음을 보냅니다. 교수님의 강의나 자료의 도움을 간절히 바랍니다.

나이를 잊고 사시는 단아한 모습을 6월을 시작하는 오늘로 부터 영원토록 지켜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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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오늘 아침 일찍부터 강의가 있다고 하셨는데 어제 늦게 끝나셔서 아침에 일어날 때 힘드셨지요?

어제 '글쓰기치료' 강의를 들은 학생이에요.

교수님의 귀한 말씀들 다시 한번 새겨보았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말도 좋았고, [죽은시인의 사회]도 좋았고, 기억하고 싶은 말들이 참 많았어요.

시간이 되면 교수님 강의 더 듣고 싶지만 직장에 다니고 있는터라 차후에 기회가 되기를 바랄 수 밖에 없네요.

교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많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 모두들 흡족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 방에서 '백곰딜레마' 내용을 보려고 하니까 비밀번호를 입력하라고 하네요.

허락해 주신다면 저도 들어가 보고 싶은데 방법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교수님께서 어렵게 공부하고 체험하신 것들이 잘 풀려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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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독서치료학회  문학과 독서치료 시간에 교수님 강의를 들었던 KH원입니다

저널치료 책을 사서 읽으면서 직접 글도 써보고, 친구에게도 이 방법을 권해주기도 했었죠

 

그런데 글쓰기치료의 강력한 힘을 믿고 계신 교수님을 직접 뵈니까

머리로만 이해했던 것들이 가슴으로 온몸으로 느껴졌어요

 

강의 듣는 동안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관절이 쑤시기도 하고 머리에 두통까지

내안의 어떤 메세지가 몸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기억 잊지 않아야 겠다고 생각했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게 그 의미를 차근차근 알아가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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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제 밤 수업 받고 글 올렸던 LHJ입니다. 수업내용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남편과 같이 하면서 천안 수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수요일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가을 학기에도 혹시 문학치료 수업이 그곳에서 있을 예정인가요? 아니면 서울에서도 혹시 수업이 있을 예정이라면, 꼭 받아보고 싶습니다. 제 자신이 자라면서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저 일기처럼 풀어헤쳐 놓았었는데 그런 것들을 이제 좀더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써 내려가면서도 어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 다음은 도대체 뭔데? 어찌해야 하는데"에서 걸려 넘어져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제라도 늦다는 생각을 저버리고 머릿속 헝클어진 마음들을 수습하고 싶네요. 저는 44세의 주부에 중3, 초등6,초등2학년의 세 아이를 두고 있는 '분발하고 싶은' 어미입니다. 꼭 다음에 만나뵐 것을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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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편히 들어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대학로 독서치료 수업을 들은 이HJ라고 합니다.

오늘 돌아오면서 정말 멀미가 났습니다. 아니, 정확한 표현으로는 구토가 일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문학이론과 시, 소설, 영화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그것들을 모두 토해버리고 싶었습니다.

모두 버리고 다시 담고 싶었습니다. 교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지금도 머릿속을 울립니다.

지금도 도저히 잠을 이룰 길이 없어 복잡한 마음 속에서도 이 방에 들어왔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마음만 달래고 나가겠습니다.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무엇보다도 교수님께서 보여주신 우리를 향한 열정에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밤이 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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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J

교수님 월요일 오전 서울에서 수업 받았던 천안의 SYJ입니다.

글쓰기의 효과를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아직 여운이 있어요.  만나서 정말 감사한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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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

오늘 문득 떠오른 생각인데 무심히 넘길 일인가...해서요.어제 남편에게 시어머니에 대한 부담감을 이야기하다가 '정말 사랑스러운 어머니라니까!'라는 말이 툭 나왔습니다. 농담삼아 한 말이긴 했지만, 빈정거리거나 반어적인 표현을 한건 아니었는데. 그런 표현을 했다는게 저도 의외였습니다. 농담으로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는데.

저의 시어머니는...저를 많이 울게 한 분이지요. '나를 저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구나'하는 것을 알려준 장본인이고(흑..) 직접적으로 말씀은 안하셔도 온 몸으로 '넌 예의도 없고, 성격을 개조해야해' 하는 메세지를 마구 풍기셨구요. 요즘은 '손자들이 성품 좋은 제 아빠는 안 닮고 엄마를 닮아서 걱정이야' 하는 메세지까지...

그런데 어제 그 말을 하는 순간 문득 어머님이 귀엽게(?) 느껴졌답니다. 70이 다 돼가시도록 관심받고 싶어하시고, 남에게 칭찬 듣고 싶어하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가지고 계시다는게요. 정말 이해할 수없는, 그보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제가 조금 마음에 여유가 생긴걸까요? 막상 또 얼굴을 대하면 어떨진 모르겠지만 제가 조금 담담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좀 용감해진 것 같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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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글이다. 내 개인 홈페이지에서 HS학생(지금은 유학중. 아기아빠이며 전도사님이다.)과 주고 받았던 글.

2003년 9월 15일
"발가벗은 한 그루 가을 나무의 용기와 겸허로
밤새도록 밤비처럼 처절한 기도로 울 수 있게 하소서" (유안진)

hs가 다녀갔다. 온 단 말도 없이  조심스런 노크소리와 함께.
자기에게 이 가을 필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 글을 적은 책 한권을 내밀었다.

반가운 손님은 그 자체가 큰 선물이다. 예기치 못한 기쁨. 어느 시린 봄날 아침 아직 다 떠나지도 않은 겨울을 이기고 고개내민 파란 싹을 만나는 기쁨처럼 가슴이 훈훈해진다.

삶의 고달픈 여정에도 항상 길가에는 의자모양 돌이, 누운 고목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 쉬어가라고.  감사한 일이다.

쌓인 일들과  두번 다시 쳐다보기도 싫은 교정원고 앞에서 봄볕에 녹는 겨울 눈처럼 졸다가 불현듯 깨어나 hs가 주고 간 책을 들쳐본다. 내 졸음은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한 내 육신의 소리없는 반항임을 알기에.  어쩌면 하나같이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수 있을까? 어떻게 이들은 온실에 비친 햇살같은 따뜻함을 황야 한복판에서 일궈내어 도란도란 여성스럽게 들려줄 수 있을까?  질투심 섞인 부러움에 이번엔 또 다른 졸음이 날 마비시킨다.

난 아직 입원중이다.
내게 세상은 거대한 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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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9. 16. by HS

세상은 거대한 병원... 어떤 병원인가요?
한 때, 세상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한눈에 보기에도 결벽증과 약간의 정신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만한 한 아주머니를 보며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더러움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 눈에 결벽증 환자처럼 보이는 저 아주머니가 정상일지 모른다고,
미친 세상에 우리 모두가 미쳤기 때문에 그 더러움을 모른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나도 미쳤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거라고...

그 때 저는 창조주란 없다고, 있어도 떠나겠다고, 벌을 내리려면 내려보시라고 반항하던,
그리고 점점 염세적으로 생각이 번지던,
그래서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던 때였습니다.
죽음이란 결국 정상인이 미친 세상에서 택하는 마지막 탈출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 그러나 저는 그 때에 이미 벌을 받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때로는 축복입니다.
옛 선지자들이 그토록 외치던 "돌이키라"는  명령에 귀를 기울일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벌인지도 모른채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은 그 얼마나 큰 형벌인지요.

너무나 감사하게도 저는 형벌을 받고 있는 상태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때에 "돌이키라"는 명령을 깊이 생각했으며,
그리고 지금의 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언제든지 어두움을 택할 수 있는 유약한 존재임에는 틀림없겠지요.

이런 말씀은 드리지 못했지만,
비젼이 확고부동해야 한다는 말에 대해 동의는 하면서도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처럼 염세적인 생각은 아닙니다만,
때로는 '세상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란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은 확신을 하고 있지만,
어쩌면 신의 존재를 있다 없다 논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싶어(다만 믿을 뿐이라는 뜻에서)
불가지론에 매력을 느끼기도 합니다.
위험한 생각인가요?

세상은 거대한 병원이라는 글귀가
지난날의 저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를 또 생각하게 합니다.

"발가벗은 한 그루 가을 나무의 용기와 겸허로 밤새도록 밤비처럼 처절한 기도로 울 수 있게 하소서"

진정 제게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렸던가요?
어릴 때 선생님이나, 대학에 와서 교수님이나,
그 앞에 서면 너무나 어렵고 불편한 생각만 들었었다는 것을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선생님은 많이 다르네요.
불편한 마음이 전혀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지금까지 제가 만난 다른 선생님이나 교수님들과는 많이 아니 전혀 달라요.
감사합니다.
늘 거기 계셔서 들어주시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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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 to HS
9. 17.

어둠은  밝음을 사모하기에 인식되는 어둠입니다
애통함은  나의 연약함에 대한 끊임없는 깨어있음으로 인한 절망입니다.
세상의 온갖 아픔을 바라보기에, 그들의 시기 질투 욕망 외로움 갈증 두려움 대인기피 과대망상 피해의식 맹목적인 사랑 우매함 판단과 지혜의 눈이 먼 안과질환 이기심 착각... 모든 것이 다 그들의 '아픔'이기에 그것을 바라보는 슬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쁜 사람입니다. 기어이 환희와  밝음과 따스한 웃음 뒤에 다시 찾아올 어둠을 너무 또렷이 찾아내고야 맙니다.  누군가의 밝음이 딛고 선 발밑에 눌린 어둠을 또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변성과 무상함을 알면서 나도 이 땅위에 중력의 법칙 속에 얽메어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바울처럼 말합니다. 내가 둘 사이에 끼었으니... 나의 원하는 바는 이곳을 떠나는 것...이지만 만일 내가 이 곳에 존재할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다면, --너희에게 유익하다면-- 이곳에 있는 것이 내게 옳다는 것이지요. 그게 사나 죽으나 의미있고 유익하다는 거지요.  세상이 병원이라는 말은 나를 제외시킨 비판적인 말이 아닙니다.  나를 포함한 인간들의 "아픔"--악함이라는 궁극적인 병, 죄(허물)라는 깊은 병에서 스스로를  치유할 길 없는 그 사실을 바라보는 슬픔을 이야기 합니다. 누가 감히 아, 기쁘다 주님이 그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나는 기쁩니다. 정말 기뻐요. 불가능이 없어요. 주님만 믿으면... 이라고 용사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절대 나는 배반하지 않아요. 죽기까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확신했던 베드로처럼요?   우리도 주를 배반했던 베드로처럼 기껏해야 이렇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백할 뿐이지 않은가요?  

"네가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나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감히 맹세하듯이 큰소리 칠 수 없어요. 난 언제 또 당신을 부인할 지 몰라요. 언제 또 세상과 타협하거나 외로움에 몸을 떨며 모든 걸 포기해 버리고 싶어지거나, 나태해져서 세상을 포기한듯 우울해 질지 몰라요. 언제또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저주하거나 내 알량한 선악의 판단으로 남을 정죄하며 미워할지 모릅니다. 언제 또 당신을 외면한 채 골방에서 혼자 쓰러져 꼼짝도 않고 생을 낭비할지 모릅니다.  오직 당신만이 지금 고백하는 이 사랑이 진심임을 아시며 동시에 그 "진심"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도 아십니다.  내 고통이 무서워 그 진심을 언제 가치없는 것인양  부인할지도 아십니다. 내 진심은 그렇게 거짓으로 어느순간 변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은 그리도 여전히  '사랑합니다....'입니다.  당신만이 나의 진심을 아십니다...

병들지 않는 사람이 없기에 아무도 대적할 수 없어서 --사실은 미운데, 저러면 안되는 데 하고 화가 나는데--내 속에서 늘 싸웁니다. 이것도 나의 무기력함에 대한 교묘한 합리화이면 어쩌나하고 갈등합니다.

또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맘 깊이 상처를 안고 병을 앓고 살아가는 것을 보는 아픔이 너무 큽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내가 해주고 싶어도 그 도움이 그들에게는 무의미하기에.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 중 가장 힘겨운 것은, 아니 가장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연약함과 별볼일 없음과 절망을 안고도 등에 지고도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의 길을 또 무겁게 무겁게 발자국을 떼며 조금씩 가는 것이지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갖는 것은,  내 속에 없는 그 무엇을 믿음으로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각오가 없이는 난 언제 또 쉽사리 넘어져 버릴지 모릅니다.  난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 각오 없이는 하루에도 열번도 더 분통을 터뜨리거나 나를 미워하거나 남을 비난할지 모릅니다.  항상 환자복을 입고, 때로는 병든 몸위에 가장 깨끗한 의사의  가운을 입고 나와 남을 대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면하는 사람들은 모두 연약한 환자들( 나처럼) 이니까요.  사랑스럽지 않기에 오히려 더 큰 사랑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이며 우리모두이니까요.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들 어딘가 아파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해본 사람은  상대가 앓고 있는 병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용어를 좀 쓰자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 더 "제도화된" "학습된" 용어를 쓰자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아,  이 놀라운 두렵고 떨리는 엄청난 말을 사람들은 구구단 외듯이, 군번 외듯이 외워서  나의 존재이류라 소리높여 외치지요.--는 것이 무엇인가 아주 쬐끔이라도 매일 생각하며 산다면 )  매일아니라도 어쩌다라도 진지히 생각하며 산다면 내가 병들어 있으며 치유받아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바로 병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사랑할 수 없고 의로울 수 없는 우리를 그것이 가능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것 아닌가요. 이 병든 영혼으로는 사랑은 불가능하니까요.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랑을 받는 일도 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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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바빠서 그 후 그의 편지에 답장도 못하고, 소식을 주고 받은 지도 한참 되었다.

언젠가 내가 인천으로 특강을 가면서 버스 멀미로 거의 몸을 가눌 수 없었던 적이 있었지.
그때 용케 강의는 끝내고 HS에게 도움을 청했었다.  다시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갈 수 없을 듯해서.
그리고 그의 차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중간 중간,  하다못해 고속도로에서도 갓길에 세우고 토할 것도 없는

빈 속에서 초록색 물을 토하며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가 했던 말, 교수님도 정말 힘드시고...... 가족들도 힘드시겠어요.....  그 말이 내게 비수처럼 꽂혔던 기억도 난다.

 

그는 지금 미국에서 목사님으로 목회하고 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미 예전에 그랬었듯이............



You needed me, Sung by Anne Murray

내가 눈물 흘렸을 때 당신이 닦아 주었고

내가 혼동 중에 방황할 때 당신은 내 의심을 씻어주었습니다.

내 영혼을 팔았지만 당신이 내게 되찾아 주었고

날 높이 올려 존귀함 주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내가 필요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다시 홀로 설 힘을 주었고

내 혼자 힘으로 세상과 맞설 수 있게 해주었고

날 높이 올려 존중해 주니 너무 높아 영원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필요했어요,
당신은 내가 필요했어요.

바로 당신이라는 게 믿을 수가 없어요, 그게 사실이라는 게,

나 당신이 필요했는데 당신이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난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내가 왜 바보같이 떠나겠어요?

마침내 진정으로 나를 염려해주는 그런 사람 찾았는데.


내가 추울 때 당신은 내 손 잡아주었고

길을 잃었을 때 날 집으로 데려다 주었고

막다른 길목에 몰렸을 때 내게 희망을 주었으며

나의 거짓도 진실로 다시 바꾸어 주었습니다

날 친구라고 부르기까지 하면서.


당신은 내가 필요했던 거에요.
당신은 내가 필요했던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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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가사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힘들고 지치고 넘어지고 외로운 것은 나였는데... 그런 내게 "당신이"  다가와 손 내밀어주었는데, 내가 그렇게 절실히 바라고 필요로 하던  "당신"이었는데...  오히려 "당신이 나를 필요로 했었다(You needed me)"고 노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린 말하죠. '난 당신없인 안돼.'
그거 아세요?  부모님도 나 없인 안되는 것을요.  밤낮 속썩이고 실망만 시키는 연약한 내가 부모님을 필요로 하는 줄 알았는데 뭐든 다 하실 수 있는 어른인 부모님이 바로 날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심바에게 고백하던 아버지의 고백을 기억하세요?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하지 못할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동물의 왕인 아버지 사자가 '오늘 두려워서 죽는 줄 알았다.'고  "사랑하는 널 잃을까봐 두려웠다고" 고백하는 것을..  )

하나님도 우리 없인 안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아십니까? '난 네가 필요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이때 피곤, 곤비는 영어로 sick and tired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쳐서 진력이 난다는 뜻입니다. 실망하고 포기하고 싶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내게 피곤해하지 않으십니다.  나도 자꾸 나에게 실망하고 지쳐가는데 그래서 자존감도 용기도 희망도 다 사그라져 그저 누워버리고 싶은데  주님은 아니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보다도 더 잘 이미 "나의 불가능성과 나의 나약함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대신 내 안에서 그의 일 (착한일, 선한일, 나를 주님 닮아가게 키우는 구원의 완성-빌립보서)을 시작하시고 이루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자여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나의 가는 길이 이렇게 캄캄하고, 외롭고, 고단하고 힘들어도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도 나는 어제의 나와 하나도 달라진 거 없는 것처럼  또 실패를 반복하는데 주님은 나를 붙들고 계시다 합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어디 곁에 있다는 말인가 하고 대뜸 반발심이 일지 않습니까?

시편 23편에서의 고백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쉴만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며...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여호와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이라.

가만히 보십시오.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에 그가 탄탄대로로 걸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쉴 만한 물가로 인도받는 그 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valley of the shadow of death)"입니다.  그런데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죽을 것 같이 힘든 그늘진 골짜기에서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바로 "害(해)" 이기 때문이며 그 해로 부터 보호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해란 손해보고 세상에서 실패하고 외면당하는 것이 아니라 Evil, 즉 악을 말합니다.  내가 악으로 부터 보호받는 것 이것이 "부족함이 없는 삶"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달할 쉴만한 물가,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 비밀을 깨달아 안 사람들은 인생길에서 피곤하고 곤비하고 넘어지고 자빠지되 여호와의 지팡이(인도)와 막대기(보호)로 인해 독수리처럼 날개치는 존재인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자 같고 이름없는 존재이며 외톨이인 우리가 가진 "그럼에도"의 권리와 승리와 힘의 "비밀"입니다.  세상과 나의 삶과 나를 새롭게 보는 눈입니다.

나의 귀한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강하다는 게 무엇인줄 아느냐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이것이 바로 그 친구가 말한 웃을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신음소리까지 다 듣고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힘이되는 지요.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나보다 더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침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다. (이사야 40)

네가 얼마나 사랑스런 데. 네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우선 일기에 네가 가장 힘든 일에 대해서 맘 놓고 다 털어놓아봐.  널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봐.  물론 보내지 않는 너만 보는 편지야.  네 맘속에 있는 분노와 미움과 그사람의 맘에 들지 않는 점, 그리고 네게 상처주는 말과 행동, 사건들을 모두 다 털어놓고 그 사람에게 화를 내.  욕을 해도 되고 네 손이 가는 대로 맘 껏 다 털어놓으렴.  분노는 부끄러운게 아니야.  네 화가 다 풀릴때까지 2-3일 아니면 4일간 편지를 써봐.  편지를 쓰고는 버려도 돼.  이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울고 불고 화를 내면서 종이에다 다 쏟아내.  이건 절대 보내는 편지나 남에게 보여주는 글이 아니니까 맘껏 욕도 하고 화를 내.
그리고 선생님에게 다시 편지 주렴.  다른 글쓰기 방법을 또 가르쳐줄게.우선 네가 널 사랑해주어야해. 알았지? 
세상은 그 누구도 남에게 관심이 없단다.  내가 날 아끼고 위로해주고 용기주고 다독거려주어야 해.  내가 스스로에게 떳떳하다면 당당하렴.  네가 스스로를 사랑해야 남들앞에서도 네가 당당할 수 있어.  네가 스스로 주눅이 들어 있으면 남들이 널 사랑해도 네가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자꾸 오해하게 돼.  널 무시한다고 고약한 착각을 하기도 하고.  거울을 보고 스스로에게 늘 말을 하렴.  넌 예쁘고 멋진 아이야.  넌 다 잘할 수 있어 하고.  그리고 주님께 늘 기도해.  지혜를 달라고.  네가 못하는 일도 네 안의 주님의 지혜가 널 인도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직장에서 네 친구를 한 사람 사귀어두려고 해봐.  누군가 대화할 수 있는 사람.  물론 쉽지 않아.  하지만 너무 많은 기대는 하지말고 같이 점심먹고 가끔 퇴근하고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친구.  물론 네 맘을 털어놓는 친구가 되는 걸 기대할 수 없을 수도 있어.  그 친구의 맘을 들어주는 일부터 시작해봐.  남에게 널 알아주길 기대하기는 거의 불가능해.  모두 자신들이 아프고 힘들어 할 뿐 남에게는 관심이 없어. 그리고는 자신들만 사랑받고 인정받고 위로받고 싶어하는 게 인간들이야.  슬프게도....  그러니까 직장에선 그렇게 많은 기대를 하면 안 돼.   일하는 곳이니까.   네 친구가 되게 하려면 노력해야 해. 

 

좀 힘들겠지만 용기가 나면 그 사람에게 웃어봐.  그건 일종의 "역할극"이라고 생각해.  네가 그 사회에서 해야하는 너의 "역할"을 하는 거야. 무대 위에서 하듯이. 화장을 하듯이. 그리고 가끔 그 사람 책상 위에 쵸콜렛이라도 하나 가져다 놓아봐.  이건 참 힘드는 일이지만 이상하게 어떨 땐 내가 그런 행동을 (의지적으로, 용기내어) 하고 나면 그런 맘이 따라올  때도 있어.   (이건 지금 당장은 어려워.  보내지 않는 편지쓰기를 한 후 혹시 용기가 나면 해봐.)  어쩌면  의외로 그 사람 네게 상처준 일이 있는 지 조차 기억도 못할거야.  즉 네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격이 그런 거야.  기억해. 인간들이 다 그런거야.누구나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어떤 상처를 주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기억도 못한단다.  때로는 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줄때가 있단다. 누구나 그래.  인간은 그렇게 불완전하고 나약하단다. 그냥 각자 몸에 자신들만의 냄새를 가지고 살 듯 자신들의 뾰죽한 가시, 울퉁불퉁한 혹... 들을 품고 살면서 서로 스쳐갈 때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못된 냄새를 풍겨 불쾌하게 하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내게서도 나는 모르는 냄새가 날수도 있고 뽀죽한 가시가 남을 긇을 수도 있는데 각자는 자신의 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거야.   그러면서 서로 부딛치고 상처입고 차차 뽀죽한 부분들이 닳고 .... 그렇게 성숙해 가는 거야. 때로 내가 냄새가 있다는 걸 깨닫는 사람들은 열심히 몸을 씻고(인격을 가다듬고, 인내하는 법과 용서하는 법과 자제하는 법을 배우고) 때로 향수를 뿌려 타인을 배려하기도 하고 감추고 남앞에 나가기도 해.  그러니까 겁먹지마.  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사람 성격이 그런거야.   가시나무도 있고 향기로운 꽃도 있고 그런 숲이 우리가 사는 곳이니까.      이곳에 있는 학생들의 글(치료모임이야기)을 읽어봐.  그애들도 첨엔 많이 힘들어 했었어.꼭 내 말대로 그렇게 해봐. 그리고 작은 일기장이나 노트 하나 준비해서 가지고 다니면서 직장에서도 그런 일 있으면 화장실 같은 데 가거나 점심시간에 카페 같은 데 가서 맘껏 분노를 터뜨리는 글을 써봐.   억울함. 분노, 미움은 간직하면 점점 널 힘들게 해.  그런 것들이 우리 속에 혹으로, 가시로, 향기롭지 못한 냄새로 남을 수도 있는 거야.  그 그 가시가 나 자신을 병들게 하는 거야. 남을 상처주기 이전에 우선 나부터 망가지게 한단다.  그러니까 분노, 슬픔, 억울함, 원한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그때 그때 그 에너지들을 분출해버려야해.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말이야.)   털어버려야 해. 알았지?선생님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게 사는게 아니란다.  우선 육체적으로도 늘 힘들어.  어제 밤에도 내내 앓고 결국엔 두통이 너무 심해서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어 새벽에 일어났다가 네 글을 보았네....  그래도 또 학교 갈 준비해야 하지.  사는게 다 그런거야.  서글프게도.  시간이 없어서 급히 썼어.  언제라도 힘들면  편지해.오늘도 힘내. 널 위해 기도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