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그리고 가장 슬픈 풍경이다. 이것은 앞 페이지의 것과 같은 풍경이지만 여러분에게 잘 보여주기 위해 다시 한 번 그린 것이다. 어린 왕자가 지상에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진 곳이 여기다.

이 그림을 자세히 잘 보아 두었다가 여러분이 언젠가 아프리카 사막을 여행할 때, 이와 똑같은 풍경을 꼭 알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혹시 그리로 지나가게 되거든 발걸음을 서두르지 말고 잠깐 별빛 밑에서 기다려 보길 간곡히 부탁한다! 그때 만일 한 어린아이가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웃으면, 그리고 그의 머리칼이 금빛이면, 그리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으리라. 그러면 내게 친절을 베풀어 주길! 내가 이처럼 마냥 슬퍼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고 그애가 돌아왔다고 빨리 편지를 보내 주기를.   

 

- 생떽쥐베리 [어린왕자]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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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가 너무나 소중해서
누군가가 너무나 감동을 주어서

나도 모르게 울어본 적이 있나요?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서

어린 왕자가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다

 

MP 072607


 

There is a speciall providence in the fall of a sparrow.
If it be now, 'tis not to come; if it be not to come, it will
be now; if it be not now, yet it will come. The readiness is all.
(Hamlet V-ii)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이죠.
와야 할 때가 지금이라면 앞으로 오지 않을 것이요,
오지 않을 것이면 지금이 그 때인 것이요. 때가 지금이 아니라해도
언젠가 때가 오기는 할 것이니,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늘 준비가 되어있는 일이지요.
(『햄릿』 5막2장)

선생님과 할머니

2010. 3. 12 금.   

어제 언니가 내가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닌 초저녁에 집으로 전화를 한 모양이다. 

"낮에도 전화 안 받고.... "
"언니 낮엔 당연히 없지. 학교에 가 있지."

"아. 어디 다녀온다고 했잖아. 중국출장." 

"응. 그건 엊그제 돌아 왔지. 그래서 어제 밤에 통화도 했잖아. " 

"아. 그랬나. 내가 정신이 이렇게 없어." 

언니가 무료해서 낮에도 전화 했구나.....

"저녁 먹었어?" 언니가 묻는다.

"지금 먹으려고..". 막 식사를 끝냈지만 거짓말을 한다.

고속도로로 출퇴근 하는 학교에서 종일 복잡한 일로 지쳐 돌아온 밤, 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만 주면 되는데,  간단한 대답 몇 마디만 해주어도 되는데 그것도 버거워 혼자 있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래? 그럼 어서 식사해. 밤낮 이렇게 한 밤중에 저녁을 먹으니 어떻게 해. "

"늘 그런데 뭐. 언니 이따가 또 잠 안 오면 전화해. 나는 2시에 자니까 걱정 말고."

"알았어."


이기적이고 못된 동생. 그냥 좀 들어주지.  어제 밤에 통화했다는 말은 뭐하러 해서 언니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는지. 전화를 끊고 후회를 한다. 
전날 밤 통화 때는 목소리도 멀쩡하고 기억도 또렷하더니 하루 사이 갑자기 다시 기억을 못하는 언니. 죽음의 고비를 2-3번 넘기고 겨우 중환자실에서 살아남은 언니. 하나뿐인 폐에 삽관을 하다가 구멍이 나서 잠시 산소공급이 끊긴 사이 두뇌 어딘가 잘못된 것일까? 그 깔끔하고 총기 있던 언니가 3달 후 퇴원하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 애기같이 변했다. 그리고는 머리에 새집을 짓고 하루 종일 집에서만 갇혀 지내고 있다. 온갖 병이 스쳐지나간 몸으로 한 쪽 뿐인 폐로 힘겹게 살았는데 그렇게 질곡 많은 생의 마지막을 어린아이로 돌아가 새장에 갇힌 어린 새처럼 살 것이다.

 

어제 언니와 통화한 일을 쓰다보니, 언니 때문인지 얼마전부터 떠오르던 기억이 있다. 

 

청주에서 서울로 막 올라와 전학 온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셨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 손영자선생님. 지금은 어디계시는지, 생존해계시기는 하시는지.... 오빠가 동생들을 다 학교 보내고 돌봐준다는 것에 감동하시면서 내 손을 잡고 교회도 가시고(우리집은 불교집안이었는데)  늘 자신의 집에 데려가 주셨다. 선생님은 이혼인지 사별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홀로 반신이 마비된 뼈만 남은 70이 넘은 친정어머니와 숙명여고 다니는 딸과 함께 3식구가 살고 계셨다. 할머니는 나를 유별나게 예뻐 하셨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얼마나 외로우면 그러셨을까 싶다. 나는 툭하면 선생님 댁에 가서 할머니 방에서 말동무 해드리면서 그 집에 있는 위인전기며 책들을 읽었다. 아이들의 보드라운 뺨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듯이 노인들의 뻣뻣한 살가죽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할머니 방은 중풍병자의 방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늘 깔끔하게 참빗으로 머리를 넘겨 쪽을 찌고 하얀 모시옷이나 무명옷을 입고 계셨지만 방에서는 알 수 없는 고통스런 냄새가 났다. 그래서 모두 ‘학교 다녀 왔어요’ 하고 문 열고 한 마디 하고는 나가버리는 쓸쓸한 방에 홀로 남겨진 할머니. 하루 종일 빈 방에서 식구들의 발소리만 기다리셨을 텐데. 그런 할머니의 냄새나는 방에 나는 방학 때면 종종 찾아가 한 나절 곁에 앉아서 배 깔고 누워 책을 보았던 거 같다. 할머니는 그게 좋아서 나만 가면 마비되어 어눌한 입으로 우우 거리시고 기억자로 곱은 손으로 손짓을 하시고는 동그랗게 끝을 말아서 고리처럼 굽혀놓은 파리채 손잡이로 곁에 놓인 작은 장을 열고는 그 속에 있는 곶감이나 다른 먹을 것을 꺼내 주셨다.

 

하루는 선생님이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또 일하는 식모가 그만 두겠다고 한 것이다. 선생님은 친정어머니 방문 앞, 마당에서 어린 나에게 호소를 했다. “다 할머니 때문이야. 똥오줌 받기 싫어서 아무도 붙어 있으려 하질 않아.” 매일 같이 출퇴근을 해야 하고, 할머니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고, 일할 사람은 오고 싶지 않다고 하고...... 선생님도 나름대로 삶의 서러움과 어려움이 있을 텐데 남편도 없이 혼자서 감당해야하는 일들이 좀 많았을까. 울음이라도 터질 듯 폭발하기 직전의 표정으로 분노인지 절망인지 원망인지 설움인지 모른 심정을 초등학생 철부지 제자에게 호소하는 선생님과 방에서 그 말을 듣고 계실  할머니 사이에서 어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그 기억은 지금도 내 뇌리에 깊이 박혀있어서 가끔 선명히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선생님이 나를 늘 집에 데려가신 이유는 나를 이뻐하셔서이기도 하지만 빈집에 할머니 혼자 둘 수 없어서 나를 할머니 곁에 두고 외출하셨던 것 같다.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참 어리숙하고 남에게 잘 이용당하고 어떤 땐 그 속이 다 보여도 그냥 속아주는 아주 바보 같은 사람이니까.  (영악스럽게, 아니면 자신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서,  자신을 지킬 줄 모르는 바보?)   내가 다음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그 학교 후배가 된 선생님의 딸은 얼굴에 주근깨가 약간 있었고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약간 통통하고 키가 컸던 언니로 기억이 난다. 내게도 잘해주었지만 살갑지는 않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할머니 때문에 귀찮아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던 언니였었다. 할머니는 그 모든 것을 다 빤히 눈치채고 계셨을 텐데 얼마나 외롭고 서럽고 또 구차했을까? 당신이 원해서 그런 병이 드신 것도 아닌데. 

 

인간의 생명이란 무엇일까? 몸과 마음은 죽은 자와 방불한데 숨 쉬고 살아있는 수치심과 그럼에도 살고 싶은 맹목적인 욕망은 무엇이며, 아니 그럼에도 죽을 수도 없는 무기력은 또 무엇일까.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져 홀로 미지의 세계로 사라지는 공포일까? 

 

잉여인간... 자신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맘대로 할 수 없어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존재, 그리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한 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  

 

이상하게 얼마전부터 그 할머니가 기억난다. 철없이 그냥 찾아와 곁에서 동화책을 읽고 집어주는 곶감을 먹어드린 것뿐인 데, 그런 나를 기다리고 예뻐하시던 정에 주린 할머니의 외로움이, 그리고 철부지 초등학생 제자 앞에서 울음이 터질듯 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면서 삶의 무게를 호소하시던 선생님의 고달픈 삶과 외로움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갑자기 그 선생님은 (어떤 의미로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길 바라셨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들 모두 속에서 나 자신의 여러 편린들을 본다.

 

2010.3.12. 금. 흐림. 바람이 심하다.

 

(언니는 하늘나라로 갔다. 코로나 때문에 뉴욕에서 한국으로 가보지도 못한 때 어린아이처럼 뼈만 남은 몸으로 홀로 떠나셨다.

이런 글이라도 남아서 언니의 기일인 엊그제 다시 미안한 마음을 기억한다.)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귀가 - 도종환]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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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지 못하면 내일도 없다.
내일은 언제나 오늘 다음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평생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중에, 나중에, .....라고 하면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목표를 위해서는 현재를 인내하고 참아야한다는 것이 너무 깊이 학습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목표지향적이고 성과지향적인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은 늘 내일만 바라보고 현재를 건너뛰라는 듯했다.

내일 쓰려고 오늘 쓰지 않은 편지는 영원히 쓰지 못할 것이다.
오늘을 살지 못하면, 나는 그저 영원한 귀가길에 있을 뿐 집에는 영영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비가 오면 (이상희)

  비가 오면
  온몸을 흔드는 나무가 있고
  아, 아, 소리치는 나무가 있고

  이파리마다 빗방울을 퉁기는 나무가 있고
  다른 나무가 퉁긴 빗방울에
  비로소 젖는 나무가 있고

  비가 오면
  매처럼 맞는 나무가 있고
  죄를 씻는 나무가 있고

  그저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
  사람이 있고.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득료애정통고.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실료애정통고,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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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의 다듬어져 알려진 5월이라는 글보다 이 처음 글이 더 좋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하지만 피천득 선생님이 "지금 가고 있다"고 말한 5월, 

그 5월의 의미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읽을 때마다 의미가 깊어진다.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를 다 닦아내는 박명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

ㅡㅡ
3월 7일 오늘은 기형도가 돌연 우리 곁을 떠난 날입니다(1989).  참 아까운 사람...

기형도시인이 내 나이만큼 되었다면 그는 어떤 시를 썼을까...
문득 문득 이 사람의 시를 읽을 때면 혼자 물어봅니다.
나이가 들면  저 끝모를 절망과 아픔은 어떤 언어로 변할까...

참, 아까운 사람.

내 안의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김용택- 해지는 들녘에서  일부 ]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2008. 마로니에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