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 - 나태주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그리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 김용오

우연찮은 만남에서
별스런 담소도 나눈 건 아니었건만

헤어지고 나니 별 하나 손에 있었다

대화라곤 짧은 몇 마디였지만
어눌한 말을 들어주어서일까

맵시나지 않은 몸짓을 미소로 받아 주어서일까

아버지와 같은 사람 어머니와 같은 사람

어깨에 기대어 비밀을 털어놓고
눈물을 흘려도 좋을 친구와 같은 사람

허물 모두를 껴안아 줄 것만 같은
그리움을 주는 그런 사람이 있다.

picture by bhlee

 

<물속의 사막- 기형도>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10222006

 

(c)sgm2013

 

[밤편지 - 김남조]

 

편지를 쓰게 해다오.

이날의 할말을 마치고

늙도록 거르지 않는

독백의 연습도 마친다음

날마다 한 구절씩

깊은 밤에 편지를 쓰게 해다오

밤기도에 이슬 내리는 적멸을,

촛불에 풀리는 나직이 습한 樂曲들을

겨울 枕上(침상)에 적시이게 해다오

새벽을 낳으면서 죽어가는 밤들을

가슴저려 가슴저려 사랑하게 해다오

 

세월이 깊을수록

삶의 달갑고 절실함도 더해

 젊어선 가슴으로 소리내고

이 시절 골수에서 말하게 되는 걸

고쳐 못 쓸 유언처럼

기록하게 해다오 

 

날마다 사랑함은

날마다 죽는 일임을

이 또한 적어 두게 해다오

눈오는 날엔 눈밭에 섞여

바람 부는 날엔 바람결에 실려

땅 끝까지 돌아서 오는

영혼의 밤 외출도

후련히 털어놓게 해다오

 

어느 날 밤은

나의 편지도 끝 날이 되겠거니

가장 먼 별 하나의 빛남으로

종지부를 찍게 해다오

 

(c)Photos by bhlee 102419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 이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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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지키는 것은 약속을 한 사람의 몫인데
오히려 그 약속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은 기다리는 사람의 일이 되었다. 

어쩌면 약속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데...

비가 오면 편지를 쓰겠다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혹여 비 오는 날에 어쩌다 문득 그 약속을 기억할까?

 

시월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 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旅程)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 한 탓이리.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 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황동규, “시월(十月)” 중에서>

 

<사는 기쁨-황동규 >

 

1

​오디오 둘러메고 한강 남북으로 이사 다니며

개나 고양이 곁에 두지 않고

칠십대 중반까지 과히 외롭지 않게 살았으니

그간 소홀했던 옛 음악이나 몰아 들으며

결리는 허리엔 파스 붙이고

수박씨처럼 붉은 외로움 속에 박혀 살자.

라고 마음먹고

남은 삶을 달랠 수는 없을까?

2

사는 건물을 바꾸지 않고는 바꿀 수 없는 바램이 있다.

40년 가까이 아파트만 몇 차례 옮겨 다니며

'나의 집'으로 가는 징검다리거니 생각했다.

마지막 디딤돌에서 발을 떼면

마련한 집의 담을 헐고

마당 절반엔 꽃을 심자.

야생화 밟지 마라 표지 세워논 현충원 산책길엔 도통 없는

노루귀 돌단풍 은방울꽃

그래, 몰운대(沒雲臺)에서 눈 크게 뜨고 만난 은방울꽃

카잔차키스 묘소에 열심히 살고 있던 부겐벨리아

루비보다 더 예쁜 루비들을 키우는 노박덩굴을 심자

겨자씨 비유의 어머니 겨자도 찾아 심자.

나머지 반은 심지 않아도 제물에 이사 와 자리 잡는 풀과

민박 왔다 눌러 앉는 이름 모를 꽃들에게 내주자.

개미와 메뚜기 그리고 호기심 많은 새들이 들르고 벌레들도 섞여 살겠지.

그래, 느낌 서로 주고 받을 마당이 있고

귀 힘 아주 빠지기 전 오디오 볼륨 제대로 올려줄 집이 주어진다면!

오크통에 30년, 책상 구석에 30년, 세상 잊고 산 위스키 앞 세워

와인과 막걸리와 칵테일을 모아 친구들을 불러

먼저 가버린 자들도 번호 살아있다면 문자를 보내

파티를 열자, 바램은 아직 유효하다

3

유효할까?

파티 다음 날, 종일 속도 마하 0으로 움직이는 텅 빈 맛이

몸에 버틸 힘을 줄까?

가을 들어 처음으로 은행잎이 비행 연습을 시작하는 저녁

동향한 창밖으로

건너편 언덕 아파트의 모든 창들이 일제히 황금향으로 피어난다.

대가(代價)없이 자신을 태우는 황금의 절창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는

한 해 가운데 이 한때가 가장 마음에 든다.

'가장'이라는 말에는 지금까지라는 뜻이 숨어있고,

다음은 텅 빔?

조금 전 건물 입구에서

시들고 있는 꽃에게 안부를 물었다.

코끝에 맴돌자마자 사라지는 향기로

꽃은 답했다. 텅 빔?

바램의 속내가 가짐인가 텅 빔인가?

햇빛 스러지며 한 자락씩 황금에서 어둠으로 바뀌는 창들이

차례로 물음을 던진다.

4

그간 군(郡)에서 주차장 집어 넣고

매점과 화장실 내고 길 펴고 넓혀

오르내리는 맛을 한껏 줄인 몰운대.

발걸음 멈추게 하던 제비꽃 달개비들 사라지고,

숨었다 들키던 은방울꽃 자취 감추고

미끄러워 마음 잡아주던 바윗길은 보이지 않고

올라보면, 시야 가득 차 오는 비닐하우스들

뜬구름도 뜨지 않고

아, '몰운대'에서 풀려난 몰운대!

그 언저리에 집 한 칸 마련해

강원도에서 차를 몰다 덜 살고 싶을 때면 슬그머니 들러

낮에는 대에 올라 다른 아무 데도 눈 주지 않고

밤에는 모깃불 피워 놓고 모기 침 쿡쿡 맞으며

답답함에서 풀려나리라던 긴 긴 꿈에서

이젠 새삼 놓여 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는가?

영영 놓여나지 못하게 되었는가?

5

바위 틈에 발톱 박고 서 있는 나무 다섯 그루

바로 뒤에 야트막한 초막

비어있다.

그 뒤로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말없이 넓게 펼쳐진 물,

물 건너 그림자 하나 없이 커다랗고 깨끗한 산,

원나라 화가 예찬(倪瓚)의 한없이 맑고 적적한 산수는

은둔 신호만 켜지면 모든 것 놔두고 들어가

신선인 듯 가볍게 거닐고 싶었던 곳.

오늘 그의 그림 다시 들여다보니

사람들도 짐승들도 그냥 들여다보기만 했을 뿐

멧새 하나 날지 않는다

들어오려면 그림자도 놔두고 오라?

읽던 책 그대로 놔두고 휴대폰은 둔 데 잊어버리고

백주(白酒)한 병 치고 들어가

물가에 뵈지 않게 숨겨논 배를 풀어 천천히 노를 저을까?

건너편을 겨냥했으나 산이 통째로 너무도 크고 맑아

무심결에 조금 더 무심해져서

느낌과 꿈을 부려놓고 그냥 떠돌까?

바람이 인다. 갑자기 구름떼들이 이리저리 몰려 다니고

여기저기 물기둥들이 솟아 상체를 흔들고

얼음처럼 투명한 해가 불타며 하늘 한가운데로 굴러 나온다.

바위에 발톱 박은 나무들이 불길처럼 너울대자

부리 날카론 새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몰려 든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예찬이여, 아픔과 그리움을 부려놓는 게 신선의 길이라면

그 길에 한참 못 미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간간이 들리는 곳에서 말을 더듬는다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 공격적이기 쉽습니다. 말투나 행동에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어서(배려 받지 못하고 자랐으므로) 나쁜 의도가 없는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곤 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전혀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 스스로 상처를 입습니다. “왜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까?”하며 이유를 모른 채 아파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인식하지 못하다보니, 자신 때문에 불편해하는 사람에게 또다시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 선인장 꽃처럼 여린 살을 가졌습니다. 다만 살아남기 위해서 가시를 달고 사는 것이지요. 그것이 자신을 보호할 유일한 생존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시로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줄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내 마음을 만지다』 중에서 

투병 중 2 - 이봉희

 

나는 갑자기 하이얀 침대에 누워

아프고 싶습니다.

맘 놓고 죄스럼 없이

아프고 싶습니다.

하이얀 침대에서 아픈 것은

당당한 일입니다.

 

나는 지금 막, 당장,

하이얀 침대에 쓰러져

실컷 아프고 싶습니다.

하얀 병원 밖 알록달록한 세상에서

하루하루 감쪽같이 앓는 건

참 많이 쓸쓸한 일입니다.

 

끝도 없는 병원 밖

긴 긴 담 길을 걷노라면 가끔

울컥 눈물이 납니다.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경계선에서

감쪽같이 앓지 않는 건

참 많이 사무치게 쓸쓸한 일입니다.

 

04 MP

<맨드라미에게 부침 - 권대웅>

언제나 지쳐서 돌아오면 가을이었다.
세상은,
여름 내내 나를 물에 빠뜨리다가
그냥 아무 정거장에나 툭 던져놓고
저 혼자 훌쩍 떠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나를 보고 빨갛게 웃던 맨드라미
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단지 붉은 잇몸 미소만으로도 다 안다는
그 침묵의 그늘 아래
며칠쯤 푹 잠들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일어서는 길에
빈혈이 일어날 만큼 파란 하늘은 너무 멀리 있고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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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빈혈이 일어날 만큼 멀리 있는 파란 하늘 말고
기대면 체온이 전해져 오는 빨간 맨드라미 같은 가슴을 가진
그런 친구 평생 기다려왔다.
평생 그런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일까?
그건 환상일 뿐일까....

너무 바빠서 외롭다 말하니까 누군가 웃었다.
복에 겨운 소리라고....
너무 바빠서 나 자신에게서 유기되고 방치된 나는
어느 정류장에 툭! 짐짝처럼 던져져 있을까?

울컥
각혈하듯 깊은 속에서 치미는 뜨거운 고백 한마디...
오늘도 그 말을 발설해선 안 되는 비밀처럼 주어 삼킨다.
나는.....

 

091609 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