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 이봉희 교수

국내유일의 미국공인문학치료전문가(CPT)/공인저널치료전문가(CJT)/담심리사

 

 

이 연필 속에 말들이 웅크리고 숨어있다

한번도 쓰인 적 없는, 표현된 적 없는,

생각한 적 없는 말들이

숨어있다.

어둠, 그 어둠 속에 깨어서

우리를 듣고 있다

---------------------------------

 

초대의 글: http://journaltherapy.org/3888

 

*이번 글쓰기문학치료워크숍은 서울이 아니고 특별히 천안에서 모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모임 수칙은 아래 댓글을 반드시 확인해주십시오.

 

1. 일시:  6/12~7/3일 (4주 8회) 매주 금요일  1회) 오전 11시~12:30/  2회)12:45~ 2:15  

   <인텐시브이므로 주 2회 연속 진행함>

2. 장소:  천안  구체적 장소는 추후참여자에게 개별적으로 연락함.

3. 준비물줄쳐지지 않은 A4용지 크기의 공책. 혹은 스케치북+ 12가지 사인펜이나 유성펜  

4. 신청:  <5명 내외로 선착순마감>

    이메일  journaltherapy@hanmail.net로 연락처와 함께 신청

   또는 블로그에 비밀댓글로도 신청가능함(단, 블로그에는 전화번호/이메일주소/성함을 남기시되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반드시 비밀댓글로 해주십시오. 참고로 비밀댓글은 pc로 가능하므로 되도록 이메일로 보내주십시오.) 

5. 참고도서: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교수의 문학치유 카페]-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선정

         [분노치유] 이봉희 역 /학지사

         페니베이커의 [글쓰기치료] 이봉희역/학지사    

6. 참여관련 자세한 문의journaltherapy@hanmail.net 

7. 워크숍에 대한 참여자 인터뷰/후기의 한 예

   http://journaltherapy.org/2958  

   저서 [내 마음을 만지다]에 대한 리뷰는 http://www.journaltherapy.org/2779 -를 참고 

  이봉희교수 프로필은 공지사항 -연구소 소개를 참고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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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글쓰기문학치료 연구소는 K. 애덤스의 저널치료센터(CJT-Center for Journal Therapy)의 한국지소(CJT-Korea)로 애덤스의 [저널치료기법]을 교수하거나 치료모임을 할 수 있는 합법적 자격을 가진 국내 유일한 연구소입니다. 

 

이 워크숍은 글쓰기치료/저널치료/문학치료에 대한 강의나 수업 또는 교육프로그램이 아닌 글쓰기문학치료모임입니다. 

모여서 차를 나누고 다과를 나누면서 좋은 시나 책을 함께 읽고 감상과 의견을 나누고, 글을 쓰고또는 쓴 글을 모아 문집을 만드는 것 같은 독서모임이나 독서코칭, 또는 교제를 위한 모임과는 다른 진지한 치료모임입니다. (따라서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이 블로그에는 광고목적으로 워크숍 사진을 공개/활용하지 않습니다.)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의 워크숍:

국내유일의 미국 공인문학치료전문가(CPT)/공인저널치료전문가(CJT)이며 상담심리사(한국상담심리학회)인 이봉희 교수의 글쓰기문학치료 워크숍은 시치료와 저널테라피(그림저널 포함)를 활용한 치료모임입니다.  수 십 년간의 교수생활, 지난 13년간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다양한 연령층의 성인남녀, 고령자 어르신들, 그리고 언론전문인클럽, 의대학생, 가정의학과교수, 교사, 학부모, 장애뇌변병요양환자, 암환자 및 가족, 교정시설, 위기의 부부, 폭력의 희생자, 트라우마 생존자, 학교폭력,  등 수많은 분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문학치료워크숍과 수많은 개인 상담, 여러 연수와 학회 특강 경력을 가진 치료전문가가 주관하는 전문적 글쓰기문학치료모임입니다.  

*치료모임 프로그램은 이곳에 공개하지 않습니다.

 

 

* "이야기 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 이성복 

Journal Therapy | 2020.05.23 06:21 | PERMALINK | EDIT/DEL | REPLY
워크숍은 안전과 위생수칙을 지켜며 소수로 모임을 갖습니다.
- 참여자들은 워크숍 시간 동안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셔야하며 안전거리를 유지합니다.
- 소독제를 준비하겠지만 각자 개인용 소독제를 지참하주시고 물/음료수도 혹은 휴식시간에 필요한 간단한 간식도 각자 개인이 지참합니다.
- 필기구 등을 절대 빌리거나 함께 사용하시면 안됩니다.
-마스크 미 착용시 그날은 모임에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Journal Therapy | 2020.05.25 11:19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강쥐맘님......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연락처가 들어있는 공개 댓글을 삭제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비밀글로 연락처(전화번호와 성함)를 올려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이메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위 공지에 말씀드린대로 비밀글은 pc로만 가능한 점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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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조각>- 나희덕

내 어머니가 그랬듯이 아이의 손을 잡고 오늘은 내가 밤길을 간다. 아이는 내가 세상의 어둠으로부터 저를 지켜줄 유일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손을 꼭 잡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굉장한 걸 발견한 듯 손을 끌어당기며 외친다.
“엄마! 저기 보석이 있어요.”
아이는 골목 입구의 폐차장 쪽을 가리키며 그리로 달려가려고 한다. 그곳엔 외등의 불빛을 받아 무언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부서진 차체에서 흩어져나온 유리조각일 것이다. 낮에 그 앞을 지나오면서 아이들이 뛰어놀다 밟으면 위험할 텐데 하고 생각했었다.
“성주야, 빛난다고 다 보석은 아니란다. 저건 깨진 유리조각일 뿐이야. 잘못 만지면 다쳐.”
나의 말에도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니에요. 보석이란 말이에요.”
아이와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이럴 떄 나의 어머니라면...... 어머니는 아마도 나에게 “그래, 보석이 맞아. 보석이 참 예쁘구나.”하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반짝이는 게 보석이라고 믿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어느 대낮 빛을 잃고 흙먼지 속에 뒹굴고 있는 유리조각의 초라함에 스스로 실망하기 전까지는, 또는 빛나는 그것에 손을 베이기 전까지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밤에 개울을 건넌 적이 있다. 지금 내 아이가 그러듯이 어린 나도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았으리라. 그때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하나님 목소리를 들어봤어요?”
“그럼, 들었구말구.”
“어떤 목소린데요?”
“마치 저 물소리들을 합쳐놓은 것 같지.”
나는 물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거렸고. 또렷하지는 않지만 들릴 듯 말 듯 한 어떤 소리가 내 마음에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불빛에 반짝이는 물비늘의 모습은 낮에 볼 때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어머니 무릎 아래서 키워온 신앙은 이제 거의 잃어버렸다. 어린 시절 주머니에 불룩하던 유리구슬들이 하나 둘 어디론가 굴러가 버린 것처럼, 신앙뿐 아니라 세상을 향한 맑은 눈도 잃어버렸다. 그래도 물가에 앉을 때면 그 많은 물소리 속에서 어떤 음성이 섞여 들리는 것 같아 귀기울이곤 하는 것은 어릴 때 어머니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아이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빛나는 게 다 보석은 아니라고. 어머니를 떠올리는 순간 나는 내 속의 빛 하나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버렸음을 느꼈다. 유리는 유리일 뿐이라는  현실에 대한 씁쓸한 깨달음만이 그 빛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음을 말이다.
유리조각이 불빛에 반짝이는 것은 그것이 더 이상 한 장의 유리일 수 없도록 깨어졌기 때문이다. 깨어진 유리의 날, 그 속에는 제 몸을 잃어버린 슬픔이 간직되어 있다. 그리고 세상엔 정작 눈부신 보석보다는 제 슬픔의 빛을 빌려 살아가는 유리조각 같은 존재가 더 많을 것이다. 그 슬픔들이 밤마다 되살아나 저렇게 반짝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린시절 우리의 눈에 비친 세상은 왜 그리도 아름다웠는지, 모든 게 반짝이고 그래서 모든 게 보석처럼 마음에 와 박혔는지...... 그때의 빛은 잃어버렸지만 또 다른 슬픔의 빛 하나를 받아들이며 나는 오늘 밤길을 간다. 한 어린 영혼의 손을 잡고.

----

세상엔 정작 눈부신 보석보다는 제 슬픔의 빛을 빌려 살아가는 유리조각 같은 존재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 2008.05.23 22:41 | PERMALINK | EDIT/DEL | REPLY
비밀댓글입니다
bhlee | 2008.05.25 08:31 | PERMALINK | EDIT/DEL
음... 후유증이 은근히... 보내준 거 잘 받았어. 고마워ㅠㅠ
H이 차차 좋아질거야. 많이 기도하자.
논문 잘 마무리하고 심사도 잘 받기를. Sj도 논문이 마무리하고 있다고 편지왔던데. 다들 열정적인 모습, 자랑스럽다.
우리 Hy이 위해서도 늘 함께 기억해주고 기도하자. 방학하면 한번 뭉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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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Mangione - Feels So Good with vocals by Don Potter

Album '70 Miles Young' 2003 ( Here only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https://youtu.be/jo1CjBBqQPs

 

Chuck Mangione의 가슴에 파고드는 트럼펫 연주에 Don Potter가 노래를 하는 이 곡을 참 좋아했었다.

Don Potter의 첫 음성이 내 마음을 사로 잡았었지.

어스름이 내려오는 저녁 시간과 럼펫 소리는 참 잘 어울린다..........

오랜만에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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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 gogh-souvenir de m..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희덕]


-----
여러겹의 마음을 가졌기에 그 나무가 까닭없이 불편하였습니까. 
멀리로 멀리로 지나쳐가며 혼자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 스스로에게 그 나무 탓을 했나봅니다..
"내가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다 말하기 불편하였을까......

그러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여 나무를 멀리서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멀리서 멀리서 보면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

그동안 눈이 부셔서 직시하기 불편했을까요? 
 
그리고 그 여려겹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합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아서라고.........

하나의 꽃빛을 피우기엔 너무 많은 소망과 열정이 있어

여러겹 마음을 피우고 있는 그 나무가 참 외로웠겠구나.......... 깨달았다 합니다.

그러다 또 생각합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아 외로웠을 것이지만 그 나무는 어쩌면 외로운 줄로 몰랐을 거라고.

그렇게 고고하게 홀로 제 열정을 따라 여러 꽃빛을 피우고 있는 그 나무는 외로운 줄도 몰랐을 거라고.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서 또 알았다 합니다. 

그 오랜 시간 당신은 그 나무를 떠나지도 못하고 멀리서 멀리서 계속 지켜보았군요.

 

외롭게 피워올린 꽃잎들 다 흩어져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에야

그 나무 이제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려겹 꽃잎같은 마음 다 흩날아가버리고 맨 몸으로 선 그 시간에야

비로소 당신은 그 그늘에 앉았습니다.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진 나무라 생각하던 그 나무 아래, 

당신은 그제야 다가가 앉았습니다.
심심한 얼굴을 한 나무 곁에.............


알 수 없네요.
그 나무가 심심한 얼굴을 하고 나서야 당신은 편하게 그에게 다가간 것인지
다가가 보니 외로운 줄도 몰랐을 듯 여려겹 마음을 가진 그도 어쩌면 참 심심한 것을 알았다는 것인지....
심심하고 외로워서 더 여려겹 꽃빛을 피워올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인지.

 

그리고 당신은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이제....... 저녁이 오는 소리를.
이제 어둠이 머지않아 내려올 소리를........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다 하십니다.

그 몇겹의 색깔을 읽어 보셨습니까.
까닭없이 부담스러워 멀리서 멀리서 떠나지도 못하고 지켜만 본 당신,

당신도 그 나무처럼 외로웠나요..........

어둠이 내려오는 그 시간에야 알게 된 당신의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저녁 당신이 찾아와 앉았던 그 나무, 여려겹 꽃잎 다 흩어보낸 그 나무를  생각할 때마다

수천의 꽃잎이 비명도 없이 떨어져 날아와 내 마음에 쌓입니다.

바람도 불어주지 않는데

바람도 불어주지 않는데.

패랭이꽃 | 2007.02.28 23:24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이 세상의 꽃이 아니라 천상의 꽃같아요. 아름다운 색감과 그 보다 더 아름다운 하늘 그보다 더 아름다운 대지...오늘 날씨와 같은 아름다움과 느낌과 감동이 있는 그림이 너무나 너무나 좋네요.
솜사탕 | 2007.03.01 12:57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이 따스한 봄날에 어디론가 나를 데려가고 싶다.
복숭아 꽃도 좋고 파릇파릇 새싹들도 좋다.
땅 속을 삐집고 살짝 나온 얼굴들을 쳐다보며 늦기 전에 인사를 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생각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 사건들, 일들을 다 해방시켜주고 싶다.
오랜 시간동안 내 안에 같혀서 답답해 하는 이들과 일들을 보내어 주자.
이 봄날에 그들을 자유롭게 하자.
아니, 나를 자유롭게 하자.
복숭아나무 | 2007.03.01 16:28 | PERMALINK | EDIT/DEL | REPLY
요즘 읽은 시집에 있는 시였는데...이 시를 읽으며 내가 복숭아 나무로 여겨지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 그림과 함께 이 시를 다시 읽어보니 문득 나를 멀리서 보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복숭아나무의 꽃빛을 보진 못했지만 그런 아름다운 빛깔이 나의 어딘가에도 숨어있을까? 나는 꽃빛이 숨어있지 않은 부분만 들여다보며 난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었고 남들도 나를 그렇게 보리라 여겼었다. 내가 생각하는 남의 눈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나의 눈이 아닌 그저 멀리서 보는 눈으로 나는 어떤 모습일까...어떤 빛깔을 가지고 있으며 얼마난 그늘을 드리워 줄 수 있을까...내 스스로 나의 꽃빛을 가리고 있던건 아닐까...남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지않고 그 그늘로 내 자신의 꽃빛을 가리우고 있었던건 아닐까...
NAPTKOREA | 2007.03.02 22:4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아, 모두들 역시 그림을 좋아하세요. 시와 그림을 같이 올리는 경우 대개 그림에 반응을 보이시네요. 앞으로 참고가 될 거 같아요^^
자귀나무 | 2017.11.24 11:37 | PERMALINK | EDIT/DEL | REPLY
복숭아 나무와
관련된 옛 추억들이 떠 오르네요.
500평 남짓의 작은 복숭아 농원이었지만,
복사꽃이 전해주는 빛, 색, 향의 향연은
지금도 아른 거립니다~
Journal Therapy | 2017.11.26 17:50 신고 | PERMALINK | EDIT/DEL
과일은 무심히 즐기지만 과일 나무와 꽃이 전하는 빛, 색, 향연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분들은 많지 않을 텐데 자귀나무님은 참 소중한 추억이 있으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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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시나요?

 

How aren’t you?

 

내가 좋아하는 K. Rosen의 글 중에 나온 인사말이다.  How are you? 잘 지내시나요라는 인사를 바꾼 이 인사가 어쩌면 내가 받고 싶은 인사, 내가 하고 싶은 인사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요즘 문득문득 이 인사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이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라는 “영혼 없는” 인사를 할 때마다 매번 진지하게 대답을 하려고 끙끙댄 적이 많았었다. 아프다고 하면 안될거 같고, 좋다고 하려니 거잣말이라 불편하고... 그러다 스스로 바보가 되거나 대놓고 웃음거리가 된 적도 많았다. '그냥 한 말에 뭐 그리 진지하게 답하세요~' 하면서 그들은 옆사람과 같이 날 보고 깔깔 웃었었지. 어던 목사 교수는 내게 '고지식하신거 같아요' 라고도 했다. 

바로 좀 전에 만났던 사람에게 또 다시 몇 번씩 다시 받는 같은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phatic communication, 즉 의미 없이 그냥 사교적으로 던지는 의례적인 언어라고 한다. 이건 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도 답없이 동일한 질문을 한다. 질문이 아니므로 물론 누구도 이 인사에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마치 아주 날씨가 힘겨운 날에도 굿모닝 하듯이.

 

그런데 요즘은 “잘 지내시죠?” “잘 지내지?” “건강조심하세요!”와 같은 이 의례적이고 평범한 인사가 온 마음과 진실이 담긴 가장 소중한 마음의 표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의미부재인 언어의 빈 공간에 ‘진심’을 담을 때 언어만 살아나는게 아니라 문득 상대와 나 사이도 의례적인 관계에서 ‘만남’이라는 의미있는 관계로 바뀌는 것을 희미하게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팀 켈러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아무도 스스로 선택해서 풀무불 같은 시련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시기를 거치지 않았으면 결코 깨닫지 못할 깨우침 얻는다.. 이것이 또한 고난 속에 숨은 선물이다. 고난은 우리의 연약함을 일깨워주고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를 깨닫게 해준다. 인간의 본성은 강하고 독립적이길 원한다. 하지만 시련속에서는 그런 자아가 발붙일 여지가 없다. 이런 자아를 벗어버리면 다른 존재와 진정한 관계로 통하는 문이 열린다. 무엇보다 우리와 참으로 교재하기 원하시는 하느님과...

 

소중한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안부인사를 건네는 일이 일상이 된 요즘 문득 나 자신에게도 진심으로 물어본다.


잘 지내니? 정말 너 잘 지내는 거야??

 

아니, 그렇게 묻고 계신 안일한 일상에서는 들리지 않는 질문에 귀를 기울여 깨닫기를 기도한다.

중언부언 하는 참 대화 - 들어주는- 가 부재한 의례적 기도가 이제야 말로 참으로 인격적 대화와 교제가 되는 기도가 되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한다.


ㅡㅡㅡㅡ
하나님은 우리가 즐거운 때는 속삭임으로 말씀하시지만 고통속에서는 고함소리를 내신다. 고통은 귀머거리 세상을 깨우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 C. S. 루이스

| 2020.10.11 17:17 | PERMALINK | EDIT/DEL | REPLY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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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론 나를 좋아하면서도
만나면 짐짓 모른체하던
어느 옛 친구를 닮았네

꽃을 피우기 위해선
쌀쌀한 냉랭함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얄밉도록 오래 부는
눈매 고운 꽃샘바람

나는 갑자기
아프고 싶다

[이해인]
송아지 | 2007.03.15 11:06 | PERMALINK | EDIT/DEL | REPLY
나의 여러가지 얼굴 나의 여러가지 마음 그래도 나 누가 뭐래도 나 스스로 생각해도 나 어쩔 수 없는 나 그래 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나 그래서 아프지만 아픈대로 살아가는 나
후기: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 속엔 끊임없는 생각들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서로 싸우고 누르고 미안해하고 그러면서 살아간다. 옳은 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 내 것이니까
| 2007.03.21 23:53 | PERMALINK | EDIT/DEL | REPLY
비밀댓글입니다
솜사탕 | 2007.03.22 20:20 | PERMALINK | EDIT/DEL | REPLY
꽃이 피는 것을 샘내는 바람이라서 꽃샘바람이라 하던가.
그래서 꽃샘바람을 견디이내고 피는 꽃들이 더 예뻐보이는 것은 그 시샘을 잘 견더내서인가.
세상을 살면서 견디고 참고 모른 척하면서 지나치기도 하지만 종종 밉다고, 싫다고, 힘들다고, 그러지 말아달라고, 아프다고 말하고 싶다.
어제는 아이들이 옷 때문에 둘이 심하게 싸웠다.
하루 종일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에 들어섰건만, 주고 받는 말들이 너무 듣기가 힘들어서 타이르다가 안되길래 억지로 말리기 보다는 둘이 시간을 가지도록 하고 잠시 밖으로 나왔다. 집 근처에서 야끼우동 한 그릇 사먹고 쓸쓸하고 힘들어하는 아픈 나를 달래기 위해 휴대폰도 끄놓고 '복면달호'라는 영화를 혼자 보고 집에 들어갔다.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는 것이 너무 부담이 되어 복면을 쓰고 노래를 부르던 주인공은 편견을 버리고 마지막에 가면을 벗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진심을 담아 노래를 부르게 되고 또한 자신이 좋아했던 락음악에 그 마음과 노래를 담아 더욱 히트를 치게 된다.
'락이나 토릇트 모두가 하트와 마음을 담아 부른다'는 재미있는 말을 주고 받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나의 인생을 이래야만 된다. 적어도 나이가 이 정도면 이렇게 해야된다. 나에게 이렇게 대해주어야 한다. 라는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마음을 이해하고 '그럴 수도 있지'
안이숙여사의 '그럴 수도 있지'라는 책이 생각한다.
| 2013.04.11 09:33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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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 말씀 절반은
맑으신 웃음
그 웃음의 절반은
하느님 거 같으셨다
임을 모르고 내가 살았더면
아무 하늘도 안보였으리

그리움이란
내 한몸
물감이 적시는 병
그 한번 번갯불이 스쳐간 후로
커다란 가슴에
나는
죽도록 머리 기대고 산다.

임을 안 첫 계절은
노래에서 오고
그래 만날 시만 쓰더니
그 다음 또 한철은
기도에서 오고
그래 만날 손씻는 마음

어제와 오늘은
말도 잠자고
눈 가득히
귀 가득히
빛만 받고 있다. (김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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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의 언어로 말한다

- 소통의 한계

 

딸아이가 오래전 외국에서 외롭게 공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나는 도심의 늑대 같아. 혼자서 인간들 속에 살고 있는…….”

오늘 말로 하는 대화는 딱 한 마디 했어. 내 목소리를 잊을 지경이야.”

우리는 종종 대화를 포기하고 차라리 외로움을 택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소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고장 난 피아노 건반처럼 제 음을 전달할 수 없거나 서로 불협화음을 내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이 상대에게 낯선 나라의 말처럼 소통되지 않는다는 좌절 때문입니다. 누군가와의 소통이 더없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통 수단은 대부분 언어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참 불완전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그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각자 타인 앞에서 해석하고 번역해야 하는 하나의 언어로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자신만의 사전으로 상대의 말을 해석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언어 이상의 의사소통 수단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습니다.

 

나는 조용조용 설명한다. 당신은

고함치는 말로 듣는다. 당신은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한다. 나는

오래된 상처가 들추어짐을 느낀다.

 ....... 

나는 비둘기다. 당신은

매로 보인다. 당신은

올리브 가지를 내민다. 나는

가시를 느낀다.

R,  맥거프, <당신과 나> 중에서

 

상대의 말과 그 속내는 똑같을까? 

우리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전화 통화를 하고, 또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그게 짧은 글이든 목소리든 언어는 그 사람을 여지없이 드러내준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너무 수식어가 화려해서 읽으면서 살얼음을 딛듯 아슬아슬한 경우도 있습니다. 대체 이 사람은 언제부터 나를 얼마나 안다고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걸까? 한두 번 보았다고 마치 나를 다 알기라도 한 듯 온갖 아름다운 말로 나를 포장하는데, 왜 그러는 걸까? 미사여구로 상대를 잔뜩 포장해놓고는 내 마음과 똑같았어요. 마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시는 것 같았어요라는 말로 상대에게 되돌려주기도 합니다. 그런 진심이 의심스런 말을 들을 때면 빌려 입은 옷을 입고 무대에 선 것처럼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혼자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혼자 토라져서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맘대로 투사해 상대를 영웅처럼 바라보다가 결국 실망했다며 평가절하하고 떠나가 버립니다. 때로는 자신의 일방적인 감정을 소화하지도 못한 채 분풀이를 하는 언어도 있습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이모티콘을 사용하고, 말끝마다 웃음으로 포장해도 자신의 날 감정은 그 포장 속에서도 진한 냄새를 풍겨옵니다.

 

그래서일까요. 한 사람의 말투는 그 사람의 인격뿐 아니라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꾸며도 그 뒤의 이기적인 계산을, 아무리 친절히 말해도 그 뒤의 적대감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웃으며 말해도 그 뒤의 두려움을,  아무리 당당하게 말해도 그 뒤의 패배감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잔인하게 말해도 그 뒤의 사랑은,  아무리 무뚝뚝하게 말해도 그 뒤의 관심은 묻어둘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숨겨둔 사랑과 관심보다는 당장 내 뇌리에 깊숙이 파고드는 뾰족한 언어의 칼에 얼마나 아파하는지요. 하지만 그 안의 사랑과 관심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상처 입고 되돌아가기에 너무 늦어버립니다.

 

나도 내가 하는 말을 모른다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언어 습관을 객관적으로 안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는 곧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안다는 자체가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내가 다르다는 사실은 종종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이 괴리는 자신의 사진을 볼 때의 첫 느낌, 즉 낯설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잘 나타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남들에게는 사진 속의 내가 그들이 보는 실제의 나와 달라 보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시각의 괴리만이 아닙니다.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처음으로 방송극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내 목소리가 어찌나 낯설던지 어린 마음에 그냥 밖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는 창문 밖에서 간이 오그라드는 심정으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던 때였습니다. 엄마가 곁에 없어도 아이가 엄마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나는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녹음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녹음이 끝난 후 들어본 목소리는 너무나 끔찍하고 낯선 목소리여서 무척이나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 낯설음이 주는 당혹감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남편과 아이는 그게 내 목소리라고 인정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타인이 알고 있는 나와 내가 알고 있는 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진실한 나의 모습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과 목소리, 성격 그리고 습관화된 나의 말투들이 타인이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소통의 한계 앞에서 한 번 더 자신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동명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내 책상 위의 천사로 잘 알려진 작가 쟈넷 프레임(Janet Frame)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이야기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글로 써서 찢어버리지 않고 친구에게 전달한 이야기다. 들어주어서 고맙다고, 내 마음의 귀에 분별력 있는 열쇠 구멍을 내주어서 고맙다고 그 보상으로 해준 이야기다.” 그렇기에 시인이며 작가인 로오드(Audre Lorde)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상처 받아 멍들고 오해받을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언어화하고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말처럼 대화를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고장 난 피아노 건반처럼 화음을 낼 수 없는 존재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고 오해를 불러오더라도 언어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소통입니다. -중략-

 

상대의 말에 자주 상처 받지는 않나요? 이런 언어의 한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소통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 친구와 했던 약속이 기억납니다. 우리가 혹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면 그건 진심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임을 서로 굳게 믿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로 인해 무척 맘이 상한 오늘, 나는 신뢰를 갖기로 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그 사람 자신도 모르는 언어습관이나 언어의 한계 때문에 생긴 것이지, 그 사람의 본심이거나 의도는 아니라고 믿으며, 그가 준 상처와 언어의 불완전함을 포용하기로 합니다. 언어가 나아갈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해결책은 대화의 단절이 아니라 바로 상대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C)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중에서

 

 

 

https://www.journaltherapy.org/3632- "여러개의 언어를 알았으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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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이봉희2007- 새국어교육 2007

 

저널치료: 새로운 일기쓰기

李 奉 姬*

 

 

<차례>

 

1. 서론

2. 저널치료란 무엇인가

3. 효과적인 저널쓰기를 위한 제안

4. 저널도구와 치료사례들

5. 문학과 저널치료의 만남

6. 결론

 

 

<국문초록>

 

독자나 평가자를 염두에 둔 좋은 글을 쓰는 것과 별도로 저널(일기)처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감정표현 글쓰기의 중요성은 그것이 정서적, 정신적 문제를 치료해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국어교육의 문외한인 필자의 본 논문은 상한 감정의 치유와 문제해결, 자아성찰을 위한 자신만의 사적인 글쓰기인 저널(journal)이란 무엇인가를 알리고 그 치료적 효능과 글쓰기기법을 몇 가지 구체적 사례들과 함께 소개함으로써 저널이 한국의 글쓰기교육과 인성교육에 미력하나마 하나의 도전이 되고자 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주제어: 저널치료, 일기(다이어리), [보내지 않는 편지]쓰기, 감정표현 글쓰기, 문학치료

 

 

1. 서론

 

인간은 누구나 자기표현 욕구를 가지고 있다. 글쓰기는 그림그리기와 동작(무용) 같은 다른 표현예술처럼 본능적 자기완성의 활동이며 자신만의 즐거움과 자아표현을 위한 행위이다. 글쓰기를 위한 교육은 국어교육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굳이 대학입시를 위한 논술 교육이 아니라 해도 어려서부터의 글쓰기 교육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교육이다. 글쓰기교육의 목표를 좋은 글을 만들어 내는데 있다고 한다면 좋은 글이란 글쓴이의 감정과 느낌, 생각이나 사고 등을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잘 전달한 글이다”(김경훤, 7). 이 말은 모든 글은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게 된다는 말과 다름없다. 글쓰기(글짓기)쓴 사람과 그것을 읽어 줄 사람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이 사실이다”(이오덕, 19). 따라서 성인들은 물론이고 어린 학생들도 글을 쓸 때는 글씨, 어법, 문장의 오류 등을 검열하는 내적, 외적 검열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사적이고 솔직한 감정은 일상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서도 통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일기쓰기는 어떨까? 아마 사적인 감정을 가장 자유롭고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감정표현 글쓰기(expressive writing)는 일기쓰기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에서조차 글을 쓰는 사람은 가상의 독자를 의식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글을 쓰는 자신이 스스로 독자가 된다. 특히 어려서부터 일기를 숙제로 제출하고 검사를 받는 데 익숙한 학생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일기에서 조차 마음껏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털어놓지 못한다. 학생 뿐 아니라 직장인들을 위한 글쓰기 전문서적과 지침서들이 범람하는 요즈음, 필자가 독자나 평가자를 염두에 둔 좋은 글을 쓰는 것과 별도로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감정표현 글쓰기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려는 것은 그것이 정서적, 정신적 문제를 치료해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감정표현과 반성적 글쓰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글쓰기인 저널이 치료적 힘을 갖는 것은 우선 글쓰기가 해결되지 못한 채 저장된 감정의 처리 과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생각에 대해 명료하게 밝히는 저널쓰기는 장기간 지속되는 심한 정신적 충격을 치료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사람들이 겪는 문제 중 일부는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고 처리하지 않은 채 어딘가에 저장해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해내듯 모든 생각과 감정을 글로 털어 놓으면회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으며 모든 감정을 털어놓으며 정리하는 과정과 함께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전체 상황을 되돌아보고 생각하는 성찰 과정이 병행되어야 한다.

감정표현글쓰기와 그 치료효과에 관해서 어느 나라보다 가장 먼저 그리고 전문적으로 연구되고 보급, 응용되고 있는 곳이 미국이다. 1920년대부터 시(문학)치료를 연구하여 문학의 실용적 가치와 문학에 내재된 치료로서의 힘을 다시 부활시켜 수용자/독자에게 돌려준 미국에서는 1960년대부터는 일기(diary)쓰기를 저널(journal)이라는 글쓰기치료법으로 개발하여 문학치료의 일부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T. 라이너의 경우는 저널이라는 말 대신 새로운 일기(New Diary)’라는 용어로 기존의 일기(다이어리)와 치료를 위한 새로운 방식의 일기쓰기를 구분하고 있기도 하다.

본 눈문에서는 저널치료의 정의, 역사와 효용을 간단히 알아보고 현재 미국에서 저널치료의 선구자요 가장 대중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 저널치료의 권위자이며 동시에 공인 문학치료사인 캐슬린 애덤스의 저널치료기법에 주로 근거하여 효과적인 저널쓰기를 위한 8가지 제안을 제시한다. 또한 구체적 글쓰기 기법인 저널도구는 어떤 것인지 간단히 알아보고, 대표적 저널도구인 [보내지 않는 편지]를 통한 저널치료의 사례와 문학을 매개로 하여 문학치료에 글쓰기를 적극 도입한 경우의 사례를 간략히 소개함으로 저널쓰기의 적용과 치료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과 성과위주의 교육환경 속에서 감정적 억압과 과다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잃어가는 학생들을 위해, 점점 확산하고 있는 학교폭력의 해결과 예방을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근간이 되는 인성교육을 위해, 글쓰기교육과 학생상담 등에 저널치료가 유용하게 활용되며 이와 관련된 연구가 활성화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중략 -

 

<Abstract>

 

Journal Therapy: an alternative way of writing education in a task-oriented environment

 

Bong-hee Lee

Korea Nazarene University

 

 

Writing education in the task-oriented country like Korea is mainly focused on how to write "good and well organized" paragraphs with no awkward or unclear expressions. However, the focus of this paper is on the importance of expressive writing, especially on the journal as a new challenge to writing education because of its therapeutic effect. It is high time that we accepted this challenge for holistic general education to our younger generation when the violence in elementary and high schools, suicidal tendencies, depression are more and more widely spread among young students. The therapeutic effect of expressive emotions writing is proven by The Freedom Writers Diary(1999), a real story of a high school teacher, who has changed her students' lives through their journals.

Journal Therapy is the act of writing down thoughts and feelings to sort through problems and come to deeper understandings of oneself or the issues in one's life. Unlike traditional diary writing, where daily events and happenings are recorded from an exterior point of view, journal therapy focuses on the writer's internal experiences, reactions, and perceptions. Through this act writing and literally "reading" of his or her own mind, the journal writer can perceive experiences more clearly and thus feels a relief from tension. Moreover, there is scientific evidence that the relief that comes from writing things down is more than just psychological. Dr. Pennebaker's studies indicate that the release offered by writing has a direct impact on the body's capacity to withstand stress and fight off infection and disease.

This paper surveys the development and the benefits of journal therapy. It also summarizes suggestions for satisfying journal writing and K. Adams' "journal tools"(writing techniques) offered as a way to match a specific life issue with a specific writing device. It finally chooses some of the journal techniques as specific examples to heal the relationship problems with testimonies of the therapeutic process in some of the members of the writer's Journal/Poetry Therapy Group and in the Literature class.

 

 

이봉희: bhlee@kornu.ac.kr

http://journaltherapy.org

나사렛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미국공인문학치료사, 공인저널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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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무감각한 뿌리들을 흔들어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듯이 지켜주었지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어주고
희미한 생명을 마른 뿌리로 먹여주었지

 

-T. S.   엘리엇, <황무지>중에서 / bhlee역

(from "The Burial of the Dead," The Waste Land- T. S. Eliot)

 

 

-------------

지난주 올 들어 첫 꽃을 보았습니다. 캠퍼스 길가에 노란 수선화 두 송이가 수줍은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곁에는 어느새 푸르러진 풀 섶 속에 작은 제비꽃이 숨어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보아주는 이 있든 없든 말없이 성실히 피어있는 작은 꽃과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나도  '살아서 살아있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슴을 흔드는 4월을 시인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합니다. 이 시는 4월이면 누구나 한번쯤 중얼거려보는 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의 첫 구절입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생명수 같은 봄비가 무감각하던 겨울뿌리를 흔들어 망각의 잠에서 깨워주는데 왜 잔인한 달인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현대인을 메마른 불모의 대지 황무지에 사는 살아있는 죽은 자(the living dead)”라고 말합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것은 참된 사랑에 접근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인식하고 감동할 수 있는 감각들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의식의 무감각함을 흔들어 일깨우면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봄이 때로는 진실의 태양빛처럼 너무 부시고 아려서 그만 눈을 감고 싶어집니다. 4월이 잔인하다든 것은 이렇게 살아있으나 죽은 자처럼(little life) 잠든 채 살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의식의 죽음, 그 비극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들에게 생명과 의식을 일깨우는 4월은 잔인하기만 합니다. 우리 모두 엘리엇의 또 다른 시 구절처럼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어 낼 수 없는(Human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존재들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4월입니다. 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어김없이 푸르러 오는 생명의 계절, 가끔 가던 길 멈추고 물어봅니다. "나는 살기 위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c)2004이봉희, 덴버 중앙일보 연재 문학칼럼 중에서]

| 2007.04.05 05:57 | PERMALINK | EDIT/DEL | REPLY
비밀댓글입니다
Journal Therapy | 2010.12.01 13:09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푸른바다: 이제 4월이군요. 새로운 4월에도 여전히 엘리엇의 황무지를 읇어야 하는게 아직 우리네 현실인 모양입니다. 누가 샀는지는 모르지만 어쨋든 집에 굴러다녔던 삼중당 문고판 '엘리어트 시집'을 통해 그의 시들은 일찌감치 접했었지요. 어릴 때는 좋은 시라고들 하니 읽기는 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감을 잡기가 참 어려웠죠. 하지만 이해는 못해도 멋진 시라는 생각은 하곤 했습니다. 보들레르, 엘리엇... 근대인의 심상을 예리하게 표현한 시인들이지요. 근대에 접어들어 물질적으론 조금더 풍요로와 졌지만 정교해진 논리는 갈수록 공허해지고 그 바탕이라 할 깊은 감수성은 메말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근대인들의 마음의 상태를 예리하게 느끼고 표현한 사람들이 이들 시인이 아닐까 생각해 보곤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시에서 '황무지'를 풍요롭게 할 자양분을 찾기는 힘들다는게 좀 아쉽습니다. 그러한 한계를 견디다 못해 보들레르는 실어증으로 도피하고 엘리엇은 과거로의 회귀를 동경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네 일상에서 신화를 다시 발견하고자 한 제임스 조이스가 대안일까 아니면 건강한 생명의 힘을 재발견하고자 한 D.H. 로렌스가 대안일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하지만 서구보다는 동양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요즈음 저의 가장 주된 생각입니다.
님은 영문학자이신가 봅니다. 직접 번역을 해 주셨네요. 직접 소개해 주시는 좋은 시들 앞으로도 자주 감상하고 또 배워보고 싶네요. 2008-04-01

RE 2008-04-02 10:44:44 맞아요. 무슨 말인지 몰라도 가슴에 남아 메아리치는 구절들이 있어요. 그러다 어느날 그 의미가 새벽안개 걷히듯 깨달아 지는 때가 있기도 하고요. "좋은 시는 내가 자라면 함께 자란다"는 말이 맞나봐요.
아시겠지만 푸른바다님이 좋아하시는 보들레르의 구절이 황무지에서도 나오지요..."위선자 독자여, 나의 동류, 내 형제여!"
대안.... 참 날카로운 지적이세요.
어느날 그 한계에서 아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태그 2008-04-03 22:44:30 역시 직접 번역하신 거라, 일역 참조해서 번역한 것보다 훠얼 낫습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 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생각나요.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breeding, mixing 하는 부분이 운명 교향곡의 맨 처음 주제의 빰빰빰 빠아아암
의 그 뒷 부분 같이 느껴져서요.


RE 2008-04-04 07:23:58 에궁. 감사합니다.
베토벤... 그러네요^^ --ng의 반복되는 리듬 때문일까요?
엘리엇이 낭송한 거 들어보면 참 멋져요.

추억과 욕망을 뒤섞는다 mixing memory and desire 는 말이 늘 저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합니다. 엘리엇의 또 다른 시 구절이 생각나기도 하구요. "Memory, you have the key."라는. 추억은 과거이고 욕망은 미래일 텐데 과거와 미래에서 자유로운 영원한 현재를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것일까요? 어쩌면 정말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과거를 떨쳐내느라, 미래를 쫓아가느라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건 아닌가 가끔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어느새 농활도 다녀오시고 그곳에서 학생들과 벌써 끈끈한 관계가 되셨나 봐요. 어디서나 누군가에게 힘과 희망이 되어주시는 모습 멋지십니다.

태그 2008-04-09 00:29:44 흐흐, 농활이 아니라 모꼬지였어요. 학생 중 한명이 그러더군요, 신임, 아니셨어요? 흐흐.


썸 2009-04-11 00:05:14 해마다 4월이면 생각나는 음악과 시가 있네요..
마침 오늘 모꼬지 모임에서 구두한켤레님께서 april을 듣고 싶다 말씀하시는데..
번역하여 소개해주신 이 시가 떠올라 대문으로 가져갑니다.
^^

RE 2009-04-11 23:15:27 아, 썸님. 4월이 가슴터질듯 문을 열어주네요.
답글있다는 메모가 남겨져서 와봤어요^^
구두한켤레님 잘 계시죠?
4월이 듣고 싶다....참 한켤레님다운 말씀이세요.

생각나서 오랜만에 오늘밤엔 엘리엇이 낭송하는 '4월을 들어'봐야겠어요. ^^
Journal Therapy | 2017.04.06 04:11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Nam Sibyllam quidem Cumis ego ipse oculis meis
vidi in ampulla pendere, et cum illi pueri dicerent:
'Sibyulla pe theleis'; respondebat illa: aponein thelo"
 
             For Ezra Pound, il miglior fabbro
 

For I, by my own eyes, saw Sibylla of Cumis hanging in a jar
and those children when they said: "Sibylla what do you want?";
and she reponded: "I want to die"
 
For Ezra Pound, the better craftman(poet)
 
내가 직접 내 두 눈으로 보았네.
쿠마지방의 시빌라가 유리병속에 매달려있는 것을.
그때 어떤 아이들이 그녀를 찾아와서 물어보길
"시빌라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라고 묻자 그녀는 대답했네
"나는 죽음을 원해...“
               -더 훌륭한 시인인 에즈라 파운드를 위해-   
신다혜 | 2017.05.16 15:29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저도 4월이면, 스무살 그 해 선생님과의 수업에서 읽던 이 시를 기억해요.. 그 교실, 함께 한 사람들, 선생님이, 엘리엇의 시 보다 힘이 쎕니다. 어김없이 4월이면 시는 그때 그 시간을 배달해 주네요!
Journal Therapy | 2017.05.18 14:08 신고 | PERMALINK | EDIT/DEL
앗, 다혜!!! 정말 오랜만이에요.
아가들은 예쁘게 잘 크고 있죠?
보고 싶네요.
| 2020.04.07 23:26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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