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 도종환]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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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지 못하면 내일도 없다.
내일은 언제나 오늘 다음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평생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중에, 나중에, .....라고 하면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목표를 위해서는 현재를 인내하고 참아야한다는 것이 너무 깊이 학습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목표지향적이고 성과지향적인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은 늘 내일만 바라보고 현재를 건너뛰라는 듯했다.

내일 쓰려고 오늘 쓰지 않은 편지는 영원히 쓰지 못할 것이다.
오늘을 살지 못하면, 나는 그저 영원한 귀가길에 있을 뿐 집에는 영영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비가 오면 (이상희)

  비가 오면
  온몸을 흔드는 나무가 있고
  아, 아, 소리치는 나무가 있고

  이파리마다 빗방울을 퉁기는 나무가 있고
  다른 나무가 퉁긴 빗방울에
  비로소 젖는 나무가 있고

  비가 오면
  매처럼 맞는 나무가 있고
  죄를 씻는 나무가 있고

  그저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
  사람이 있고.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득료애정통고.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실료애정통고,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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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의 다듬어져 알려진 5월이라는 글보다 이 처음 글이 더 좋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하지만 피천득 선생님이 "지금 가고 있다"고 말한 5월, 

그 5월의 의미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읽을 때마다 의미가 깊어진다.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를 다 닦아내는 박명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

ㅡㅡ
3월 7일 오늘은 기형도가 돌연 우리 곁을 떠난 날입니다(1989).  참 아까운 사람...

기형도시인이 내 나이만큼 되었다면 그는 어떤 시를 썼을까...
문득 문득 이 사람의 시를 읽을 때면 혼자 물어봅니다.
나이가 들면  저 끝모를 절망과 아픔은 어떤 언어로 변할까...

참, 아까운 사람.

 

해지는 들길에서 - 김용택

 

사랑의 온기가 더욱더 그리워지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먼 들 끝으로 해가

눈부시게 가고

산그늘도 묻히면

길가의 풀꽃처럼 떠오르는

그대 얼굴이

어둠을 하얗게 가릅니다

​​

내 안의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한 계절의 모퉁이에

그대 다정하게 서 계시어

춥지 않아도 되니

이 가을은 얼마나 근사한지요​

 

지금 이대로 이 길을

한없이 걷고 싶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앞에

하얀 풀꽃

한송이로 서고 싶어요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2008. 마로니에북스  

살아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 일상의 재발견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요? 그것도 매순간을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살아 있는 건 멋진 거야!>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난 지금도 여기 이렇게 살아 있지.

아마도 계속 살아갈 거야.

내 사랑, 아가씨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겠지만

난 살려고 태어난 것 아니겠어.

 

외치는 내 소리 당신이 듣게 될지도 모르고

우는 내 모습 당신이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 죽는 걸 보게 되는 일은, 사랑하는 아가씨,

앞으로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살아 있는 건 멋진 거야!

포도주처럼 멋진 거야!

살아 있는 건 멋진 거야!

- 랭스턴 휴즈, 살아 있는 건 멋진 거야!Life is Fine중에서

 

시의 주인공(시적 화자)은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생명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죽음만은 생각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일종의 다짐 같은 것이지요. 간혹 울어버릴 수도 있고 소리 지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결코 죽지는 않겠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Life is fine”이라고. 나는 Life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모두들 번역한 대로 인생으로 번역하고 보니 시인의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생이 고통스러워서 죽음까지 생각한 사람이, 살면서 다시 울어버릴 수도 있고 소리 지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갑자기 인생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포도주와 같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는 삶이 고달플지라도  살아 있는 건 멋진 거야(좋은 거야)”라고 생명의 소중함을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꼭 극적이어야 멋진 인생일까?

 

미국의 극작가 손턴 와일더(Thornton Wilder)우리 마을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을 의미 있게 보여줍니다. 즉 사람들이 태어나고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죽음을 맞이하며 그 죽은 자들이 또 산자들을 바라보는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극입니다. 이 작품을 읽은 후 학생들의 반응은 한결같았습니다. 아무런 극적인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이 지루하다고 말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좀 더 극적이기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이런 평범한 하루하루를 그린 극은 지루하고 무의미하며 실망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극중에서 에밀리는 다릅니다. 세상을 떠난 그는 단 하루만이라도 이 세상에 다시 돌아와 자신의 생을, 평범했던 열두살의 생일 하루만이라도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다시 살게 된 그 하루 동안 엄마와 가족과 이웃의 말 한마디, 엄마가 아끼는 꽃 한 송이, 그리고 무심코 지나쳤던 하루의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를 뒤늦게 깨달으며 이렇게 말합니다세상아, 너는 인간들이 깨닫기엔 너무도 멋진 곳이구나.”

 

그리고는 극중 스테이지 매니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살면서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것도 매순간순간을요.”

 

그러자 스테이지 매니저가 대답합니다. 아니, 없지. 어쩌면 성자나 시인 중에는 있을지 몰라.”

 

극 중에서 죽은 자로 나오는 사이먼이라는 인물은 에밀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너도 알았구나. 그게 살아 있다는 거야. 무지의 구름 속을 걸어 다니는 것.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짓밟으면서 살아가는 것. 마치 백만 년이라도 살 듯 시간을 낭비하면서 사는 것. 이런 저런 이기적인 열정에 자신을 맡기고 사는 것. 이제는 알겠지. 그게 바로 네가 돌아가고 싶어 했던 삶이라는 것을. 무지와 몽매함.

- 손턴 와일더, 우리 마을Our Town중에서

 

극적이고 가슴 뛰는 일들을 기대하느라, 내가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날들을 기다리느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들을 놓치면서 살고 있을까요? 작은 일상이 주는 의미와 기쁨과 감사를 얼마나 자주 망각하고 사는지 모릅니다. 작은 일들의 그 우주적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을 향해, 사람들을 향해,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해 그저 싸울 태세로 달려듭니다. 절망과 끝없는 경쟁을 되풀이하면서 말입니다.

 

오늘도 나는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한 후배가 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치료를 받는 순간순간 자신이 물 없는 어항에 갇힌 물고기인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그 끔찍한 순간을 겪다가도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을 느낄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병원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 뒤뚱거리며 걸어가거나 휠체어를 탄 환자들을 바라보면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프고 나니 세상이 다시 보여요. 기어가는 벌레 하나도 너무 소중하고, 그 생명력이 무척이나 부러워요.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 알겠어요.” 그런데 벌레는 알까요? 거대한 존재들 틈에서 무심코 밟히기라도 하면 이내 사라지고 말 자신의 운명이 절망스러울 때, 힘겹게 온몸으로 기어 다녀야 하는 그 삶이 부질없게 느껴질 때, 세상의 누군가는 자신을 지켜보며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를 벌레처럼 작고 힘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은 알까요? 내가 살아서 존재하는 그 자체가 포도주처럼 더 없이 멋진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고통스럽기만 한 몇 년간의 암 치료 과정을 거치면서 그 후배는 오히려 감사함을 배우고 행복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암이 완치되고 나서 다시 교만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면서 그럴 때마다 다시 겸손과 감사의 마음을 되새긴다고 합니다. 후배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그동안 잊어버렸던 것들을 떠올리며 나 역시 감사의 마음을 갖습니다. 내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를…….

 

와일더는 우리는 자신이 가진 보물을 가슴으로 느끼는 순간에만 참으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보물 1호는 바로 오늘도 내가 살아 있다는 그 사실입니다. 욕심의 키가 커져서 사는 일이 버겁게만 느껴질 때,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해봅니다. “살아 있는 건 참 좋은 거야!” 쓸쓸해도 오늘 또 하루 감사해하며 살아 있을 것입니다. 장정일 시인의 말대로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기 때문입니다.

 

(c)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중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길로 갔거는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고난 주간을 맞아 다시 이 그림으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죽으심은 처절했고 거기서 흘러나온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라는 절규는 지금까지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발언하던  절규였다.  그것이 이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고통의 비명과 원망이 되어 몰트만의 표현을 빌자면 "버림을 받으신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스스로 버리는 음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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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아주 오래전 건축공학 전공이던 딸이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린 그림.


 

 

 

그림:  Jean Michel Basquiat(1960-1988)

 

[To define is to kill - L. Pirandello]
기자가 바스키야에게 물었다.
"그림 안에 있는 이 글자를 해석해 주시겠소?"

"해석이요? 그냥 글자에요."

"압니다. 어디서 따온 거죠?"

"모르겠어요. 음악가에게 음표는 어디서 따오는지 물어봐요.
....당신은 어디서 말을 따옵니까?"


"나의 음악을 듣고 세상은 말했다. 이건 끔찍한 소음이군
내 음악은 세상에 통하지 않았다. 낯선 불협화음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소리를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한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음악 발전에 걸림돌이라 생각한다."
ㅡCharles Ives
 
 
내가 좋아하는 작가 피란델로(Luigui Pirandello)도 말했다
ㅡTo define is to kill.( 무언가를 정의 내리는 것, 무엇이라 규정 짓는 것은 살인이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나의 불완전하고 주관적인 판단과 이기적인 관점으로 규정 짓고 정의하는 것
그것은 상대를 박제화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살인이나 다름 없다. 너무나 공감하는 말이다.
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라고.
그래서 또 잊지말고 침묵과 기다림과 겸손을 배워야겠다.

 

(c)Depollas (here only for therapue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기다린다]

 

기다림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도망쳐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그림자처럼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기다림.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차마 포기하지 못하는 고통스런 업이 되어버린 적은 없었나요?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는 “기다림은 아픔이다. 잊는 것도 아픔이다. 하지만 둘 중에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정호승 시인은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중략.......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정호승 <또 기다리는 편지> 중에서

 

차라리 기다리는 것이 덜 아프다:

나는 기다립니다. 나는 소망합니다. 오지 않는 그대를. 지친 나그네 바람이라도 머물다가겠지, 그렇게 위로하며 오늘도 마음의 문 앞에 의자 하나 내어 놓습니다. 맘 편히 쉬었다 가라고 가만히 문을 닫아놓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궁금하다면, 혹시라도 나를 기억한다면 문을 두드리리라, 그렇게 위로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만 그 의자를 치워야 할까요?

......................

우리가 진정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꿈에서 나타나는 무의식적 욕구처럼 때로 변장을 하고 나타납니다. 때로는 연인의 모습으로, 또 때로는 성공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시인의 말대로 우리가 진실로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기다려봐야 알 수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리는 님이 오지 않았기에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오지 않았기에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

나는 님을 누군지 알 것만 같다

   - 김형영,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림을 계속하는 것, 오지 않는 그 무엇을 기다리는 것, 그것은 답 없는 질문을 계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기다림은 질문입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길을 잃을지 모릅니다. 답이 없어도 질문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질문은 대상을 향한 나의 관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자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문은 기다림처럼 아직은 이해할 수 없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성실한 의지이며 희망입니다. 

 

답이 없는 질문을 계속하는 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다림을 통해 만나는 것은 ‘그’가 아닌 나 자신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기다림은 질문처럼 우리를 성숙시킵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최초의 질문이나 최초의 기다림의 이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면서 기다리던 내 마음이 차차 호수처럼 잠잠해지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참으로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쓸쓸한 아픔입니다.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작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형기, <호수>)입니다.

오늘도 쓸쓸한 날, 나를 토닥여주며 말해봅니다. “아프지, 그게 진심만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야. / 아프지, 그게 서로 부르고 있다는 증거야”라고.(마종기, <상처6>) 그리고 여전히 내 마음 문 밖에 의자 하나 내어 놓습니다. 창 앞에 섧도록 빨간 우체통 하나 세워놓습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오지 않는 그대를 기다립니다.

< 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기다린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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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나는 또 그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는가?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나는 또 그 무엇을 기다리며 한 걸음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까요?

골똘히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지치지 말자고. 포기하지 말자고.

너무 외로워하지도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