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d here only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Sting과 Toots Thielemans 의 Shape of My Heart.
투츠 틸레망의 하모니카 연주 너무너무 좋아!!
스팅과도 어쩜 이리 잘 어울릴까.

 

https://youtu.be/IJvfMnnDxp4
Toots Thielemans, The Shadow of Your Smile

 

 

...

[I wonder if everybody feels the same.]

 

가슴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들 속엔 늘 알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슬픔? 그게 슬픔일까?

내가 좋아하는 캐더린 맨스필드(K. Mansfield)의 소설 “카나리아(The Canary)”에서 주인공이 이제는 그의 곁을 떠난 카나리아 새의 노래속에서 들었던 이름 붙일 수 없는 ‘슬픔’—그것과 같은 것인지도모른다. 그래서 난 이 소설을 대학교 1학년 때 읽고 너무 공감해서 소설의 그 부분을 그냥 외워버렸다(나도 모르게 저절로.... )

맨스필드가 말했지.
인생에는 슬픈 무엇이 존재한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고. 그게 뭔지 말하기 너무 어려운 그 무엇이. 그건 질병, 가난, 죽음 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슬픔과 다른 그 무엇이라고. 하지만 저 아래 깊은, 깊은 내면에 우리 존재의 일부로 마치 호흡처럼 존재한다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나 자신을 고단하게 만들어도 잠시 멈춰서면 그 순간 그 ‘슬픔’은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끔 궁금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느낄지. 아무도 알 수 없죠.

하지만 정말 놀랍지 않나요? 그의[카나리아 새의] 그 사랑스럽고 즐거운 작은 노래 속에서 내가 들은 것이 바로 그것ㅡ슬픔?ㅡ아 그게 뭐지? ㅡ그것이었다는 게.. “ (맨스필드)
ㅡㅡㅡㅡㅡㅡ

아무리 열심히 지치도록 살아도 멈추는 순간 마주치는 그 무엇!!! 그게 무엇일까??

나도 맨스필드처럼 평생 혼자 중얼거렸지. I wonder if everybody feels the same....하고.

그리고 열심히 그걸 알고 있는, 그래서 일생 그걸 함께 느끼고 내게 말해주는 “카나리아”를 찾아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ㅡㅡㅡ

All the same, without being morbid, and giving way to—to memories and so on, I must confess that there does seem to me something sad in life. It is hard to say what it is. I don't mean the sorrow that we all know, like illness and poverty and death. No, it is something different. It is there, deep down, deep down, part of one, like one's breathing. However hard I work and tire myself I have only to stop to know it is there, waiting. I often wonder if everybody feels the same. One can never know. But isn't it extraordinary that under his sweet, joyful little singing it was just this—sadness ?—Ah, what is it ?—that I heard.(from The Canary by K. Mansfield)

| 2020.09.09 23:06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안녕하세요 저널치료지도사가 되고싶습니다 양성과정이 있으실지 어떻게 해야할지 문의드려요
Journal Therapy | 2020.09.11 02:31 신고 | PERMALINK | EDIT/DEL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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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사랑이 뭐기에 허다한 죄를 덮는 이런 엄청난 능력이 있을까?

 

그리고 인간은 과연 그런 사랑을 할 능력이 있을까?

우리는 가끔 착각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고 온정을 베풀고 있다고.
하지만 그 모든 것 뒤에 어쩔 수 없이 자리하고 있는 나의 자랑과 나의 의 앞에 절망하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늘  진실이 무엇인지 알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20여 년 전에 여객선 카페리호 침물 사건이 있었다.  섬과 육지의 한 도시를 오가는 배에 휴가철이었던가, 명절이었던가?  정원초과로 손님들을 태우고 가다 전복된 사건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의 실종, 사망하였고 사고의 전말을 알기 위해서 선장의 행방을 찾았으나 선장은 발견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선장도 실종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거의 모든 시신이 발견되기까지 선장은 시신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신문기사는 점점 선장에 대한 추측 기사에서 비난의 기사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모든 사건이 그렇듯 이 사건에 대한 의문과 분노를 쏟아내고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이 필요했고 그건 선장이었다.  심지어 신문에는 선장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있다는 기사까지 버젓이 실리더니 결국 그는 배를 버리고 도망간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기사가 실리기 까지 했다.

2주 후 쯤 거센 물결때문에 지연되었던 배의 인양작업이 시작되고 침몰되었던 배가 배다 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선실 한 구석에서 그렇게 찾던 선장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러자 일제히 언론은 선장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는 승객들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배에 남아 키를 붙잡고 사투를 벌였으며 탈출도 하지 않은 채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신문기사의 객관성에 대해 다시 한 번 회의를 갖게 되었다.  며칠전 비난의 글을 올린 신문이 이제는 칭찬의 글을 올리면서 아무 사과기사 한 줄 없었다. 

선장의 시신이 발견되자 드디어 선장의 유족들이 입을 열었다. "우리 남편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절대 배를 두고 혼자 도망갈 사람이 아이었어요..." 

왜 유족들은 온갖 비난의 화살을 맞을 때 아무 말을 하지 못했을까? 왜 이제야 , 시신이 발견된 후에야, 입을 열어 항변할 수 있었을까?

그건 내게 무척 충격적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진실"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들 "자신이 원하는" 진실에 맞는 데이터만 무의식적으로 수집하는 "가설검증바이어스"에 걸린 탓인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가설검증바이어스'라는 말도, 많은 인간의 심리를 파해치는 과학적 용어/판단들처럼, 이미 증상으로 나타난 인간들의 행태와 모습을 통해서 그것을 분석하고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바로 인간들의 모습에서 이미 그러한 만연된 현상을 발견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가설인 것이다. )

나도 언젠가부터 누군가 나를 오해하면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건 오해의 근거를 내가 제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살면서 깨달은 바에 의하면 그 누구도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정의감에서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자신에게 도전을 한 경우 그 순간부터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또는 사람들은 진실을 알아도 그것때문에 상대에 대한 호의적 행동을 하거나 그사람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이 손을 드는 쪽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익한 쪽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쪽이다.  또는 자신을 마치 신처럼 여겨주고, 우러러보며 존경하고 복종해주는 쪽이다.  우러러보고 떠받드는 사람들도 어쩌면 힘의 논리에 의해서, 자신들의 유익함을 위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나약한 인간의 당연한 본능적 선택인지 모른다.  어린시절부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왜 독재가 존재하는 지, 왜 자신을 존중해주고 친절히 대해주는 사람보다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 힘을 과시하는 사람들, 명령하는 사람들에게 모두들 더 다가가서 무리를 이루는지 보아왔다.

그렇다고  그들(나를 포함한)을 비난하려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다. 새록새록 깨닫고 확인하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는 어떤 객관성에 의해 남을 판단하는 능력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인간은 그럴만한 "인격적 실력자"가 아무도 없다. 
만일 선장의 가족들이 한참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을 때 "우리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 아들은.. 우리 아빠는..."이라고 항변했다면 누가 들어주었을까? 

그 누가 그 말을 기사로 실어주었을까?  소위 그들이 말하는 "객관적 증거"인 시신을 본 후에야 실어줄 수 있다는 말일까? 그럼 그 시신이 나오기도 전에 한 두개의 정황으로 유추하여 기사를 쓴, 그래서 그 가족을 지옥 속에 몰아 넣은 신문기사는 무엇을, 과연 어떤 객관적 증거를  근거로 한 것일까?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갑자기 머리 속에 "실종된 진실"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진정 실종된 것, 그건 시신이 아니라 진실이었다는 생각. 


만일 그 선장의 시신이 영영 물결에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그 시신과 함게 선장에 대한 모든 진실도 함께 실종되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추측기사만 더 "진실"이라는 쪽으로 무게를 싣고 사람들의 머리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아니...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얼마 후 까맣게 잊혀졌을 것이다 (사그러든 집단 분노와 함께?).  다만 희생자들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인양되지 못한 채 가라 앉아 사라져간 얼마나 많은 "실종된 진실"들이 있을까? 그리고 그 실종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공교롭게도 그 사건 얼마 후 비슷한 일이 또 보도되었다. 한때 월북했다고 여겨진  S여고 교사의 사건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다. 그 교사는 자진월북이 아니라 납북된 것이었다. 그리고 신혼 10개월 후 생이별을 하고 사회에서 매장되어 살아온 그 부인이 18년간의 고통끝에 우울증으로 (시신이나 다름 없는 뼈만 남은 몸으로) 투신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다.  이것도 실종되었던 진실의 "시신"이 뒤늦게 인양된 사건이다. 또 한명의 희생자를 낳고. 이 테러에 대해서는 왜 아무말이 없는 것일까?

과연 나는 얼마만큼 한 인간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한 인간을 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그건 또 다른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신은 우리에게 타인에 대한 판단보다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와 사랑을, 용서와 인애를 강조하는 것인지 모른다. 복수는 신의 몫이라면서.... 

타인의 행동의 배후까지 이해하기를 바란다면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바보이거나 아직도 감상주의적이고 꿈을 쫓는 이상주의자거나 혹은 골치 아픈 이상한 사람이라 여겨지는 세상에서 누군가가 겉에 드러난 행동으로 오해와 비난을 받을 수는 흔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나의 행동으로 인해  한 인격을 "정의 내린다"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그건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신의 영역에 속한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인간을 판단하고 재판할 수 있는 신은 정죄의 언어로 오시지 않고 "용서"의 언어로, 사랑과 관용으로 오셨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하자 그 무리를 향해 그는 "누구든지 저 여자를 돌로 칠 수 있는 자가 먼저 쳐라." 하시고는 돌로 칠 자격을 가진 유일한 자인 그분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또,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생각해본다.
그여자는 5명의 남편과 살았다.  그 남편이 남의 여자의 남편이었던 사람인지 모두 그냥 싱글이던 남자였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의 남자를 빼앗긴 여자라면 그 수가성의 여자를 비난하고 돌던지는 것을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남편과는 무관한 한 여자, 그 여자가 5명의 남편과 살았다고 그녀를 정죄하고 손가락질하고 근처에도 못오게 하는 것은 과연 "정의"의 분노일 뿐일까?

그런데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 여자를 "재판"하고 "비난"하고 "정죄"할 모든 권리를 가진 사람이엇다.  그가 그 여자를 찾아서 일부러 그 시간에 그 마을을 지나가셨다.   그는 그여자에게 한마디도 네가 어떻게 살았는가 보라..고 훈계한 적도 없었다. 더구나 "나를 보라. 내가 얼마나 거룩한가. 나를 닮으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  그 교태를 버리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  아니 안타깝다며, 너를 정말 위해서 하는 소리라며 충고하지도 않았다--네 처지를 보라고, 왜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고 사람들을 피해 이 더운 정오시간에 혼자서 이 먼 길을 물을 길러 와야하는 지 네 외로운 처지를 보라고, 그게 다 네 탓이 아니냐고, 반성하고 돌아보라고 훈계하지도 않았다.  (오전 시원한 시간엔 마을 여인들이 물을 길러 오는 시간이므로 그여자는 그 시간에 올 수가 없었다.)  다만 그는 "알고 있었다."   왜 모든 마을 사람을 피해 이 뜨거운 정오 먼길을 걸어 혼자 외롭게 우물물을 길러 와야 했는지.   왜 이 여인이 5번씩이나 남편을 갈아야 했는지. (아니 남편들 중 몇은 그들이 먼저 이 여인을 버리고  떠났을 지 누가 아는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는 것과 그것을 상대에게 설명하고 재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여기서 인간의 한계가 드러난다.

그 사람은 그 여인의 그럴 수 밖에 없는 한계와 나약함을 "알았기에" 그녀를, 그 겉에 드러난 행동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아 주었다.  우리가 상담이니, 심리학이니, 여러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지식을 동원하는 건 상대를 정의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정죄하고 추궁하고 충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행동의 근거가 되는 아픔/병을 "바로 이해하고" 끌어안아주고 덮어주고 사랑해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물론 전문적 약물치료를 포함한 의학적 치료를 말하는게 아니다.)

중요한 건 겉에 드러난 행동 이전의 너의 상처야, 너의 목마름이야, 너의 영적 가난함이야... 라고 그는 수가성여인의 소위 부도덕함과 "방탕함"의 배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주었을 뿐이다.  목마르지 않을 물이 있다고 말해주었던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캐묻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진정 무엇이 필요한 지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고 한심하다며, 이 여자는 아직  더 고통을 당해봐야해.. 라며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인간은 아무리 거룩해도.. 아니 거룩할 수록 또 다른 죄을 범하게 된다. 상대 앞에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죄.
그게 바로... 사랑이 없고, 어쩌면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행하고, 실패하고 나아졌는줄 알았는데 아직도 아니라고 하나님은 또 시련과 절망을 통해 성찰하고 깨닫게 하시는 지도 모른다.

두 말씀 앞에 가만히 또 나를 돌아본다. 

"아무도 판단하지 말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양심상 깨끗할 지라도 주 앞에 죄 없다 못하리라."

"네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네 몸을 친구를 위하여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You are NOTHING)"

buck | 2008.08.11 15:24 | PERMALINK | EDIT/DEL | REPLY
선생님, 예전에 제가 쓴 글인데 여기 답글로 달고 싶어집니다.

사람은 자신의 역경을 통해 성숙해 질 수 있다.
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말은
가장 힘든 일을 겪은 자가 가장 성숙한 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며
그렇기에
그렇게 바닥에서 딩굴지 않아도
돼지 우리에서 주염을 먹지 않아도
성숙해 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가졌다고 생각할 때(그것이 무엇이든)
계산기를 두드리며 너는 몇 점이라고 다른 이를 평가한다.
가정형편, 학벌, 옷, 차, 집... 그리고 외모, 등등.

하지만 역겨운, 그보다 더 역겨운, 너무나 역겨운 것은
자신 만큼 고난을 받아보지 않아서
-그 이면엔 자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겠지-
너가 하는 말은 우습다는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다.

즉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고는
자신이 가장 비참한, 역겨운, 참기 힘든 자라고 말하고는
그게 자랑이 되는 것이다.
코메디 중에 상 코메디 인 것이다.
자기의 못남이 자랑이라니.
누가 누가 못났나 경연하는 것도 아니고.

그건 자신의 못남을 앞에 방패막이로 내어 걸고
그 누구도 내 못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라. 난 이미 내 못남을 말했으니..
라고 떳떳하게 자신을 자랑하려는 것이다.

내 안에 그것을 발견한 적이 있었고
또 항시 내 안에 꽈리를 틀고 있을 것이기에
가장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bhlee | 2008.08.19 22:43 | PERMALINK | EDIT/DEL
오랜만에 전화 고마웠어. 어서 모든 일 다 잘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렴. 널 수업중 만나지도 벌써 20년이 넘었구나. 참 오랜세월 변함없는 존경스런 제자들 중 잊을 수 없는 한 사람... 그게 너야. 지금 내가 좀 힘들어서 긴 말 할 수 없어서 간단히 답글 달아. 다시 편지할 게. 아름답고 지혜로운 wife에게도 안부 전해주렴.
Journal Therapy | 2011.02.16 01:37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소설가 김영하(43·사진)씨가 지난달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고(故) 최고은작가의 사인에 대한 반박 글을 올렸다.

 현재 미국에 체류중인 김씨는 14일 오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은이가 굶어 죽었다고 당연히 믿고 있다는데 놀랐다”며 “아마 최초로 보도된 신문의 선정적 기사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녀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의연하고 당당하게 자기 삶을 꾸려갔다고 들었다”며 “직접 사인은 영양실조가 아니라 갑상선기능항진증과 그 합병증으로 인한 발작이라고 고은이의 마지막을 수습한 친구들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진실을 외면한 채 고은이를 아사로 몰고 가면서 가까웠던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겪고있다”며 “살아서도 별로 도움이 못되는 선생이었는데 가고 나서도 욕을 보여 미안하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고(故) 최고은 작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시절 김씨의 수업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석기기자sgtoh@kwnews.co.kr(강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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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밝혀진 이야기들이 얼마나 진실일까? 많은 오해를 받으면 살아 본 경험이 있어서 늘 그런생각 했어.
그런데 가끔 사람들은 정말 진실에 관심이 있을까? 그런 생각도 해. 늘 자신들이 원하는 진실만 원하니까.
그래서 오해를 받아도 결국 침묵하고 말아. 어차피 믿지 않을 거니까. 관심도 없으니까.
내게 진심으로 관심있는 사람들은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믿어주니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이야기해도 안 믿더라고. 그래서 깨달았지.
기자.. 신문.. 그 고마운 매체도 한계가 있지. TV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외국에서는 어려서부터 매체읽기를 위한 교육이 있다던데. 어떻게 편집되고 어떻게 카메라 앵글이 보도자의 주관적 시각에 의해서 달라지고 그것이 시청자를 지배하는지. 어떻게 무비판적으로 받아서는 안되는지. 미디어문맹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이제는 글자를 못읽는 문맹만이 문맹이 아닌지 오래된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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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의 시 - 이형기]

 

밤엔 나무도 잠이 든다.
잠든 나무의 고른 숨결소리
자거라 자거라 하고 자장가를 부른다.

...

가슴에 흐르는 한 줄기 실개천
그 낭랑한 물소리 따라 띄워 보낸 종이배
누구의 손길인가, 내 이마를 짚어주는.

누구의 말씀인가
자거라 자거라 나를 잠재우는.

뉘우침이여.
돌베개를 베고 누운 뉘우침이여.

- 1971년 시집 <돌베개의 시> (문예사)

——


돌베개 베고 누운 불안하고 외롭고 지친 광야의 밤
가슴에 소리 없이 남모르게 흐르는 실개천...

그런 내 이마 짚어주는 손길.
자거라 자거라 나를 잠재우는 말씀.

다 안다, 다 안다.... 아무 말없는 손길과
쉬어라쉬어라 나무라지도 않는 말씀이
참된 뉘우침을 주시는 군요.
참된 깨달음을 주시는 군요.

30대에야 알게 된 이형기선생님(1933~2005) 시가 너무 좋아서 참 많은 시를 외웠던 거 같다.

보통 시집을 사면 몇개의 시 외에는 가슴을 울리는 것이 드물었는데 이형기의 시집은 하나 하나 거의 모든 시가 가슴에 젖어 왔다.
그리고 참 이상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참 많은 오해와 고통을 받던 긴 시절.. 그의  시는 늘 내게 위로가 되었다.

말년에 암과 투쟁하실 때의 이형기선생의 시는 그 전의 시와 또 다른 목소리였지. 이제 보니 겨우 72에 돌아가셨구나.

(우리 아버지와 이름도, 모습도 참 많이 비슷한 분... 그래서 더 맘에 들었을까??)

이상하게 요즘 또 다시
그 시절 외던 시 구절이 떠오른다.

 

  ”아무 말도 말고 다 가져가거라.

   오늘의 내 몫은 우수 한 짐

   나머지는 모두 너희들 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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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편지 - 김남조]

 

편지를 쓰게 해다오.

이날의 할말을 마치고

늙도록 거르지 않는

독백의 연습도 마친다음

날마다 한 구절씩

깊은 밤에 편지를 쓰게 해다오

밤기도에 이슬 내리는 적멸을,

촛불에 풀리는 나직이 습한 樂曲들을

겨울 枕上(침상)에 적시이게 해다오

새벽을 낳으면서 죽어가는 밤들을

가슴저려 가슴저려 사랑하게 해다오

 

세월이 깊을수록

삶의 달갑고 절실함도 더해

 젊어선 가슴으로 소리내고

이 시절 골수에서 말하게 되는 걸

고쳐 못 쓸 유언처럼

기록하게 해다오 

 

날마다 사랑함은

날마다 죽는 일임을

이 또한 적어 두게 해다오

눈오는 날엔 눈밭에 섞여

바람 부는 날엔 바람결에 실려

땅 끝까지 돌아서 오는

영혼의 밤 외출도

후련히 털어놓게 해다오

 

어느 날 밤은

나의 편지도 끝 날이 되겠거니

가장 먼 별 하나의 빛남으로

종지부를 찍게 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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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3.28 16:08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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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30 17:02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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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이 아가 때 처음 신었던 구두이다.  인형은 울딸 꼭 닮아서 사준 것.  아이가 무척이나 아꼈던. 그래서 머리가 다 망가졌다(?)  목욕도 여러번 시키다보니... 

 

(10년전 추석때 뭉클뭉클 아이가 보고 싶어서 찍었던 사진)

 

아이가 처음 입은 옷(배냇저고리 말고), 첫 배게의 커버, 첫 토끼 인형, 이런 것들은 소중한 시간을 소환하는 것들이다.

 

나이가 자꾸 드니 떠날 준비란 다 비우고, 버리고 지우는 것임을 아는데..... 
구석구석 소중한 시절의 웃고 울던 이야기가 담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자잘한 물건들이 가득하다.
세월은 무심히 떠나며 잉여존재를 낳는가 보다.
아이는 이제 저 당시 내 나이보다 더 어른이 되었는데 내 추억 속에는 자라지 않는 아가가 있다.


"그립다 말을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소월의 말대로 보고 싶다 말하면 더 그리워지니까 우린 그 말도 아낀다.  
딸아이가 오래전 언젠가 그랬었지. 엄마 우리의 문제는 서로 너무 배려한다는 거야..  라고^^

 

그 배려 중에는 서로의 독립성에 대한 존중도 포함된다는 걸 우린 안다.

| 2009.10.09 23:25 | PERMALINK | EDIT/DEL | REPLY
비밀댓글입니다
1234 | 2020.07.07 18:33 | PERMALINK | EDIT/DEL | REPLY
2009.10.09

믹폴리 2009-10-03 05:12:24 아이에 대한 사랑이 철철 넘치십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구나. 아오 즐거워
-->답글: acsebichi 2009-10-04 22:15:11 사실 늘 너무 부족한 엄마라는 걸 느껴요. 자녀란 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교사인 거 같아요. 제 말은..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리고 부모의 사랑만큼 조건없는, 변함없는, 그런 사랑도 없으니까) 그 사랑으로 인해 자신이 누구인지 끝없이 배우게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whitetoronto 2009-10-03 06:45:06 아.............어쩜.... 너무 사랑스러워요... 인형 셋 모두 입모양이 다르네요? ^^ 뒷편것....옷핀꽂은 모양도 느므 귀여워요...(악세비치님좀닮은듯..ㅎㅎㅎ) 소품들도 갖고 계시는군요... 전 아이들 배꼽 떨어진것, 첫이빠진것 두번째것 tooth fairy준다고하고 감춘것들 갖고있다가 들켰는데.. 싸이코 취급을 하더라는..-_-;; (저도 옷이나 신발 이런걸 좀 보관할껄....) 그래도 아직도 갖고있어요..하하 너무 배려하는..... 딸들은 엄말 안닮으려고 우겨보며 살지만 결국 닮아지던걸요? 나도 울엄마 보구싶다...-_-;;
->답글: acsebichi 2009-10-04 22:21:01 결국 닮아지면 안되는데..ㅠㅠ 배꼽.. 이... ^^ 우와. 대단하세요. 사실 계속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렸어요. 살면서 타임캡슐같이 소중한 것들을 너무 많이 다 망각 속에 묻어버렸다는 게 후회가 되는군요. 나도 울옴마 보고 싶다. 저어 파란 하늘에서 날 보고 계실까? 이젠 친정엘 가도 손님 같아서 몇시간 견디지 못하고 돌아오네요.

날다나무 2009-10-09 19:35:13 아름다운 기억을 보존하는 방법도 참 곱고 이쁩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당^^
| 2020.08.10 19:44 | PERMALINK | EDIT/DEL | REPLY
비밀댓글입니다
ASS | 2020.08.11 17:08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음, 나이가 든다고, 떠날 준비한다고 버리고 지우는 건 아닌거 같아요. 선생님은 매일매일 새사람을 입으시니까요.

치사랑보단 내리사랑인게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보고 싶어도 혹시 방해할까 전화하기가 저어되는게 느껴집니다..
Lee | 2020.08.16 10:17 | PERMALINK | EDIT/DEL
어서 코로나가 잦아들어서 전처럼 자유롭게 오고가야하는데.... 아들 많이 보고 싶지?
참 긴 인내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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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bhlee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기형도 - 물 속의 사막]
정윤 | 2006.10.22 02:08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오늘밤은 계속 '살아서 헛것이었다'라는 말이 맴도네요. 내 지난 시절이 헛것이면 안되니까 자꾸 아름답게 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아름답게 여기면 아름다운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진실이라는 게 굳이 있는건지 진실을 인정하기가 역시 두려운건지 모르겠네요. 흘려보낸 20대 그 시절이 자꾸 생각이 나 끄적거립니다.
| 2007.08.16 22:02 | PERMALINK | EDIT/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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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zart, Concerto for Flute and Harp K.299, 2nd Mov. Andantino 

 

London Symphony Orchestra

Conductor. Michael Tilson Thomas

James Galway- Flute & Marisa Robles- Harp

 

https://youtu.be/lLPheTV6RTw (Here only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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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전하는 말 - 이해인
 

밤새
길을 찾는 꿈을 꾸다가
빗소리에 잠이 깨었네 
 
물길 사이로 트이는 아침
어디서 한 마리
새가 날아와 나를 부르네 
 
만남보다
이별을 먼저 배워
나보다 더 자유로운 새는 
 
작은 욕심도 줄이라고
정든 땅을 떠나
나를 향해 곱게 눈을 흘기네 
 
아침을 가르는 하얀
빗줄기도 내 가슴에
빗금을 그으며 전하는 말 
 
진정 아름다운 삶이란
떨어져 내리는 아픔을
끝까지 견뎌내는 겸손이라고 
 
오늘은
나도 이야기하려네
함께 사는 삶이란 힘들어도 
 
서로의

다름을 견디면서
서로를 적셔주는 기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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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 이준관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 집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 하늘이 내 집이었지.
 
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 준 집은 차암 많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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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피하려다 웃음까지 잃어버렸다

- 고통의 재인식  (2011이봉희)

 

어느 여름날, 난(蘭) 하나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꽃을 피우던 난이 겨울이 되자 어느새 가지가 노랗게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만 손을 놓아버렸나 생각하면서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겨울이 지나도록 볕 좋은 창 앞에 열심히 놓아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어버린 가지를 달고 있는 뿌리가 새 가지를 내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원래 피어오른 줄기가 말라버리자 어느새 뿌리는 그 곁으로 하나의 새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나봅니다. 말라버렸다고 줄기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뿌리 채 뽑아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작은 꽃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죽어가는 가지에도 새 가지를 내고 꽃을 피우는 뿌리의 생명력이 있다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니 문득 이 시가 떠올랐습니다.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 줄 때도

사실은

참 아픈 거래

- 이해인 <꽃이 필 때> 중에서

 

 

살아 있으니 아픈 것이다

 

아픔은 선인장의 가시처럼 생명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박경리 씨의 말이 생각납니다. 20년간 《토지》를 쓰면서 참 힘든 일도, 고통스런 기억도 많지 않았냐는 기자의 물음에 박경리 씨는 망설임 없이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산다는 게 고통 아닌가요? 인간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고통을 겪지 않나요? 내 생각엔 생명이 있다는 자체가, 산다는 게 고통인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생명은 앓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앓음 알음’이라는 것, 앓아가면서 알아가는 여행길이라는 것을.

 

괴테는 “모든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라고 말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색채들은 빛의 고통에 의해 존재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뿐 아니라 자연 속에서도 아픔 없이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도 나는 사는 동안 뜨겁게 타오르는 노을과 시린 새벽빛과 소나기 뒤의 그 장엄한 하늘빛을 보면서 한 번도 빛의 고통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묘한 빛깔의 많은 꽃들을 보며 감탄만 했지, 그것을 피워내는 아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때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면서 책상 앞에 “난 이미 죽었는데 왜 아직도 아픈 걸까?”라고 써 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프지 않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자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인간도 우주도 그 모든 생명은 아픔과 함께 하는 것인데 우리는 아픔으로부터 피하고만 싶어 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죽은 자처럼 살고자 모든 느낌을 차단합니다. 마취제를 맞으면 아픔이야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 마취된 시간 동안 죽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부분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던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의식이 또렷해서 의사들의 메스소리가 들리는데, 자신의 몸에서 아무 통증이 느껴지지 않자 자신이 온전히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고 합니다. 마취제는 통증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약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마취 상태로 있다가는 다시는 깨어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통증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다가 의식마저 무감각하게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김수영 시인의 <사령(死靈)> 중 한 구절을 중얼거려봅니다.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 김수영, <사령> 중에서

 

 

아픔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순간, 다시 살아나는 그 순간에 느껴지는 고통은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살아 있다는 감사한 깨우침입니다. 아픔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이건 사는 게 아니라고, 이건 삶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픔은 오히려 살아 있다고, “깨어서” 살고 싶다고 외치는 온몸의 아우성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고통스런 기억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방어기제는 고통뿐 아니라 생의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들까지 함께 차단합니다. 그럼으로써 타인에 대한 깊은 친밀감과 사랑, 신뢰감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방어기제는 우리의 깊은 내면을 감옥으로 만들어 우리의 참자아를 고립시킵니다. 딸아이가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때 쓴 가슴 아픈 고백처럼 말입니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다가 이제 난 기쁨마저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렸어. 내가 진 거야.”

 

아픔을 아파하지 마세요. 아픔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이 아픔을 대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아픔과 절망의 끝에서 어느 날 활짝 터지는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리라는 것을. 고치를 벗어난 나비처럼 영롱한 빛으로 날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나만의 아름다운 색깔로 세상을 그리게 되리라는 것을. 그 순간 왜냐고 묻던 모든 항거와 의구심의 무게는 꿈처럼 가볍게 흩어져버리겠지요. 그때 우리는 조용히 웃음 지으며 끄덕일 것입니다. 왠지 몰라도 이제는 문제되지 않으며, 이제는 고백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모든 게 다 협력해서 선한 결과를 이루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픔의 순간에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고 말하겠지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름 없이 피고 지는 꽃들과 내 아픔을 함께 느끼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사랑이 내 곁에 함께 존재했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픔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힘이 될 수 있었다고,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겠지요. 아프지만 나는 아픔보다 더 용감했다고 말입니다.  2011이봉희  

 

출처: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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