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ivity & Technology in the Age of AI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유럽에서 가장 큰 디자인 컨퍼런스 중 하나인 OFFF

Creativity and Tech. in the age of AI (AI 시대에 창조성과 테크놀로지)를 주제로 3명이 Adobe 대표로 발표했다.

오디언스가 3000명가까이 모였다고 한다.

 

커퍼런스 발표 후 live webcast. 흥미롭고 재미있는 내용이다.

 

 
 

 

Passion of Christ by EKim(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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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전 당시 건축공학 전공이던 딸이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린 그림.
미술공부는 초등학교 때 미술학원 3일 가고 재미없다고 그만둔게 미술교육(?)의 전부였다.
오랜만에 고난 주간을 맞아 사진으로 찍어 둔 이 그림을 찾았다.


 

내 학교 연구실 책상 위에는 빛바랜 아주아주 오래된 작고 낡은 액자가 하나 있었다. 

화집이 정말 귀했던 내 어린시절 TIME지 표지에 난 고흐의 자화상 모음 사진을 오려서 액자에 넣은 것이었다.

(위 그림은 내 액자의 그림은 아니다.)

고흐는 언제부턴가 어딜가나 내 곁에 있는 동반자였다. 그림으로 때로는 글로.
고등학교때 벽에 붙은 화집에서 가져다 액자에 넣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던 별밤이나 싸이프러스 나무나 밤카페나 그런 그림이 아니라)
그림그리러 가는 화가를 밤새 바라만 보던 적도 있었다.  

 

자화상은 고흐의 자서전처럼 느껴진다.

"나는 무한한 고독과 신에 대한 경건함에 익숙해진 나의 얼굴을 왜곡시킬 수는 없었다.
터치 하나하나에 나의 심상을 담으며 일정한 선들의 흐름을 그려보았다."(-Gogh/1887)

고갱에게 바친 자화상(1888.9)에서 고흐는 말했다. 

"당신이 내 모습을 볼텐데 이 작품은 동시에 우리의 모습이며
사회로부터 희생당한 가련한 자들이고, 모든 것을 사회에 친절로 반환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라고.

 


오래 전 파리에 갔을 때 정말 우연히 숨막히는 전시회를 만나게 되었다. 오르세 미술관 특별전시회 Musée d'Orsay: Van Gogh/Artaud- Le suicidé de la société (고흐/아르토: 사회에 의해 자살당한 사나이)였다. 그때의 감동은 MoMa(NY)에서 만났던  "Van Gogh and the Colors of the Night(반 고흐와 밤의 색깔들)"과 함께 평생잊지 못할 감격의 선물이었다. 전시회의 포스터는 그 유명한 사진작가 만 레이의 아르토사진과 고흐의 초상화로 되어있었다.


아르토(Artaud)는 잔혹극의 창시자이다. 영문학을 공부할 때 그가 고흐에 대해 책을 낸 것을 알지 못했었다. 
아르토는 말한다.  누구든지 한번이라도 인간의 얼굴을 제대로 볼 줄 알았던 사람이 있다면 고흐의 자화상를 보게 하라고. 어떤 정신치료사도 고흐처럼 인간의 얼굴을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심리학으로 마치 칼로 해부하듯이 해부하면서 그렇게 강렬한 힘으로 세밀히 살펴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거라고.

 

귀에 붕대를 하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SP with Bandaged Ear and Pipe.  1889)에 나오는 고흐의 눈은 소크라테스도 갖지 못했던, 다만 니이체만이 갖고 있던 눈, '육체를 혼에서 해방시키고, 정신의 속임수를 발가벗긴 눈'이라고.

 

나는 이런 것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이다. 
그래서 너무 행복하고 그래서 이상하게  외롭고 슬프다.....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ㅡㅡ

흩날리는 꽃비를 흠뻑 맞으며 마냥 행복에 젖은 하루였다.

언제나 이맘때면 이형기의 시가 가슴을 울리곤 했었다.

찬란한 설렘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낙화속 '소풍'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스름길,

오늘은 나도 모르는 새 맘 한구석에서 “물보면 흐르고 별보면 또렷한 마음은 어이면 늙으뇨.” 라는 영랑의 시 구절이 함께 따라 나와 혼자 웃었다. 조금은 쓸쓸히...낙화속을 걸으며 마냥 기쁘다가도 느끼는 묘한 마음이 이것이었나?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교수로서, 치료자로서 그리고 삶의 모든 관계와 장에서 내가 혼들릴때마다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말씀 중 하나인데
요즘 내가 어떤 일을 겪으면서 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

내가 가진 좋은 것, 그것에 대한 나의 확신이 타인에게 강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요는 무례함이라는 것을.

내가 깨달은 좋은 것, 내가 누리는 좋은 것을 알려주고 싶은 뜨거운 열정 그 깊은 아래에 그것을 전해도 깨닫지 못하거나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은근한 비난과 경멸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확신과 열정에 상대에 대한 사랑과 관심 보다는 먼저 누린자의 교만함이 도사린 것은 아닌지.

정말 배려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랑하는 것인가.

상대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는 내 마음이 인내하는 귀찮음에 대한 포장과 합리화는 아닐지....

 

그래서 늘 내가 이것을 깨닫기 전 그 과정에서 경험한 절망과 회의와 좌절, 포기하고 싶던 마음 등을 기억하고 상대를 바라보려 한다. 사람들의 수많은 다양성과 각자의 형편을 존중하고 끝까지 진정 내가 줄 수 있는도움을 주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줄수 있는 것 밖에는 도움을 주지 못하며)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하는것인데....  결국 어떤 것도 책임질 능력이 없지 않은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아니하며....."

 

 

무례함의 근거는 우월감이 아닌가.


오늘도 나의 열정에 무례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우리 문 앞에서 간절한 맘으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시는 그 분을 기억한다.

흙으로 그릇을 빚는데

그 안에 빈자리가 있어

그릇으로 쓰네

 

- 노자 [도덕경] 11장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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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도 "빚는 일"임을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고

없음은 쓸모를 위한 것이다.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고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

만물은 흔들리면서 - 오규원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 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가면 - 셸 실버스타인

 

 

          그 여자의 피부는 파란색입니다

          그 남자도 그랬습니다.

          그 남자는 그걸 숨겼습니다

          그 여자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일생동안

          파란색 피부를 가진 사람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두 사람은 바로 곁을 스쳐지나갔지만

          결코 서로를 보지 못했습니다. (역: bhlee)

 

(c)Shel Silverstein/ used here only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오빠가  갑자기 하늘 나라로 가신지 벌써 4년이 되었다.  까마득해 보이기도 하고,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오늘 밤엔 저 먼 곳 별이 되신 보고픈 얼굴들이, 별이 되어 내 가슴에 뜨고 지는 분들이 자꾸만 그립다.

아버지, 엄마, 언니, 오빠.... 

떠나간 사람들이 남긴 빈 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길이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훗날 아쉬워할 일들을 아무 생각없이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은 내 곁에 머물러 있을 거라 합리화하면서.....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고,  내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더 급하다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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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4.

 

큰오빠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신 지 일주일 째 되는 날이다.

물론 오래 앓으셨지만 갑자기 어느날 아침 떠나실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에게 아주 특별했던 큰오빠, 가족 중에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시고 보살펴주시고, 내가 아버지 같이 의지했던 오빠.

어린 시절 서울에서 내려올 때마다 동화책을 한 아름 사다 주시면 외도록 그 책을 있으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오빠 방에는 철학책, 시집, 화집, 문학전집 등 책으로 가득 찬 책장이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일어, 불어, 영어 등 외국어 책을 쑤알라 쑤알라 하면서 읽는 흉내를 내었던 기억이 난다.

오빠방 하얀 커버가 씌워진 안락의자에서 나는 엄마 품에 안긴 듯, 참 포근했었다.

오빠가 벽에 걸어 놓은 고흐, 고갱, 세잔, 르노와르, 마티스 등등의 그림들은 어린 내게도 얼마나 큰 경이로움과 알 수없는 위로와 기쁨을 주었던지.

오빠가 전축에서 들려주시던 클래식 음악들,  오빠가 즐겨 부르던 영화 "셰인"의 주제곡,....

 

어린 시절 오빠는 가끔 나를 불러서 외국 시를 읽어주셨다.  10대의 시인이라면서 프랑스 여자아이의 시를 읽어주던 기억도 난다. 긴 겨울 밤 한 이불 속에서, 또는 짧은 여름 밤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별을 보면서 듣던 엄마의 구수한 옛날 얘기처럼 오빠의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내게는 참 따뜻하고 소중하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교내 글짓기대회 교장상은 물론이고, 시장, 그리고 도지사 상을 늘 받았던 기억이 닌다.  그 어린시절 내 꿈은 소설가였다.  그 꿈을 하얗게 잃어버린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그래서 나도 오빠처럼 대학교 때 모든 선택과목을 철학으로 했었을까? 
철학과 문학과 음악과 미술.....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는 마음의 문을 열어준 오빠. 

 

7남매의 막내로 그것도 다섯째 딸로 엄마 나이 40에 태어난 나(어쩌면 반갑지 않아서였을까?)-- 엄마는 간난아기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던거 같다. 어느 날 오빠가 안방에 들어가보니 핏덩이인 내가 빈 방에서 혼자 꼬므락거리면서 오빠를 쳐다보는데 갑자기 그렇게 측은할 수가 없으셨단다. 그때부터 오빠는 날 유난히 사랑하셨다.  크면서 유달리 애교가 많았던 나를 보며 오빠는 늘 우리집에 막내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어요, 라고  하셨단다.  엄마 젖이 나오지 않아서였을까, 간난아기 때 몇일이고 밤 새 울기만 하여서 엄마는 얘가 이러다 죽으려나보다 하셨단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아이용 분유도 우유도 없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날 오빠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분유(당연히 전지분유)를 사오셔서 그걸 (젖병도 없던 시절이니) 그릇에 타서 수저로 떠 넣어주었더니 간난애가 한 대접을 다 받아먹고 그 날로부터 색색 잘 자더란다. 그래서 엄마는 그 때 미안했다고, 넌 어려서 젖을 주려서 몸이 약하다고 늘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 오빠가 명동 찻집에 친구들 만나려가면 나를 꼭 데리고 다니시면서 따뜻한 우유(역시 분유를 탄 것)을 시켜주셔서 그때 그 맛을 못 잊어서일까,  나는 유난히 따듯한 우유를 좋아한다.  아직도 여름에도 우유를 뜨겁게 데워 마시곤 한다. 

 

결혼하고 뒤늦은 나이 유학을 떠났다 돌아왔을 때 친정 가까이 살면서 엄마가 우리 딸을 키워주셨기에 오빠는 자연스레 우리 딸을 키워주신 셈이 되었다. 내가 수없이 이런 저런 일로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아플 때 마다, 무슨 교통사로라도 날 때마다,  성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기우뚱기우뚱 걸으시며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달려오셨던 오빠...... 내게는 은인인 오빠.  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하는 삶을 가르쳐주신 오빠. 병약하셨던 아버지 대신 내가 의지했던 오빠.

 

헌칠한 키에 넓은 이마, 오똑한 콧날,  멋스런 모습.
나이들어서 병원에 초췌한 모습으로 입원해 있을 때도, 요양병원에서도 모두들 잘 생기셨다고 하던 오빠.

담배를 좋아하셔서 늘 손에서 구수한 옥수수 냄새가 났던 오빠.

머리가 유달리 뛰어나신 오빠.

옷을 멋스럽게 입었던 오빠.

미술재능도 뛰어나셔서 그림으로 중고시절 정부에서 보내줘 중국까지 다녀오신 오빠.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던 철학공부를 못하고, 예술공부도 못하고 맏이라서 실용적인 공부를 하셨어야 했던 오빠.

(결국 문리대 철학과를 학사편입으로 나오시긴 했지만)

7남매를 다 보살펴주신 오빠. 책임감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고 성실하셨던 오빠. (그래서 얼마나 버거운 삶이었을지... 그래서 그런 조건 때문에 원하는 결혼도 할 수 없었던 오빠)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 주변에 힘든 사람들을 늘 가족처럼 초대해서 함께 지내고 돌봐주던 오빠.

늘 아랫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했던 오빠.

그렇게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오빠.

꽃과 나무를 좋아하셨던 오빠.

이제는 우리 곁에 없다.

내 곁에 없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리 허망히 가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찾아뵐 걸.....


 

육신의 고통이, 통증이 이리 절대 고독인 걸 내가 그때는 왜 미처 몰랐을까?
왜 우리는 늘 나 살기 바쁘다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곁에 있을 것처럼 착각을 선택하는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일까?

오빠 사랑해요.  감사해요.
그리고... 너무 미안해요...

아픔 없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너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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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해야하는 세가지

그건 죽기 마련인 모든 것을 사랑하기,

당신의 삶이 거기에 기대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은 가슴 깊이 끌어안기,

그리고 놓아보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놓아 보내기. 

(M. 올리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