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수틀 - 나희덕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에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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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당신 - 김 용 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좋은
당신.

-------------------

 

너무나 잘 알려진 시이다.

생각만 해도

좋은

당신

나는 어떤 사람이 참 좋은가?

늘 환히 웃어주는 자?

누가 늘 환히 웃을까?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ㅡ그는 어둠을 건너온 자이다.

그리고 그 웃음이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웃음ㅡ “밝고 환한 빛”이라는 데 있다.

어둠을 건너 온 자...

아니,

삶이 끝나는 날까지 여정 중에 지나야할 어둠의 길목과 터널과 건너야할 강이 항상 기다리고 있기에

어쩌면 어둠의 길목에서도 눈길 마주치면

웃음이 환하고 밝은 사람

난 그가 내 삶에 빛이 된 참 감사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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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다

- 무언의 소통

 

 

내 안에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는 상징주의를 이야기할 때  즐겨 인용하는 중세시대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표현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표현하지 않은 말들은 어디에 숨었을까요?

우리는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고 말할까요? , 남이 내게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는 있을까요?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무(nothing)는 없음, 아무것도 아님, 혹은 결핍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불리는 그 무엇(something called nothing)’을 뜻합니다. 햄릿, 리어왕, 오셀로등 이 모든 비극에서 주인공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nothing’의 말이 단순한 없음이나 무의미를 뜻하는 부정어가 아니라 보다 능동적인 긍정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무엇(something)’을 소통하지 못하는 데서 극의 비극성이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리어왕은 세 딸들에게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럼 땅을 나눠주겠다고 제안한 것이지요. 땅을 물려받고 싶은 욕심에 두 딸들은 전혀 마음에도 없는 거창하기만 한 거짓 사랑을 고백합니다. 반면 셋째 딸 코오딜리어는 진정으로 아버지 리어왕을 사랑하는 딸입니다. 두 언니의 사랑 고백을 듣고 있는 코오딜리어는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만일 사랑이란 말이 언니들이 말하는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라면, 자신의 사랑을 언니들이 사용한 것과 같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코오딜리어는 아버지의 신뢰와 기대를 저버리고 너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느냐는 기대에 부푼 왕의 질문에 할 말이 없다(Nothing)”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숨은 코오딜리어의 진정한 사랑의 고백을 알아차릴 수 없는 리어왕은 실망과 배반감으로 셋째 딸을 추방하고 맙니다. 그때부터 리어왕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뒤늦게야 겉으로 드러난 언어 뒤에 숨은 무언의 진실에 하나씩 눈 떠가지만 이미 때늦은 깨달음일 뿐입니다.

 

침묵도 하나의 언어다

 

고백을 해야 할까?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처음 읽게 되었을 때 내가 당황했다는 것을……. 나는 처음에는 그가 말하는 침묵이 그 무엇의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능동적인 그 무엇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프랑스의 형이상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The World of Silence를 읽고 한 말입니다. 피카르트는 말합니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된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인 것이다라고. 피카르트가 말하는 침묵의 깊은 철학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일상 언어에 숨어 있는 말들, 침묵한 의미들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무언(침묵)도 엄연한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머어윈의 시처럼 그 언어들은 어둠 속에 깨어서 우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 연필 안에

말들이 웅크리고 있다 한번도

쓰인 적 없는

말해진 적 없는

배운 적 없는 말들이

 

숨어 있다

 

어둠, 그 어둠 속에

깨어서

우리를 듣고 있다

- 머어윈, <쓰이지 않은 말> 중에서

 

우리가 하는 말 중에는 의미 없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말이지만 동시에 소음입니다. 소음이 의미 없는 목소리(meaningless voice)’라면, 침묵의 언어는 목소리가 없는 의미(voiceless meaning)’입니다. 그 언어가 목소리를 갖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unspoken) 침묵의 언어, 또는 말할 수 없어서(unspeakable) 하지 못하는 침묵도 있습니다. 또 스스로도 내 마음 깊은 곳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말 속에 그 말과는 다른 진정한 나의 마음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프로이드는 말의 실수도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글을 쓰다보면 내가 의도하지 않은 단어를 쓸 때가 있습니다.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 우연인 것 같은 실수 속에서 나의 무의식이 건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나는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을까?

 

독일의 한 해석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는 퇴근하면서 아내에게 머리가 아파라고 하소연합니다. 이때 아내가 그래요?” 하고 진통제만 가져다준다면 아내는 남편의 말 뒤에서 침묵하고 있는 진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입니다. 어쩌면 남편도 그 말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때 남편이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머리가 아파가 아니라 당신의 위로가 필요해. 나를 좀 돌봐줘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만일 아내가 남편의 말 뒤에 숨어 있는 침묵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면 아내는 남편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남편의 욕구를 채워줄 것입니다. “당신 오늘도 밖에서 일하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요라며 다른 날보다 더 특별한 위로를 해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편도 자신이 정말 위로받고 싶어서 그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르면서도 아내가 그저 진통제를 내밀 때 뭔가 허전하고 마음이 허전하겠지요. 괜히 답답하겠지요.)

 

어린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직장을 다니는 엄마가 있었습니다. 낮 동안에도 수시로 아이가 궁금하고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친 몸으로 퇴근해 친정에 가면 어린아이가 드라마에서처럼 달려 나오며 엄마아아~~” 하고 매달리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는 엄마를 반기기는커녕 언제부턴가 스티커!” 하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얼굴은 외면한 채 말입니다. 스티커를 사가지 못하는 날이면 아이는 이내 토라져서 작은 일로도 투정을 부리거나 떼를 썼습니다. 스티커에 대한 끈질긴 집착은 오랫동안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외국에 출장을 갔다 오면서도 엄마는 스티커를 사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단순히 스티커에만 집착했던 것일까요?

 

스티커를 달라는 아이의 투정은 바로 엄마, 하루 종일 어디 갔다 왔어? 엄마가 날 두고 가버렸을까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 내면의 그런 두려움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그 당시 자신이 좋아하는 스티커가 엄마의 사랑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합니다. 어쩌면 스티커는 부재의 시간 동안 엄마가 자신을 기억했다는 증거품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주면 부모들은 아. 그렇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아이에게 반응할까요? 아마 대부분 아이에게 눈높이로 앉아서 부드럽게 말할지 모릅니다. “00, 네가 원하는 건 스티커가 아니란다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해주어도 아이에게는 소용없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스티커를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스티커만 준다면 사랑을 갈망하는 아이의 욕구는 영원히 충족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엄마는 아이가 말한 스티커와 함께 표현되지 못한 말의 의미인 사랑을 듬뿍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불안 속에는 엄마의 부재 뿐 아니라 무엇보다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fear of the unknown), 즉 엄마가 대체 자신을 두고 어디에 가 있는지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이 더 큰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주말에 자신이 낮에 무엇을 하는지 직장에 데려가 보여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 00이가 할머니댁에 가 있는 동안 엄마는 지금 우리가 가는 이 길로 차 타고 학교에 가는 거야.... 여기가 엄마가 학생들 가르치는 교실이야....“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가 안 보이는 동안 불안하지 않고 엄마가 지금쯤 어디 있겠지하고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퇴근길에 스티커는 물론 사랑도 열심히 표현해주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와 함께 15분 정도 뒹굴며 놀아주고 꼭 안아주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느 때부터인가 아이는 그렇게 집착하던 스티커를 달라고 조르지 않았습니다.

 

 

나의 속마음은 누가 알아줄까?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도 그 욕구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다른 곳에 그 욕구를 전이시켜 거짓 욕망에 집착합니다. 배가 부르면서도, 비만으로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초콜릿이나 군것질을 달고 살거나, 술이나 게임 등에 집착하는 경우입니다. 그 순간 초콜릿을 먹지 말라거나 게임을 하지 말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 사람이 진정 원하는 것을 탐구하도록 도와주고 그것을 먼저 해결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짓 욕망에 대한 강박증은 사라집니다. 이런 강박증은 때로 사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보이기도 합니다.

 

친정어머니는 우리딸을 유달리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지나치셔서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전화를 하셔서는 오늘은 애한테 뭐 먹였니?”라고 물어보셨습니다. 불고기를 해주었다고 하면 야채를 먹여야지!” 하고 화를 내셨습니다. 다음 날 야채 반찬을 해주었다고 하면 고기를 먹여야지!” 하고 또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무슨 대답을 해도 만족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어머니가 말만 시작하면 다 듣기도 전에 벌써 화부터 났습니다. 때로는 전화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안톤 체홉의 <비탄>이라는 단편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책의 한 구절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인공 포타포브는 이제는 너무 늙어 일하기 어려운 마부입니다. 그는 얼마 전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가 늙어서 말을 제대로 몰지 못하자 마차에 탄 젊은 청년들이 노인에게 심한 모욕을 주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욕적인 행동에 분노를 느끼지 않고 다만 소리로만 듣습니다. 그리고는 허허, 참 유쾌한 젊은이들이야하고 웃어버립니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말을 듣기만 한다는 그 장면은 소설의 주제와 무관하게 아하!” 하며 머릿속을 강타했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어머니의 말을 일일이 들리는 대로 해석해서 감정적으로 반응했을까? 그냥 단순히 소리로만 들으면 되는데.’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은 고기를 먹여도, 야채를 먹여도, 그 무엇을 해도 성에 차지 않을 만큼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의 표현임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네 딸을 사랑하는지 알지?’라는 (어머니 자신도 모르는) 어머니의 소리 없는 진심이 무시당하자 어머니는 나름대로 욕구불만이 쌓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심을 알아달라고 점점 더 심하게 잔소리를 하신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어머니의 간섭과 잔소리에도 나는 평화로워졌습니다. 그렇게밖에는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어머니가 안쓰럽기도 하고, 또 아이처럼 귀엽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알았어, 알았어요!! 울 엄마, 손녀 사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라며 웃으며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게 찾아온 평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의 간섭과 잔소리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의 진정한 마음을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간섭과 잔소리로밖에는 표현하지 못한 자신의 진정한 사랑과 욕구를 알아주자 어머니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변화로 어머니도 변하셨던 것입니다.

 

내 속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날이면 새삼 삶이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Jung)고독은 내 곁에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자신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의사소통 할 수 없을 때 온다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배려할 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말 너머 말없이 침묵하는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서로의 욕구를 읽어주고 들어준다면 그것이 진정한 공감과 경청이며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훨씬 더 따뜻해질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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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론 나를 좋아하면서도
만나면 짐짓 모른체하던
어느 옛 친구를 닮았네

꽃을 피우기 위해선
쌀쌀한 냉랭함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얄밉도록 오래 부는
눈매 고운 꽃샘바람

나는 갑자기
아프고 싶다

[이해인]
송아지 | 2007.03.15 11:06 | PERMALINK | EDIT/DEL | REPLY
나의 여러가지 얼굴 나의 여러가지 마음 그래도 나 누가 뭐래도 나 스스로 생각해도 나 어쩔 수 없는 나 그래 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나 그래서 아프지만 아픈대로 살아가는 나
후기: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 속엔 끊임없는 생각들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서로 싸우고 누르고 미안해하고 그러면서 살아간다. 옳은 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 내 것이니까
| 2007.03.21 23:53 | PERMALINK | EDIT/DEL | REPLY
비밀댓글입니다
솜사탕 | 2007.03.22 20:20 | PERMALINK | EDIT/DEL | REPLY
꽃이 피는 것을 샘내는 바람이라서 꽃샘바람이라 하던가.
그래서 꽃샘바람을 견디이내고 피는 꽃들이 더 예뻐보이는 것은 그 시샘을 잘 견더내서인가.
세상을 살면서 견디고 참고 모른 척하면서 지나치기도 하지만 종종 밉다고, 싫다고, 힘들다고, 그러지 말아달라고, 아프다고 말하고 싶다.
어제는 아이들이 옷 때문에 둘이 심하게 싸웠다.
하루 종일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에 들어섰건만, 주고 받는 말들이 너무 듣기가 힘들어서 타이르다가 안되길래 억지로 말리기 보다는 둘이 시간을 가지도록 하고 잠시 밖으로 나왔다. 집 근처에서 야끼우동 한 그릇 사먹고 쓸쓸하고 힘들어하는 아픈 나를 달래기 위해 휴대폰도 끄놓고 '복면달호'라는 영화를 혼자 보고 집에 들어갔다.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는 것이 너무 부담이 되어 복면을 쓰고 노래를 부르던 주인공은 편견을 버리고 마지막에 가면을 벗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진심을 담아 노래를 부르게 되고 또한 자신이 좋아했던 락음악에 그 마음과 노래를 담아 더욱 히트를 치게 된다.
'락이나 토릇트 모두가 하트와 마음을 담아 부른다'는 재미있는 말을 주고 받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나의 인생을 이래야만 된다. 적어도 나이가 이 정도면 이렇게 해야된다. 나에게 이렇게 대해주어야 한다. 라는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마음을 이해하고 '그럴 수도 있지'
안이숙여사의 '그럴 수도 있지'라는 책이 생각한다.
| 2013.04.11 09:33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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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무감각한 뿌리들을 흔들어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듯이 지켜주었지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어주고
희미한 생명을 마른 뿌리로 먹여주었지

 

-T. S.   엘리엇, <황무지>중에서 / bhlee역

(from "The Burial of the Dead," The Waste Land- T. S. Eliot)

 

 

-------------

지난주 올 들어 첫 꽃을 보았습니다. 캠퍼스 길가에 노란 수선화 두 송이가 수줍은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곁에는 어느새 푸르러진 풀 섶 속에 작은 제비꽃이 숨어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보아주는 이 있든 없든 말없이 성실히 피어있는 작은 꽃과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나도  '살아서 살아있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슴을 흔드는 4월을 시인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합니다. 이 시는 4월이면 누구나 한번쯤 중얼거려보는 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의 첫 구절입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생명수 같은 봄비가 무감각하던 겨울뿌리를 흔들어 망각의 잠에서 깨워주는데 왜 잔인한 달인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현대인을 메마른 불모의 대지 황무지에 사는 살아있는 죽은 자(the living dead)”라고 말합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것은 참된 사랑에 접근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인식하고 감동할 수 있는 감각들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의식의 무감각함을 흔들어 일깨우면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봄이 때로는 진실의 태양빛처럼 너무 부시고 아려서 그만 눈을 감고 싶어집니다. 4월이 잔인하다든 것은 이렇게 살아있으나 죽은 자처럼(little life) 잠든 채 살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의식의 죽음, 그 비극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들에게 생명과 의식을 일깨우는 4월은 잔인하기만 합니다. 우리 모두 엘리엇의 또 다른 시 구절처럼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어 낼 수 없는(Human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존재들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4월입니다. 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어김없이 푸르러 오는 생명의 계절, 가끔 가던 길 멈추고 물어봅니다. "나는 살기 위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c)2004이봉희, 덴버 중앙일보 연재 문학칼럼 중에서]

| 2007.04.05 05:57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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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 | 2010.12.01 13:09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푸른바다: 이제 4월이군요. 새로운 4월에도 여전히 엘리엇의 황무지를 읇어야 하는게 아직 우리네 현실인 모양입니다. 누가 샀는지는 모르지만 어쨋든 집에 굴러다녔던 삼중당 문고판 '엘리어트 시집'을 통해 그의 시들은 일찌감치 접했었지요. 어릴 때는 좋은 시라고들 하니 읽기는 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감을 잡기가 참 어려웠죠. 하지만 이해는 못해도 멋진 시라는 생각은 하곤 했습니다. 보들레르, 엘리엇... 근대인의 심상을 예리하게 표현한 시인들이지요. 근대에 접어들어 물질적으론 조금더 풍요로와 졌지만 정교해진 논리는 갈수록 공허해지고 그 바탕이라 할 깊은 감수성은 메말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근대인들의 마음의 상태를 예리하게 느끼고 표현한 사람들이 이들 시인이 아닐까 생각해 보곤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시에서 '황무지'를 풍요롭게 할 자양분을 찾기는 힘들다는게 좀 아쉽습니다. 그러한 한계를 견디다 못해 보들레르는 실어증으로 도피하고 엘리엇은 과거로의 회귀를 동경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네 일상에서 신화를 다시 발견하고자 한 제임스 조이스가 대안일까 아니면 건강한 생명의 힘을 재발견하고자 한 D.H. 로렌스가 대안일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하지만 서구보다는 동양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요즈음 저의 가장 주된 생각입니다.
님은 영문학자이신가 봅니다. 직접 번역을 해 주셨네요. 직접 소개해 주시는 좋은 시들 앞으로도 자주 감상하고 또 배워보고 싶네요. 2008-04-01

RE 2008-04-02 10:44:44 맞아요. 무슨 말인지 몰라도 가슴에 남아 메아리치는 구절들이 있어요. 그러다 어느날 그 의미가 새벽안개 걷히듯 깨달아 지는 때가 있기도 하고요. "좋은 시는 내가 자라면 함께 자란다"는 말이 맞나봐요.
아시겠지만 푸른바다님이 좋아하시는 보들레르의 구절이 황무지에서도 나오지요..."위선자 독자여, 나의 동류, 내 형제여!"
대안.... 참 날카로운 지적이세요.
어느날 그 한계에서 아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태그 2008-04-03 22:44:30 역시 직접 번역하신 거라, 일역 참조해서 번역한 것보다 훠얼 낫습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 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생각나요.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breeding, mixing 하는 부분이 운명 교향곡의 맨 처음 주제의 빰빰빰 빠아아암
의 그 뒷 부분 같이 느껴져서요.


RE 2008-04-04 07:23:58 에궁. 감사합니다.
베토벤... 그러네요^^ --ng의 반복되는 리듬 때문일까요?
엘리엇이 낭송한 거 들어보면 참 멋져요.

추억과 욕망을 뒤섞는다 mixing memory and desire 는 말이 늘 저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합니다. 엘리엇의 또 다른 시 구절이 생각나기도 하구요. "Memory, you have the key."라는. 추억은 과거이고 욕망은 미래일 텐데 과거와 미래에서 자유로운 영원한 현재를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것일까요? 어쩌면 정말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과거를 떨쳐내느라, 미래를 쫓아가느라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건 아닌가 가끔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어느새 농활도 다녀오시고 그곳에서 학생들과 벌써 끈끈한 관계가 되셨나 봐요. 어디서나 누군가에게 힘과 희망이 되어주시는 모습 멋지십니다.

태그 2008-04-09 00:29:44 흐흐, 농활이 아니라 모꼬지였어요. 학생 중 한명이 그러더군요, 신임, 아니셨어요? 흐흐.


썸 2009-04-11 00:05:14 해마다 4월이면 생각나는 음악과 시가 있네요..
마침 오늘 모꼬지 모임에서 구두한켤레님께서 april을 듣고 싶다 말씀하시는데..
번역하여 소개해주신 이 시가 떠올라 대문으로 가져갑니다.
^^

RE 2009-04-11 23:15:27 아, 썸님. 4월이 가슴터질듯 문을 열어주네요.
답글있다는 메모가 남겨져서 와봤어요^^
구두한켤레님 잘 계시죠?
4월이 듣고 싶다....참 한켤레님다운 말씀이세요.

생각나서 오랜만에 오늘밤엔 엘리엇이 낭송하는 '4월을 들어'봐야겠어요. ^^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 | 2017.04.06 04:11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Nam Sibyllam quidem Cumis ego ipse oculis meis
vidi in ampulla pendere, et cum illi pueri dicerent:
'Sibyulla pe theleis'; respondebat illa: aponein thelo"
 
             For Ezra Pound, il miglior fabbro
 

For I, by my own eyes, saw Sibylla of Cumis hanging in a jar
and those children when they said: "Sibylla what do you want?";
and she reponded: "I want to die"
 
For Ezra Pound, the better craftman(poet)
 
내가 직접 내 두 눈으로 보았네.
쿠마지방의 시빌라가 유리병속에 매달려있는 것을.
그때 어떤 아이들이 그녀를 찾아와서 물어보길
"시빌라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라고 묻자 그녀는 대답했네
"나는 죽음을 원해...“
               -더 훌륭한 시인인 에즈라 파운드를 위해-   
신다혜 | 2017.05.16 15:29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저도 4월이면, 스무살 그 해 선생님과의 수업에서 읽던 이 시를 기억해요.. 그 교실, 함께 한 사람들, 선생님이, 엘리엇의 시 보다 힘이 쎕니다. 어김없이 4월이면 시는 그때 그 시간을 배달해 주네요!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 | 2017.05.18 14:08 신고 | PERMALINK | EDIT/DEL
앗, 다혜!!! 정말 오랜만이에요.
아가들은 예쁘게 잘 크고 있죠?
보고 싶네요.
| 2020.04.07 23:26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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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 오닐 - 그래미상 수상 축하합니다!!!

Richard Yongjae O’Neill wins Grammy with concerto recording.

 

Schubert Arpeggione Sonata

New York Classical Players
Dongmin Kim, conductor
Richard Yongjae O'Neill, viola

May 1, 2015
W83 Concert Hall, New York, NY

 

| 2016.01.15 15:35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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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박정대>

 

고통이 습관처럼 밀려올 때 가만히 눈을 감으면 바다가 보일 거야
석양빛에 물든 검은 갈색의 바다, 출렁이는 저 물의 大地

누군가 말을 타고 아주 멀리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보일거야
그럴 때, 먼지처럼 자욱이 일어나던 生은 다시 장엄한 음악처럼 거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되돌아오기도 하지

북소리, 네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들어봐
고독이 왜 그렇게 장엄하게 울릴 수 있는지 네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어봐

너를 뛰쳐나갔던 마음들이 왜 결국은 다시 네 가슴속으로 되돌아오는지
네 가슴속으로 되돌아온 것들이 어떻게 서로 차가운 살갗을 비벼대며 또다시 한 줄기 뜨거운 불꽃으로 피어나는지

고통이 습관처럼 너를 찾아올 때 그 고통과 함께 손잡고 걸어가 봐
고통과 깊게 입맞춤하며 고독이 널 사랑할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너만의 보폭으로 걸어가 봐

석양빛에 물든 저 검은 갈색의 바다까지만
장엄한 음악까지만

[아무르 기타, 문학과사상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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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 도종환]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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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지 못하면 내일도 없다.
내일은 언제나 오늘 다음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평생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중에....라고 하면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목표를 위해서는 현재를 인내하고 참아야한다는 것이 너무 깊이 학습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목표지향적이고 성과지향적인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은 늘 내일만 바라보고 현재를 건너뛰라는 듯했다.

그래서 Carpe Diem이라는 말을 한다. 오늘을 즐겨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오늘을 즐기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가장 귀중한 순간임을 잊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내일을 위해서 내가 살아있는 이 순간을, 오늘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게 이 소중한 오늘이 단지 "내일의 전날"일 뿐인 것은 아닐까. 그 내일이 또 ‘오늘’이 될 텐데.

내일 쓰려고 오늘 쓰지 않은 편지는 영원히 쓰지 못할 것이다.
오늘을 살지 못하면, 나는 그저 영원한 귀가길에 있을 뿐 집에는 영영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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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과수원으로 오세요
석류꽃 만발한 곳, 햇살과 포도주와 연인들이 있어요.
당신이 혹 안 오신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있겠어요.
당신이 혹 오신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있겠어요.

                                             (루미/ 이봉희 역)

 

 

photo fr gardening books-Virginia Woolf's garden
(used here only for therapeutic purpo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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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 본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꼽으라면 당연히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를 빼 놓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티니 컬리지의 정원이 더 먼저 떠오른다.

 

그 곳은 "아, 좋다"라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고요함과 숙연함을 느끼게 하던 공간으로 내 가슴에 남아있다. 아무도 없는 어둑한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안개처럼 어둠이 내리는 그곳에서 같이 수업 듣던 일본에서 온 학생(선생)과 함께 아무 말 없이 한 동안 앉아 있다가 온 기억이 난다. 휴식과 사색의 공간! 사람들의 의미 없는 소음에 지친 요즘, 나도 그런 의미 없는 말을 하고 있는 요즘, 그 곳에 다시 가고 싶다.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도!

 

그런데 시인은 말한다.
이 가슴 벅찬 아름다움이 당신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니 당신이 있다면 또 이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말이 없어도 좋은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 더욱 그리운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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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아프다고 말하지 못할까?

- 상처의 대물림

   

영화 <다크나이트>를 보면 악의 상징인 조커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당하면 그 누구라도 자신과 같은 악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주고자합니다. 시민들의 희망인 고담시의 정의로운 검사 하비덴트는 그런 조커에게 희생되고 맙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서 조커와 똑같은 악의 화신이 되는 것이지요. 영화에서 보여주는 하비덴트의 이중적인 얼굴, 즉 반은 손상되기 이전의 온전한 모습, 나머지 반은 화상을 입고 괴물로 변한 얼굴은, 조커가 원하던 대로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고 만 안타까운(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요즘은 우리나라에도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 건강의 중요성이 일깨워지면서 상담과 치료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의료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야뿐 아니라 자가치료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특히 미술, 음악, 연극 등의 예술치료에 이어 문학치료와 글쓰기치료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지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나는 아프지 않은데, 치료 따위가 왜 필요하냐는 것이지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자연스럽게 관계의 문제로 고통 받는 경험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피할 수 없는 이 고통스런 관계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발견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악하기 이전에 심히 병들었다는 것을, 가해자는 가해자가 되기 이전에 먼저 피해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렇게밖에 살아남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저 사람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고 말합니다. 참 슬픈 말입니다. 이 말에는 그냥 거짓말을 쉽게 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저 사람은 거짓이 생존의 수단()이라는 뜻이며,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달리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도 가해자이기 이전에 하비덴트처럼(그리고 조커처럼) 피해자인 것입니다. 가해자의 뒤에는 반드시 또 다른 가해자(특히 어린 시절의 가정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악의 승리는 상대의 파멸 혹은 선의 파멸이 아니라 상대를 또 다른 악으로 만든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나는 흡혈귀론이라고 말합니다. 흡혈귀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단순히 누군가를 죽게 하지 않습니다. 흡혈귀는 자기에게 물린자를 또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살 수 있는 상태, 즉 자신과 똑같은 또 하나의 악을 만들고야 맙니다. 이렇게 악은 대물림되듯 연속적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괴물과 싸웠으나 괴물이 되지 않았다는 니체의 말은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이 병들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병을 전염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성복 시인의 말했듯이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치는 노인과 교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이성복, <그날> 중에서

 

나보다 더 약한 상대를 희생자로 삼는다.

어떤 부모도 자신의 질병을 자녀에게 대물림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독감에 걸렸을 때 자녀 앞에서 대놓고 재채기를 하거나 기침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부모도 자녀의 입에 일부러 담배연기를 일부러 불어넣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독감 균보다, 담배연기보다 더 치명적인 파괴적 언어의 독을 아이들 앞에서 재채기처럼, 담배연기처럼 마구 쏟아내고 뿜어냅니다. 내가 들었던 더없이 끔찍한 그 말들을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고스란히 그 누군가에게 다시 퍼부어댑니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부모의 잔소리나 비난을 무의식중에 나의 자녀에게 똑같이 반복하는 경우는 아주 흔한 일입니다.

우리는 내가 받았던 유형과 무형의 폭력을 그 누구에겐가 다시 휘두릅니다. 이때 그 누군가는 나에게 다시 복수할 힘이 없는 안전한 상대, 즉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녀보다 더 연약한 존재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악은 무엇보다 부모에게서 (사실은 우리가 누구보다 먼저 보호해주어야 할) 자녀에게로 대물림됩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복수의 대상을 찾지 못한 경우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복수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찌른 칼을 뽑아서 다시 내가 나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우울증이 되고 자존감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돌출된 악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나만의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나를 병들게 한 그 불행이 그대로 그 누군가에게 대물림되기 때문입니다. 치료받지 못한 희생자인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가해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건강해져야 한다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정신분열증에 걸린 어머니가 자주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자랐습니다. 예고 없이 발작을 일으키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아이는 매번 공포에 질렸지만 아무에게서도 어머니의 그런 행동에 대해 설명을 듣지 못했습니다. 소년은 자라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딸아이에게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좋아하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는 어린 딸의 모습을 보며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이건 꾸며낸 이야기야. 아빠가 곁에 있잖아라고 위로해주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정말 딸을 보호해주는 다정한 아버지일까요? 그는 자기 아이의 두려움을 교묘하게 조종하면서 자신이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라고 심리학자 엘리스 밀러(Alice Miller)는 말합니다. 그의 의식적인 소망은 자신에게 박탈되었던 것, 즉 보호와 위로, 공포에 대한 설명을 딸아이에게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 아버지가 무의식적으로 아이에게 전해준 것은 바로 자신이 어린 시절 겪었던 두려움과 재난의 예측 그리고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의 대물림이었습니다.

 

왜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이토록 두렵게 하는 거지?”

 

그래서 우리에게 치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부모 자신이 먼저 과거 속 고통의 거미줄을 거두어내고, 자신과 자신의 행복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도록 건강하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나는 불행하면서 자녀에게 행복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먼저 행복하면 자녀는 자연히 행복해집니다. 나의 고통을 가장 사랑하는 자녀와 가족, 또는 그 누군가 무고한 사람에게 반복해서 악을 전파하는 불행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의 정원에서 악마를 쫓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악마를 당신 아들의 정원에서 다시 발견할 것입니다.”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료 카페>(생각속의 집) 중에서

저작권이 있으므로 정확한 출처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음.

| 2019.11.21 20:06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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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 | 2019.11.24 23:24 신고 | PERMALINK | EDIT/DEL
에궁.. 저도 그래요 선생님.
완벽한 사람은 없잖아요. 완벽한 엄마도 없고요. 그런 엄마 마음을 아이에게 표현하셔도 좋을 듯 해요.
그리고 저도 정말 아이 말대로 선생님이 충분히 좋은 엄마셨으리라 생각해요.
윤임경 | 2019.11.21 20:08 | PERMALINK | EDIT/DEL | REPLY
교수님 혹시 이 글,대학원 문학치료 까페에 옮겨도 되는지요??
bhlee | 2019.11.22 21:49 | PERMALINK | EDIT/DEL
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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