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방문객을 만나러 가는 길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만나러 가는 길)* 잎하나 내 발 앞에 날아와 앉았다. 붉게 물들어 가는 제 몸 한쪽엔 고집스럽게 나는 물들지않겠다 자신을 지키는 노란 빛이 당당하다.
그 작은 잎 데려다 마음에 심었다 마른 잎 속 작은 나무가 가지를 뻗고 있다. 해와 달을 그렸다. 갑자기 영원 같은 공간에 서 있다 내가 서있다 떨어진 잎이 아닌 나무로.
<bhlee 111325> *정현승 시인을 인용했음 ㅡㅡㅡㅡㅡ 나도 모르게 해와 달을 그려넣다가 내가 장욱진을 흉내내나보다 혼자 웃었다. 내가 처음 장욱진 그림을 만났던 그 먼 옛날, 나의 첫 탄성은 그의 그림 속 시/공간을 초월한 순수한 세상이었다. 해와 달이 공존하는 세상. 자연과 사람과 선한 동물이 나무 속에, 나무 위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세상. ㅡㅡㅡㅡㅡ
그렇게 소중했던가 - 이성복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 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 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ㅡ김남조 11월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곁을 내주지 않고 인색하던 눈부신 가을하늘이 드디어 찾아와주었다. 감사하다! 길고 긴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아름다움.... 지난 3일간 매일 연이어 세 분이 하늘로 떠나신 소식을 들었다. 이 나이에 점점 자주 마주하게 될 현실이다. 그래도 먹먹했다. 마지막은 그것이 무엇이든 비록 순리이고 아름다울지라도 “슬픔"이다. 가을이 조금씩 떠나가는 11월, 오늘 산책 길에 더더욱 내 마음을 물들인 노을처럼. 노을로 가는 길이 “천천히” 라고 일러준다. 이 말이 이젠 속도가 아니라 한 걸음도 의미있게..로 읽힌다. ㅡㅡㅡ photos by bhlee(110225)
아주 오래전 언젠가 이런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도도히 버티던 안나푸르나 봉도 결국 인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히말라야 정상 등반에 성공할 때마다 언론은 대대적인 보도를 합니다. 이때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바로 ‘정복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생각하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루어낸 승리지, 자연과 싸워서 이기거나 정복해서 얻은 승리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승리를 내 밖의 어떤 적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여길까요? 더군다나 자연은 우리와 싸우기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자연과 사람을 꼭 싸워 이겨야 하는 경쟁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이 이기적인 가치관은 우리의 마음을 씁쓸하게 합니다. 이런 씁쓸한 표현 말고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저 멀리서 우리를 기다리던, 너무 높고 험한 곳에 존재해서 만날 수 없었던 봉우리를 드디어 만나러갔다고요. 그 만남을 위해 모험을 했고, 드디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등정 과정에서 실패한 사람들, 때로는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모두 "정복"에 실패한 낙오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마치 무슨 침략 전쟁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모두 같은 승리자입니다. 그들 역시 ‘산이 거기 있어서’ 만나러 갔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매 순간 살아 있었던 분들입니다. 이런 도전은 그 자체로 이미 승리입니다. 만일 우리의 행동을 모두 결과로만 판단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거나, 심하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지 모릅니다. 봉우리에 오르지 못하면 그동안의 내 모든 노력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저 높고 험한 산에 오르는 일이 결국엔 다시 내려오기 위함이듯 우리들의 모든 여행은 역설적이게도 결국 집으로 향하는 일입니다. 집으로 향하는 외출이 곧 여행입니다. 다만 집으로 다시 돌아온 우리는 예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내가 되어 있습니다. 힘겨운 여정을 거쳐 오는 동안 우리는 한 걸음 더 ‘나’를 실현시키며 한층 성숙한 ‘나’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결과만으로 나의 여행, 나의 사랑, 나의 꿈과 모험이 허망했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어떤 과정도 무의미한 실패는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성실하고 묵묵히 나를 도전하며 나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해안가의 수많은 모래알들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찾아내든 그것은 결국 언제나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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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는 낮잠을 자서 거북이에게 졌다.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토끼가 잠을 잔 이유는 승리가 너무나 뻔해서 성실하게 끝까지 뛰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승리가 뻔한 경주를 왜 했을까요? 이기는게 목적이니까요. 그런데 거북이는 왜 바보 같이 "결과"가 너무도 뻔한, 당연히 패배할 웃음거리가 되는 경주에 참여했을까요? 거북이는 토끼를 이기는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스스로에게 도전한 것입니다. 이 기회를 통해 자신에게 도전한 것입니다. 토끼와 경주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경기를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승리자"일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비유적으로 우화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가을하늘이 숨이 막히도록 푸르게 점점 높아만 갑니다. 어느새 한해도 이 가을이 질 때 함께 저물어갈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은 물처럼 내 손에 잡히지 않지만 우리에겐 잊히지 않는 이야기들이 시간의 굽이굽이마다 꽃으로 피어납니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꽃은 국화와 코스모스입니다. 싸늘한 국화의 향기가 쓸쓸함과 외로움, 고독함의 냄새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코스모스는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트이고 싶은 마음,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던 우리 가슴 깊은 곳의 이루지 못한 '간절함'을 그리움이란 설움으로 말없이 피워내고 있는 코스모스를 보면서 남은 한 해, 나의 그 간절함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고 싶습니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이 오늘도 목이 가늘도록 날 바라보며 손짓하고 있는 데 나는 무심히 등 돌리고 부지런히 세상의 물결을 쫓아 떠밀려가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 한해가 저물기 전에,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문득 뒤돌아 달려가 그 그리움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그리움은 내 가슴 깊은 속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이며 온전히 꽃피워야할 '나의 참 모습'입니다. 고달프고 외로운 나그네로 세상에 살되 영원한 고향을 기억하며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나를 일깨워 살아있게 하는 손짓입니다. 저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가 파랗게 파랗게 부셔져 하늘과 나, 하나가 되는 그날을 위해.. -[ 덴버 중앙일보 칼럼, <내 마음의 작은 새>중에서]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