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있는가. 곧 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기형도 -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크리스마스를 위하여ㅡ김시태

 

 

​너무 많이 걸었습니다
희미한 고향집과 어머니
그 개구쟁이들
그들을 도로 돌려주소서
조그만 카드 속에 정성을 담던
그 소년들도 돌려주소서
첫아이 보았을 때 기도드리던
그 아빠와 엄마도 돌려주소서
아이들과 손잡고 이야기하며
성당을 찾던 그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한 번 더 그 종소리 듣게 하시고
눈 내리는 아침을 걷게 하소서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소서

[왼 손 - 도종환]

 

말 없는 왼손으로
쓰러진 오른손을 가만히 잡아주며
잠드는 밤

 

오늘도 애썼다고
가파른 순간순간을
잘 건너왔다고

 

제 손으로
지그시 잡아주는
적막한 밤

 

어둠속에서
눈물 한방울 깜빡깜빡
그걸 지켜보는 밤

즐거운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속을 
헤매일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언제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옆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노 잃은 나룻배 - 한영기

때로는 나아가고
때로는 되돌아가고
때로는 멈추고 싶지만
노 잃은 나룻배
나에겐
부질없는 바람일 뿐.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물결 흐름 따라
그저 힘없이 떠내려가야만 한다.

이 무능력함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부디 내 가는 그곳이
지나온 곳보다 나은 곳이길
기도하는 것 뿐.

나무- 곽재구

 

숲속에는

내가 잘 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를 만나러

날마다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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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opper-NY Office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다가
나는 알게 되었지
이미 네가
투명인간이 되어
곁에 서 있다는 것을
그래서 더불어 기다리기로 한다

[성북역 - 강윤후]

 

장미와 가시 - 김승희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 몸을 만지면서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라고

 

장미꽃이 피어난다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가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이 가을에]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나태주

 

 

photos by bh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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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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