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에 해당되는 글 301건

너무 어렵게 이야기하며 살지 말자 - 강재현 

 

너무 어렵게 이야기하며 살지 말자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하고 살자

 

너무 어렵게 셈하며 살지 말자
하나를 주었을 때 몇 개가 돌아올까
두 개를 주었을 때 몇 개를 손해 볼까
계산 없이 주고 싶은 만큼은 주고 살자


너무 어렵게 등 돌리며 살지 말자
등 돌린 만큼 외로운 게 사람이니
등 돌릴 힘까지 내어 사람에게 걸어가자
절망 끝에서 건져올린 희망이 되어

막다른 곳에서- 오세영

그렇게 마냥 서 있었다.
한곳에
기다림의 막다른 곳에
걸어서 걸어서
이제 서 있어도
걷는 것이 된
그것을 나무라 할까,
그것을 꽃이라 할까,
산마루에 멍청히 서 있는 측백 혹은 소철 한 그루
걷다가 걷다가 지쳐
짓누르는 어깨의 세상 짐들을 부리고
너의 이름을 부리고
너를 부리고
마침내 막다른 그곳에 와서
나무는
세상을 늘어뜨린 제 그림자를 걷으려
스스로 꽃과 잎을 벗어버린 채
홀로 하늘을 진다.
산이 된다.

"쓸쓸하지 않은 따스함을 당신은 보셨는가?" - 허수경

----------------------------

"살아 있는 동안의 기록
읽히지 않고 들릴 때도 있다
한 장 한 장
오래오래
시간이 안쓰럽게 우리를 번역하고 있었다
비 오기 직전 구름 같은 우리의 마음을
마음의 생애를
그러다 언제쯤
당신과 나는 누군가가 듣고 있는
이 지구에 없는 목소리의 유랑인이 될 거다
아무도 건설해본 적 없는 국도를 걷는 아픈 고아,
꿈꾸는 귀가 듣는 발자국일 거다"
<허수경, "듣는 책" 일부>
허수경 시인은 말한다. "고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데, 기댈 전통이 외부에 있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전통이라는 것에 기대면 스스로를 베끼는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위기감" 때문에 "시인으로서 나의 존재는 고아"라고.
"그 박하의 나날 동안 보라빛 박하꽃은 피고
숲 속에 들어간 벌 한 마리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니? 나는 나에게 물어본다.
......
나는 나에게 물어본다 박하의 나날 동안 나를 동반한 것은
박하와 나 뿐. 이 절대의 향기는 시간의 눈물 같은 것이었다."
<허수경, "박하의 나날" 일부>
===================
 
허수경 시인 (1964~2018)
아까운 분. 지도 교수로 만났던 독일인 남편을 두고 암투병 중 젊은 나이에 그만 세상을 떠났지.
찬란한 시를 쓰는 날들을 '박하의 나날'이라 고백하던 시인.
내가 이를 수 없는, 가 닿을 수 없는 깊이의 눈과 진솔한 고뇌와 쓸쓸함, 그리고 따스함의 언어를 가진 시인. 그 언어의 깊이는 시인의 말대로 어쩌면 꿈꾸는 귀가 되어야 들을 수 있는 발자국인지 모르겠다.
그녀의 시에서 나는 nostalgia라는 슬픔을 읽는다. (좀 더 근원적인 의미의 노스탈지아.)
"쓸쓸하지 않은 따스함을 당신은 보셨는가?
따스한 쓸쓸함을 당신은 보셨는가?
따스함이 쓴 쓸쓸의 안경
서럽고 따뜻하고 흐릿하다"
시인의 이 시구절을 그녀에게 되돌려 말해주며 말 건네본다.
쓸쓸하다 내가 말하는 것이 그 언어에 왠지 죄스러운 이 저녁에

들판을 푸르게 하는 것은 잡초다 -이문조

 

  저 푸른 들판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들판을 푸르게 하는 것은
  잘난 장미도 백합도 아니다

  이름도 없는
  있어도 불려지지도 않는
  잡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각기 자리 잡아
  제 역할에 충실한 들풀

  그들이 들판을 푸르게 한다
  소리 없는
  그들이 세상을 지탱한다.

 

   - 2009년 월간 <한비문학> 

<비오는 날 - 마종기>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날 때
환한 불이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ㅡㅡ

 

오늘 빗속을 오래 걸었다
옷과 발이 다 젖었지만
마음은 메마른 사막이었다.

참 오래도 그리 걸어왔다
젖지 못한 채,

마냥 퍼붓던 굵은 빗속을. 

그래, 그래,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끄덕 끄덕
시인의 말을 중얼거리며.

 

 

MP 080420

 

 

하지만 어린왕자야,  너의 조그만 별에서는 의자를 몇 발짝 옮겨놓기만 하면 돼.
그러면 네가 원할 때면 언제라도  저무는 하루와 지는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거야.

"어느 날인가," 네가 말했지, "난 해가 지는 걸 마흔 네번이나 보았어!"
그리고는 잠시 후 너는  이렇게 덧붙였지:  "...사람들은 너무나 슬플 때 해지는 모습을 좋아하게 돼..."

"그럼 너 그렇게 많이 슬펐었니...," 내가 물었다,  "마흔 네번의 노을을 본 날?"  

그러나 어린 왕자는 대답이 없었다.
--------

But on your tiny planet, my little prince, all you need to do is move your chair a few steps.
You can see the day end and the twilight falling whenever you like...
"One day," you said to me,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And a little later you added:
"You know-- one loves the sunset, when one is so sad..."
"Were you so sad, then?" I asked, "on the day of the forty-four sunsets?"

But the little prince made no reply.

만일 당신이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싶거든, 그 누군가를 잘 알고 싶다면.....그가 웃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의 웃음이 친절하고 후하다면, 그는 선한 사람이다.  -도스토엡스키


잎 지는 초저녁, 무덤들이 많은 산 속을 지나왔습니다. 어느 사이
나는 고개 숙여 걷고 있습니다. 흘러 들어온 하늘 일부는 맑아져
사람이 없는 산 속으로 빨려듭니다. 사람이 없는 산 속으로 물은
흐르고 흘러 고요의 바닥에서 나와 합류합니다. 몸이 훈훈해집니다.
아는 사람 하나 우연히 만나고 싶습니다.

무명씨,
내 땅의 말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그대......

[신대철 -사람이 그리운 날1]

 

------

'아는 사람 하나 우연히 만나고 싶다'는 시 속 사람의 말이 여러겹으로 가슴에 남는다. 
그 사람은에서  사람이 없는 산, 무덤만 가득한 산에서 그늘진 빛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그가 산에서 내내 만난 이들은 만날 수 없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무명씨,

이땅의 말로는 부를 수도 없는 잠든 이들뿐. 

그가 그 산을 내려와 만난 건 

그가 지나온 산에서부터 자신처럼 굽이굽이 흘러 하산한 물 뿐이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아니,

혼자라는 걸 다시 깨닫는다. 

-------------

지난 주 원광대에서 "고립의 시대"에 대해서 특강/워크숍을 마쳤다. 3번째 초청해준 그 학회에 감사하다. 
마침 내가 올해는 지난 가을부터 계속 한국에 있어서 그동안  특강을 3-4곳에서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한달 넘게 수없이 100페이지 넘는 PPT를 수정하고 또 수정하며 고립-단절-외로움에 대해서 끝없이 생각했다 
이미 몇달전부터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던 중이었기도 했었기에

나는 고립 중에 가장 중요한 한 주제에 집중하고 싶었다. 

 

다녀와서 좀 아팠다. 탈진? 아쉬움?  어떻게 그 짧은 시간 그 길고도 깊은 이야기를 다 나눈단 말인가?

메인 디쉬는 맛도 못보여주고 애피타이저로 끝난 듯해서  와서 끙끙 앓았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칼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바람이 너희 사이엣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말라

그보다 너희 영혼과 영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속에 묶어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질만이 너희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득료애정통고.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실료애정통고,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

나는 선생님의 다듬어져 알려진 5월이라는 글보다 이 처음 글이 더 좋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하지만 피천득 선생님이 "지금 가고 있다"고 말한 5월, 

그 5월의 의미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읽을 때마다 의미가 깊어진다. 

오래된 농담-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 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를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그대 - 비스듬히여.
시인은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라고 말한다.
가만히 읽어보면 마치 비스듬히 하고 그 이름을 불러주며 말하는 것 같다.
비스듬히는 이제 어딘가에 기대는 기울어진 모습의 특징을 묘사하는 부사가 아니다.
'다른 비스듬히'라고 말하면서 시의 후반에서 더욱 확실해지지만
그런 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라고 명명하고 호명해주는 것이다.
다정하게 불러주는 것이다. 괜차나 그렇게 서로 기대는 거야.
 
맑기도 흐리기도 한 공기에 기대는 존재, 당연히 맑기도 흐리기도 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시인의 다정한 호명에 의해 아름다운 이름과 정체성이 된다. 
 
"공기에 기대다"ㅡ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가.
공기에라도 기대며 살아가는 우리가 당연하고 당당해진다. 

나, 비스듬히도 오늘 흐린 공기에 편안히 기댄다. 
이젠 흐림 속에서도 그 너머 여전히 존재하는 맑음과 빛을 알기에
공기의 흐림도, '나의 흐림'도 의미있고 소중하다는 걸 믿으며, 감사하며... 

 

-----

photo by bhlee4426



  

지상의 꽃 - 오세영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설령 그것이 죄가 된다 해도
이제 어찌 할 수 없구나.
아침마다 우짖는 산새도,
저녁마다 바자니는 다람쥐도
지금은 눈에 없어.
나는 다만 하늘을 우러르는 한 마리
슬픈 짐승,
낮에는 햇빛으로 환하게 눈멀고
밤에는 등불로 활활 타오를 뿐이다.
지상은
어느덧 가을,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어이 할꺼나,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영원한 그리움이 끝내
한 떨기 불길로 타오르다 사라지는
지상의 꽃.


--
어찌할 거나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들 하늘을 가릴 수 있을까?


상처가 더 꽃이다 - 유안진

어린 매화가 꽃 피느라 한창이고
사백 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섰다
등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으로 보이는가
백 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 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 맡아 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꽃인 것을

3월의 바람 속에 - 이해인

  필까 말까
  아직도 망설이는 꽃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열까 말까 망설이며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쌀쌀하고도 어여쁜 3월의 바람
  바람과 함께
  나도 다시 일어서야지
  앞으로 나아가야지.


마지막 공부 - 홍윤숙 

무거운 몸 함께 갈 수 없어
자리에 눕혀 놓고
마음 홀로 문을 나서면
동서남북 캄캄한 밤
길도 없는 하늘에 별 하나 뜰까

어린 왕자 사는 별은
어디쯤일까
몸을 떠난 혼은 그 때
어떤 마음으로 어느 산 굽이 돌며
지척일까

한 생애 무거운 살 벗어 놓고
고통의 뼈도 내려 놓고
가볍게 가볍게 깃털 하나로
약속된 시간 지체없이 돌아가는
귀향의 길

마침내 알리라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그리고 눈뜨고 귀 열리리라
삶은 끝없이 꾸는 꿈이고
죽음은 비로소 깨어나는 현실임을

그날을 위해 날마다
은사시나무 가지 끝에 부는 바람
가슴으로 새기며
남모르는 마지막 공부에
밤이 깊다

따뜻한 슬픔- 홍성란

너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차마, 사랑은 네 여윈 얼굴 바라보다 일어서는 것. 묻고 싶은 맘 접어 두는 것. 말 못 하고 돌아서는 것. 하필, 동짓밤 빈 가지 사이 어둠별에서, 손톱달에서 가슴 저리게 너를 보는 것. 문득, 삿갓등 아래 함박눈 오는 밤 창문 활짝 열고 서서 그립다, 네가 그립다, 눈에게만 고하는 것. 끝내, 사랑한다는 말 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것.

숫눈길,
따뜻한 슬픔이
딛고 오던
그 저녁.

---

사랑에 법이 있다는 것을 사랑받는 동안은 아무도 모른다.
홀로 뒤돌아 오는 길목에서나 가슴 시리게 깨닫는 것, 그게 사랑의 법인지 모른다.
아니, 그 시린 한겨울 굳은 가슴 저 아래에 여전히 따스한 봄 같은 사랑의 강이 흐르는 그런 사람만이 깨닫는 게 사랑의 법인가 보다.  외길 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아는, 서로 사랑하는 동안은 알 필요 없는 이상하게 빛나는 사랑의 법. 

그 어둡고 추운, 푸른 - 이성복 

겨울날 키 작은 나무 아래
종종걸음 치던
그 어둡고 추운 푸른빛.

지나가던 눈길에
끌려나와 아주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살게 된 빛

어떤 빛은 하도 키가 작아.
쪼글씨고 앉아
고개 치켜들어야 보이기도 한다

더딘 사랑  - 이 정 록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