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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슬픔- 홍성란

너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차마, 사랑은 네 여윈 얼굴 바라보다 일어서는 것. 묻고 싶은 맘 접어 두는 것. 말 못 하고 돌아서는 것. 하필, 동짓밤 빈 가지 사이 어둠별에서, 손톱달에서 가슴 저리게 너를 보는 것. 문득, 삿갓등 아래 함박눈 오는 밤 창문 활짝 열고 서서 그립다, 네가 그립다, 눈에게만 고하는 것. 끝내, 사랑한다는 말 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것.

숫눈길,
따뜻한 슬픔이
딛고 오던
그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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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법이 있다는 것을 사랑받는 동안은 아무도 모른다.
홀로 뒤돌아 오는 길목에서나 가슴 시리게 깨닫는 것, 그게 사랑의 법인지 모른다.
아니, 그 시린 한겨울 굳은 가슴 저 아래에 여전히 따스한 봄 같은 사랑의 강이 흐르는 그런 사람만이 깨닫는 게 사랑의 법인가 보다.  외길 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아는, 서로 사랑하는 동안은 알 필요 없는 이상하게 빛나는 사랑의 법. 

그 어둡고 추운, 푸른 - 이성복 

겨울날 키 작은 나무 아래
종종걸음 치던
그 어둡고 추운 푸른빛.

지나가던 눈길에
끌려나와 아주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살게 된 빛

어떤 빛은 하도 키가 작아.
쪼글씨고 앉아
고개 치켜들어야 보이기도 한다

더딘 사랑  - 이 정 록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나면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비 오는 날- 마종기]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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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 한다

가만히 눈을 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참 좋은 당신 - 김 용 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좋은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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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잘 알려진 시이다.

생각만 해도

좋은

당신

나는 어떤 사람이 참 좋은가?

늘 환히 웃어주는 자?

누가 늘 환히 웃을까?

 

시인은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ㅡ그는 어둠을 건너온 자라고 말한다. 

그의 웃음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어둠을 아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이다. 
그의 존재가 어둠을 밝히는 깨끗한 빛이다. 
그게 그의 웃음이다. 


어둠을 건너 온 자... 어둠을 아는 자,  그래서 

삶이 끝나는 날까지 수없이 지나야할 어둠의 길목과 터널마다 

그 자신이 빛이 된 사람,

참 좋은 당신. 

[덕담 한마디- 김지하]

 

    새해에는 빛 봐라
    사방문 활짝 열어제쳐도
    동지 섣달
    어두운 가슴속에서 빛 봐라
    샘물 넘쳐흘러라
    아이들 싱싱하게 뛰놀고
    동백잎 더욱 푸르러라
    몰아치는 서북풍 속에서도
    온통 벌거벗고 싱그레 웃어라
    뚜벅뚜벅 새벽을 밟고 오는 빛 속에
    내 가슴 사랑으로 가득 차라
    그 사랑 속에
    죽었던 모든 이들 벌떡 일어서고
    시들어가는 모든 목숨들
    나름나름 빛 봐라
    하나같이 똑 하나같이
    생명 넘쳐흘러라
    사방문 활짝 열어제쳐도
    동지 섣달
    어두운 가슴속에서
    빛 봐라
    빛 봐라
    빛 봐라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 이기철

  

나팔꽃 새 움이 모자처럼 볼록하게 흙을 들어 올리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질까 두렵다

어미 새가 벌레를 물고 와 새끼 새의 입에 넣어주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따뜻해질까 두렵다

 

몸에 난 상처가 아물면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저 추운 가지에 매달려 겨울 넘긴 까치집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이 도시의 남쪽으로 강물이 흐르고 강둑엔 벼룩나물 새 잎이 돋고 동쪽엔 살구꽃이 피고

서쪽엔 초등학교 새 건물이 들어서고 북쪽엔 공장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서문시장 화재에 아직 덜 타고 남은 포목을 안고 나오는 상인의 급한 얼굴을 보면

찔레꽃 같이 얼굴 하얀 이학년이 가방을 메고 교문을 들어가는 걸 보면

눈 오는 날 공원의 벤치에 석상처럼 부둥켜안고 있는 가난한 남녀를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 세상 여리고 부드러운 것만 사랑한 셈이다

이제 좀 거칠어지자고 다짐한 것도 여러 번, 자고 나면 다시 제 자리에 와 있는 나는

아, 나는 이 세상 하찮은 것이 모두 애인이 될까 두렵다

흙으로 그릇을 빚는데

그 안에 빈자리가 있어

그릇으로 쓰네

- 노자 [도덕경] 11장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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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고 

없음은 쓸모를 위한 것이다.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고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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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하나씩 비워야하는 시간

비움도 "빚는 일"임을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맬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언제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아버지의 전화 - 김수원 (2024 시민공모작)

 

아픈 데는 없니

그게 사랑한다는 말이다

별일 없니

걱정된다는 말이다

 

바쁘니

보고 싶다는 말이다

나는 괜찮아

외롭다는 말이다 

 

문득 전화가 뚝 끊어지는 것은 

울고 있다는 말이다

많이 아프다는 말이다

 

위로받고 싶다는 말이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 이성복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 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 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가을-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가을날 맑아-나태주

 

잊었던 음악을 듣는다.

잊었던 골목을 찾고

잊었던 구름을 찾고

잊었던 너를 찾는다

아, 너 거기

그렇게 있어줘서

얼마나 고마운가 좋은가

나도 여기 그대로 있단다

안심해라 손을 흔든다

여름 한때 -천양희 

 

 

   비 갠 하늘에서 땡볕이 내려온다. 촘촘한 나뭇잎이 화들짝 잠이 깬다. 

공터가 물끄러미 길을 엿보는데, 두 살 배기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간다

  생생한 생(生)! 우주가 저렇게 뭉클하다

  고통만이 내 선생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몸 한쪽이 조금 기우뚱한다

 

  바람이 간혹 숲 속에서 달려나온다. 놀란 새들이 공처럼

튀어오르고, 가파른 언덕이 헐떡거린다.

웬 기(氣)가 ― 저렇게 기막히다

 

  발밑에 밟히는 시름꽃들, 삶이란

  원래 기막힌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다시

  숨을 쉬며 부푼다. 살아 붐빈다.

그래도 

 

사랑했다

좋았다

헤어졌다

그래도 고마웠다.

 

네가 나를 버리는 바람에 

내가 나를 더 

사랑할 수 있었다. 

 

ㅡ나태주 

 

 

9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9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9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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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김진호

꽃밭 한가운데 엄마가 있어
그녀의 주변엔 꽃밭이 있어
아름답게 자란 꽃밭이 있어
티브이를 켜고 잠이 들어버리는 일이
어느새 익숙해진 한 사람
티브이 속에서 나오는 수많은 얘기에
혼자서 울고 웃는 한 사람
엄마의 사진엔 꽃밭이 있어
꽃밭 한가운데 엄마가 있어
그녀의 주변엔 꽃밭이 있어
아름답게 자란 꽃밭이 있어
초록빛 머금은 새싹이었지
붉은빛 머금은 꽃송이였지
나를 찾던 벌과 사랑을 했지
그 추억 그리워 꽃밭에 있지
나는 다시 피어날 수 없지만
나를 찾던 벌도 사라졌지만
나의 사랑 너의 얼굴에 남아
너를 안을 때 난 꽃밭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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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쓴다 ㅡ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이 진 자리에 잎이 폈다고 너에게 쓰고
잎이 진자리에 새가 앉았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 풍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