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에 해당되는 글 303건

결심 - 전욱진 

 

휘청거리다

넘어지려다

그래 무너지자, 하고

마음먹은 나를 옆에서

꼭 붙잡는 사람은 마치

곁에 있는 사람처럼

 

그리워하지도 

잊지도 않은 채

마음의 눈으로 보았다

절대로 지지 말라는 듯

무너지는 마음 정도는

괜찮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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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곁에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 곁에 있어주길 원하는가?

그에게 '나'는 그리움의 대상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타성에 젖은 관계도 아니다.
그에게 나는 잊지 않고 기억하는 대상이다. 그는 나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무너지는 마음 정도는 괜찮다는 듯 마음을 건네면서 넘어지지 말라고 잡아 주고 버텨준 그의 마음을 읽는다.
그건 넘어지면 안 돼! 라는, 격려를 내세운 충고 혹은 가르침이 아니다.
휘청거리다 그만 지쳐 무너져 버리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나를 나무라는 마음이 아니다.

그저 "그럴 수도 있지. 휘청거릴 수도, 비틀거릴 수도 있어."라고
넘어질 수 있다는 그 당연한 절망을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것이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당연하지. 그런 너를 너무 자책하지마. 그게 너의 전부는 아니야. 네 삶의 전부는 아니야....
마음에서 마음으로 건네는 마음.


함께 그 곳에 존재함으로 말없이 말하는 사람.
미완의 내 속에 나를 기억하게 해주는 사람.
그리고 그런 누군가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끊임없이 성장하는 존재인 우리 자신,
넘어지는 것도 축복이 될 수 있는
그런 우리 자신을 제대로 기억해 낼 수 있다.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채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나무에 대하여 - 정호승>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여름 한때 -천양희

 

비 갠 하늘에서 땡볕이 내려온다. 촘촘한 나뭇잎이 화들짝 잠을 깬다. 공터가 물끄러미 길을 엿보는데, 두 살배기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간다.

 

생생한 生(생)! 우주가 저렇게 뭉클하다

고통만이 내 선생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몸 한쪽이 조금 기우뚱한다

 

바람이 간혹 숲 속에서 달려 나온다. 놀란 새들이 공처럼 튀어 오르고, 가파른 언덕이 헐떡거린다.

웬 氣(기)가 ― 저렇게 기막히다

 

발밑에 밟히는 시름꽃들, 삶이란

원래 기막힌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다시

숨을 쉬며 부푼다. 살아 붐빈다.

 

([마음의 수수밭], 창비,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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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시인의 후기: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한 것들과 생각해야 할 것들이 길이 되어주었다. 삶 속에는 왜 그런가요? 라고 물을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있다.

일년 내내 눈이 먼 채고 살다가, 가을이 되어 문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가면 비로소 앞을 볼 수 있다는 숭어대해, 벚꽃이 필 무렵, 남풍이 부는 따듯한 날에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가을에, 제가 태어난 하구로 돌아가서 알을 낳고 죽는다는 은어에 대해, 땅 속에서 6년 동안 애벌레로 살다가 네 번째의 껍질을 벗은 뒤, 가장 날씨가 좋은 여름날을 택하여 다섯 번째의 껍질을 벗고, 땅 속을 뚫고 나와서야 날개 달린 한 마리 매미가 된다는 유지매미에 대해, 둥지가 없어 춥고 긴 밤을 떨면서 날이 밝으면 꼭 둥지를 지어야지 하고 밤새 다짐하지만, 아침 해가 떠오르면 그 따뜻함과 편안함에 취해 집짓는 걸 잊어버리고 만다는 야명조라는 새에 대해,

나, 할말을 줄이려 한다.

다시는 아무 곳에나 내 이름을 내려 놓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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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제 몫의 운명에 덜미를 잡히지 않으랴
욕망과 운명의 낯설고 공포스런 어긋남을 누군들 면할 수 있으랴그러나 그 절망적인 어둠을 헐벗은 손으로 맞서 스스로를 방기하지 않고 이처럼 신실한 싸움과 견딤을 보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김사인 시인의 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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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시를 올린다.  기력이 바닥이어서 랩 탑을 열지도 못한 채 지냈다. 

게다가 얼마 전 교통사고로 또 다시 나는 가해자가 차라리 편한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몇 십 년 전 내가 '그들은 기억도 못하는 일로 왜 난 이렇게 오래오래 고통 당하는 것일까'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어린 딸이 대뜸 해 준 말이 기억이 난다-- "그거야 엄마가 피해자니까 그렇지."

천양희 시인의 신실한 싸움과 견딤을 읽는다. 

언제나 내가 의지해야 할 것은 나의 두 다리 뿐. 나의 몇 가지 삶의 철학 중 하나인 wait and hope, 아니 희망 없이도 견디는 순전한 마음과 용기를 또 다시 지팡이처럼 붙잡는다. 다시 일어나 주어진 길을 반박자로 절둑이며 걸으며....
내 눈을 열어 어둠 속에서도 나를 지켜준 보이지 않는 손길과 빛을 보게 하소서. 아직 남아있는 더 많은 것들에 감사하게하소서....  

 

 

 

 

 

 

 

 

 

 

너무 어렵게 이야기하며 살지 말자 - 강재현 

 

너무 어렵게 이야기하며 살지 말자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하고 살자

 

너무 어렵게 셈하며 살지 말자
하나를 주었을 때 몇 개가 돌아올까
두 개를 주었을 때 몇 개를 손해 볼까
계산 없이 주고 싶은 만큼은 주고 살자


너무 어렵게 등 돌리며 살지 말자
등 돌린 만큼 외로운 게 사람이니
등 돌릴 힘까지 내어 사람에게 걸어가자
절망 끝에서 건져올린 희망이 되어

막다른 곳에서- 오세영

그렇게 마냥 서 있었다.
한곳에
기다림의 막다른 곳에
걸어서 걸어서
이제 서 있어도
걷는 것이 된
그것을 나무라 할까,
그것을 꽃이라 할까,
산마루에 멍청히 서 있는 측백 혹은 소철 한 그루
걷다가 걷다가 지쳐
짓누르는 어깨의 세상 짐들을 부리고
너의 이름을 부리고
너를 부리고
마침내 막다른 그곳에 와서
나무는
세상을 늘어뜨린 제 그림자를 걷으려
스스로 꽃과 잎을 벗어버린 채
홀로 하늘을 진다.
산이 된다.

"쓸쓸하지 않은 따스함을 당신은 보셨는가?" - 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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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의 기록
읽히지 않고 들릴 때도 있다
한 장 한 장
오래오래
시간이 안쓰럽게 우리를 번역하고 있었다
비 오기 직전 구름 같은 우리의 마음을
마음의 생애를
그러다 언제쯤
당신과 나는 누군가가 듣고 있는
이 지구에 없는 목소리의 유랑인이 될 거다
아무도 건설해본 적 없는 국도를 걷는 아픈 고아,
꿈꾸는 귀가 듣는 발자국일 거다"
<허수경, "듣는 책" 일부>
허수경 시인은 말한다. "고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데, 기댈 전통이 외부에 있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전통이라는 것에 기대면 스스로를 베끼는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위기감" 때문에 "시인으로서 나의 존재는 고아"라고.
"그 박하의 나날 동안 보라빛 박하꽃은 피고
숲 속에 들어간 벌 한 마리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니? 나는 나에게 물어본다.
......
나는 나에게 물어본다 박하의 나날 동안 나를 동반한 것은
박하와 나 뿐. 이 절대의 향기는 시간의 눈물 같은 것이었다."
<허수경, "박하의 나날"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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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인 (1964~2018)
아까운 분. 지도 교수로 만났던 독일인 남편을 두고 암투병 중 젊은 나이에 그만 세상을 떠났지.
찬란한 시를 쓰는 날들을 '박하의 나날'이라 고백하던 시인.
내가 이를 수 없는, 가 닿을 수 없는 깊이의 눈과 진솔한 고뇌와 쓸쓸함, 그리고 따스함의 언어를 가진 시인. 그 언어의 깊이는 시인의 말대로 어쩌면 꿈꾸는 귀가 되어야 들을 수 있는 발자국인지 모르겠다.
그녀의 시에서 나는 nostalgia라는 슬픔을 읽는다. (좀 더 근원적인 의미의 노스탈지아.)
"쓸쓸하지 않은 따스함을 당신은 보셨는가?
따스한 쓸쓸함을 당신은 보셨는가?
따스함이 쓴 쓸쓸의 안경
서럽고 따뜻하고 흐릿하다"
시인의 이 시구절을 그녀에게 되돌려 말해주며 말 건네본다.
쓸쓸하다 내가 말하는 것이 그 언어에 왠지 죄스러운 이 저녁에

들판을 푸르게 하는 것은 잡초다 -이문조

 

  저 푸른 들판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들판을 푸르게 하는 것은
  잘난 장미도 백합도 아니다

  이름도 없는
  있어도 불려지지도 않는
  잡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각기 자리 잡아
  제 역할에 충실한 들풀

  그들이 들판을 푸르게 한다
  소리 없는
  그들이 세상을 지탱한다.

 

   - 2009년 월간 <한비문학> 

<비오는 날 - 마종기>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날 때
환한 불이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ㅡㅡ

 

오늘 빗속을 오래 걸었다
옷과 발이 다 젖었지만
마음은 메마른 사막이었다.

참 오래도 그리 걸어왔다
젖지 못한 채,

마냥 퍼붓던 굵은 빗속을. 

그래, 그래,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끄덕 끄덕
시인의 말을 중얼거리며.

 

 

MP 080420

 

 

하지만 어린왕자야,  너의 조그만 별에서는 의자를 몇 발짝 옮겨놓기만 하면 돼.
그러면 네가 원할 때면 언제라도  저무는 하루와 지는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거야.

"어느 날인가," 네가 말했지, "난 해가 지는 걸 마흔 네번이나 보았어!"
그리고는 잠시 후 너는  이렇게 덧붙였지:  "...사람들은 너무나 슬플 때 해지는 모습을 좋아하게 돼..."

"그럼 너 그렇게 많이 슬펐었니...," 내가 물었다,  "마흔 네번의 노을을 본 날?"  

그러나 어린 왕자는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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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on your tiny planet, my little prince, all you need to do is move your chair a few steps.
You can see the day end and the twilight falling whenever you like...
"One day," you said to me,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And a little later you added:
"You know-- one loves the sunset, when one is so sad..."
"Were you so sad, then?" I asked, "on the day of the forty-four sunsets?"

But the little prince made no reply.

만일 당신이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싶거든, 그 누군가를 잘 알고 싶다면.....그가 웃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의 웃음이 친절하고 후하다면, 그는 선한 사람이다.  -도스토엡스키


잎 지는 초저녁, 무덤들이 많은 산 속을 지나왔습니다. 어느 사이
나는 고개 숙여 걷고 있습니다. 흘러 들어온 하늘 일부는 맑아져
사람이 없는 산 속으로 빨려듭니다. 사람이 없는 산 속으로 물은
흐르고 흘러 고요의 바닥에서 나와 합류합니다. 몸이 훈훈해집니다.
아는 사람 하나 우연히 만나고 싶습니다.

무명씨,
내 땅의 말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그대......

[신대철 -사람이 그리운 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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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 하나 우연히 만나고 싶다'는 시 속 사람의 말이 여러겹으로 가슴에 남는다. 
그 사람은에서  사람이 없는 산, 무덤만 가득한 산에서 그늘진 빛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그가 산에서 내내 만난 이들은 만날 수 없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무명씨,

이땅의 말로는 부를 수도 없는 잠든 이들뿐. 

그가 그 산을 내려와 만난 건 

그가 지나온 산에서부터 자신처럼 굽이굽이 흘러 하산한 물 뿐이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아니,

혼자라는 걸 다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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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원광대에서 "고립의 시대"에 대해서 특강/워크숍을 마쳤다. 3번째 초청해준 그 학회에 감사하다. 
마침 내가 올해는 지난 가을부터 계속 한국에 있어서 그동안  특강을 3-4곳에서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한달 넘게 수없이 100페이지 넘는 PPT를 수정하고 또 수정하며 고립-단절-외로움에 대해서 끝없이 생각했다 
이미 몇달전부터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던 중이었기도 했었기에

나는 고립 중에 가장 중요한 한 주제에 집중하고 싶었다. 

 

다녀와서 좀 아팠다. 탈진? 아쉬움?  어떻게 그 짧은 시간 그 길고도 깊은 이야기를 다 나눈단 말인가?

메인 디쉬는 맛도 못보여주고 애피타이저로 끝난 듯해서  와서 끙끙 앓았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칼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바람이 너희 사이엣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말라

그보다 너희 영혼과 영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속에 묶어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질만이 너희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득료애정통고.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실료애정통고,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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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의 다듬어져 알려진 5월이라는 글보다 이 처음 글이 더 좋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하지만 피천득 선생님이 "지금 가고 있다"고 말한 5월, 

그 5월의 의미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읽을 때마다 의미가 깊어진다. 

오래된 농담-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 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를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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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 비스듬히여.
시인은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라고 말한다.
가만히 읽어보면 마치 비스듬히 하고 그 이름을 불러주며 말하는 것 같다.
비스듬히는 이제 어딘가에 기대는 기울어진 모습의 특징을 묘사하는 부사가 아니다.
'다른 비스듬히'라고 말하면서 시의 후반에서 더욱 확실해지지만
그런 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라고 명명하고 호명해주는 것이다.
다정하게 불러주는 것이다. 괜차나 그렇게 서로 기대는 거야.
 
맑기도 흐리기도 한 공기에 기대는 존재, 당연히 맑기도 흐리기도 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시인의 다정한 호명에 의해 아름다운 이름과 정체성이 된다. 
 
"공기에 기대다"ㅡ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가.
공기에라도 기대며 살아가는 우리가 당연하고 당당해진다. 

나, 비스듬히도 오늘 흐린 공기에 편안히 기댄다. 
이젠 흐림 속에서도 그 너머 여전히 존재하는 맑음과 빛을 알기에
공기의 흐림도, '나의 흐림'도 의미있고 소중하다는 걸 믿으며,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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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hlee4426



  

지상의 꽃 - 오세영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설령 그것이 죄가 된다 해도
이제 어찌 할 수 없구나.
아침마다 우짖는 산새도,
저녁마다 바자니는 다람쥐도
지금은 눈에 없어.
나는 다만 하늘을 우러르는 한 마리
슬픈 짐승,
낮에는 햇빛으로 환하게 눈멀고
밤에는 등불로 활활 타오를 뿐이다.
지상은
어느덧 가을,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어이 할꺼나,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영원한 그리움이 끝내
한 떨기 불길로 타오르다 사라지는
지상의 꽃.


--
어찌할 거나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들 하늘을 가릴 수 있을까?


상처가 더 꽃이다 - 유안진

어린 매화가 꽃 피느라 한창이고
사백 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섰다
등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으로 보이는가
백 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 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 맡아 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꽃인 것을

3월의 바람 속에 - 이해인

  필까 말까
  아직도 망설이는 꽃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열까 말까 망설이며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쌀쌀하고도 어여쁜 3월의 바람
  바람과 함께
  나도 다시 일어서야지
  앞으로 나아가야지.


마지막 공부 - 홍윤숙 

무거운 몸 함께 갈 수 없어
자리에 눕혀 놓고
마음 홀로 문을 나서면
동서남북 캄캄한 밤
길도 없는 하늘에 별 하나 뜰까

어린 왕자 사는 별은
어디쯤일까
몸을 떠난 혼은 그 때
어떤 마음으로 어느 산 굽이 돌며
지척일까

한 생애 무거운 살 벗어 놓고
고통의 뼈도 내려 놓고
가볍게 가볍게 깃털 하나로
약속된 시간 지체없이 돌아가는
귀향의 길

마침내 알리라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그리고 눈뜨고 귀 열리리라
삶은 끝없이 꾸는 꿈이고
죽음은 비로소 깨어나는 현실임을

그날을 위해 날마다
은사시나무 가지 끝에 부는 바람
가슴으로 새기며
남모르는 마지막 공부에
밤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