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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시간- 정현종

시간의 물결을 보아라.
아침이다.
내일 아침이다.
오늘밤에
내일 아침을 마중 나가는
나의 물결은
푸르기도 하여, 오
그 파동으로
모든 날빛을 물들이니
마음이여
동트는 그곳이여.

심리치료사, 수필가, 시인, 그리고 문학치료사였던 Kenneth Paul Joshua Gorelick이 2년간 뇌종양으로 투쟁하다 지난달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고, '삶의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위한 길 중 하나로  심리학, 그리고 문학치료에 매료되었다던 그... 그의 명복을 빈다.


나는 옳은 삶을 살아왔다.
행동 하나하나 마다 더 생각하고 더 고민했다
......
나무들은 메마름과 더위에 고통받으며
이 기근 속에  아직도 불굴의 끈기로 매달려
저리 아름답게 서있구나
(뇌 종양 첫번째 수술후 그가 쓴 시)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 박정대

나 집시처럼 떠돌다 그대를 만났네
그대는 어느 먼길을 걸어왔는지
바람이 깍아놓은 먼지조각처럼
길 위에 망연히 서 있었네
내 가슴의 푸른 샘물 한 줌으로
그대 메마른 입술 축여주고 싶었지만
아, 나는 집시처럼 떠돌다
어느 먼 옛날 가슴을 잃어버렸네
가슴 속 푸른 샘물도
내 눈물의 길을 따라
바다로 가버렸다네
나는 이제 너무 낡은 기타 하나만을 가졌네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한다네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기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면
가응 가응, 나의 기타는
추억의 고양이 소리를 낸다네
떨리는 그 소리의 가여운 밀물로
그대 몸의 먼지들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이 먼지나는 길 위에서
그대는 한 잎의 푸른 음악으로
다시 돋아날 수도 있으련만
나 집시처럼 떠돌다 이제야 그대를 만났네
그대는 어느 먼길을 홀로 걸어왔는지
지금 내 앞에 망연히 서 있네
서러운 악보처럼 펄럭이고 있네
평안하다는 서신, 받았습니다
평안했습니다

아침이 너무 오래 저 홀로 깊은
동구까지 느리게 걸어갔습니다
앞강은 겨울이 짙어 단식처럼 수척하고
가슴뼈를 잔잔히 여미고 있습니다

마르고 맑고 먼 빛들이 와서 한데
어룽거립니다
당신의 부재가 억새를 흔들고
당신의 부재가 억새를 일으켜 세우며
강심으로 차게 미끄러져 갔습니다

이대로도 좋은데, 이대로도 좋은
나의 평안을
당신의 평안이 흔들어
한 겹 살얼음이 깔립니다

아득한 수면 위로
깨뜨릴 수 없는 금이 새로 납니다
물밑으로 흘러왔다
물 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
흰 푸른 가슴뼈에
탁본하듯
         
[이영광- 탁본]
정호승 -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앉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그림:(c)bhlee



나로 인해 그대가 아플까 해서
나는 그대를 떠났습니다
내 사랑이 그대에게 짐이 될까 해서
나는 사랑으로부터 떠났습니다.

그리우면 울었지요
들개처럼 밤길을 헤매 다니다,
그대 냄새를 좇아 킁킁거리다 길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든 적도 있었지요. 가슴이 아팠고,
목이 메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대는
가만 계세요. 나만 아파하겠습니다.

사랑이란 이처럼 나를 가두는 일인가요.
그대 곁에 가고 싶은 나를
철창 속 차디찬 방에 가두는 일인가요.
아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풀었다 가두는 이 마음 감옥이여.

마음의 감옥 - 이정하

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 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 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 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 이성복]

늦가을-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을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른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꽃동네를 만드신 오웅진 신부가 수녀들에게 하신 말이란다.

"거지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돈과 먹을 것이 없는 사람?   잘 곳이  없는 사람?

받을 줄만 알 고 줄 줄 모르는 사람, 그게 바로 거지란다."

벌거벗은 나뭇가지에
까치둥지 하나,
벗은 몸
훔쳐본 것 같아
마음 쓸쓸하다

 

[양수리 - 윤길영]


그리움이 홍시처럼
익어가는 시간입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병을 안고
복사꽃처럼 웃기엔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요일 오후입니다.

( 작가 미상)

오래전 어디선가에서 가져온 시구절인데 작가 이름을 모르겠다.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릴케- '두이노의 비가' 에서)



[가엾은 내 손 -  최종천]

나의 손은 눈이 멀었다
망치를 쥐어잡기보다는
부드러운 무엇을 원한다
강요된 노동에 완고해지며
대책 없이 늙어가는 손
감각의 입구였던 열개의 손가락은
자판 위를 누비며
회색의 언어들을 쏟아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던
손의 시력은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다
열개의 손가락에서 노동은 시들어버렸다
열개의 열려 있는 입을 나는 주체할 수가 없다
모든 필요를 만들어내던 손
인간의 유일한 실재인 노동보다
입에서 쏟아지는 허구가 힘이 되고 권력이 된다니
나의 손은 이제
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허구조작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노동을 잃어버리고
허구가 되어간다
상징이 되어간다


가을은 눈의 季節- 김현승

이맘때가 되면
당신의 눈은 나의 마음,
아니, 생각하는 나의 마음보다
더 깊은 당신의 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落葉들은 떨어져 뿌리에 돌아가고,
당신의 눈은 세상에도 순수한 言語로 변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가을 하늘만큼이나 멀리멀리 당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서 생각하고,
그 눈을 나의 영혼 안에 간직하여 두는 것입니다.

落葉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

중년 여자의 노래 - 문정희

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이상한 계절이 왔다.

아찔한 뾰족구두도 낮기만 해서
코까지 치켜들고 돌아다녔는데

낮고 편한 신발 하나
되는 대로 끄집어도
세상이 반쯤은 보이는 계절이 왔다.

예쁜 옷 화려한 장식 다 귀찮고
숨막히게 가슴 조이던 그리움도 오기도
모두 벗어버려
노브라된 가슴
동해바다로 출렁이던가 말던가
쳐다보는 이 없어 좋은 계절이 왔다.

입만 열면 자식 얘기 신경통 얘기가
열매보다 더 크게 낙엽보다 더 붉게
무성해가는
살찌고 기막힌 계절이 왔다.

 
음악 - 이성복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 본다
바다 1 -이성복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 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한 그루 전나무 외로이 서 있네.
북방의 헐벗은 산마루 우에
눈과 얼음에 덮이여
흰옷 입고 조는 듯 서 있네.

전나무 꿈 속에서 종려수 그리네.
머나 먼 동방의 나라
불볕 쪼이는 절벽 우에
외로이 말 없이 슬퍼하는 종려수를.

by Henri Matisse-La chute d'lcare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선천성 그리움 - 함민복]

The Sick Rose - William Blake



오 장미여, 너는 병들었다.
울부짓는 폭풍 속
어둔 밤을 날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벌레가
진홍빛 기쁨이 있는
너의 침대를 발견하여
그의 어둡고 비밀스런 사랑이
너의 삶을 파괴하는구나.

Oh rose, thou art sick;
The invisible worm
That flies in the night
In the howling storm
has found out thy bed
Of crimson joy,
And his dark secret love
Does thy life destory.


(Blake는 시인이지만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 자신의 삽화를 넣곤 했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 사온 그의 삽화가 있는 시집은 나의 소중한 보물이다.)

오래 먼 숲을 헤쳐 온 피곤한
상처들은 모두 신음 소리를 낸다
산다는 것은 책임이라구.
바람이라구. 끝이 안 보이는 여정.
그래. 그래 이제 알아들을 것 같다
갑자기 다가서는 가는 바람의 허리.

같이 있어도 같이 있지 않고
같이 없어도 같이 있는, 알지?
겨울 밤 언 강의 어둠 뒤로
숨었다가 나타나는 숲의 상처들.

그래서 이렇게 환하게 보이는 것인가.
지워 버릴 수 없는 그 해의 뜨거운 손
수분을 다 빼앗긴 눈밭의 시야.
부정의 단단한 껍질이 된
우리 변명은 잠 속에서
밤새 내리는 눈먼 폭설처럼
흐느끼며 피 흘리며 쌓이고 있다.


[상처 - 마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