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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이상희)

  비가 오면
  온몸을 흔드는 나무가 있고
  아, 아, 소리치는 나무가 있고

  이파리마다 빗방울을 퉁기는 나무가 있고
  다른 나무가 퉁긴 빗방울에
  비로소 젖는 나무가 있고

  비가 오면
  매처럼 맞는 나무가 있고
  죄를 씻는 나무가 있고

  그저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
  사람이 있고.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득료애정통고.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실료애정통고,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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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의 다듬어져 알려진 5월이라는 글보다 이 처음 글이 더 좋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하지만 피천득 선생님이 "지금 가고 있다"고 말한 5월, 

그 5월의 의미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읽을 때마다 의미가 깊어진다.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를 다 닦아내는 박명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

ㅡㅡ
3월 7일 오늘은 기형도가 돌연 우리 곁을 떠난 날입니다(1989).  참 아까운 사람...

기형도시인이 내 나이만큼 되었다면 그는 어떤 시를 썼을까...
문득 문득 이 사람의 시를 읽을 때면 혼자 물어봅니다.
나이가 들면  저 끝모를 절망과 아픔은 어떤 언어로 변할까...

참, 아까운 사람.

내 안의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김용택- 해지는 들녘에서  일부 ]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2008. 마로니에북스  

적막한 봄 - 정완영 (1919~2016)

  산골짝 외딴집에 복사꽃이 혼자 핀다
  사람도 집 비우고 물소리도 골 비우고
  구름도 제풀에 지쳐 오도 가도 못한다.

  봄날이 하도 고와 복사꽃 눈멀겠다
  저러다 저 꽃 지면 산도 골도 몸져눕고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건가.

   - 출처 <시암(詩庵)의 봄>(2011)

3월의 바람 속에 - 이해인

  필까 말까
  아직도 망설이는 꽃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열까 말까 망설이며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쌀쌀하고도 어여쁜 3월의 바람
  바람과 함께
  나도 다시 일어서야지
  앞으로 나아가야지.

  (2014)

오늘의 약속 - 나태주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매미 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난간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흔들린다 - 함민복

 

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

익선이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대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은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띄우는 일이었구나

안부 - 나태주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photo by bhlee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른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아침 - 정현종]

입김 - 신형건

  미처
  내가 그걸 왜 몰랐을까?
  추운 겨울날
  몸을 움츠리고 종종걸음 치다가
  문득, 너랑 마주쳤을 때
  반가운 말보다 먼저

  네 입에서 피어나던
  하얀 입김!
  그래, 네 가슴은 따뜻하구나
  참 따뜻하구나.

   - 2010년 시집 <입김> (푸른책들)

희망이 외롭다 - 김승희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아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 걸 뭐.......

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

 

희망은 때로 응급처치를 해주기도 하지만

희망의 응급처치를 싫어하는 인간도 때로 있을 수 있네

아마 그럴 수 있네

절망이 더 위안이 된다고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찬란한 햇빛 한 줄기를 따라

약을 구하러 멀리서 왔는데

약이 잘 듣지 않는 다는 것을 미리 믿을 정도로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희망의 토템폴이 선인장.......

피가 철철 흐르도록 아직, 더, 벅차게 사랑하라는 명령인데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 없이 나누어주는 저 찬란한 햇빛, 아까워

물에 피가 번지듯.......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이 외롭다

 

(Totem Pole: 동물, 새 등이 수직으로 새겨진 힘찬 조각으로

부족내의 특정한 친족집단과 신화적으로 연결된 초자연적인 존재)

연애 1 - 김용택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나무에게로 걸어 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강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산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질 때, 나무와 산과 강에게로 걸어가는 일은
아름답다 해가 질 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산그늘처럼

걸어가는

일만큼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다

집 - 김용택

 

외딴집,

외딴집이라고

왼손으로 쓰고

바른손으로 고쳤다

 

뒤뚱거리면서 가는

가는 어깨를 가뒀다

 

불 하나 끄고

불 하나 달았다

 

가물가물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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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혼자 있어서만은 아닐 터인데

거리 한복판에서, 모두 목적지가 있어서인지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 북적이는 인파속에서,

특히 하루가 저물어 환하게 불밝힌 거리에서, 

나만 빛 없는 한 점같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어디로 가야하나.

기다리는 얼굴들, 기다리는 따듯한 집이 있어서 사람들은 저리 분주히 걸음을 옮길까 생각할 때가 있다. 

나만 그 거리에서 동떨어진 외딴 집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외딴집ㅡ이라고 가슴으로 쓰고

머리로 고친다.  아니, 지웠을까?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 뒤뚱거리면서 가는 사람, 

그 사람의 가느다란 어깨를 감싸는 집을 그렸다. 

그런데 그 집이 그 사람을 가두었다. 

외로운 사람은 차라리 스스로를 가둔다.

더 외롭지 않으려고 숨어버린다. 

자신이 만든 외딴 곳에. 

 

외로움의 불 하나 끄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또 다른 불 하나 켠다. 

희망의 불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가둔 외딴집에서 나오기 않고 지내려는 체념의 불일까? 

가물가물, 밖에선 얼어버린 눈물이 소리없이 대신 내려온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대신 울고 있다. 

바람의 집 – 겨울 판화(版畫) -기형도(1960~1989)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깍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1989년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理由(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理由(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時代(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우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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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bhlee

대학교 때 이 시를 번역했었다.  그 번역했던 글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어디에 싣느라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이런 것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왜 이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생각도 안 했었는데....  요즘 지인들이 자신이 쓴 글이 어느 사보나 동인지에 실리면 늘 그걸 올리면서 축하인사를 받거나 할 때, 자신들이 한 일이나 업적을 일일이 기록할 때 가끔 나는 왜 이런 걸 하나도 기록하지 않으면서(기억하지 않고) 살지? 할 때가 있다. 내게는 그런 게, 그렇게 나를 세상에 자랑하거나 알리는 게 중요하지 않았던 거 같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그럴 기력이 늘 부족하다.  그래서 가끔 내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 시를 읽고 번역도 할 만큼 좋아했던 내 마음-- 이 시를 좋아했던 그 때의 "내 마음, " 그 시절 나의 가슴에 울림을 준 이 시의 목소리이다.  그런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다.  그치.... 어쩌면 이런게 아무 "쓰잘데기 없는" 일인지 모른다.  내 친구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넌 참 복잡하게 사는구나.... 영화도, TV 드라마도 우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들이 넌 보이니 피곤해서 어떻게 즐기겠냐.  그냥 보고, 그냥 읽으면 될 걸 피곤하겠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그림: Q. Buchholz(here only for educational and/or therapeutic purposes)

 

[겨울바다 -김남조]

겨울바다에 가보았지
未知(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 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바다에 가보았지
忍苦(인고)의 물이
水深(수심)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도종환 - 폭설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만에 내리는
큰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 속
빈 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을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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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그 눈들의 "남은 시간," ㅡ 그것이 차마 고통스러 힘들어했었습니다. 이 땅의 때묻음, 세상의 나약함은 덮는다고 가린다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녹지 않는 눈 같은 환상이라도 있어 내 눈을 덮어주길 바란 것일까요? 어둠에 그을린 세상을 온몸으로 덮고 함께 녹아 길에 쓰러져 그 최후를 맞이하는 눈...그것을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이 겨울에는 질척이는 외롭고 응달진 골목을 걸을 때 그 속에 함께 녹아 내린 희디 흰 눈의 눈물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