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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서적 - 기형도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 한다

가만히 눈을 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나는 집으로 간다 - 여림 (1967-2002) 

 

몇 번이나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햇살에도 걸리고 횡단보도 신호등에도 걸려
자잘한 잡품들을 길거리에 늘어놓고 초라한
눈빛으로 행인들을 응시하는 잡상인처럼
나는 무릎을 포개고 앉아 견뎌온 생애와
버텨가야 할 생계를 간단없이 생각했다

해가 지고 구름이 떠오르고 이윽고
밥풀처럼 입술 주위로 묻어나던 싸라기는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나는 석유 난로 그을음 자욱한 포장마차에 앉아
가락국수 한 그릇을 반찬 삼은 저녁을 먹는다

둘러보면 모두들 살붙이 같고 피붙이인 사람들
포장 틈새로 스며드는 살바람에 찬 손 가득
깨진 유리병 같은 소주 몇 잔을 털어 넣고
구겨진 지폐처럼 등이 굽어 돌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오랜 친구처럼
한두 마디 인사라도 허물없이 건네고 싶어진다

포장을 걷으면 환하고 따뜻한 길
좀 전에 내린 것은 눈이 아니라 별이었구나
옷자락에 묻어나는 별들의 사금파리
멀리 집의 불빛이 소혹성처럼 둥글다

 

--등단 후 3년 만에 요절한 비범한 재능을 가진 시인 여림(본명 여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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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까운 많은 아름다운 재능을 가진 이들이 머물렀던 짧은 삶을 생각하면 
힘겹다고 점점 느려지는  삶이 부끄러워진다. 
살아있음 자체가 기적이고 축복이고 감사임을 또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 여림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손뼉을 칠 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어요.

소포를 부치고,
빈 마음 한 줄 같이 동봉하고
돌아서 뜻모르게 뚝,
떨구어지던 누운물.

저녁 무렵,
지는 해를 붙잡고 가슴 허허다가 끊어버린 손목.
여러 갈래 짓이겨져 쏟던 피 한 줄.
손수건으로 꼭, 꼭 묶어 흐르는 피를 접어 매고
그렇게도 막막히도 바라보던 세상.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울었습니다.

흐르는 피 꽉 움켜쥐며 그대 생각을 했습니다.
홀로라도 넉넉히 아름다운 그대.

지금도 손목의 통증이 채 가시질 않고
한밤의 남도는 또 눈물겨웁고
살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 있고 싶습니다.

뒷모습 가득 푸른 그리움 출렁이는 그대 모습이 지금
참으로 넉넉히도 그립습니다.

내게선 늘, 저만치 물러서 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여,
풀빛 푸른 노래 한 줄 목청에 묻고
나는 그대 생각 하나로 눈물겨웁습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마음 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 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명사산 추억 - 나태주

헛소리 하지 말아라
누가 뭐래도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먼지 날리는 이 모래도 한때는 바위였고
새하얀 조그만 뼈 조각 하나도 한때는
용사의 어깨였으며 미인의 얼굴이었다

두 번 말하지 말아라
아무리 우겨도 인생은 고해 그것이다
즐거울 생각 아예 하지 말고
좋은 일 너무 많이 꿈꾸지 말아라
해 으스름 녘 모래 능선을 타고 넘어가는
어미 낙타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들어보아라

하지만 어디선가 또다시 바람이 인다
높은 가지 나무에 모래바람 소리가 간다
가슴이 따라서 두근거려진다
그렇다면 누군가 두고 온 한 사람이 보고 싶은 거다
또다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고 싶어
마음이 안달해서 그러는 것이다

꿈꾸라 그리워하라 깊이, 오래 사랑하라
우리가 잠들고 쉬고 잠시 즐거운 것도
다시금 고통을 당하기 위해서이고
고통의 바다 세상 속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또다시 새롭게 꿈꾸고 그리워하고
깊이, 오래 사랑하기 위함이다.

photo by bhlee



당신도 없이 나를 견딥니다
묵은 베개의 메밀 속처럼
나날이 늙어도 꼭 그만큼입니다.
[ 이성복]

 

072812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기형도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 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기형도, 메모(1988.11)/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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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모를 쓴 몇달 후 1989년 3월 그는 뇌졸중으로 홀로 외롭게 세상을 떠나갔다.
겨우 만 29세. 아까운 사람. 아까운 천재.
그는 "또 다른 세상," 그가 견딜 수 있는 날씨가 있는 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몄을까.
하고 싶은 말이 그곳에서도 공중에 흩어졌을까?
그 곳은 어디일까.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만을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바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거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손가락 빗질인 양 쓸어 올려보다가, 목을 꺾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진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려오는 실낱같은 향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이다. 갈 수 없어도 사랑이다. 魂이라도 그쪽으로 머릴 두려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꽃잎 - 도종환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다.
피었다 저 혼자 지는 오늘 흙에 누운 저 꽃잎 때문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형언 할 수 없는
시작도 아지 못할 곳에서 와서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의 저 외로운 나부낌
아득하고 아득하여

 

받아쓰다 - 김용택

어머니는 글자를 모른다. 글자를 모르는 어머니는 자연이 하는 말을 받아 땅 위에 적었다. 봄비가 오면 참깨 모종을 들고 밭으로 달려갔고, 가을 햇살이 좋으면 돌담에 호박쪼가리를 널어두었다가 점심때 와서 다시 뒤집어 널었다. 아침에 비가 오면 "아침 비 맞고는 서울도 간다"라고 비옷을 챙기지 않았고 "야야, 빗낯 들었다"며 비의 얼굴을 미리 보고 장독을 덮고 들에 나갔다. 평생 바다를 보지 못했어도 아침저녁 못자리에 드는 볍씨를 보고 조금과 사리를 알았다. 감잎에 떨어지는 소낙비, 밤에 우는 소쩍새, 새벽하늘 구석의 조각달, 달무리 속에 갇힌 보름달, 하얗게 뒤집어지는 참나무 잎, 서산머리의 샛별이 글자였다. 난관에 처할 때마다 어머니는 살다가보면 무슨 수가 난다고 했다. 세상에는 내가 가보지 못한 수가 얼마나 많은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했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고 했다. 어머니는 해와 달이, 별과 바람이 시키는 일을 알고 그것들이 하는 말을 땅에 받아 적으며 있는 힘을 다하여 살았다.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차창바람 서늘해
가을인가 했더니
그리움이더라

그리움 이 녀석
와락 안았더니
눈물이더라

세월 안고
그리움의 눈물 흘렸더니
아~ 빛났던 사랑이더라  

-작자미상/출처: 울릉도 예림원

엄마와 어머니 사이 - 목필균

  스물네 살 딸 시집보내고
  친정어머니 되고
  서른세 살 아들 장가보내고
  시어머니 되었다

  엄마와 어머니 사이
  비탈진 품 안으로
  조금은 멀게 자리 잡은
  자식들

  진액 모두 빠져나간
  텅 빈 거실에서
  리모컨으로 들려오는
  세상 이야기

  어머니 시절보다
  엄마 시절이
  더 힘이 있고

  엄마 시절보다
  어머니 시절이
  더 둥글더라고.

쉽게 쓰여진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우리들의 시간 - 박경리

 

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딛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뽑내어 본들 徒勞無益(도로무익)

時間(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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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徒勞無益(도로무익) 

   헛되게 애만 쓰고 아무 이로움이 없음

봄날에선가 꿈 속에선가 - 릴케

어느 봄날에선가 꿈 속에선가
나 언제였던가 너를 만난 것이
지금 이 가을날을 우리는 함께 걷고 있다.
그리고 너는 내 손을 쥐고 흐느끼고 있다.

흘러가는 구름 때문에 우는가?
핏빛처럼 붉은 나뭇잎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리.
언제였던가 한 번은 네가 행복했기 때문이리라.
어느 봄날에선가 꿈 속에선가…




ㅡㅡ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
당신도 한 번은 행복했었나요?

정념의 기 - 김남조  (1927. 9. 2-2023. 10. 10)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새벽에 아가에게 - 정호승

  아가야 햇살에 녹아내리는 봄눈을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사랑이 있는가 보다

​  아가야 봄하늘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눈물이 있는가보다

​  길가에 홀로 핀 애기똥풀 같은
  산길에 홀로 핀 산씀바귀 같은

​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한 송이 들꽃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라

​  오늘도 어둠의 계절은 깊어
  새벽하늘 별빛마저 저물었나니

​  오늘도 진실에 대한 확신처럼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없나니

​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눈물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라
  내가 별들에게 죽음의 편지를 쓰고 잠들더라도
  아가야 하늘에도 거지별 하나.

   - 2015년 시선집 <수선화에게> (비채)

한 송이 꽃-도종환 

 

이른 봄에 핀

한 송이 꽃은

하나의 물음표다

 

당신도 이렇게

피어 있느냐고

묻는 

 

 

3월의 시 -  나태주

어차피 어차피
3월은 오는구나
오고야 마는구나

2월을 이기고
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
넓은 마음이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 앞에
풀잎과 꽃잎의 비단방석을 까는구나

새들은 우리더러
무슨 소리든 내보라 내보라고
조르는구나

시냇물 소리도 우리더러
지껄이라 그러는구나
아,
젊은 아이들은
다시 한번 새옷을 갈아입고

새 가방을 들고
새 배지를 달고
우리 앞을 물결쳐
스쳐가겠지...

그러나

3월에도
외로운 사람은 여전히 외롭고
쓸쓸한 사람은 쓸쓸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