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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린다 - 함민복

 

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

익선이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대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은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띄우는 일이었구나

안부 - 나태주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photo by bhlee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른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아침 - 정현종]

입김 - 신형건

  미처
  내가 그걸 왜 몰랐을까?
  추운 겨울날
  몸을 움츠리고 종종걸음 치다가
  문득, 너랑 마주쳤을 때
  반가운 말보다 먼저

  네 입에서 피어나던
  하얀 입김!
  그래, 네 가슴은 따뜻하구나
  참 따뜻하구나.

   - 2010년 시집 <입김> (푸른책들)

희망이 외롭다 - 김승희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아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 걸 뭐.......

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

 

희망은 때로 응급처치를 해주기도 하지만

희망의 응급처치를 싫어하는 인간도 때로 있을 수 있네

아마 그럴 수 있네

절망이 더 위안이 된다고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찬란한 햇빛 한 줄기를 따라

약을 구하러 멀리서 왔는데

약이 잘 듣지 않는 다는 것을 미리 믿을 정도로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희망의 토템폴이 선인장.......

피가 철철 흐르도록 아직, 더, 벅차게 사랑하라는 명령인데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 없이 나누어주는 저 찬란한 햇빛, 아까워

물에 피가 번지듯.......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이 외롭다

 

(Totem Pole: 동물, 새 등이 수직으로 새겨진 힘찬 조각으로

부족내의 특정한 친족집단과 신화적으로 연결된 초자연적인 존재)

연애 1 - 김용택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나무에게로 걸어 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강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산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질 때, 나무와 산과 강에게로 걸어가는 일은
아름답다 해가 질 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산그늘처럼

걸어가는

일만큼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다

집 - 김용택

 

외딴집,

외딴집이라고

왼손으로 쓰고

바른손으로 고쳤다

 

뒤뚱거리면서 가는

가는 어깨를 가뒀다

 

불 하나 끄고

불 하나 달았다

 

가물가물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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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혼자 있어서만은 아닐 터인데

거리 한복판에서, 모두 목적지가 있어서인지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특히 하루가 저물어 환하게 불 밝힌 거리에서, 

나만 빛없는 한 점같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어디로 가야 하나.

기다리는 얼굴들, 기다리는 따듯한 집이 있어서 사람들은 저리 분주히 걸음을 옮길까 생각할 때가 있다. 

나만 그 거리에서 동떨어진 외딴집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외딴집ㅡ이라고 가슴으로 쓰고

머리로 고친다.  아니, 지웠을까?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 뒤뚱거리면서 가는 사람, 

그 사람의 가느다란 어깨를 감싸는 집을 그렸다. 

그런데 그 집이 그 사람을 가두었다. 

외로운 사람은 차라리 스스로를 가둔다.

더 외롭지 않으려고 숨어버린다. 

자신이 만든 외딴곳에. 

 

외로움의 불 하나 끄고  또 다른 불 하나 켠다. 

희망의 불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가둔 외딴집에서 나오기 않고 지내려는 불일까? 

가물가물,  집 밖에선 얼어버린 눈물이 하늘에서 소리 없이 내려온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대신 울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넉넉한 위로가 된다, 

넉넉하고 참 감사한 위안. 

바람의 집 – 겨울 판화(版畫) -기형도(1960~1989)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깍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1989년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理由(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理由(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時代(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우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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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bhlee

대학교 때 이 시를 번역했었다.  그 번역했던 글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어디에 싣느라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이런 것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왜 이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생각도 안 했었는데....  요즘 지인들이 자신이 쓴 글이 어느 사보나 동인지에 실리면 늘 그걸 올리면서 축하인사를 받거나 할 때, 자신들이 한 일이나 업적을 일일이 기록할 때 가끔 나는 왜 이런 걸 하나도 기록하지 않으면서(기억하지 않고) 살지? 할 때가 있다. 내게는 그런 게, 그렇게 나를 세상에 자랑하거나 알리는 게 중요하지 않았던 거 같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그럴 기력이 늘 부족하다.  그래서 가끔 내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 시를 읽고 번역도 할 만큼 좋아했던 내 마음-- 이 시를 좋아했던 그 때의 "내 마음, " 그 시절 나의 가슴에 울림을 준 이 시의 목소리이다.  그런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다.  그치.... 어쩌면 이런게 아무 "쓰잘데기 없는" 일인지 모른다.  내 친구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넌 참 복잡하게 사는구나.... 영화도, TV 드라마도 우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들이 넌 보이니 피곤해서 어떻게 즐기겠냐.  그냥 보고, 그냥 읽으면 될 걸 피곤하겠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그림: Q. Buchholz(here only for educational and/or therapeutic purposes)

 

[겨울바다 -김남조]

겨울바다에 가보았지
未知(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 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바다에 가보았지
忍苦(인고)의 물이
水深(수심)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도종환 - 폭설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만에 내리는
큰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 속
빈 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을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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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그 눈들의 "남은 시간," ㅡ 그것이 차마 고통스러 힘들어했었습니다. 이 땅의 때묻음, 세상의 나약함은 덮는다고 가린다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녹지 않는 눈 같은 환상이라도 있어 내 눈을 덮어주길 바란 것일까요? 어둠에 그을린 세상을 온몸으로 덮고 함께 녹아 길에 쓰러져 그 최후를 맞이하는 눈...그것을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이 겨울에는 질척이는 외롭고 응달진 골목을 걸을 때 그 속에 함께 녹아 내린 희디 흰 눈의 눈물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by bhlee

못- 천양희

벽에다 못 하나 박았다. 벽이 울렸다.
박힌 것은 못인데 벽이 다 울렸다.
그 소리 벽을 들어올렸다.
못 하나 받으려고 벽은 버텼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종일 못을 박았다.

벽에서 못 하나 뽑았다. 벽이 울렸다.
뽑힌 것은 못인데 벽이 다 울렸다.
그 소리 마음을 들어올렸다.
못 하나 보내려고 벽은 버텼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종일 못을 뽑았다.

 

113009

이름 부르기 - 마종기

 

우리는 아직도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검은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 앉아
막막한 소리로 거듭 울어대면
어느 틈에 비슷한 새 한 마리 날아와
시치미 떼고 옆가지에 앉았다.
가까이서 날개로 바람도 만들었다.

아직도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 새가 언제부턴가 오지 않는다.
아무리 이름 불러도 보이지 않는다.

한적하고 가문 밤에는 잠꼬대가 되어
같은 가지에서 자기 새를 찾는 새.

방 안  가득 무거운 편견이 가라앉고
멀리 이끼 낀 기적소리가 낯설게
밤과 밤 사이를 뚫다가 사라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는 게 보인다.
부서진 마음도 보도에 굴러다닌다.

이름까지 감추고 모두 혼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도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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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제 이름 석자 무엇이 부끄러워, 아니 두려워 어둠에 감추고 익명의 존재들이 되었을까. 

그래서 같은 가지에서 서로를 불러도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걸까.  함께 있어도

각자 혼자가 되어버린 우리는 이제 어떤 이름으로 서로를 불러야 할까?  020214

 

나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가
왜 이름을 감추게 되었을까?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bhlee 역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두 길을 다 갈 수 없는 한사람의 나그네인지라
아쉬운 맘으로 그 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굽어든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웠지만
어쩌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에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은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이 지난 자취가 없었으니까요.
비록 그 길로 가면 그 길도 낡아져
결국 또 다른 길과 같아지겠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은 모두 아무도 밟지 않아
더럽혀지지 않은 낙엽에 묻혀 있었습니다.
아, 나는 훗날을 위해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또 다른 길로 계속 이어지는 것을 알기에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도.

먼 먼 훗날에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하겠지요.
어느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노라고
그리고 나는 사람이 적게 다닌 길을 택하였다고,
그래서 모든 게 달라졌다고.

(trans./bhlee)

 

시의 제목을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해야할지 그동안 모두들 번역한대로 '가지 못한 길'이라고 해야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시의 내용과 또 마지막 연을 봐도 인생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시이므로 그냥 나는  

"가지 않은 길"이라고 번역했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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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hlee8819/at Khuvsgul

 

 

 

가을-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시월에 -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 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 2006년 시집 <가재미> (문학과 지성사)

<맨드라미에게 부침 - 권대웅>

언제나 지쳐서 돌아오면 가을이었다.
세상은,
여름 내내 나를 물에 빠뜨리다가
그냥 아무 정거장에나 툭 던져놓고
저 혼자 훌쩍 떠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나를 보고 빨갛게 웃던 맨드라미
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단지 붉은 잇몸 미소만으로도 다 안다는
그 침묵의 그늘 아래
며칠쯤 푹 잠들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일어서는 길에
빈혈이 일어날 만큼 파란 하늘은 너무 멀리 있고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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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빈혈이 일어날 만큼 멀리 있는 파란 하늘 말고
기대면 체온이 전해져 오는 맨드라미 같은 가슴을 가진
그런 붉은 마음 친구 평생 기다려왔다.
평생 그런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일까
환상일까

너무 바빠서 외롭다 말하니까 누군가 웃었다.
복에 겨운 소리라고....
나 자신에게서 유기되고 방치된 나는
어느 정류장에 툭! 짐짝처럼 던져져 있을까?

울컥
각혈하듯 깊은 속에서 치미는 뜨거운 고백 한마디... 

나는........
그리고 오늘도 발설해선 안 되는 비밀도 아닌

그 말을 도로 주어 삼킨다

 

091609 MP

새 - 김남조 

 

새는 가련함 아니어도 

새는 찬란한 깃털 아니어도 

새는 노래 아니여도

무수히 시로 읊어짐 아니어도

심지어

신의 신비한 촛불

따스한 맥박 아니어도

 

탱크만큼 육중하거나

흉물이거나

무개성하거나

적개심을 유발하거나 하여간에

 

절대의 한순간

숨겨 지니던 날개를 퍼득여

창공으로 솟아오른다면

이로서 완벽한 새요

여타는 전혀 상관이 없다. 

 

([평안을 위하여] 1995, 서문당)

대숲 아래서 - 나태주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 <대숲 아래서> (1973, 예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