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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울음 끝에 -박재삼

  막바지 뙤약볕 속
  한창 매미 울음은
  한여름 무더위를 그 절정까지 올려놓고는
  이렇게 다시 조용할 수 있는가,
  지금은 아무 기척도 없이
  정적(靜寂)의 소리인 듯 쟁쟁쟁
  천지가 하는 별의별
  희한한 그늘의 소리에
  멍청히 빨려들게 하구나.

  사랑도 어쩌면
  그와 같은 것인가
  소나기처럼 숨이 차게
  정수리부터 목물로 들이 붓더니
  얼마 후에는
  그것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맑은 구름만 눈이 부시게
  하늘 위에 펼치기만 하노니.

   - [울음이 타는 가을 강] (1987, 미래사)

여름날 저녁 - 심재휘
 
내가 그 여름을 떠나면서
여름은 언제나 헛된 저녁이었다
저물녘이면 헐렁한 반바지에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아무렇게나 자란
풀들의 길을 따라
내일을 희롱하며 내가 걷고 있었다 그럴 때면
바람이 터진 기억의 솔기를 자꾸 꿰매며
나를 밀어내는 탓인지 그 때의 들풀 냄새가
나는 듯 할뿐이어서 더욱 손을 내저어 보는데
그럴수록 멀찍이 물러서는
냇물과 산그늘이 있었고
다만 저녁의 푸른 집들만 도드라져서
손 앞에서 잡힐 것만 같았다 여름날 저녁
세상의 모든 윤곽선들은 반듯하였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오늘의 일과를 마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간선도로의 질주 아래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추억의 박제가
또 산산이 깨어져 있었다

바다와 나비 - 김기림(1939)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오늘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그대 가까이 2 - 이성복>
          
자꾸만 발꿈치를 들어 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마득한 하늘에 새털구름이
떠가고 무슨 노래를 불러
당신의 귓가에 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만나지 않았으니
헤어질 리 없고 헤어지지
않았어도 손 잡을 수 없으니
이렇게 기다림이 깊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늘어납니다

고독을 위한 의자 - 이해인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 볼 수 있으므로
  여럿 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고독 속에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
  안 해야 할 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 기울일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 말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 [꽃삽]/샘터사2003)

벚꽃 지는 날에 - 김승동

  가끔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고
  그래서 더 알 수 없는 눈물이
  푸른 하늘에 글썽일 때가 있다.

  살아간다는 것이
  바람으로 벽을 세우는 만큼이나
  무의미하고
  물결은 늘 내 알량한 의지의 바깥으로만
  흘러간다는 것을 알 때가 있다.

  세상이 너무 커서
  세상 밖에서 살 때가 있다.

  그래도 기차표를 사듯 날마다
  손을 내밀고 거스름돈을 받고
  계산을 하고 살아가지만
  오늘도 저 큰 세상 안에서
  바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나는 없다.

  누구를 향한 그리움마저도 떠나
  텅 빈 오늘
  짧은 속눈썹에 어리는 물기는
  아마 저 벚나무 아래 쏟아지는
  눈부시게 하얀 꽃잎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2003년 시집 <외로움을 훔치다> (문화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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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과수원으로 오세요
석류꽃 만발한 곳, 햇살과 포도주와 연인들이 있어요.
당신이 혹 안 오신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당신이 혹 오신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루미/ 이봉희 역)

 

photo fr gardening books-Virginia Woolf's garden
(used here only for therapeutic purpo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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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 본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꼽으라면 당연히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를 빼 놓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티니 컬리지의 정원이 더 먼저 떠오른다.

그곳은 "아, 좋다"라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고요함과 숙연함을 느끼게 하던 공간으로 내 가슴에 남아있다. 아무도 없는 어둑한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안개처럼 어둠이 내리는 그곳에서 같이 수업 듣던 일본에서 온 학생(선생)과 함께 아무 말 없이 한 동안 앉아 있다가 온 기억이 난다. 휴식과 사색의 공간!  의미 없는 소음에 지친 요즘, 그리고 나도 그런 의미 없는 말을 하고 있는 요즘,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도!

 

그런데 시인은 말한다.
이 가슴 벅찬 아름다움이 당신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니 당신이 있다면 또 이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말이 없어도 좋은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 더욱 그리운 계절이다.

 

3월의 기도 - 남정림

익어가는 이 고통이
낭비로 끝나지 않게
해주소서

익숙해진 이 상처가
흉터로 끝나지 않게
해주소서

남모르는 이 아픔이
사치로 보이지 않게
해주소서

3월에는
고통의 가지 끝에
명랑한 새의 노래
머물게 하시고

멍든 잎맥 사이로
순한 꽃향기 맴돌게
하시고
어디에서도 터뜨릴
수 없었던
아픔의 꽃을 내 밖으로
활짝 꺼내게 해주소서

고통이 고통을 안아주고
상처가 상처를 덮어주고
아픔이 아픔을 토닥이는
사랑의 3월이 되게 하소서

천장호에서 -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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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얼어붙은 호수.

한때 깊은 가슴에 품었던 빛도, 그림자도 상실한 채 

꽁꽁 언 마음

깨뜨려볼 수 있을까 돌멩이를 던져본다.

자꾸자꾸 네 이름을 불러본다.

작은 돌맹이 하나에도, 

아주 작은 부름 하나에도

부서지듯 포말선을 그리던 그 섬세하던 네 마음 
이제는 노래마저 떠나버린

네 굳어버린 차디찬 마음에 

쩡쩡 부딪쳐 되돌아오는

그래도 불러보는 네 이름

 

너라고 외롭게 얼어버리고 싶었을까
제 스스로 얼어붙는 마음이 있을까
얼마나 대답하고 싶을까


봄은 반드시 올 거야

지치지 않는다면
나도,

그리고 너도

 

(너는 누구일까.. 

네 이름은 누구일까... 생각해 본다. 

봄은 오겠지....)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바람없이 눈이 내린다

이만큼 낮은 데로 가면 이만큼 행복하리

 

살며시 눈감고

그대 빈 마음 가장자리에

가만히 앉는 눈

 

곧 녹을 

 

행복 3- 김용택                                   


바람 타고 눈이 내린다
이 세상 따순 데를 아슬아슬히
피해 어딘가로 가다가
내 깊은 데 감추어 둔
손 내밀면
얼른 달려와서
물이 되어 고이는
이 아깐 사랑

[덕담 한마디- 김지하]

 

    새해에는 빛 봐라
    사방문 활짝 열어제쳐도
    동지 섣달
    어두운 가슴속에서 빛 봐라
    샘물 넘쳐흘러라
    아이들 싱싱하게 뛰놀고
    동백잎 더욱 푸르러라
    몰아치는 서북풍 속에서도
    온통 벌거벗고 싱그레 웃어라
    뚜벅뚜벅 새벽을 밟고 오는 빛 속에
    내 가슴 사랑으로 가득 차라
    그 사랑 속에
    죽었던 모든 이들 벌떡 일어서고
    시들어가는 모든 목숨들
    나름나름 빛 봐라
    하나같이 똑 하나같이
    생명 넘쳐흘러라
    사방문 활짝 열어제쳐도
    동지 섣달
    어두운 가슴속에서
    빛 봐라
    빛 봐라
    빛 봐라

<크리스마스 카드 - 정영>

 

귓속에서 누군가 우네

 

나, 눈 내리는 카드에서 걸어나와

 

봉투를 닫네 

등불을 끄네 

겨울 골짜기- 조향미

가슴 수북이 가랑잎 사이고
며칠 내 뿌리는 찬비
나 이제 봄날의 그리움도
가을날의 쓰라림도 잊고
묵묵히 썩어가리
묻어둔 씨앗 몇 개의 화두(話頭)
폭폭 썩어서 거름이나 되리
별빛 또록한 밤하늘의 배경처럼
깊이깊이 어두워지리.

photo by bhlee

 

간신히 낙엽 - 복효근

  벌레에게 반쯤은 갉히고
  나머지 반쯤도 바스러져

  간신히 나뭇잎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는,
  죄 버려서 미래에 속한 것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먼 길 돌아온 그래서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듯
  언제든 확 타오를 자세로

  마른 나뭇잎.

<꽃씨 - 문병란>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쓰러진 나무 - 나희덕>

  저 아카시아 나무는
  쓰러진 채로 십 년을 견뎠다

  몇 번은 쓰러지면서
  잡목 숲에 돌아온 나는 이제
  쓰러진 나무의 향기와
  살아 있는 나무의 향기를 함께 맡는다

  쓰러진 아카시아를
  제 몸으로 받아 낸 떡갈나무,
  사람이 사람을
  그처럼 오래 껴안을 수 있으랴

  잡목 숲이 아름다운 건
  두 나무가 기대어 선 각도 때문이다
  아카시아에게로 굽어져 간 곡선 때문이다

  아카시아의 죽음과
  떡갈나무의 삶이 함께 피워 낸
  저 연초록빛 소름,
  십 년 전처럼 내 팔에도 소름이 돋는다.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고사목(枯死木)을 보며 - 박두규

자꾸만 변해야 한다고
변해야 살아남는다고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사는 일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변하는 것은 나를 살리는 궁리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너를 위한 궁리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내가 본 세상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변치 않는 것들에 있었으므로
사랑은 지난 사랑이라도
변치 않아야 했으므로.

- [숲에 들다](2008: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