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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과 그늘 사이로 오늘 하루도 지나왔다
일찍 저무는 날일수록 산그늘에 마음 베인다
손 헤도 별은 내려오지 않고
언덕을 넘어가지 못하는 나무들만 내 곁에 서 있다

가꾼 삶이 진흙이 되기에는
저녁놀이 너무 아름답다
매만져 고통이 반짝이는 날은
손수건만 한 꿈을 헹구어 햇빛에 널고
덕석 편 자리만큼 희망도 펴놓는다

바람 부는 날은 내 하루도 숨 가빠
꿈 혼자 나부끼는 이 쓸쓸함
풀뿌리가 다칠까 봐 흙도 골라 딛는
이 고요함

어느 날 내 눈물 따뜻해지는 날 오면
나는 내 일생 써온 말씨로 편지를 쓰고
이름 부르면 어디든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릴 사람
만나러 가리라

써도써도 미진한 시처럼
가도가도 닿지 못한 햇볕 같은 그리움
풀잎만이 꿈의 빛깔임을 깨닫는 저녁
산그늘에 고요히 마음 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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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저녁놀에 고통을 매만져 반짝이면, 그때 

손수건만 한 꿈이라도 헹구어 널어 말릴까?
일찍 저문 오늘은 꿈 대신

가도 가도 닿지 못한 햇볕 같은 그리움이라도 널어놓는다. 
산 그늘에 소리없이 베이는 마음 

초승달 - 박성우 

 

어둠 돌돌 말아 청한 저 새우잠,

누굴 못 잊어 야윈 등만 자꾸 움츠리나

욱신거려 견딜 수 없었겠지
오므렸던 그리움의 꼬리 퉁기면
어둠 속으로 튀어 나가는 물별들,

더러는 베개에 떨어져 젖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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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눈과 가슴과 언어를 가질 수 있을까?
이토록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초승달을 보면서  일기에 쓴 나의 말은 겨우 이거였는데.. 

"깜깜한 하늘에 차가운 초승달 

내 가슴에 꽂힌 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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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생달 [초승달]- 김강호

 

그리움 문덕쯤에

고개를 

내밀고서

 

뒤척이는 나를 보자

흠칫 놀라

돌아서네

 

눈물을 다 쏟아내고

눈썹만 남은

내 사랑

 

(출처: [한국의 단시조 156편] 2015/책만드는 집)

 <촛불 켜는 아침- 이해인>

 

밭은 기침을 콜록이며
겨울을 앓고 있는 너를 위해
하얀 팔목의 나무처럼
나도 일어섰다

대신 울어 줄 수 없는
이웃의 낯선 슬픔까지도
일제히 불러 모아
나를 흔들어 깨우던
저 바람소리

새로이 태어나는 아침마다
나는 왜 이리 목이 아픈가
살아 갈수록 나의 기도는
왜 이리 무력한가

사랑할 시간마저
내 탓으로 잃어버린
어제의 어둠을 울며
하늘 위에 촛불 켜는 아침

너를 위한 나의 매일은
근심 중에서도
신년 축제의 노래와 같기를 -

그래서 나는 눈부신 언어를 날개에 단
아침 새가 되고 싶었다

햇빛을 끌어내려
젖은 어둠을 말리는 나무 위에
희망의 둥지를 트는
새가 되고 싶었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 안도현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별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 되어 우리라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올 때까지는 저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여줄 따뜻한 이불이란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은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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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 세월 새해아침이면 가슴에 떠오르는 노래입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입니다.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처럼 그리움에 서럽던 마음을 나의 눈물로 다 씻어 헹구고

새로 떠오른 햇살처럼 밝은 희망이 되어 당신에게 가고 싶습니다.

그 긴긴 밤을 지나는 동안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타는 가슴이

사랑보다 더한 행복임을 자꾸자꾸 일깨워주시니 그도 감사합니다.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이 모습 이대로 당신께 가고 싶습니다.

당신도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당신 모습 그대로 내게 오고 싶다면 좋겠습니다.

우리 서로 울 곳이 필요할 때 서로의 등에 기대 말없이 그냥 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서로 빙그레 웃음 지을 일이 있을 때 하늘 보며 떠올리는

달 같은 별 같은 얼굴이면 좋겠습니다.

 

올해도 나의 사랑하는 이들이

어둠에 묻혀 어둠이 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인내와 용기를 잃지 않기를

그래서 어둠도 빛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어둠 속에서 빛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새해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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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크리스마스 ㅡ나태주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 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시집, 슬픔에 손목 잡혀 (시와시학사 2000)>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이어령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하나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조그만 이파리 위에

우주의 숨결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내가 혼자인가를 알았다

푸른 나무와 무성한 저 숲이

실은 하나의 이파리라는 것을…

제각기 돋았다. 홀로 져야 하는 하나의 나뭇잎

한 잎 한 잎이 동떨어져 살고 있는

고독의 자리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잎과 잎 사이를 영원한 세월과

무한한 공간이 가로막고 있음을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살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왜 이처럼 살고 싶은가를,

왜 사랑해야 하며 왜 싸워야 하는가를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생존의 의미를 향해 흔드는 푸른 행커치프…

태양과 구름과 소나기와 바람의 증인…

잎이 흔들릴 때

이 세상은 좀 더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의 욕망에 눈을 떴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들었다

다시 대지를 향해서 나뭇잎은 떨어져야 한다

어둡고 거칠고 색채가 죽어버린 흙 속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본다

피가 뜨거워도 죽는 이유를

나뭇잎들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생명의 아픔과 생명의 흔들림이

망각의 땅을 향해 묻히는 그 이유를

그것들은 말한다

거부하지 말라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대지는 더 무거워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인력이

나뭇잎을 유혹한다

언어가 아니라 나뭇잎은

이 땅의 리듬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는다

별들의 운행과 나뭇잎의 파동은

같은 질서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우리의 마음도 흔들린다

온 우주의 공간이 흔들린다.

 

Byun Shiji(1926-2013)  

 



[슬픔 -김용택 ] 


외딴 곳
집이 없었다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어디 울 곳이
없었다

 

---
지난 주에는 갑자기 눈보라가 쳤습니다. 슬픈 재즈 같이 젖은 눈이 아프다는 소리도 없이 잿빛 바람에 마구 휩쓸려 불려 다녔습니다. 누군들 곱고 하얗게 내려 쌓이고 싶지 않을까요.


세상은 온통 고장 난 시계처럼 하루 종일 희미한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가슴속의 다 타고난 재가 불어오고, 불려 다녔습니다. 공연히 해묵은 아픔이 가슴을 적셨습니다. 이 작은 냉기에도 마음이 또 다시 위축됩니다. 하루하루 손에 남은 건 녹아버린 눈송이 같은 젖은 방울 몇 점 뿐.
해 놓은 일도, 남겨진 것도 없이 무산된 계획만 헛손질하며 가버리는 하루, 하루, 그리고 또하루....

늘 손잡아 주던 엄마가 이젠 혼자가라고 나를 남겨둔 정류장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초조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이런 흐린 날은 어려서부터 공연히 서둘러 집에 가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시인은 집이 없었다고 합니다.
외딴 곳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삶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익숙하던 길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잿빛 바람이 불고 날은 쉽게 어둑어둑해지는 겨울날이 우리 삶의 여정에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외딴 곳, 침침한 곳에서 시인이 집을 찾는 이유는 울 곳이 필요해서입니다. 우리 모두 길을 잃은 듯 외로운 날,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이슬을 막아주는 지붕이 되고 기대어 울 수 있는 벽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는 동으로 난 작은 창이 되어 이 외딴 세상에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런 희망으로 시를 감히 고쳐 읽어 봅니다.  "
외딴 곳,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작은 창에 불이 켜졌다. 나는 그대의 가슴에, 그대는 내 가슴에  집을 짓고  이름 없는 설움을 비워내며 조용히 울었다." (2005 이봉희, Denver 중앙일보 문학칼럼 중에서)

 

picture by bhlee

 

<물속의 사막- 기형도>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10222006

 

(c)sgm2013

 

[밤편지 - 김남조]

 

편지를 쓰게 해다오.

이날의 할말을 마치고

늙도록 거르지 않는

독백의 연습도 마친다음

날마다 한 구절씩

깊은 밤에 편지를 쓰게 해다오

밤기도에 이슬 내리는 적멸을,

촛불에 풀리는 나직이 습한 樂曲들을

겨울 枕上(침상)에 적시이게 해다오

새벽을 낳으면서 죽어가는 밤들을

가슴저려 가슴저려 사랑하게 해다오

 

세월이 깊을수록

삶의 달갑고 절실함도 더해

 젊어선 가슴으로 소리내고

이 시절 골수에서 말하게 되는 걸

고쳐 못 쓸 유언처럼

기록하게 해다오 

 

날마다 사랑함은

날마다 죽는 일임을

이 또한 적어 두게 해다오

눈오는 날엔 눈밭에 섞여

바람 부는 날엔 바람결에 실려

땅 끝까지 돌아서 오는

영혼의 밤 외출도

후련히 털어놓게 해다오

 

어느 날 밤은

나의 편지도 끝 날이 되겠거니

가장 먼 별 하나의 빛남으로

종지부를 찍게 해다오

 

시월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 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旅程)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 한 탓이리.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 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황동규, “시월(十月)” 중에서>

 

<사는 기쁨-황동규 >

 

1

​오디오 둘러메고 한강 남북으로 이사 다니며

개나 고양이 곁에 두지 않고

칠십대 중반까지 과히 외롭지 않게 살았으니

그간 소홀했던 옛 음악이나 몰아 들으며

결리는 허리엔 파스 붙이고

수박씨처럼 붉은 외로움 속에 박혀 살자.

라고 마음먹고

남은 삶을 달랠 수는 없을까?

2

사는 건물을 바꾸지 않고는 바꿀 수 없는 바램이 있다.

40년 가까이 아파트만 몇 차례 옮겨 다니며

'나의 집'으로 가는 징검다리거니 생각했다.

마지막 디딤돌에서 발을 떼면

마련한 집의 담을 헐고

마당 절반엔 꽃을 심자.

야생화 밟지 마라 표지 세워논 현충원 산책길엔 도통 없는

노루귀 돌단풍 은방울꽃

그래, 몰운대(沒雲臺)에서 눈 크게 뜨고 만난 은방울꽃

카잔차키스 묘소에 열심히 살고 있던 부겐벨리아

루비보다 더 예쁜 루비들을 키우는 노박덩굴을 심자

겨자씨 비유의 어머니 겨자도 찾아 심자.

나머지 반은 심지 않아도 제물에 이사 와 자리 잡는 풀과

민박 왔다 눌러 앉는 이름 모를 꽃들에게 내주자.

개미와 메뚜기 그리고 호기심 많은 새들이 들르고 벌레들도 섞여 살겠지.

그래, 느낌 서로 주고 받을 마당이 있고

귀 힘 아주 빠지기 전 오디오 볼륨 제대로 올려줄 집이 주어진다면!

오크통에 30년, 책상 구석에 30년, 세상 잊고 산 위스키 앞 세워

와인과 막걸리와 칵테일을 모아 친구들을 불러

먼저 가버린 자들도 번호 살아있다면 문자를 보내

파티를 열자, 바램은 아직 유효하다

3

유효할까?

파티 다음 날, 종일 속도 마하 0으로 움직이는 텅 빈 맛이

몸에 버틸 힘을 줄까?

가을 들어 처음으로 은행잎이 비행 연습을 시작하는 저녁

동향한 창밖으로

건너편 언덕 아파트의 모든 창들이 일제히 황금향으로 피어난다.

대가(代價)없이 자신을 태우는 황금의 절창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는

한 해 가운데 이 한때가 가장 마음에 든다.

'가장'이라는 말에는 지금까지라는 뜻이 숨어있고,

다음은 텅 빔?

조금 전 건물 입구에서

시들고 있는 꽃에게 안부를 물었다.

코끝에 맴돌자마자 사라지는 향기로

꽃은 답했다. 텅 빔?

바램의 속내가 가짐인가 텅 빔인가?

햇빛 스러지며 한 자락씩 황금에서 어둠으로 바뀌는 창들이

차례로 물음을 던진다.

4

그간 군(郡)에서 주차장 집어 넣고

매점과 화장실 내고 길 펴고 넓혀

오르내리는 맛을 한껏 줄인 몰운대.

발걸음 멈추게 하던 제비꽃 달개비들 사라지고,

숨었다 들키던 은방울꽃 자취 감추고

미끄러워 마음 잡아주던 바윗길은 보이지 않고

올라보면, 시야 가득 차 오는 비닐하우스들

뜬구름도 뜨지 않고

아, '몰운대'에서 풀려난 몰운대!

그 언저리에 집 한 칸 마련해

강원도에서 차를 몰다 덜 살고 싶을 때면 슬그머니 들러

낮에는 대에 올라 다른 아무 데도 눈 주지 않고

밤에는 모깃불 피워 놓고 모기 침 쿡쿡 맞으며

답답함에서 풀려나리라던 긴 긴 꿈에서

이젠 새삼 놓여 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는가?

영영 놓여나지 못하게 되었는가?

5

바위 틈에 발톱 박고 서 있는 나무 다섯 그루

바로 뒤에 야트막한 초막

비어있다.

그 뒤로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말없이 넓게 펼쳐진 물,

물 건너 그림자 하나 없이 커다랗고 깨끗한 산,

원나라 화가 예찬(倪瓚)의 한없이 맑고 적적한 산수는

은둔 신호만 켜지면 모든 것 놔두고 들어가

신선인 듯 가볍게 거닐고 싶었던 곳.

오늘 그의 그림 다시 들여다보니

사람들도 짐승들도 그냥 들여다보기만 했을 뿐

멧새 하나 날지 않는다

들어오려면 그림자도 놔두고 오라?

읽던 책 그대로 놔두고 휴대폰은 둔 데 잊어버리고

백주(白酒)한 병 치고 들어가

물가에 뵈지 않게 숨겨논 배를 풀어 천천히 노를 저을까?

건너편을 겨냥했으나 산이 통째로 너무도 크고 맑아

무심결에 조금 더 무심해져서

느낌과 꿈을 부려놓고 그냥 떠돌까?

바람이 인다. 갑자기 구름떼들이 이리저리 몰려 다니고

여기저기 물기둥들이 솟아 상체를 흔들고

얼음처럼 투명한 해가 불타며 하늘 한가운데로 굴러 나온다.

바위에 발톱 박은 나무들이 불길처럼 너울대자

부리 날카론 새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몰려 든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예찬이여, 아픔과 그리움을 부려놓는 게 신선의 길이라면

그 길에 한참 못 미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간간이 들리는 곳에서 말을 더듬는다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매미 울음 끝에 -박재삼

  막바지 뙤약볕 속
  한창 매미 울음은
  한여름 무더위를 그 절정까지 올려놓고는
  이렇게 다시 조용할 수 있는가,
  지금은 아무 기척도 없이
  정적(靜寂)의 소리인 듯 쟁쟁쟁
  천지가 하는 별의별
  희한한 그늘의 소리에
  멍청히 빨려들게 하구나.

  사랑도 어쩌면
  그와 같은 것인가
  소나기처럼 숨이 차게
  정수리부터 목물로 들이 붓더니
  얼마 후에는
  그것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맑은 구름만 눈이 부시게
  하늘 위에 펼치기만 하노니.

   - [울음이 타는 가을 강] (1987, 미래사)

여름날 저녁 - 심재휘
 
내가 그 여름을 떠나면서
여름은 언제나 헛된 저녁이었다
저물녘이면 헐렁한 반바지에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아무렇게나 자란
풀들의 길을 따라
내일을 희롱하며 내가 걷고 있었다 그럴 때면
바람이 터진 기억의 솔기를 자꾸 꿰매며
나를 밀어내는 탓인지 그 때의 들풀 냄새가
나는 듯 할뿐이어서 더욱 손을 내저어 보는데
그럴수록 멀찍이 물러서는
냇물과 산그늘이 있었고
다만 저녁의 푸른 집들만 도드라져서
손 앞에서 잡힐 것만 같았다 여름날 저녁
세상의 모든 윤곽선들은 반듯하였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오늘의 일과를 마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간선도로의 질주 아래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추억의 박제가
또 산산이 깨어져 있었다

바다와 나비 - 김기림(1939)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오늘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그대 가까이 2 - 이성복>
          
자꾸만 발꿈치를 들어 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마득한 하늘에 새털구름이
떠가고 무슨 노래를 불러
당신의 귓가에 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만나지 않았으니
헤어질 리 없고 헤어지지
않았어도 손 잡을 수 없으니
이렇게 기다림이 깊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늘어납니다

고독을 위한 의자 - 이해인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 볼 수 있으므로
  여럿 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고독 속에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
  안 해야 할 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 기울일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 말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 [꽃삽]/샘터사2003)

벚꽃 지는 날에 - 김승동

  가끔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고
  그래서 더 알 수 없는 눈물이
  푸른 하늘에 글썽일 때가 있다.

  살아간다는 것이
  바람으로 벽을 세우는 만큼이나
  무의미하고
  물결은 늘 내 알량한 의지의 바깥으로만
  흘러간다는 것을 알 때가 있다.

  세상이 너무 커서
  세상 밖에서 살 때가 있다.

  그래도 기차표를 사듯 날마다
  손을 내밀고 거스름돈을 받고
  계산을 하고 살아가지만
  오늘도 저 큰 세상 안에서
  바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나는 없다.

  누구를 향한 그리움마저도 떠나
  텅 빈 오늘
  짧은 속눈썹에 어리는 물기는
  아마 저 벚나무 아래 쏟아지는
  눈부시게 하얀 꽃잎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2003년 시집 <외로움을 훔치다> (문화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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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과수원으로 오세요
석류꽃 만발한 곳, 햇살과 포도주와 연인들이 있어요.
당신이 혹 안 오신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당신이 혹 오신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루미/ 이봉희 역)

 

photo fr gardening books-Virginia Woolf's garden
(used here only for therapeutic purpo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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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 본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꼽으라면 당연히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를 빼 놓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티니 컬리지의 정원이 더 먼저 떠오른다.

그곳은 "아, 좋다"라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고요함과 숙연함을 느끼게 하던 공간으로 내 가슴에 남아있다. 아무도 없는 어둑한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안개처럼 어둠이 내리는 그곳에서 같이 수업 듣던 일본에서 온 학생(선생)과 함께 아무 말 없이 한 동안 앉아 있다가 온 기억이 난다. 휴식과 사색의 공간!  의미 없는 소음에 지친 요즘, 그리고 나도 그런 의미 없는 말을 하고 있는 요즘,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도!

 

그런데 시인은 말한다.
이 가슴 벅찬 아름다움이 당신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니 당신이 있다면 또 이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말이 없어도 좋은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 더욱 그리운 계절이다.

 

3월의 기도 - 남정림

익어가는 이 고통이
낭비로 끝나지 않게
해주소서

익숙해진 이 상처가
흉터로 끝나지 않게
해주소서

남모르는 이 아픔이
사치로 보이지 않게
해주소서

3월에는
고통의 가지 끝에
명랑한 새의 노래
머물게 하시고

멍든 잎맥 사이로
순한 꽃향기 맴돌게
하시고
어디에서도 터뜨릴
수 없었던
아픔의 꽃을 내 밖으로
활짝 꺼내게 해주소서

고통이 고통을 안아주고
상처가 상처를 덮어주고
아픔이 아픔을 토닥이는
사랑의 3월이 되게 하소서

천장호에서 -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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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얼어붙은 호수.

한때 깊은 가슴에 품었던 빛도, 그림자도 상실한 채 

꽁꽁 언 마음

깨뜨려볼 수 있을까 돌멩이를 던져본다.

자꾸자꾸 네 이름을 불러본다.

작은 돌맹이 하나에도, 

아주 작은 부름 하나에도

부서지듯 포말선을 그리던 그 섬세하던 네 마음 
이제는 노래마저 떠나버린

네 굳어버린 차디찬 마음에 

쩡쩡 부딪쳐 되돌아오는

그래도 불러보는 네 이름

 

너라고 외롭게 얼어버리고 싶었을까
제 스스로 얼어붙는 마음이 있을까
얼마나 대답하고 싶을까


봄은 반드시 올 거야

지치지 않는다면
나도,

그리고 너도

 

(너는 누구일까.. 

네 이름은 누구일까... 생각해 본다. 

봄은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