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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 천양희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어떤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막무가내 올라간다
고비를 지나 비탈을 지나
상상봉에 다다르면
생각마다 다른 봉우리들 뭉클 솟아오른다
굽은 능선 위로
생각의 실마리들 날아다닌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바람소리
생각(生覺)한다는 건
生을 깨닫는다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生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상에 없어
생각을 버려야 살 것 같은 날은
마음이 종일 벼랑으로 몰린다
생각을 버리면 안된다는 생각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이렇게
바람 많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저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도 불타는
당신의 그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능소화연가 - 이해인]
중구난방이다.
한없이 외롭다.
입이 틀어막혔던 시대보다 더 외롭다.

모든 접속사들이 무의미하다.
논리의 관절들이 삐어버린
접속이 되지 않는 모든 접속사들의 허부적거림.
생존하는 유일한 논리의 관절은 자본뿐.

중구난방이다.
자기 함몰이다.
온 팔을 휘저으며 물 속 깊이 빨려 들어가면서
질러대는 비명 소리들로 세상은 가득차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없이 외롭다.
신앙촌 지나 해방촌 지나
희망촌 가는 길목에서.

최승자- 중구난방이다

갈대 - 천상병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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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 bought at a store in SantaFe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 이성복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 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 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photo by bhlee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정호승, "아버지의 나이" 중에서)

photo by bhlee(@SFO)


그리운 사람,
때로 너무 생각이 간절해져서 전화조차 버거웠다면 쓸쓸히 웃을까?
보고 싶어서 컴퓨터 자판 위에 놓인 손가락들을 본다
그런데
손가락들이 봉숭아보다 더 붉어서 아프다
그리운 사람
조금씩만 서로 미워하며 살자
눈엔 술을 담고 술엔 마음을 담기로
(여림)

다시 쓸쓸한 날에- 강윤후 

 

오전 열시의 햇살은 찬란하다. 무책임하게

행복을 쏟아내는 라디오의 수다에 나는

눈이 부셔 금세 어두워지고 하릴없이

화분에 물을 준다. 웬 벌레가 이렇게 많을까.

살충제라도 뿌려야겠어요, 어머니.

그러나 세상의 모든 주부들은 오전 열시에 행복하므로

엽서로 전화로 그 행복을 라디오에 낱낱이 고해 바치므로

등허리가 휜 어머니마저 귀를 뺏겨 즐거우시고

나는 버리지 않고 처박아둔 해진 구두를 꺼내

햇살 자글대는 뜨락에 쪼그리고 앉아 공연히

묵은 먼지나 턴다. 생각해보면 그대 잊는 일

담배보다 끊기 쉬울지 모르고

쑥뜸 떠 독기를 삭이듯 언제든 작심하여

그대 기억 모조리 지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새삼

약칠까지 하여 정성스레 광 낸 구두를 신자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피노키오처럼 걸어본다.

탈수기에서 들어낸 빨랫감 하나하나

훌훌 털어 건조대에 널던 어머니

콧노래 흥얼대며 마당을 서성거리는 나를

일손 놓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시고

슬며시 짜증이 난 나는 냉큼

구두를 벗어 쓰레기통에 내다버린다.

올곧게 세월을 견디는 그리움이 어디 있으랴.

쿵쾅거리며 마루를 지나

주방으로 가 커피 물을 끓이며 나는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얘야,

죽은 나무에는 벌레도 끼지 않는 법이란다.

어머니 젖은 걸레로 화분을 닦으시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살아갈 날들을 내다본다. 그래, 정녕 옹졸하게

메마른 날들을 살아가리라. 그리하여

아주 먼 어느 날 문득

그대 기억 도끼처럼

내 정수리에 내리찍으면

쪼개지리라

대쪽처럼 쪼개지리라.

 

- - -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옹졸하게 메마른 날들을 살아가리라. 
그러다
아주 먼 어느 날  문득 그대 기억 도끼처럼 내 정수리에 내리찍으면 쪼개지리라 대쪽처럼 쪼개지리라.


버려진 손- 길상호

공사장 인부가 벗어놓고 갔을
목장갑 한 켤레 상처가 터진 자리
촘촘했던 올이 풀려 그 生은 헐겁다
붉은 손바닥 굳은살처럼 박혀있던 고무도
햇살에 삭아 떨어지고 있는 오후,
터진 구멍 사이로 뭉툭한 손 있던
자리가 보인다 거기 이제 땀으로 찌든
체취만 누워 앓고 있으리라
그래도 장갑 두 손을 포개고서
각목의 거칠게 인 나무 비늘과
출렁이던 철근의 감촉을 기억한다
제 허리 허물어 집 올리던 사람,
모래처럼 흩어지던 날들을 모아
한 장 벽돌 올리던 그 사람 떠올리며
목장갑은 헐거운 생을 부여잡는다
도로변에 버려진 손 한 켤레 있다
내가 손놓았던 뜨거운 生이 거기
상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다

photos by bhlee (those pictures are here only for therapeutic purposes)

I celebrate myself, and sing myself
And what I assume, you shall assume
For every atom belonging to me as good belongs to you.
I loaf and invite my soul,
I learn and loafe at my ease observing a spear of summer grass
(Walt Whitman, excerpt from Song of Myself, Part 1)

나는 나를 찬미하고, 나를 노래하네
내가 젠체 뽑내는 것, 당신도 뽑낼 수 있어
내게 있는 작은 것 하나 하나  당신에게도 모두 있으니까.
나는 한가로이 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초대하네
뾰족한 여름 풀잎을 관찰하며 내 맘대로 배우고 빈둥거리지. (휘트만, "나의 노래" 중)
(trans.bh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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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도 쉴 권리가 있어....

내가 좋아하는 것,  산책.
햇살이 깔꼭 침 삼기는 순간처럼 사라지고 나면 그 어스름의 시간을 늘 못 견뎌했다.
그리움이 온몸에 아슬아슬하도록 넘쳐 고이는 시간...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어느 모퉁이에선가 추억처럼 돌연 내 앞을 막고 기다리고 있을 그 무엇이, 그 누군가가,
아니 어쩌면 내 안에 숨은 '내'가 그리웠다.  

내가 좋아하는 것, (누구라도 그렇듯....) 잔디, 나무, 숲, 꽃,...
특히 이름조차 없는 풀섶의 작은 꽃들은 이 엉망인 시력에도 용케 잡힌다.
대학생 때는 저녁 해지고 나면 학교 구석 나만의 나무와 벤치가 있어서 그 그늘에 숨어서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앉아있곤 했었다.  혼자서 "에덴의 동쪽은 저물어 가는구나... " 청승맞게 노래도 불렀던 거 같다.^^ 그러다 달이라도 벙긋 떠오르면 온몸이 자연 속에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육체의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하루하루 레일 위의 인생. 이건 삶이 아니야...를 중얼거리며 하다못해 아파트 단지 내의 온갖 꽃들과 녹색그늘에라도 몸을 숨길 시간조차 없이 살아왔다.....

와 보니 아이가 그렇게 바삐 살고 있다.
어제는 모처럼 아이와 둘이서 분수대 벤치에 앉아 세상 어느 곳에서나 보일 벙긋 차 버린 달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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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낮 11시-12시
딸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꽃시간- 정현종

시간의 물결을 보아라.
아침이다.
내일 아침이다.
오늘밤에
내일 아침을 마중 나가는
나의 물결은
푸르기도 하여, 오
그 파동으로
모든 날빛을 물들이니
마음이여
동트는 그곳이여.

심리치료사, 수필가, 시인, 그리고 문학치료사였던 Kenneth Paul Joshua Gorelick이 2년간 뇌종양으로 투쟁하다 지난달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고, '삶의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위한 길 중 하나로  심리학, 그리고 문학치료에 매료되었다던 그... 그의 명복을 빈다.


나는 옳은 삶을 살아왔다.
행동 하나하나 마다 더 생각하고 더 고민했다
......
나무들은 메마름과 더위에 고통받으며
이 기근 속에  아직도 불굴의 끈기로 매달려
저리 아름답게 서있구나
(뇌 종양 첫번째 수술후 그가 쓴 시)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나면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비 오는 날- 마종기]

만일 당신이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싶거든, 그 누군가를 잘 알고 싶다면.....그가 웃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의 웃음이 친절하고 후하다면, 그는 선한 사람이다.  -도스토엡스키

 그림:(c)bhlee



나로 인해 그대가 아플까 해서
나는 그대를 떠났습니다
내 사랑이 그대에게 짐이 될까 해서
나는 사랑으로부터 떠났습니다.

그리우면 울었지요
들개처럼 밤길을 헤매 다니다,
그대 냄새를 좇아 킁킁거리다 길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든 적도 있었지요. 가슴이 아팠고,
목이 메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대는
가만 계세요. 나만 아파하겠습니다.

사랑이란 이처럼 나를 가두는 일인가요.
그대 곁에 가고 싶은 나를
철창 속 차디찬 방에 가두는 일인가요.
아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풀었다 가두는 이 마음 감옥이여.

마음의 감옥 - 이정하

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 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 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 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 이성복]

늦가을-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을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른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꽃동네를 만드신 오웅진 신부가 수녀들에게 하신 말이란다.

"거지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돈과 먹을 것이 없는 사람?   잘 곳이  없는 사람?

받을 줄만 알 고 줄 줄 모르는 사람, 그게 바로 거지란다."

벌거벗은 나뭇가지에
까치둥지 하나,
벗은 몸
훔쳐본 것 같아
마음 쓸쓸하다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릴케- '두이노의 비가' 에서)



[가엾은 내 손 -  최종천]

나의 손은 눈이 멀었다
망치를 쥐어잡기보다는
부드러운 무엇을 원한다
강요된 노동에 완고해지며
대책 없이 늙어가는 손
감각의 입구였던 열개의 손가락은
자판 위를 누비며
회색의 언어들을 쏟아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던
손의 시력은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다
열개의 손가락에서 노동은 시들어버렸다
열개의 열려 있는 입을 나는 주체할 수가 없다
모든 필요를 만들어내던 손
인간의 유일한 실재인 노동보다
입에서 쏟아지는 허구가 힘이 되고 권력이 된다니
나의 손은 이제
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허구조작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노동을 잃어버리고
허구가 되어간다
상징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