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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 (c)이철수

 

산경-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기억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리고 당신은 기다립니다, 당신의 삶을
영원히 부요케할 그 하나를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렬하고, 독특하고 비범하며
잠자는 돌들을 일깨우는 그 하나,
당신에게 당신을 계시해 줄 심연을.

땅거미지는 시간, 당신은 금박과 갈색빛의
책들이 꽂힌 책장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여행했던 먼 나라들을
그림들과 당신이 얻었다가 잃어버린
여인들이 입었던 가물거리는 빛의 가운들을

그러다 문득 깨닫지요
바로 그거였어! 그리곤 일어섭니다.
두려움과 여러 사건과 기도로 이루어진
당신의 먼 과거, 그 어느 해를 기억해냈으니까요.
(tr. bhlee)

유령-되기   -김언

 

그 사이 나는 아프고 늙지는 않았어요

그날의 햇살과 눈부신 의심 속에서

 

내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어는 시대를 살고 있느냐, 그게 문제겠지요

 

그렇다면 얼굴이 생길 때도 되었는데

얼굴 다음에 표정이 사라집니다

윤곽이 사라진 다음에 드디어 몸이 나타났어요

내 몸이 없을 때 더없이 즐거운 사람

 

그 얼굴이 깊은 밤의 명령을 내린다면

누군가는 아프다고 명령할 겁니다

그날의 태양과 눈부신 의심속에서

 

감정의 동료들은 여전히 집이 되기를 거부하지요

, 나무, 사람들의 데모 행렬엔 한 사람쯤

흘러다니는 내가 있어요

 

허공과 바닥을 섞어가며

흙발과 진흙발을 번갈아가며

공기가 움직일때 나도 따라 걷는 사람

 

그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않아요

다만 어느 시대를 살고있느냐가 문제겠지요

나는 중요하지 않아요.

 

[출발 - 김남조]

 

 

남은 사랑 쏟아 줄

새 친구를 찾아 나서련다

거창한 행차 뒤에

풀피리를 불며 가는

어린 牧童을 만나련다

깨끗하고 미숙한 청운의 꿈과

우리 막내둥이처럼

측은하게 외로운 사춘기를

 

평생의 사랑이

아직도 많이 남아

가슴앓이 될 뻔하니

추스리며 추스리며 길 떠나련다

머나먼 곳 세상의 끝까지도

가고 가리라

남은 사랑 다 건네주고

나는 비어

비로소 편안하리니

그리운 나무 - 정희성

 

사람은 지가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그 사람 가까이 가서 서성대기도 하지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을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와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 추억들 읽어 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벗은 가지 위 위태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

[은행나무- 곽재구]
 

잠자리- 김주대

 

지고 온 삶을 내려놓고

흔들리는 끝으로 간다

날개를 접으면

불안의 꼭대기에도 앉을 만하다

어떤 것의 끝에 이르는 것은 결국

혼자다

허술한 생계의 막바지에

목숨의 진동을 붙들고

눈을 감는다

돌이킬 수 없는 높이를 한참 울다가

죽고 사는 일 다 허공이 된다

품- 정현종

 

비 맞고 서 있는 나무들처럼

어디

안길 수 있을까

비는 어디있고

나무는 어디 있을까

그들이 만드는 품은 또

어디 있을까

 

(사랑한 시간이 많지 않다. 1989)

 photo by bhlee  (from my iphone) 051914

 

 

 

 

해마다 부활하는 사랑의 진한 빛깔 진달래여

네 가느단 꽃술이 바람에 떠는 날

상처입은 나비의 눈매를 본 적이 있니

견딜 길 없는 그리움의 끝을 보았니

봄마다 앓아 눕는 우리의 지병은 사랑

 

                                      -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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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부활하는 나의 봄

그래 나는 해마다 너를 앓는다

신음소리도 낼 수 없는

선홍색 앓음

 

photo by bhlee(@DBG)

노래: 이브라임 훼레


나의 영혼은 슬프고 무거워

나의 이 고통 숨기고 싶어.

꽃들은 알면 안 돼

난 원치 않아.

아름다운 꽃들이

인생의 슬픔을 알게 하면 안 돼


나의 이 슬픔을

꽃이 알면

나와 함께 울게 될 거야.

고요히 꽃들이 자고 있어

붓꽃과 백합, 그들은

그들은 내 슬픔을 알면 안 돼

내 눈물을 보면

꽃들이 죽어버려


그들은 내 슬픔을 알면 안 돼

내 눈물을 보면

꽃들은 죽어버려


넝쿨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웃음의 힘 - 반칠환]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 눈을 깜짝거린다
세계는 그러한 무수한 간단(間斷)

오오 사랑이 추방을 당하는 시간이 바로 이때이다
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산이 있거든 불러보라
나의 머리는 관악기처럼
우주의 안개를 빨아올리다 만다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 - 김수영]

상현 - 나희덕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켝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신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사이에 사라졌다가

다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떤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초승달 - 곽말약(중국시인/1892-1978)

 

초승달이 낫 같아

산마루의 나무를 베는데

땅위에 넘어져도 소리나지 않고

곁가지가 길 위에 가로 걸리네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자화상 - 한하운(1949)

 

한 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

한 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에 굳어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가는 시장끼냐.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짓궂게 왔다가는 포만증飽滿症이냐.

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매워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머리에

쩔룸 쩔룸 다섯 자보다 좀더 큰 키로 나는 섰다.

어쩌면 나의 키가 끄으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웬 땅을 덮는 것이냐.

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

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바람 사나운 거리
파랗고 긴 하늘 아래
너 참 많구나
나 참 많구나
우리 모두 밤하늘의 별처럼
흩어져 있구나

[생각 - 강은교]

photo by bhlee


창문 밖, 사막, 바라보고 있다
내세의 모래 언덕들, 전생처럼 불어가는 모래의 바람
창가에서 이십 년쯤 만났던 노래를 들으며
찻잔을 훌쩍이다가, 나는 결정한다.
이제껏 내가 먹여 키워왔던 슬픔들을
이제 결정적으로 밟아버리겠다고
한때는 그것들이 날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자신이 그것들을 얼마나 정성스레 먹여 키웠는지 이제 안다
그 슬픔들은 사실이었고, 진실이었지만
그러나 대책없는 픽션이었고 연결되지 않는 숏 스토리들이었다
하지만 이젠 저 창 밖 풍경, 저 불모를 지탱해주는 눈먼 하늘의 흰자위
저 무한으로 번져가는 무색 투명에 기대고 싶다
더스트 인 더 윈드, 캔자스   

[더스트 인 더 윈드, 캔사스-최승자]

 

오래된 농담-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 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