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에 해당되는 글 269건

초승달 - 곽말약(중국시인/1892-1978)

 

초승달이 낫 같아

산마루의 나무를 베는데

땅위에 넘어져도 소리나지 않고

곁가지가 길 위에 가로 걸리네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자화상 - 한하운(1949)

 

한 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

한 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에 굳어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가는 시장끼냐.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짓궂게 왔다가는 포만증飽滿症이냐.

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매워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머리에

쩔룸 쩔룸 다섯 자보다 좀더 큰 키로 나는 섰다.

어쩌면 나의 키가 끄으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웬 땅을 덮는 것이냐.

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

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바람 사나운 거리
파랗고 긴 하늘 아래
너 참 많구나
나 참 많구나
우리 모두 밤하늘의 별처럼
흩어져 있구나

[생각 - 강은교]

photo by bhlee


창문 밖, 사막, 바라보고 있다
내세의 모래 언덕들, 전생처럼 불어가는 모래의 바람
창가에서 이십 년쯤 만났던 노래를 들으며
찻잔을 훌쩍이다가, 나는 결정한다.
이제껏 내가 먹여 키워왔던 슬픔들을
이제 결정적으로 밟아버리겠다고
한때는 그것들이 날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자신이 그것들을 얼마나 정성스레 먹여 키웠는지 이제 안다
그 슬픔들은 사실이었고, 진실이었지만
그러나 대책없는 픽션이었고 연결되지 않는 숏 스토리들이었다
하지만 이젠 저 창 밖 풍경, 저 불모를 지탱해주는 눈먼 하늘의 흰자위
저 무한으로 번져가는 무색 투명에 기대고 싶다
더스트 인 더 윈드, 캔자스   

[더스트 인 더 윈드, 캔사스-최승자]

 

오래된 농담-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 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내 몸 속에 잠든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별 한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2007)

한 영혼이 인간으로 만들어지기 전 하나님께 소원을 빌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럼 좋다. 하지만 대신 너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도 좋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자로 태어났다. 빼어난 용모, 재능.. 모든이들이 다 그를 보기만 하면 사랑에 빠졌다.

모두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고 아무런 기쁨도 행복도 없었다. 

왕자는 다시 하나님을 찾아갔다.

 

"저도 남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좋다. 하지만 네가 남을 사랑하는 대신에 남들은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도 좋으냐?"

"좋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지가 되었다.  그는 누구를 보든지 다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침뱉고 멸시하였다.

그래도 그는 행복했다.   [톨스토이]


어느 아프리카 부족에서는 여성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면,

친구들과 함께 들판으로 나가서 태어날 아이의 노래가 들릴 때까지

기도와 명상을 한다.

그들은 모든 영혼은 각자 고유한 향기와 삶의 목적을 나타내는

고유의 진동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임신한 여성이 그 노래에 조율하면,

그들은 큰 소리로 그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나서 부족에게 돌아와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준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족은 함께 모여

태어난 아이에게 그 아이의 노래를 불러준다.

나중에 아이가 교육을 받게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그 아이의 노래를 불러준다.

아이가 성인이 될 때도

사람들이 다시 모여 함께 그 아이의 노래를 불러준다.

그 아이가 결혼할 때도

사람들은 그 노래를 듣게 된다.

그 영혼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가족과 친구들이 머리맡에 모여서

그가 태어났을 때처럼 노래를 불러 그 사람을 다음 생으로 보낸다.

이 부족의 마을 사람들이 한 개인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경우가

한 가지 더 있다.

삶의 어느 때이건 그 사람이

죄를 지었거나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을 때

그를 마을 한 가운데로 불러놓고

마을 사람들이 그를 빙 둘러싼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그에게 그의 노래를 불러준다.

 

이 부족은 반사회적 행동을 교정하는 것은 처벌이 아니라,

사랑과 자신의 고유성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래를 알고 있으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어떤 행동을 할 욕망과 욕구를 갖지 않는다.


바람은
저 나무를 흔들며 가고
난 살고 싶었네

몇 개의 길들이 내 앞에 있었지만
까닭 없이 난 몹시 외로웠네

거리엔 영원불멸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달리고
하늘엔 한 해의 마른 풀들이 떠가네

열매를 상하게 하던 벌레들은 땅밑에 잠들고
먼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 제비들은 시끄러웠네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의 바쁜 발길과 웃음소리
뜻 없는 거리로부터 돌아와 난 마른 꽃 같이 잠드네

밤엔 꿈 없는 잠에서 깨어나
오래 달빛 흩어진 흰 뜰을 그림자 밟고 서성이네

여름의 키 작은 채송화는 어느덧 시들고
난 부칠 곳 없는 편지만 자꾸 쓰네

바람은 저 나무를 흔들며 가고
난 살고 싶었네 

 

말과 별 - 신경림

나는 어려서 우리들이 하는 말이
별이 되는 꿈을 꾼 일이 있다.
들판에서 교실에서 장터거리에서
벌떼처럼 잉잉대는 우리들의 말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는 꿈을.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찬란한 별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어릴 때의 그 꿈이 얼마나 허황했던 가고.
아무렇게나 배앝는
쓰레기 같은 말들이 휴지조각 같은 말들이
욕심과 거짓으로 얼룩진 말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별들이 되겠는가.

하지만 다시 생각한다.
역시 그 꿈은 옳았다고.
착한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이
망설이고 겁먹고 비틀대면서 내놓는 말들이
괴로움 속에서 고통 속에서 내놓는 말들이
어찌 아름다운 별들이 안 되겠는가.

아무래도 오늘밤에는 꿈을 꿀 것 같다.
내 귀에 가슴에 마음속에
아름다운 별이 된
차고 단단한 말들만을 가득
주워 담는 꿈을.


12월 -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

122306

타오르는 책 - 남진우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을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나 일어나 이제 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리라.
거기 나뭇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집 하나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가지리
그리고 꿀벌 소리 붕붕대는 그 숲 속에서 홀로 살아가리.

그 곳에서 나는 평화를 느끼리라, 천천히

아침의 장막으로부터 귀뚜리가 노래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방울져 내려오는 평화를.

그 곳에선 한밤이 은은한 빛으로 가득하고,
한낮은 자주 빛으로 타오르리라,
그리고 저녁 즈음엔 가득한 홍방울새 나래소리.

나는 이제 일어나 가리라,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서 나지막이 찰랑대는 물결소리 항상 내게 들려오고 있으니,
찻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빛 보도 위에 서 있을 때면,
그 물결 소리 내 마음 깊숙이 들리네.

 

[이니스프리 호수 섬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동백 낙화  - 김상경

 

꽃은 떨어질 수록 누추하고, 찬란하다

선운사 뒷 담장 붉어 누운 그대는

갈 땅에서 더 눈물겹다

맺혀버린 그리움의 무게

알알이 뭉치고 포개져서 그런 것일까

오뉴월 솔바람 소리 귀 기울이다

말 못한 사연은 속으로 타들어가

동종소리 사리되었네

선운사 붉은 누이여!

가슴 저며 저며 누운 지금, 낙조보다 붉으니

외져 지나는 가슴 멍이 들어버렸소

 

해벽(海壁) - 문정희

 

눈물이 우리들 첫 숟갈의 밥이었던 것은 알지만

그것이 바다가 되어

지상을 칠 할하고도 반이나 덮어버린 것은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사람의 가슴마다 물결인 것은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저 많은 눈물을 누가 다 흘렸을까

한껏 차오르다 기어이 무너지는 낮과 밤

밀려가고 밀려오는

미친 술병들의 바다

거대하게 떠밀리는 언어의 물거품들

 

어느새 다 마시고 어디로 떠났을까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서한체(書翰體) · ∥  - 박두진

 

 

달아나다오, 달아나다오. 다시는 내가 너를 찾을 수 없게, 더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나다오. 별에서 별엘 가듯 달아나다오.

내 앞에 있을수록 더욱 멀은 너, 내게서 멀을수록 더 가까운 너, 없음으로 더욱 있게 달아나다오. 있음으로 더욱 없게 달아나다오.

한밤에 저 서늘어운 푸른 달만큼, 한낮에 저 활활 끓는 금빛 해만큼, 너를 위해 내가 울릴 달빛 딩동댕, 나를 위해 네가 울릴 햇빛 딩동댕.

무량 영원 우릴 위해 열고 닫을 문, 닫힌 문을 열기 위해 달아나다오. 열린 문을 닫기 위해 달아나다오.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photo by BongheeLee @Sata Fe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西行(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燒却場(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刑量(형량)
단 한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공포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있는 그대여
오후 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기형도- 노을)


---------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지?"

  무심히 아름답다고 감탄하면서 매일같이 바라보는 노을로부터 가슴에 알 수 없는 아픔이 전해올 때 그 의미를 몰랐습니다.  노을이 불타는 오후, 소각장의 폐휴지처럼 타들어가는 남은 햇살들을 보면서 못 다 태운 채 가슴에 남겨진 나의 열정들이 아파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직도 죽지 못해서 펄펄 살아있는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지.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성실히 살아내지 못한 밤이면 잠자리에 드는 것이 떳떳하지 못해서 졸면서도 일기장의 빈 종이를 들여다보곤 합니다. 그리고 내일은 폐휴지를 태우듯 부끄럽게 펄렁이는 하루를 마감하는 일이 없기를 기도해봅니다. 아니, 내 생의 늦은 시간, 이제 정해진 시간을 마감할 때, 땅에 떨어져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채 남아 떠도는 젊은 시절의 열정이 줄지어, 줄지어 헤매는 일이 없도록, 아직도 펄펄 살아있을 때 나의 가야할 바르고 떳떳한 길을 가르쳐 달라고, 그곳으로 인도해 달라고 간절히 기원해봅니다. (bhlee)

껌벅이다가 - 최정례

 

느닷없이 너 마주친다 해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할 것 같다
물건을 고르고
지갑 열고 계산을 치르고
잊은 게 없나 주머니 뒤적거리다
그곳을 떠나듯

가끔
손댈 수 없이
욱신거리면 진통제를 먹고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잠들려고
잠들려고 그러다가

젖은 천장의 얼룩이 벽을 타고 번져와
무릎 삐걱거리고 기침 쿨럭이다가
왜 그럴까 왜 그럴까
도대체 왜 그래야 할까
헛손질만 하다가 말듯이

대접만한 모란이 소리 없이 피어나
순한 짐승의 눈처럼 꽃술 몇 번 껌벅이다가
떨어져 누운 날
언젠가도 꼭 이날 같았다는 생각
한다 해도
그게 언제인지 무엇인지 모르겠고

길모퉁이 무너지며 너
맞닥뜨린다 해도
쏟아뜨린 것 주워 담을 수 없어
도저히 돌이킬 수 없어
매일이 그렇듯이 그날도
껌벅거리다
주머니 뒤적거리다 그냥 자리를 떠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