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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없어도 상점의 불빛은 켜져 있다 심야의,

심야극장의 필름은 돌아간다 손님이 없어도

화면 속의 여자는 운다 손님이 없어도

비는 내리고 손님이 없어도

커피 자판기의 불빛은

밤을 지샌다 손님이 없어도

택시는 달리고

손님이 없어도 육교는 젖은 몸을 떨며

늑골처럼 서 있다 손님이 없어도

............

지하철은 달리고

손님이 없어도

삼청공원의 복사꽃은

핀다 흐느끼듯 흐느끼듯

꽃이 피듯이 손님이 없어도

어두운 거리 상점들의 불빛은 켜져 있다

 

오정국, <손님이 없어도 불빛은 켜져 있다> 중에서  

종점 하나 전 - 나희덕

 

집이 가까워 오면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깨어 보면 늘 종점이었다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 속을 내딛듯 골목으로 사라져 가고

한 정거장을 되짚어 돌아오던 밤길,

거기 내 어리석은 발길은 뿌리를 내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늘 막다른 어둠에 이르러야 했던,

그제서야 터벅터벅 되돌아오던,

그 길의 보도블록들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그래서 길은 기우뚱거렸다

잘못 길들여진 말처럼

집을 향한 우회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희미한 종점 다방의 불빛과

셔터를 내린 세탁소, 쌀집, 기름집의

작은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낮은 지붕들을 지나

마지막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지붕들 사이로 숨은 나의 집이 보였다

 

집은

종점보다는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것이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아이- 이성복

 

저의 아이는 높은 계단을 올라가

문득 저를 내려다 봅니다

저 높이가 아이의 자랑이더라도

저에겐 불안입니다.


세월을 건너 눈과 눈이 마주칩니다
그리곤 이내 눈이 멀겠지요
우리가 손잡을 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사연- 도종환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 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하는 게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는

아리고 아픈 이야기들

하나씩 있습니다...

무서운 시간 - 윤동주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 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 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교화고성에서 - 홍사성]

 

 

집은 땅 위에만 짓는 줄 알았다

 

성은 반드시 돌로 쌓는 것인 줄 알았다

 

40도가 넘어면 사람이 못 사는 줄 알았다

 

지상에는 종교가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다

 

사랑은 잘생긴 사람들만 하는 줄 알았다

 

못난 인생은 인생도 아닌 줄 알았다

 

무너지면 역사가 아닌 줄 알았다

 

정말 다 그런 줄 알았다.

[겨울 가로수  - 민]


잎새 떨군 내 알몸 옆에
네거리의 신호등
꽃집 유리창 너머 마른 장미다발
커피 전문점 따뜻한 불빛도 여전한데
정직했던 그대 표정과 옆모습은
어쩐지 서먹하고 낯설어 갑니다.

내 모든 것이 그대에게 속해 있듯
그대 많은 부분 내게 속해 있으리라
믿고 있지만
그대 고개 젓는다면 그뿐

가까이 가기 위해
이제 더 벗을 것도 없지만

아직 굳건한 얼음 흙덩이 밑으로
가늘고 여린 뿌리들이
그대 찾아 소리없이 뻗어가고 있음입니다.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 -최승호]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 으하하하 크게 웃으니까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 으하하하 크게 웃으니까
당신은 길게 찢어진 입 너머 허공의 빛깔을 보아 두세요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 으하하하 크게 웃으니까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 으하하하 크게 웃으니까
당신은 길게 찢어진 입 너머 허공의 침묵을 들어 두세요

 

by bhlee


   

못- 김재진

당신이 내 안에 못 하나 박고 간 뒤
오랫동안 그 못 뺄 수 없었습니다.

덧나는 상처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당신이 남겨놓지 않았기에
말없는 못하나도 소중해서 입니다.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청춘 - 심보선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지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칼로 사과를 먹다 -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데."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나무에 대하여 - 호승

나의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 주고 싶다. 불을 켜서

오래 꺼지지 않도록

유리벽 안에 아슬하게 매달아 주고 싶다.

나의 슬픔은 언제나

늪에서 허우적이는 한마리 벌레이기 때문에

캄캄한 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거나

아득하게 흔들리는 희망이기 때문에.


빈 가슴으로 떠돌며

부질없이 주먹도 쥐어 보지만

손끝에 흐트러지는 바람소리,

바람소리로 흐르는 오늘도

돌아서서 오는 길엔 그토록

섭섭하던 달빛, 별빛.


띄엄띄엄 밤하늘 아래 고개 조아리는

나의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불을 켜서

희미한 기억 속의 창을 열며

하나의 촛불로 타오르고 싶다.

제 몸마저 남김 없이 태우는

그 불빛으로

나는 나의 슬픔에게

환한 꿈을 끼얹어 주고 싶다


나의 슬픔에게 - 이태수


8월 한낮의 지는 더위쯤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밀물처럼 밀려오는 밤은 정말

견딜 수가 없다.

나로 하여금 어떻게

이 무더운 여름날의 밤을

혼자서 처리하라 하는가

내 주위를 머물다 떠난 숱한

서러운 세월의 강 이쪽에서

그리운 모든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지만

밤이 찾아오는 것만은 죽음처럼

견딜 수가 없다.

차라리 8월의 무더위 속에 나를 던져

누군가를 미치게 사랑하게 하라.

빈 들에서 부는 바람이 되어

서러운 강이 되어.......

[서러운 강 - 박용삼]

나의 느려터진 걸음이 다 지나갈 때까지
고욤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매미 한 마리
울음 뚝 그치고
참고 있습니다
사람처럼 무서운 것이 지나갈 때에는 울음도 이렇게 참고 있어야 한다고, 그렇다고!

[말복-유홍준]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채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