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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시간 - 윤동주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 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 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교화고성에서 - 홍사성]

 

 

집은 땅 위에만 짓는 줄 알았다

 

성은 반드시 돌로 쌓는 것인 줄 알았다

 

40도가 넘어면 사람이 못 사는 줄 알았다

 

지상에는 종교가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다

 

사랑은 잘생긴 사람들만 하는 줄 알았다

 

못난 인생은 인생도 아닌 줄 알았다

 

무너지면 역사가 아닌 줄 알았다

 

정말 다 그런 줄 알았다.

[겨울 가로수  - 민]


잎새 떨군 내 알몸 옆에
네거리의 신호등
꽃집 유리창 너머 마른 장미다발
커피 전문점 따뜻한 불빛도 여전한데
정직했던 그대 표정과 옆모습은
어쩐지 서먹하고 낯설어 갑니다.

내 모든 것이 그대에게 속해 있듯
그대 많은 부분 내게 속해 있으리라
믿고 있지만
그대 고개 젓는다면 그뿐

가까이 가기 위해
이제 더 벗을 것도 없지만

아직 굳건한 얼음 흙덩이 밑으로
가늘고 여린 뿌리들이
그대 찾아 소리없이 뻗어가고 있음입니다.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 -최승호]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 으하하하 크게 웃으니까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 으하하하 크게 웃으니까
당신은 길게 찢어진 입 너머 허공의 빛깔을 보아 두세요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 으하하하 크게 웃으니까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 으하하하 크게 웃으니까
당신은 길게 찢어진 입 너머 허공의 침묵을 들어 두세요

 

by bhlee


   

못- 김재진

당신이 내 안에 못 하나 박고 간 뒤
오랫동안 그 못 뺄 수 없었습니다.

덧나는 상처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당신이 남겨놓지 않았기에
말없는 못하나도 소중해서 입니다.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청춘 - 심보선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지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칼로 사과를 먹다 -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데."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나무에 대하여 - 호승

나의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 주고 싶다. 불을 켜서

오래 꺼지지 않도록

유리벽 안에 아슬하게 매달아 주고 싶다.

나의 슬픔은 언제나

늪에서 허우적이는 한마리 벌레이기 때문에

캄캄한 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거나

아득하게 흔들리는 희망이기 때문에.


빈 가슴으로 떠돌며

부질없이 주먹도 쥐어 보지만

손끝에 흐트러지는 바람소리,

바람소리로 흐르는 오늘도

돌아서서 오는 길엔 그토록

섭섭하던 달빛, 별빛.


띄엄띄엄 밤하늘 아래 고개 조아리는

나의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불을 켜서

희미한 기억 속의 창을 열며

하나의 촛불로 타오르고 싶다.

제 몸마저 남김 없이 태우는

그 불빛으로

나는 나의 슬픔에게

환한 꿈을 끼얹어 주고 싶다


나의 슬픔에게 - 이태수


8월 한낮의 지는 더위쯤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밀물처럼 밀려오는 밤은 정말

견딜 수가 없다.

나로 하여금 어떻게

이 무더운 여름날의 밤을

혼자서 처리하라 하는가

내 주위를 머물다 떠난 숱한

서러운 세월의 강 이쪽에서

그리운 모든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지만

밤이 찾아오는 것만은 죽음처럼

견딜 수가 없다.

차라리 8월의 무더위 속에 나를 던져

누군가를 미치게 사랑하게 하라.

빈 들에서 부는 바람이 되어

서러운 강이 되어.......

[서러운 강 - 박용삼]

나의 느려터진 걸음이 다 지나갈 때까지
고욤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매미 한 마리
울음 뚝 그치고
참고 있습니다
사람처럼 무서운 것이 지나갈 때에는 울음도 이렇게 참고 있어야 한다고, 그렇다고!

[말복-유홍준]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채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면 그 순간 모두가 다 그리워지기 시작할 테니까." (샐린저)

Don't ever tell anybody anything. If you do, you start missing everybody.
from The Catcher in the Rye
--

 

나 하나 꽃피어 - 조동화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너도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나도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봄이여 눈을 감아라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

[병상일기 5- 전초혜]

 

(c)Rene Magritte



2월의 황혼- 사라 티즈데일

새로 눈 쌓여 매끄러운
산 옆에 서 있었습니다.
차가운 저녁 빛 속에서
별 하나가 내다봅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이는 나 밖에 아무도 없었지요.
나는 거기 서서 별이 나를 보는 한
내내 그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bhlee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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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수 있던 그 별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요....

지금은 나도 볼 수 없는 그 별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네 속을 열면 몇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밤 눈 - 기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