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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잃은 나룻배 - 한영기

때로는 나아가고
때로는 되돌아가고
때로는 멈추고 싶지만
노 잃은 나룻배
나에겐
부질없는 바람일 뿐.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물결 흐름 따라
그저 힘없이 떠내려가야만 한다.

이 무능력함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부디 내 가는 그곳이
지나온 곳보다 나은 곳이길
기도하는 것 뿐.

E. Hopper-NY Office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다가
나는 알게 되었지
이미 네가
투명인간이 되어
곁에 서 있다는 것을
그래서 더불어 기다리기로 한다

[성북역 - 강윤후]

 

[이 가을에]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나태주

술 한 잔 - 정호승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가을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 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때 - 도종환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당신은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차라리 당신에게서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또 그렇게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남들은 그리움을 형체도 없는 것이라 하지만
제게는 그리움도 살아있는 것이어서
목마름으로 애타게 물 한잔을 찾듯
목마르게 당신이 그리운 밤이 있습니다.
절반은 꿈에서 당신을 만나고
절반은 깨어서 당신을 그리며
나뭇잎이 썩어서 거름이 되는 긴 겨울동안
밤마다 내 마음도 썩어서 그리움을 키웁니다.
당신 향한 내 마음 내 안에서 물고기처럼 살아 펄펄 뛰는데
당신은 언제쯤 온몸 가득 물이 되어 오십니까
서로 다 가져갈 수 없는 몸과 마음이
언제쯤 물에 녹듯 녹아서 하나되어 만납니까
차라리 잊어야 하리라 마음을 다지며 쓸쓸히 자리를 펴고 누우면
살에 닿는 손길처럼 당신은 제게 오십니다.
삼 백 예순 밤이 지나고 또 지나도
꿈 아니고는 만날 수 없어
차라리 당신 곁을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바람처럼 제게로 불어오십니다

 

used here only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수련-정호승

 

물은 꽃의 눈물인가

꽃은 물의 눈물인가

물은 꽃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꽃은 물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새는 나뭇가지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눈물은 인간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연두- 도종환 

 

초록은 연두가 얼마나 예쁠까?

모든 새끼들이 예쁜 크기와 보드라운 솜털과

동그란 머리와 반짝이는 눈

쉼 없이 재잘대는 부리를 지니고 있듯

갓 태어난 연두들도 그런 것을 지니고 있다

연두는 초록의 어린 새끼

어린 새끼들이 부리를 하늘로 향한 채

일제히 재잘거리는 소란스러움으로 출렁이는 숲을

초록은 눈 떼지 못하고 내려다본다 

처음처럼 - 신영복

 

처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오랑캐꽃 - 조운

 

넌지시 알은 채 하는

한 작은 꽃이 있다

 

길가 돌담불에

외로이 핀 오랑캐꽃

 

너 또한 나 보기를

너 보듯 했더냐.

사막  -  정호승 

 

들녘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듬뿍 머금고

들녘엔 들꽃이 찬란하다

사막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흠뻑 빨아들이고

사막은 여전히 사막으로 남아 있다

받아들일 줄은 알고

나눌 줄은 모르는 자가

언제나 더 메말라 있는

초여름

인간의 사막 

 

2004Kangsan-reprinted here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only

(그림은 제가 너무너무나 좋아하는 강산님의 저작권이 있는 그림이며 이곳에 오직 치료적/교육적 목적으로만 게시되었습니다.)

www.jamsan.com

 

 

 

.....
가야 하나? 그럼 어디로 가나?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날자.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 '날개' 중에서)

 

어둠- 장옥관

 

웬일로 밤늦게 찾아온 친구를 배웅하고 불 끄고 자리에 누우니 비로소 스며든다 반투명 셀로판지 같은 귀 엷은 소리, 갸녈갸녈 건너오는 날개 비비는 소리, 달빛도 물너울로 밀려든다

 

아하, 들어올 수 없었구나!

 

전등 불빛 너무 환해서 들어올 수 없었구나 어둠은, 절절 끓는 난방이 낯설어서 발붙일 수 없었구나 추위는,

 

얼마나 망설이다 그냥 돌아갔을까

은결든 마음 풀어보지도 못하고 갔구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내 이야기에 멍만 안고 돌아갔겠구나

 

 

 

 

 

손님이 없어도 상점의 불빛은 켜져 있다 심야의,

심야극장의 필름은 돌아간다 손님이 없어도

화면 속의 여자는 운다 손님이 없어도

비는 내리고 손님이 없어도

커피 자판기의 불빛은

밤을 지샌다 손님이 없어도

택시는 달리고

손님이 없어도 육교는 젖은 몸을 떨며

늑골처럼 서 있다 손님이 없어도

............

지하철은 달리고

손님이 없어도

삼청공원의 복사꽃은

핀다 흐느끼듯 흐느끼듯

꽃이 피듯이 손님이 없어도

어두운 거리 상점들의 불빛은 켜져 있다

 

오정국, <손님이 없어도 불빛은 켜져 있다> 중에서  

종점 하나 전 - 나희덕

 

집이 가까워 오면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깨어 보면 늘 종점이었다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 속을 내딛듯 골목으로 사라져 가고

한 정거장을 되짚어 돌아오던 밤길,

거기 내 어리석은 발길은 뿌리를 내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늘 막다른 어둠에 이르러야 했던,

그제서야 터벅터벅 되돌아오던,

그 길의 보도블록들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그래서 길은 기우뚱거렸다

잘못 길들여진 말처럼

집을 향한 우회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희미한 종점 다방의 불빛과

셔터를 내린 세탁소, 쌀집, 기름집의

작은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낮은 지붕들을 지나

마지막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지붕들 사이로 숨은 나의 집이 보였다

 

집은

종점보다는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것이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아이- 이성복

 

저의 아이는 높은 계단을 올라가

문득 저를 내려다 봅니다

저 높이가 아이의 자랑이더라도

저에겐 불안입니다.


세월을 건너 눈과 눈이 마주칩니다
그리곤 이내 눈이 멀겠지요
우리가 손잡을 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사연- 도종환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 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하는 게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는

아리고 아픈 이야기들

하나씩 있습니다...

무서운 시간 - 윤동주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 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 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