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깍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대학교 때 이 시를 번역했었다. 그 번역했던 글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어디에 싣느라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이런 것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왜 이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생각도 안 했었는데.... 요즘 지인들이 자신이 쓴 글이 어느 사보나 동인지에 실리면 늘 그걸 올리면서 축하인사를 받거나 할 때, 자신들이 한 일이나 업적을 일일이 기록할 때 가끔 나는 왜 이런 걸 하나도 기록하지 않으면서(기억하지 않고) 살지? 할 때가 있다. 내게는 그런 게, 그렇게 나를 세상에 자랑하거나 알리는 게 중요하지 않았던 거 같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그럴 기력이 늘 부족하다. 그래서 가끔 내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 시를 읽고 번역도 할 만큼 좋아했던 내 마음-- 이 시를 좋아했던 그 때의 "내 마음, " 그 시절 나의 가슴에 울림을 준 이 시의 목소리이다. 그런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다. 그치.... 어쩌면 이런게 아무 "쓰잘데기 없는" 일인지 모른다. 내 친구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넌 참 복잡하게 사는구나.... 영화도, TV 드라마도 우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들이 넌 보이니 피곤해서 어떻게 즐기겠냐. 그냥 보고, 그냥 읽으면 될 걸 피곤하겠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너무나 챙피 했지만 고장난 수도 꼭지처럼 컨트롤 할수 없는 감정에 한때는 교수님 수업 들어갈때마다 굳게 다짐을 하고 수업에 임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절대 울지 말자...'
요즘은 저를 들어내고 표현한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또 한번 절실히 느낍니다.말은 하고 싶었지만 실수의 두려움이 항상 저를 가로막습니다.남편은 실수하는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이 용기를 얻는 다면서 본인은 그래서 더 일부러 실수를 한다고, 남들에게 좋은 일하는 거라며 얘기합니다.
"실수 할 권리가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 저를 위한 말씀 같았습니다.
교수님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이냐며 물어보실때 저는 리차드 기어가 과거를 떠올리며
교회의 닫혀진 문을 여는 장면에서 그 사람이 과거의 경험을 또다시 겪게 되면 어쩌나...
그 교회안의 사람들이 죽었으면 어쩌나 마음을 조리며 보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를 들어내는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였습니다.
그래서 조금 우울합니다. 제 자신에게 진것 같아서...
저를 그럴 듯 하게 포장 하려는 ... 알면서도 제자신을 깨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서 걸어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다행이다' 그 정도의 감정에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교수님의 해석을 들으며 어느순간엔가 닫혀 버린 제 생각 폭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수업은 문학, 영화 , 아니 보여지는 모든 삶의 시각을
새롭게 눈뜨게 하는 그런 능력을 일깨워 주시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입니다.
어느샌가 우울했던 마음이 없어졌네요. 교수님!
늦었지만 저녁해야 겠어요.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2006/05/04
_____ 선생님, 편지 감사합니다.
문학이 가진 힘은 예측할 수 없이 우리 가슴에 찾아와 우리를 깨운다는 것을 선생님을 통해 (그리고 수업을 통해) 또 느낍니다. 마치 사랑이 찾아오듯이요. 첨엔 두려움을 주기도하고 거부반응이 생기기도 하고 그러다 우리가 읽은 쇼팽의 단편소설의 주인공에게 찾아온 각성의 순간처럼 거부를 포기하는 순간, 사랑처럼 밀려오지요.
수업을 통해 힘을 얻으셨다니, 선생님 참 다행이에요. 담엔 두려워하지 말고 편히 말하고 포현하세요. 정답이 없다고 했잖아요. 늘 말씀드렸지만 제가 소설이나 문학, 영화를 읽는 방식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니까 저처럼 읽지 않아도 되어요.^^ 남편분께서 수업에 오셔서 같이 청강하시는 모습 보면서 너무나 감동이이었어요.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보여서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제 마음이 얼마나 따듯해지던지요.
어린이날, 날은 흐리지만 꽃핀 야외에서 아이들과 예쁜 추억 많이많이 담아오세요. 그리고 늘 행복하세요.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만에 내리는 큰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 속 빈 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을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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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그 눈들의 "남은 시간," ㅡ 그것이 차마 고통스러 힘들어했었습니다. 이 땅의 때묻음, 세상의 나약함은 덮는다고 가린다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녹지 않는 눈 같은 환상이라도 있어 내 눈을 덮어주길 바란 것일까요? 어둠에 그을린 세상을 온몸으로 덮고 함께 녹아 길에 쓰러져 그 최후를 맞이하는 눈...그것을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이 겨울에는 질척이는 외롭고 응달진 골목을 걸을 때 그 속에 함께 녹아 내린 희디 흰 눈의 눈물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I 아텐보로 감독의 영화 <셰도우랜즈 Shadowlands>(1993)는 작가이며 영문학 교수, 그리고 평신도 신학자인 C. S. 루이스(Lewis, 1898-1963)가 50이 넘은 나이에 만난 15살 연하의 유태계 미국인 조이 그래샴(Joy Grasham)과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상실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어떤 평자는 "옥스포드 스타일의 <러브스토리>"라고 평을 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과 사랑의 상실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1) 그 뿐 아니라 작가가 갖는 두려움, 즉 현실이 상상, 혹은 관념의 세계를 침입해 들어와 그가 가지고 있는 지적인 확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두려움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2) 또한 고통과 행복, 지성과 감성, 환상과 현실, 세상의 고통과 신의 사랑, 영국과 미국의 대립 등 여러 대립들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내걸진 않았지만 이 영화 속에 나타난 조이야 말로 페미니스트들이 눈 여겨 볼만한 인물이다. 그녀에게는 페미니스트들이 지양하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즉 부조리하고, 부당한 것 같이 보이는 자신의 운명 앞에서의 당당함, 독립심, 주체성이 도전적일지라도 결코 반항적이거나 호전적이지 않게 한 인격체 속에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셰도우랜즈>에서 말하는 영혼의 동반자(소울 메이트soul mates)의 의미를 이 영화가 두 사람의 사랑 속에서 보여주는 주제중 하나인 환상(관념)과 현실(경험)의 관계와 연관지어 논하고자 한다. 영혼의 동반자로서의 잭과 조이의 만남은 그림자 세계에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환상(문학/상상의 세계)과 현실(경험)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영화의 장면, 장면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성격의 차이를 짚어보면서 두 사람이 대변해 주는 두 세계의 의미를 살펴보고, 그럼으로써 두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환상(문학)과 현실의 소울 메이트로서의 이상적인 만남을 제시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II 영화의 처음 몇 시퀀스3)는 관객들에게 루이스를 소개하면서 조이를 그의 세계 속으로 연결 시켜주기 위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회색 빛 속에 옥스퍼드대학촌의 고풍스런 모습이 성가대의 합창을 배경으로 드러나면서 시작된 첫 장면은 곧이어 식당으로 이어진다. 옥스퍼드의 전통대로 학생과 교수가 가운을 입고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가운데 루이스(안소니 홉킨스)의 동화책,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 화제가 되고 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는 잭(실제 루이스는 어린 시절 이미 클라이브 스테이플즈(Clive Staples)라는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잭으로 불리기를 원했다고 한다.)이 어떻게 동화책을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음 장면은 회색 빛 안개 속에서 루이스와 형 워니(에드워드 하드윅)가 집으로 오면서 여성 독자가 보낸 편지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 다 쉰을 넘긴 나이지만 독신이다. 그리고 다음날 술집에 교수들이 모여 또 다시 루이스의 동화책을 놓고 빈정거린다. 교목은 마법의 나라로 가는 문이 있는 옷장이 교회의 상징이 아니냐며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자 루이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한다: "그냥 마법일 뿐입니다. 자, 보세요." 그러면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면서 일어나 교수들 앞에서 옷장 문을 열고 마법의 나라로 들어가는 어린아이의 역할을 해 보여주다가 웃음을 참고 있는 교수들의 반응에 무안한 듯 황급히 자리를 뜬다. 교수들은 서로 바라보며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린다. 다음 시퀀스는 루이스가 전 장면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강당을 가득 채운 청중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을 약간의 로우 앵글로 잡아서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즉 청중의 눈으로 바라보는 루이스는 전 장면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당당하고 약간은 도도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확신에 찬 연설가이다. 강의 내용은 인간이 당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당한 고통과 신의 섭리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일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버스사고로 수많은 청년사관생도들이 죽어갔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느냐는 신의 선함과 뜻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나타내는 편지를 인용하면서 연설을 한다:
그 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왜 그 사고를 막아주지 않으셨지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닌가요?...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이게 그분의 질문이었습니다.] 만일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예"라면 어떨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특별히 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시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사랑 받기를 원하십니다.
루이스는 오늘날도 설교 중에 흔히 인용되는 "고통은 귀머거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확성기"라는 말을 한다. 고통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신이 주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마치 조각가가 돌을 쪼아 완벽한 형상의 조각품을 만들어 내듯이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우리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확신에 찬 시선으로 청중을 둘러보며 말한다. 카메라는 그의 말에 감동 받고 매료되는 청중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여러 팬들의 편지들 속에서 조이의 편지를 읽는다. "당신 꿈을 꾸었어요. 당신도 내 꿈을 꾸시나요?"라고 하는 다른 여성 팬들과 달리 조이의 편지는 자신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다고 잭은 형 워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좀 다른 것 같아. 마치 나를 알고 있는 듯이 편지를 쓰거든... '저는 당신이 마법에 걸린 어린 아이인지 아니면 마법을 거는 마술사인지 알 수가 없어요' 이렇게 썼어.
이런 조이의 편지에 관객은 지금까지 살펴본 앞의 두 시퀀스에서 나타났던 잭의 두 가지 얼굴, 즉 마법의 옷장 문 앞에 선 어린아이의 역을 해 보이던 잭의 아이 같은 천진한 얼굴과 청중들 앞에서 고통의 의미를 설명하며 그들을 매료시키던 자신만만한 마법사 잭의 두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것을 꿰뚫어 본 그녀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영화는 이렇게 조이가 안락한 고치 속에서 조용하고 질서정연한 삶을 살고 있는 루이스의 세계에 침입해 들어오게 될 것을 암시함으로 시작되고 있다. 편지에서 시작한 조이와 루이스의 만남의 과정은 그녀가 옥스퍼드로 찾아오면서부터 이 영화에서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처음에는 호텔 커피샵에서 시작하여 웅장한 옥스퍼드 대학건물, 어려서부터 살아온 루이스의 집, 책들이 성곽을 이루고 있는 서재, 그리고 여자 방문객은 찾아 온 적이 없는 학교 연구실로, 점점 사적인 공간으로 이동해 가면서 결국 조이는 단단히 방어하고 있던 잭의 내면의 세계와 그가 숨어있던 마법의 옷장 속까지 찾아가게 된다. 잭의 마법의 옷장에는 상실된 어린 시절이 억압되어 환상 속에 숨어 있었다. 어떻게 조이가 루이스를 옷장 밖으로, 유아방 밖으로, 관념적 상상의 세계 밖으로 이끌고 나오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만남을 과정을 차례차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루이스와 조이(데브라 윙어)의 첫 만남에서부터 루이스는 조이의 도전 앞에 당황한다. 조용한 호텔 커피샵에서 큰소리로 "루이스라는 분 계세요?"라고 자신을 찾는 조이에게 루이스는 초등학교 교실의 학생처럼 수줍게 손을 든다. 그러나 그런 과감한 행동과 달리 그녀는 섬세하고 민감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자기가 대중적인 유명인사가 아니라는 말에 그 많은 책을 쓰고 연설을 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모른 채 그냥 내버려두길 원하는가 라고 허를 찌른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루이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곧 알아차리고는 그녀의 과장된 행동은 두려움과 긴장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였음을 고백한다:
조이: [긴장감과 싸워 이겨보려는] 제 행동이 좀 유치하긴 하죠. 금방 괜찮아 질 거예요. 잭: 너무 서두를 건 없어요. 저도 멋진 싸움을 좋아하니까요. 조이: 그래요? 잭: 네. ....놀랍다는 표정이시네요. 조이: 아니, ... 아니에요. 좋죠, ... 멋진 싸움을 좋아 하신다니... 멋지시네요. 잭: 그런데요? 조이: 그런데 당신이 마지막으로 싸움에서 진 게 언제였지요?
잭이 다른 사람과 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는 월등한 위치에 있으면서 대등한 멋진 싸움을 좋아한다고 말하니까 조이가 날카롭게 지적해 주는 말이다. 아이러닉하게 이 짧은 첫 대면 장면에서부터 이미 두 사람은 마치 핑퐁게임을 하듯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고 받아넘기는 언어의 "싸움"을 하고 있다. 이 영화에 (뒷부분을 제외하고) 나타나는 두 사람의 언어의 대결은 셰익스피어이래 금세기 최고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4) 루이스는 어린 조이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도전을 받으면서 당황해 한다. 잭이 한번도 옥스퍼드의 가장 높은 교회 탑에 올라가 5월 첫날 벌어지는 옥스퍼드의 전통적인 해맞이축제를 구경한 적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눈을 감고 사느냐"고 허를 찌르는 조이 앞에 그는 할말을 잃고 만다. 확실히 조이는 그를 무조건적으로 열광하는 팬들, 청중들과는 다른 여자이다. 잭(루이스)은 조이와 아들 더글라스(죠셉 마젤로)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워니는 그녀가 못마땅하다. 첫 만남에서 그녀의 당돌한 지성과 통찰력에 감동을 받았음에도 워니가 그녀를 불신하고 계속 냉소적인 것은 외견상으로는 조이가 결혼한 여자라는 점과 미국인이라는 점에 대한 미묘한 편견 때문이지만 사실은 그들의 오래된 성, 안전한 세계를 침입 당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조이의 어린 아들 더글라스는 또 다른 잭의 팬, 동화 나니아 이야기의 팬이다. 루이스는 더글라스의 나니아 책표지에 "마법은 끝나지 않는다" 라는 사인을 해주자 조이는 "만일 그렇지 않거든 고소해라"라고 말한다. 조이는 루이스에게 자신의 시, "마드리드에 내리는 눈(Snow in Madrid)"을 낭송한 뒤 자신이 전쟁이 일어났던 그 곳에 직접 가보지 않고 이 시를 썼다고 말하고 이로 인해 루이스와 조이는 직접적인 경험(고통의 체험)과 간접 경험인 독서(안전한 대리경험), 현실과 상상의 세계에 대한 의견의 대립을 보인다:
잭: 개인적인 경험이 전부는 아니지요. 조이: 제 생각은 달라요. 제 생각엔 경험이 전부예요. 잭: 그럼 책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이겠군요. 조이: 아니요. 시간낭비는 아니지만 독서는 안전하지 않나요? 책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으니까요. 잭: 누가 상처를 입고 싶어하겠어요?
잭은 고통을 직접 체험한다고 더 진실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고통은 신의 확성기라는 자신의 연설 내용을 반복하지만 조이는 이미 그 말을 다 외고 있다. 이렇게 조이는 잭의 내면세계를 속속들이 여행한 사람인 듯 하다. 그렇기에 그녀가 잭의 영혼의 동반자가 되어 누에고치 속에서 그를 해방시키고 날아오르게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고치 밖의 세계는 잭의 말대로 위험한 곳이다. 그 곳은 마법이 끝난 세상, 옷장 밖의 세상, 어른의 세상인 것이다. 잭은 조이를 책이라는 벽돌로 든든히 지은 안전한 세계인 서재로 안내한다. 그러나 그곳도 조이 앞에선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다. 벽에 걸려있는 [황금 골짜기] 그림은 액자로 상징되는 틀 속에 갇힌 루이스의 관념의 세계처럼 보인다. 하늘에서 황금빛 빛이 비치고있는 골짜기를 보자 조이는 "이 곳, 실제로 있는 곳인가요?"라고 묻는다. 그 그림은 어린 시절 유아 방에서부터 지금까지 늘 잭의 곁에 걸려있는 그림이다. 어릴 때는 그곳이 실재하는 곳이 아니라 천국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어느 날 길모퉁이를 돌면 문득, 산등성이를 넘어서면 문득, 그곳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한다. 실재하는 장소이지만 잭은 그곳에 가 본 적이 없다. 황금골짜기가 실재하는 장소인가 묻는 조이의 질문 때문인지 아니면 유아 방에 걸려있던 황금골짜기 그림이 기억을 상기시킨 것인지, 잭은 갑자기 깊이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고는 자신이 조금 전 대답을 회피했던 조이의 질문, 즉 진정으로 아픔을 겪어본 적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한다. 바로 더글라스와 같은 나이인 9살,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던 고통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상실의 고통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나이였지만 아직은 그것을 직면하거나 수용하고 대처할 수는 없는 어린 나이에 경험한 첫 고통이었기에 더욱 충격이 컸다: "처음 겪을 때 가장 힘들지요... 그때는 세상이 다 끝나버린 것 같았어요." 조이는 죽음 이후의 만남(죽음 후의 세계인 천국)에 대해 묻지만 잭은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그 뿐이라는 말을 한다. 이런 잭의 회상은 후에 어머니의 죽음 앞에 보이는 더글라스의 반응을 미리 암시해준다. 치통으로 아파 울면서 엄마가 와주기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고 회상하는 잭에게 조이는 "복도에서는 엄마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 한데 여전히 엄마는 오시지 않았지요?"라고 잭의 어린 시절의 아픔과 상실감, 그리고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에 공감해준다. 조이는 이런 모습은 잭에게 도전이상의 위로를 준다. 그의 주변의 모든 이들이 완벽한 학자이며 연설가이며 작가인 잭의 아픔이나 연약함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의 당당한 겉모습에만 존경을 보내고 혹은 경계하거나 일방적으로 경청하는 반면, 조이는 연약할 수 있는 인간 잭의 모습을 바라보고 진정으로 그를 이해하는 것이다. 조이는 항상 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불러일으킬 반응을 감지하고 앞서 나가는 예민한 통찰력과 섬세한 배려의 소유자이며 자아 반성적 인물이다. 이에 비해 오히려 자기 확신과 논리의 성에 갇혀 정체된 잭은 조이 앞에 있으면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사물을 분석하고 삶의 고통과 그 수수께끼를, 심지어는 신의 마음까지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그의 날카롭고 차가운 지성은, 그리고 경험적이라기 보다는 직관적인 상상력은, 조이의 날카롭지만 따뜻한 통찰력과 다르다. 조이의 통찰력은 오히려 삶의 한 복판 전쟁터에서 겪은 "자신에 대한 회의, 두려움, 고통, 공포" 그리고 그에 따른 자아반성의 결과로 생긴 것이며 아픔을 겪은 사람이 그 대가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실제인물 루이스는 『내가 목격한 고통』에서 아내 조이를 딸이자 어머니이며, 전우였다고 회상하는 것이다.5) 영화는 차차 '방문객'인 조이의 역동성에 의해 앞으로 나가게 된다. 잭은 조이를 크리스마스에 다시 집으로 다시 초대한다. 이번에는 기차역까지 마중 나간 잭의 행동에서 그가 조이에게 맘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총장이 주최하는 대학 성탄파티에 잭과 함께 참석한 조이는 모든 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 앞에 당당하다. 그 동안 간간이 보이던 영-미의 대립의 주제가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되는 장면이 이 상아탑의 파티이다. 그는 잭의 동화책을 "자기들의 우정을 시험하는" 책이라고 비아냥거리는 크리스토퍼 라일리(죤 우드) 교수에게 그 책이 마술처럼 경이롭다고 말한다. 라일리는 잭에게 "축하하네, 잭. 자네 영혼의 짝을 만난 것 같군."이라고 말을 한다. 이 말은 라일리 교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적절히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조이는 노골적으로 미국인과 여자를 경멸하는 라일리에게 멋진 언어의 펀치를 날린다:
라일리 교수님, 알고 계신 대로 저는 미국에서 왔어요. 문화가 다르면 말하는 법도 다르지요. 아마 그 점에 대해 교수님이 절 좀 도와 의문을 풀어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일부러 상대방을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그런 어투로 말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어리석으신 건가요?
이처럼 조이는 강하고 정직하며 용감한 사람이다. 알코올 중독자이며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과 그의 새로운 여자관계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도망 온 가난하고 불행한 여자, 잭이 묘사하듯이 유대인이며 여자이며 미국인이며 이혼녀라는 핸디캡을 가진 그녀의 이런 당당함은 거친 운명 앞에서의 당당함과 용기인 것이다. 실제 인물인 루이스도 조이를 모든 남자친구에 맞먹는 친구였다고 말하고 있다.6) 잭은 조이가 남편을 떠나 아이와 함께 먼 이국에서 성탄을 보내는 이유가 불행한 결혼생활 때문임을 알게 되고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오솔길을 따라 멀어져 가는 조이의 차를 바라보며 루이스가 뒤늦게 망설이듯 시도해 보는 그러나 곧 포기하고 마는 굿 바이 동작은 마음 빗장을 붙잡고 두려워하는 루이스의 마음을 표현해주는 너무나 인상적인 장면이다. 영화에서 거의 대부분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루이스의 표정을 잡아 그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장면에서는 얼굴 표정 대신 뒷모습을 앵글을 서서히 높여가며 보여준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고 서있는 머리가 벗어진 두 형제의 뒷모습과 허망하다 해야할 지, 아니면 고통스럽다고 해야할 지 모를 제스츄어, 그리고 오른쪽 프레임 옆으로 두 사람을 옮겨 화면에 담은 마른 잎들이 몇 개 뒹구는 집 앞길의 풍경은 언어가 나타낼 수 없는 루이스의 내면의 풍경을 완벽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후에 같은 길로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영구차를 떠나보낸다.) 조이가 떠난 후 루이스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있다. 그는 여전히 고통의 의미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보다는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을 줄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의 장난감이 모든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아 방이 전 세계인줄 알고 그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우리를 그 유아 방에서 쫓아내어 다른 이들의 세계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안전한 어린아이의 세계에서 쫓아내는 그 무엇은 바로 고통입니다."
루이스의 설교에 의하면 성장한다는 것은 사랑을 배우는 것이며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나만의 세계에서 다른 이들의 세계로 고통을 통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난감으로 상상하며 만족하는 어린아이의 이기적인 세계에서 다른 이들의 세계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 "고통"이라는 그의 연설은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는 듯하다. 이제 C. S. 루이스는 예전처럼 안전히 옷장 속에 살고 있을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의 삶이 예전의 평안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허전함을 감출 수 없는 잭은 그러면서도 아직 자신이 조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강연장 수많은 청중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찾아내고 그녀에게 다가갔을 때 기껏 그가 할 수 있는 말, 그 나름대로의 고백은 "당신 생각을 늘 했어요. 그래요, 늘 당신생각을 하며 지냈어요..."를 반복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두 사람의 대화는 지금까지의 탄력과 재치와 역동성을 잃고 겉돌고 어긋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이스가 두려움에서 진실을 회피하고 자기 방어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잭이 친구의 우정으로 영주권이 필요한 조이와 서류상의 결혼을 하는 장면은 바로 이런 잭의 자기방어 심리를 잘 보여준다. 반지도 없는 결혼식을 형식적으로 마친 후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기차시간 때문이라며 퍼붓는 비속에 조이를 남겨두고 급히 가버리는 그의 행동은 형 워니 마저도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안전한 환상과 관념의 세계가 흔들리는 위험을 감지한 루이스의 과장된 자기방어일 뿐이다. 이런 고집스런 방어 벽 앞에서 조이는 마침내 지치고 만다. 옥스퍼드의 졸업식장에서 조이의 말에 딴전을 피우며 거리감을 두는 그의 우월감을 견딜 수가 없어진 조이는 자신에 대한 회의도 두려움도, 아픔도 공포심도 가져본 적이 없이, 아무에게서도 도전 받은 적 없이, 항상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경지에서 담을 쌓고 군림하는 루이스에게 자신은 친구가 될 수는 없다며 방을 나가버린다. 영화가 아니라 실제 경우도 그들을 지켜본 친구들은 루이스가 일찍부터 조이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다만 그 사랑을 깨닫고 인정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안소니 홉킨스는 <남아있는 나날들(The Remains of the Day)>에서 보여준 감정을 극도로 자제하는 연기뿐 아니라 그 든든한 자제력의 벽이 균열되어 새어 나오는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의 누출을, 때로는 더글라스보다 더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노학자의 모습에서부터 자아를 발견해 가면서 부드럽고 온화하게 변화하는 루이스의 내면을 드러내는 표정변화까지를, 절제된 연기로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 영화의 한 장면도 한 대사도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그 "고통스런 느림" 속에서 변화되는 잭의 모습, 마침내 두려움을 끌어안고 인정하게 되는 내면의 성장과 사랑의 과정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조이가 암으로 쓰러지고 마침내 또 다른 상실의 고통 앞에 서서야 비로소 잭은 자신의 사랑을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그의 눈빛과 표정도 무장을 해제하고 올바로 조이를 바라본다: "그거 아세요? 당신 달라졌어요. 이제는 날 제대로 바라보시는 군요."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 상실에 대한 내면의 두려움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잭이 죽음을 앞에 둔 조이에게 청혼을 할 때 조이와 함께 관객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잭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잭: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이 바보 같고 겁에 질린 늙은이와 결혼해 주겠소? 조이: 이번 한 번 만이에요.
조이는 잭을 관념과 환상의 옷장에서 경험과 현실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마지막 여행을 하게 된다. 기적처럼 병세가 좋아진 조이는 잭과 함께 처음으로 5월 첫날 해맞이 축제도 구경하러 가고 액자 속의 천국인 '황금골짜기'를 찾아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 여행은 잭에게는 세상 밖 경험의 세계로의 입문과 같다. 잭은 호텔 룸서비스에 진을 시키면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쩔쩔맨다. 잭이 어린 시절 천국인 줄 알았다는 황금골짜기는 사람들의 실수로 잘못 지어진 이름이었다. 그곳은 태양이 아름답게 비치는 곳이 아니라, 날씨가 늘 궂은 장소이다. 잭은 약속의 땅은 고통이 없는 곳이라는 것은 동화적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과 마주쳐야 하는 것이다. 잭은 그곳을 찾아가면서 조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잭: 나는 물론 우리가 이미 거기에 와 있는 걸 알아. 조이: 어디요? 잭: 거기 조이: 아, 거기요. 그래요.
잭은 그 곳에 가보지 않아도 이미 조이로 인해 "그 곳"에 와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잭이 생각한 종류의 "행복"과 달리 조이가 생각하는 천국과 행복은 비가 오는 황금골짜기처럼 직시해야 하는 고통과 현실이다. 두 사람이 황금골짜기에서 소낙비를 피하고 있는 동안 잭은 다시 한번 자신이 도달한 행복(황금골짜기)에 대해 말한다. 이제는 다시 길모퉁이를 돌거나 산을 넘거나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미 그곳에 와 있으니까. 그러나 조이는 잭에게 "비가 그치기 전" 그에게 현실을 직시하도록 한다. 자신은 죽어가고 있으며 잭이 지금 생각하는 '황금빛' 행복은 더 이상 행복이 아닐 것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행복과 고통은 관념 이상의 현실이며 그 현실 속에서 고통과 행복은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처럼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사랑과 행복을 택할 때 고통은 더불어 선택되는 것이며 그러한 현실을 용감히 직시하고 모험하고 선택하고 경험해야지 안전히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잭: 나는 더 이상 다른 곳엔 가고 싶지 않아. 새로운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지도, 다음 번 모퉁이를 돌아보거나, 또 다른 언덕을 넘거나 하지도 않을 거야. 여기 우리가 이렇게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조이: 그게 당신이 말하는 행복이군요, 그렇죠? 잭: 그래. 조이: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할 거예요, 잭. 잭: 지금은 그런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 같이 있는 동안만은 그런 생각으로 그 행복을 깨뜨리지 맙시다. 조이: 행복을 깨뜨리는 게 아니에요. 더 진실 되게 바라보는 거죠. 비가 그치고 돌아가기 전에 곡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잭: 꼭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조이: 난 죽을 거예요. 그 후에도 난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요.... 잭: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내 걱정은 하지 마오. 조이: 아니요. 그냥 견디며 살아가는 거 말고, 당신 그 보다 잘 지낼 수 있어요. 내 말은, 그 때 당신이 겪는 고통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일부라는 사실이에요. 그게 정당한 거죠.
조이가 죽은 후 잭은 그 동안 그가 의지해오던 세계에 대한 엄청난 회의에 빠지게 된다. 청중들 앞에서 확신에 차서 말했던 고통의 목적과 의미는 경험의 도전 앞에 속수무책이다: "이제 보니 고통은 그냥 고통일 뿐이야. 명분도, 목적도, 양식도, 뭐도 없어. 아무것도. 어떤 말도 할 수 없어. 이젠 알겠어. 내가 직접 경험을 해보니까... 경험은 잔인한 선생이지만, 확실히 가르쳐 주는군. 맙소사. 경험이 가르쳐 주어."7) 이제 잭은 다시 어린 시절처럼 고통 앞에서 도망쳐서 안전한 옷장 속으로 숨어 들어갈 것인지 어떤지 영화는 그림 같은 장면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어른 잭이 더글라스와 함께 다락방 옷장 앞에 나란히 앉아서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마법의 옷장 앞에서 기적을 바라는 마지막 시도라고 보이기 보다 열리지 않는 마법의 문을 인정하는 절망으로 보인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잭(더글라스)과 현재의 잭은 마법의 옷장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더 이상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 학기가 되어 다시 예전처럼 강의를 시작한 루이스는 체드윅이라는 학생에게 질문을 던진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혹 누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사랑을 한다고 말한다면?" 학생 체드윅의 대답은 조이를 만나기 전 잭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체드윅이 "경험한 적은 없지만 책에서 읽은 사랑에 대해" 열심히 논하는 동안 루이스는 창 밖을 바라다보며 자신의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보이스 오버 나래이션으로8) 이야기한다:
상실의 고통이 이렇게 아프다면 왜 사랑을 할까? 나는 이제 더 이상 답이 없다. 다만 내가 살아가는 삶밖에는. 그 삶 속에서 내게는 두 번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어린아이로 한번, 그리고 어른으로 한번. 어린아이는 안전함을 택했고 어른은 고통을 선택한다. 지금의 고통은 그 때의 행복의 한 부분이다. 그게 정당한 거다.
III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더글라스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처음 잭을 방문했을 때 더글러스는 우선 다락방을 찾는다. 그 곳에서 낡은 옷장을 발견하고는 달려가 그 앞에 설레는 마음으로 서본다. (그 옷장은 나니아 동화책에 그려진 마법옷장 그림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있다.) 어린 더글러스에게는 동화책의 세계와 현실세계가 구분되지 않는다. 두 번째 잭의 집을 방문한 더글라스는 또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가 본다. 그는 부모님의 불화와 아버지의 폭력, 타국에서 보내야하는 성탄절 등 모든 현실이 버겁기만 하다. 조심스레 옷장 앞으로 다가가 낡은 코트를 헤치고 옷장 벽을 두드려보지만 마법의 문을 열리지 않는다. 더글라스는 이 영화에서 내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나 고통 앞에 보이는 어린아이 특유의 반응인 부루퉁함으로 방어기제를 삼는다: "그냥 낡은 고물 옷장일 줄 알았어. 아무려면 어때.... " 조이가 떠나가면서 잭에게 남겨놓은 더글라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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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ttenborough`s Shadowlands is as one describes it a "Love Story-Oxford style." However, within this love story movie based on the real life story of C. S. Lewis and Joy Grasham, there are some of the basic questions of life. What is real and what is not? What is reality and what is fantasy?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The soul mates of this movie represent the ideal fellowship between the fantasy world(books, ideals, illusion) and the real world(experience). This paper is to study how C. S. Lewis who, as Joy put in her letter, was not only a magician casting magic but also a little boy caught by it, is led by his soul-mate, Joy, out of his little "magic wardrobe" into the world of others, into the real world. By studying that process, this paper tries to find out one of the main themes of the movie. The script writer, Nicholson changes the real life two sons of Jack and Joy to an only son, Douglas. This paper also will discuss the meaning of Douglas. Like an intruder Joy enters into the safe cocoon of Lewis. Their meeting places are symbolic as well as real. Their first meeting at a Hotel coffee shop leads them little by little to a more private world of Lewis. He invites her to his study where the books are stacked like the brick wall that shuts him safe from the real outside world. Finally Joy can penetrate deeper into the "wardrobe" of Jack, the fantasy world where "magic never ends." "The nursery is not the whole wide world" and the childish toys do not bring all the happiness. Nor is the Golden Valley(the imagined Paradise of Jack`s childhood) golden. It is wet when the two visits there as a honeymoon. As Jack himself lectures to the audience "something must drive us out of the nursery into the world of others [in order for us] to grow, to love and be loved" and that something is suffering. Now Jack experiences the loss again as a man as he once had really been hurt as a boy. The symbolic scene of Jack and Douglas sitting together like the past and the present in front of the "magic wardrobe" represents his final and desperate appeal in vain to the safe fantasy world. However, this paper concludes that Attenborough`s <Shadowlands> does not put any more weight on experience/reality(Joy) than on fantasy, ideal world(Jack). As the title speaks itself, and as its facade-story of love show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seeming opposite worlds constantly affect and heal each other like "soul-mates" because Joy, too, is healed and gets strength to walk against the harsh reality because of Jack, his fantasy books, and his sermons on the meaning of pain. (c)2003BongheeLee
시월에 -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 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 2006년 시집 <가재미> (문학과 지성사)
언제나 지쳐서 돌아오면 가을이었다. 세상은, 여름 내내 나를 물에 빠뜨리다가 그냥 아무 정거장에나 툭 던져놓고 저 혼자 훌쩍 떠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나를 보고 빨갛게 웃던 맨드라미 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단지 붉은 잇몸 미소만으로도 다 안다는 그 침묵의 그늘 아래 며칠쯤 푹 잠들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일어서는 길에 빈혈이 일어날 만큼 파란 하늘은 너무 멀리 있고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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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빈혈이 일어날 만큼 멀리 있는 파란 하늘 말고 기대면 체온이 전해져 오는 맨드라미 같은 가슴을 가진 그런 붉은 마음 친구 평생 기다려왔다. 평생 그런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일까 환상일까
너무 바빠서 외롭다 말하니까 누군가 웃었다. 복에 겨운 소리라고.... 나 자신에게서 유기되고 방치된 나는 어느 정류장에 툭! 짐짝처럼 던져져 있을까?
널 잃어 빈 가슴에 못 박는 아픔보다 널 안고 가시를 품는 아픔이 차라리 행복임을 너는 알까?
널 안고 흘리는 따듯한 눈물이 널 잃고 흘리는 따가운 눈물보다 차라리 축복임을 너는 알까?
그러니 네 상처투성이 온몸
그 가시로
홀로 아파하지마 안기지도 못하고 자꾸자꾸
도망가지마
맘껏 내 품에 안기렴
내 사랑
MP
02/22/2007 --------------- 글을 쓰다가 언젠가 보았던 이 그림이 생각났다.
그림:출처미상(혹시 출처를 아시면 알려주십시오.)
ㅡㅡ 언젠가 꿈을 꾸었었다. 내 몸에서 끝도 없이 장미가시를 뽑아 내는 꿈이었다.
너무 슬프고 아프고 두려워서 꿈에서 깨어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022207 ------------
참 많이 아팠던 시절이었다. 이젠 기억 저편에 있는 그런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 journal의 힘이고 치유인 것 같다. 그 막막하던 아픔의 시간들은 영원하지 않았다. 결국 가시를 꿈에서처럼 뽑아내고, 가시에 찔려도 가시보다 단단해진 나와 나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가시들이 만들어준 단단한 마음을 본다. 당연히, 여전히 삶은 가시밭을 만나는 길이다. 나에게 솟아나는 가시, 혹은 나를 밖에서 찌르는 가시들... 하지만 이것도 그 때처럼 넉넉히 이길거라는 걸 알게 해주는 게 바로 지난 저널을 읽을 때의 위로와 격려다.092924
대숲 아래서 - 나태주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 <대숲 아래서> (1973, 예문관)
어려서부터 책을 사면 전공서적이 아닌 경우 대부분 그 책을 살 때 언제 어떤 마음이었는지 표지 안 쪽 첫페이지에 몇 줄 적곤 했었다. 수도없이 떠나보낸 책들. 그들을 다 버리려 할 때마다 그 몇 줄 글과 함께 한 번씩 책갈피를 스르륵 들쳐보면 줄쳐진 곳, 여백에 적혀있는 책과 대화한 나의 단상들을 만난다. 그 때의 시간과 추억이 소환되고 잊었던 그 시절 내 마음 갈피가 열린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옛날 젊은/어린시절의 빛바랜 사진들을 보며 추억을 소환하곤 한다. 하지만 나에겐 누렇게 바랜 책갈피에서 발견하는 밑줄쳐진 글이나 메모와 나의 생각들이 추억의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는 것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상실감이 더 크기 때문일까? 내가 이렇게 치열했고 순수했고 고민했구나. 이제는 잃어버린 그 시절의 나의 빛났던 “언어“가 아프다.
지난 겨울 너무 많이 아파서 꿈도 무엇도 다 힙겹고 무의미하고 버거웠던 때, 방을 가득채운 서류더미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차마 나는 열어보지 못하고 도우미 아줌마를 시켜 수도 없이 버리고 버리고…방가득 쌓인 15박스 넘는 내가 정리했던 글들과 공부한 내용들을 버리고 나서 일주일 넘게 이유 없이 끙끙 앓았다.
내가 간직했던 수많은 영화사에 중요한 구하기 어려운 귀한 명작 영화 비디오도 씨디도 특수쓰레기 대형봉투 6자루정도 버렸다. 어딘가 기증하고 싶었는데 인터넷을 찾아도 모르겠고 기력이 없었다. 저질 체력 앞에 모든 꿈과 열정이 다 허무하고 고통스럽고 부담되어서 다 결별하고 싶었다.
지난 것은 지난 것대로 그 때를 살았던 것이니 되었지… 라는 스스로의 위로는 이번에는 가슴 속 빈 공간을 채워주진 못했다. 사실 그 빈 구멍이 무엇때문인지 나는 안다….
이제 다가오는 추수의 계절 나는 오히려 또 비워야지 생각한다. 아직도 남은 책들과 서류들과 모든 물건들을 다 정리해야지…. 이별은 면역이 없다는 걸 알지만 이젠 그래도 좀 쉽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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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연히 제목이 새삼 마음에 들어와 버리려 모아둔 책들 속에서 들쳐본 <현재라는 이름의 환상>.
다른 책갈피 메모보다 평범한 메모긴 하다. (빛바랜 줄 친 부분들도 지금 읽어보니 새로운 눈으로 읽힌다. )
내가 참 많이 좋아하는 내 친구, 의사이며 화가인 그가 역시 의사이며 서예가인 남편과 함께한 6번째 동인전, "빛, 색, 묵, 흙"의 오픈닝 날이다. 가보지는 못하지만 마침 내가 화과자를 보냈는데 오프닝 날에 딱 맞추게 되어서 기분이 좋다.
그동안 그녀가 주로 그리는 옹기종기 모인 집들의 그림은 너무나 아름답고도 정이 넘친다. 한결같으면서도 늘 변화하는 그의 색감 그리고 무엇보다 변화하는 시점은 전시회마다 새로운 감동을 준다. 그동안의 그의 그림에는 따듯한 공동체의 힘이 있었다. 그만의 색채는 늘 화가를 닮아 매력적이고 정갈하며 아름답고 따듯하고 그러면서도 특유의 힘이 느껴진다. 그 묘한 힘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런데 이번 여름 그 더위 속에서 작업한 그림들중 팜플렛에 있는 그림 한 점의 제목이 <숲으로 가면>이다. 옹기종기 모여있던 그녀의 마을의 집들이 나무들이 모인 숲으로 자리를 옮겼다. 더위를 이기고 남을 푸른 나무들이 모인 숲의 생명력이 태양마저 푸르게 물들였다.
그녀는 늘 멀리서 집들이 모인 마을을 조망한다. 이번 숲 그림도 그렇다. 그녀의 집과 나무는 외따로 돋보이게 서 있는 적이 없다. [함께 '그러나' 홀로/ 홀로 '그러나' 함께]가 현대인의 삶, 현대인의 공동체를, 그 삶의 숲을 보여준다면 어쩌면 그녀의 그림은 [함께 '그리고' 홀로]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삶은 어쩌면 '그러나'와 '그리고'의 조화가 아닐까? 그 조화가 주는 따듯한 힘. 그게 늘 사회에 봉사하며 이웃에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유명한 그녀 부부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빌려서 "마치 우리 자신 내면의 어떤 중요한 곳, 진지하고 진정한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녀의 <숲으로 가면>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자마자 곧바로 정희성의 시가 떠올랐다. 왜 일까... 생각해보다 몇 자 적어보았다. (다시 그녀의 다른 그림들의 사진을 받아보게 되었는데 이 글은 그 중에 한 점인 <숲으로 가면>에 대한 나의 감상임을 밝혀둔다.)